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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론 생각

 


 
최영철


 우리가 잠시라도 두드리지 않으면
 불안한 그대들의 모서리와 모서리는 삐걱거리며 어긋난다
 우리가 세상 어딘가에 녹슬고 있을 때
 분분한 의견으로 그대들은 갈라서고
 벌어진 틈새로 굳은 만남은 빠져나간다
 우리가 잠시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그 누가 일어나 두드릴 것인가
 무시로 상심하는 그대들을 아프게 다짐해줄 것인가

 그러나 더불어 나아갈 수 없다면
 어쩌랴 아지 못할 근원으로 한 쪽이 시들고
 오늘의 완강한 지탱을 위하여 결별하여야 할 때
 팽팽한 먹줄 당겨 가늠해 본다
 톱날이 지나가는 연장선 위에
 천진하게 엎드려 숨죽인 그대들 중
 남아야할 것과 잘려져 혼자 누울 것은
 무슨 잣대로 겨누어 분별해야 하는가를

 또다시 헤어지고 만날 것을 빤히 알면서
 단호한 못질로 쾅쾅 그리움을 결박할 수는 없다
 언제라도 피곤한 몸 느슨히 풀어 다리 뻗을 수 있게
-자나 +자로 따로 떨어져
 스스로 바라보는 내일이 있기를
 수없이 죄었다가 또 헤쳐 놓을 때
 그때마다 제각기로 앉아 있는 그대들을 바라보며

 몽키스패너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이스플라이어의 꽉 다문 입술로
 오밀조밀하게 도사린 내부를 더듬으며
 세상은 반드시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
 제나름으로 굳게 맞물려 돌고 있음을 본다

 그대들이 힘 빠져 비척거릴 때
 낡고 녹슬어 부질없을 때
 우리의 건장한 팔뚝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누가 달려와 쓰다듬을 것인가
 상심한 가슴 잠시라도 두드리고
 절단하고 헤쳐 놓지 않으면
 누가 나아와 부단한 오늘을 일으켜 세울 것인가.

- 등단작 <연장론> 전문

 

 시 연장론은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품으로 1985년 12월초에 쓰여진 작품이다. 소위 말하는 등단 작품인 셈인데 십오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이 시를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것은 등단작이 출세작이나 대표작이 되고 심할 경우 마지막 작품이 되는 경우를 더러 보아 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 발표한 내 작품을 지나칠 정도로 괄시하는 못된 버릇 때문이기도 하다. 마찬가지 이야기겠지만 남에게는 관대하고 나에게는 혹독한 자학증세도 일면 가세하고 거기에다 지나온 시간을 반추할 만큼 내 과거가 그리 호사스럽지 않다는 생각에도 한 원인이 있다. 그렇다고 진일보의 길을 걸어온 것도 아니고 과거의 무능과 부끄러움을 상쇄할 성과를 쌓아가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어서 참 못된 소갈머리라고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런데도 지나간 자료철을 뒤져 굳이 이 시를 옮겨 본 것은 뒤돌아 보지 않고 무작정 앞만 보고 가는 것이 또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일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지나온 20세기의 과오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과거를 부정하고 짓밟고 넘어서서 계속 앞만 보고 치달은 결과가 오늘의 우리 모습이다. 그렇게 무시하고 지나온 과거보다 20세기가, 지금의 21세기가 월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로 그것들은 흉악한 몰골의 상채기만 드러내놓고 있다. 인간은 못된 지배욕과 이기심의 포로가 되었고 자연환경은 몰라보게 훼손되었으며 죄 없는 동식물들은 지금 멸종의 가속도를 밟고 있다. 어제 보았던 식물들이 흔적도 없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어제 느꼈던 동물들의 움직임이 자취도 없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그들은 이 미련한 인간들의 서식처인 지구를 떠나 더 살기 좋은 어느 별로 공간 이동을 했을 것이다. 정말 그들에게 면목이 서지 않는다.

한 십오년쯤 자료철 갈피의 밑바닥에 갇혀 있었던 시 ‘연장론’도 그동안 인간 최영철에게 비슷한 욕지거리를 해대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렵사리 낳은 첫 자식을 헌신짝 취급한 넌 인간도 아니야. 그렇지 않니. 그 애가 잘못한 게 뭐 있다고. 시인 자격증도 따게 해줬지, 상금으로 그동안 빚진 인간들에게 술도 사주게 했지, 무엇보다 별 일도 없이 허송세월을 할뻔 했던 네게 할 일을 주었잖니.’ 누가 옆에서 이렇게 욕을 퍼붓는다 해도 나는 정말 할말이 없다. ‘연장론’이 자료철에서 뛰쳐나와 내 머리를 쥐어박는다 해도 나는 달게 그 매를 받아야 할 판이다.

그런 형벌을 예상하면서도 연장론을 꺼내든 것은 이제 또 한번 나를 새롭게 할 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어진 것을 곶감 빼먹듯이 하나하나 다 소진하고 빈털털이가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런 위기는 물론 시시각각 나를 엄습한다. 대체로 그럴 때의 처방은 아무 책도 보지 않고 아무 글도 쓰지 않은채 무력한 잠에 빠지거나 술을 진탕 마셔 보는 것이었는데 그런 완충요법만으로는 큰 효험이 없을 것 같다. 내 것만 어줍잖아 보이는 게 아니라 활자화된 모든 것들이 시덥잖아 보인다. 별 대수롭지 아닌 걸 갖고 왜 이렇게 호들갑이람. 제기랄 이 무슨 엄살들이람. 도통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를 왜 이렇게 열을 내서 하고 있는 거지. 이 사이에 끼여들지 못해 안달인 나는 또 뭐람.

그래서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 말은 지난해 봄에 나온 나의 다섯 번째 시집 ‘일광욕하는 가구’의 자서에도 적은 말이다. ‘다섯 번째 시집인데도 처음 같다. 부끄럽고 주저하는 초심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나를 흔들어 준 시간들이 고맙다.’로 시작하고 있는 다소 비감하고 도통한 것 같은 이 발언이 지금 읽어보니 참 ‘부끄럽다’. 말만 그렇게 그럴싸하게 내뱉어 놓고 나는 진정 다시 시작했는가, 처음으로 갈 수 있을 만큼 나를 모조리 씻어냈는가, 하고 물어본다. 언제나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쓰는 자의 당연한 근무 수칙이 아닌가. 이 다짐은 그 당연한 근무 수칙을 지금까지 제대로 지키지 않은데 대한 고백과 반성의 자인서였을 것이다. 한 십오년의 시간을 별다른 충전 없이 탕진해 온 자의 자기변명과 지기최면이었을 것이다. 아, 나는 정말 나에게 미안하다. 미당 선생은 ‘나를 키운 것의 8할이 바람이었다’고 했는데 나는 나를 키운 것의 8할이 무엇이었다고 훗날 말할 수 있을는지. 그것은 아마도 나를 향한 신랄한 야유와 혹독한 학대가 되지 않을까. 나를 향한 끊임없는 삿대질이.

그런 생각으로 연장론을 다시 읽는다. 1985년 12월 초 한국일보 신춘문예 마감 전날 밤 나는 이 시를 썼다. 부산에서 나오던 무크지 지평에 작품발표를 시작한 뒤여서 신춘문예의 꿈을 접어가고 있던 중이었는데 1면 하단에 한 줄로 빼놓은 ‘신춘문예 내일 마감’이라는 문구가 나를 자극한 게 아닌가 싶다. 그 막바지의 시각, 아무리 잘 봐주려고 해도 도통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던 진퇴양란의 그해 겨울이 또 한 편의 시를 쓰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게 오는 모든 절망에게 감사한다. 나의 절망은 힘이며 희망이다. 그 겨울의 절망이 나를 두드려 깨우지 않았다면, 그것이 그 겨울뿐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불쑥 찾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만 중도에 가라앉고 말았으리라. 나는 내가 지나온 그 많은 절망들에게 빚지고 있다. (웹진 시향 2002)


 * 최영철 / 1956년 경남 창녕 생. 1984년 무크지 <지평> 시 발표.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일광욕하는 가구>로 제2회 백석문학상 수상. 현 계간 <관점21, 게릴라> 편집주간. 시집으로 <개망초가 쥐꼬리망초에게>(2001, 문학과 경계), <일광욕하는 가구>(2000, 문학과 지성), <야성은 빛나다>(1997, 문학동네), <홀로 가는 맹인 악사>(1994, 푸른숲), <가족사진>(1991, 생각하는 백성),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1987, 열음사), 산문집 <우리 앞에 문이 있다>(1993, 빛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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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어떻게 치유되는가

 

최영철  


시는 내 게으름의 핑계거리다


어느새, 살아갈 날이 얼마 남았을까 가늠해보는 처지가 되었다. 구차하게 늙는 사람을 보며 나는 절대 저 지점까지는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 그런 것들이 허사가 되긴 했으나 그렇다고 마냥 풀어 놓기에는 나란 놈을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일찍이 주어진 시간이 짧은 것에 절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보여 절망했었다. 도대체 새털같이 많은 이 날들을 무슨 수로 소일한단 말인가. 어김없이 떴다 지는 해를 무슨 낯짝으로 맞이하고 보낸단 말인가. 무슨 생각 무슨 짓거리를 하며 그 많은 낮밤을 살아낸단 말인가. 무수하게 줄서서 기다리고 있을 빈 밥그릇을 무슨 수로 다 채워 넣는단 말인가. 나를 향해 쏟아질 멸시와 반목과 야유, 간혹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나에게 배달될 격려와 위로와 물거품의 찬사를 어떻게 받아넘긴단 말인가.

소년기에 접어들 무렵 나를 절망하게 한 것은 내가 이렇다하게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그 시절의 나에게 부여된 시간은 잘못 배달된 어마어마한 화물이어서 어떻게 해볼 엄두가 나지않는 처치 곤란한 숙제였다. 나는 그것을 개봉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매일같이 도착하는 정체불명의 화물에 깔려 거의 압사할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시시각각 나에게 도착해 긴 줄을 이루고 있는 질문들 앞에서 전전긍긍 미로를 헤맬 뿐이었다.

그나마 천만 다행으로 그 시절 내 주위에는 장래 희망이 무어냐고 묻는 어른들이 없었다. 일용할 양식이 우선이었던 시절에 유별난 꿈을 꾸는 건 호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꿈이 무어냐고, 장래 희망이 무어냐고 묻지 않았던 그 시절의 어른들에게 감사한다. 나에게 꿈은 너무 호사스러운 장식이었다. 오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짤막한 답도 가지지 못한 처지에 멀고 아득한 미래에 대해 답한다는 것은 과분한 일이었다. 주제넘고 시건방진 일이었다. 어쨌거나 어린 시절의 나는 일사불란하게 목표를 설정하고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은 곳이 없었.으므로 매사에 시무룩했다. 삑! 소리와 함께 죽으라고 앞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100미터 달리기가 싫었다. 출발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고 웅크린 채 오감을 집중하고,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해 전력 질주하는 행위가 우스꽝스러웠다. 누구 하나라도,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이상했다. 내가 그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소년 시절의 내가 즐겨한 것은 틈만 나면 어두워지는 저녁거리를 하릴없이 쏘다니는 것이었다. 얼쩡거리고 머뭇거리고 어슬렁거리는 게 좋았다. 그래서 자주 지각생으로 교문 앞에 벌을 서야 했지만 그 벌이란 게 조금도 나를 개조시키지는 못했다. 그런 나의 증세는 점점 악화되어 나의 중요한 습관이 되었다. 점점 숙련되어 나의 손발이 되고 나의 입과 귀와 콧구멍이 되었다. 떨어질 수 없는 나의 동심일체가 되었다. 천하에 아무 쓸모없는 것들과 동맹을 맺은 나는 그때부터 걸핏하면 불평불만을 터트렸다. 세상은 왜 이리 줄창 바쁘기만 한 것일까? 왜 저렇게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고 핏대를 올리는 것일까? 나는 저 아수라장을 어떻게 지나가야 할까?

그것들은 지금도 내가 변치 않고 하고 있는 생각들 중의 하나여서, 세상이란 좀 과도하게 설정된 목표가 있고,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허덕거리고, 그 목표에 도달하자마자 보다 높은 목표를 설정하거나 또 다른 목표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일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진퇴양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알리바이가 게으름이었을 것이다. 그 게으름을 벗삼아 그 게으름을 무기로 그 게으름에 힘입어, 어쨌든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시는 나에게 그 게으름의 보상이요 그 게으름의 핑계거리였다.

 

시는 무일푼의 해작질이다

 

예순의 나이를 어마어마한 고령으로 생각한 적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그만 내가 덜컥 그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그러고도 무사태평으로 살고 있으니, 나란 놈 참 뻔뻔스럽다. 나는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만 있을 뿐 실행이 없는 인간이다. 한 생각은 다른 생각에 파묻히거나 곧 망각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이어서 생각을 굳이 부여잡을 필요는 없었다. 대체로 그 녀석이 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였다. 가지 말고 조금만 더 있어보라고 애걸하지도 않았다. 나의 죄는 그것이다. 나의 죄는 명백하다.

나는 대체로 생각뿐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승전결의 구조가 아니라 앞뒤가 없는 파편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런 질문이라도 던져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바람에 그 씨앗들이 놀라 저절로 발화해 날아갈까 봐 숨죽여 바라보기만 하였다. 먼 다른 곳을 보는 척 했다. 그것들의 쫑알거림을 몰래 엿듣고 훔쳤다. 나는 이미 그런 짓거리로 무수히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시는 그러니까 그 짓거리를 은닉하고 용서받는 절묘한 알리바이였다. 그것만으로 내 시는 이미 본전을 다 건졌다. 애초에 들인 밑천이 게으름과 두서없는 망상 따위였으니 본전이랄 것도 없다. 어눌한 내 시는 그러므로 횡재에 가깝다. 시간을 투자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어차피 허송세월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시를 건질 욕심에 세상의 모퉁이와 변두리를 기웃거리기는 했으나 그 공력은 사실 값어치가 거의 없는 것이었다. 땀 흘려 힘을 쏟은 것도, 시간을 많이 허비한 것도, 돈을 투자한 것도 아니었다. 자주 헛걸음을 하긴 했으나 백일 정성으로 기다린 것이 아니었으므로 큰 손실은 아니었다.

그저 그것들은 불현 듯, 느닷없이, 우연히, 다른 옷을 갈아입고 왔다. 나는 그 중 몇 개의 실오라기를 낚아채기만 했을 뿐이다. 그 길에서 이루 다 헤일 수 없는 것들을 만나고 이루 다 헤일 수 없는 것들을 엿보고 엿들었다.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래도 신명 내 할 수 있는 걸 찾다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고 싶은 게 없어서 그래도 하고 싶은 걸 찾다가 걸려든 게 시였다. 미끼도 없는 게으른 내 낚시에 걸려들 것이라곤 애초에 시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엔 소설을 써보려고 도서관에 가서 매일 소설책을 읽었으나 나의 체력과 심보는 지속적인 일을 하기에 적절치 않았다. 나의 감정과 체력은 장거리 달리기엔 적절치 않았다. 쉽게 싫증나고 지치고 하품이 나고 졸음이 밀려왔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심사를 잠시 잠재워 놓고 그 놈이 깨기 전에 후다닥 해치울 수 있는 일이란 두서없는 몇 줄 시밖에 없었던 것도 같다. 긴 공력이 없어도 되는 일이고 수틀리면 언제든 폐기처분 할 수 있어 좋았다. 하다가 구겨버리고 하다가 지워버리고 하다가 내팽개쳐도 크게 본전 생각이 나지 않아 좋았다. 그 시절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점령해버린 허무라는 녀석에게도 덜 눈치가 보여 좋았다.

뭔가 그럴듯한 일을 하겠다고 덤비면 녀석이 질투하거나 해꼬지를 할 게 뻔하지 않은가. 시는 녀석에게 아무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슬렁, 휘적, 흘깃, 보는 둥 마는 둥, 생각하는 둥 마는 둥, 쓰는 둥 마는 둥, 없는 듯 있는 내 시에게 누가 위기의식을 느끼겠는가. 맞장을 둘 경쟁상대로 여기겠는가. 녀석은 온갖 변덕을 부려도 탓하지 않을 것 같아 좋았다. 무엇보다 무슨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 것처럼 거들먹거리지 않아 좋았다. 나의 허튼 수작으로 읽는 이의 심기를 언짢게 할 위험성이 적어 보여 좋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지금 무슨 짓거리인가를 하며 살고 있다는 최소한의 자의식을 주어 좋았다.

그 정도의 보상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덧없이 세월은 가버렸고 나는 그게 똥인지 밥인지도 모르고 무슨 말인가를 주절대며 왔다. 이제 와 어쩌겠는가. 되돌릴 수도, 없었던 일로 감쪽같이 파묻을 수도 없지 않은가. 결국 지울 수 없는 회한을 남겨줄 것이지만 나의 시는, 새털같이 많은 날들을 소일하게 한 싫증나지 않는 해작질이었다. 빈털터리, 몇 개의 딸랑대는 동전, 급기야 빈 호주머니…, 그런 빈궁과 허무, 고독과 적요의 시간과 함께 나를 연명하게 한 힘이었다.

아무 것도 없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시와 나는 죽이 잘 맞았다. 정 심심해 주리를 틀면 몇 줄 토막난 말을 받아먹고 곧 잠잠해졌으므로 좋았다. 생각보다 온순하고 착한 놈이어서 좋았다. 땡전 한 푼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좋았다. 땡전 한푼 없어야 더 잘 되는 일이어서 좋았다.


땡전 한푼 없이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고 오늘은 실직의 바람이 분다 동에서 남으로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생기발랄하다 한 푼 뉘우침의 빛도 없이 신문의 활자는 엎드려 중얼댄다 엎드려 이 와중에도 부동산은 힐끔힐끔 눈치를 살핀다 눈치를 살피다니 오 아름다운 우리의 산과 들 눈치를 살피다니 팔십년대는 재빠른 스타트를 끊었다 이미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보무도 당당하게 국민소득은 높아가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늘만 여전히 푸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새들은 지저귀고 생기발랄하게 민주는 꽃 핀다 꽃 지고 땡전 한푼 없이 벚꽃은 피고 흰꽃 이파리에 가려 우리는 다정다감하다 명상에 젖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안심하는 이 저녁에 땡전 한푼 없이 바람은 불고.

- 「이 저녁에 땡전 한푼 없이」

 

시는 찬물 한 사발이다

 

 

상처는 달래고 약을 바른다고 물러나는 게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 앞에서 치유되는 것인가 보다. 내 인생이 왜 이러냐고 원망과 한탄을 늘어놓던 사람도 자신보다 더한 상황에 놓인 경우 앞에서는 잠시 제 짐을 내려놓고 눈시울을 붉히지 않던가.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십대 중반부터 엄습헸던 허무는 좀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았고 무작정 가출해 굶주린채 밤길을 걷던 나는 질주하던 군용차에 치였다. 수술 후 겨우 께어난 내 몸은 발끝에서 가슴까지 딱딱하고 견고한 석고붕대에 결박되어 있었다.

마취에서 깨어난 나는 너무 배가 고팠고 병원 허드렛일을 하던 내 또레 소녀가 떠먹여주던 흰죽을 몇 차례 연거푸 청해 받아먹었던 기억이 난다. 허기는 사춘기 소년에게 엄습한 생의 허무보다 몇 백 몇 천 배 더 힘이 센 놈이었다. 허무는 그러니까 장신구 같은 것이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서산 너머로 펼쳐진 노을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을 잠시 압도하지만 초라한 그 사람의 잔영과 함께 곧 어둠 속으로 사라질뿐이다. 하지만 삶의 허기는 내가 어찌해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린 나에게 엄습했던 생의 허무는 너무 이른 너무 과한 장신구였다.

그렇게 세 번의 수술을 견디며 뼈가 붙기를 기다렸다. 창밖으로 체육과 교련 수업을 받는 학생들의 함성과 선생님의 구령과 호각 소리가 교차했지만 석고붕대에 갇혀 천정과 벽만 바라보고 있던 나는 운동장을 내려다볼 수 없었다. 그것은 당연한 형벌이었다. 그렇게 나는 두 계절 동안 하얀 벽과 대면했다. 병실 벽면은 왜 모두 하얀색일까? 파랑이나 빨강이면 안될까? 하얀색을 지겹도록 마주하고 있는 사이 나는 별 생각을 다했다. 당연히 점점 하연색이 싫어졌다. 그건 침묵이고 정지고 고요였다. 과장된 순결이었다. 너무 넓게 견고하게 내 앞에 제시된 백지였다. 하루 종일 나를 압박하는 넓은 답안지였다. 정답은 아니지만, 백퍼센트 오답이지만 거기에 나는 무엇인가를 그려 넣어야 했다. 기나긴 반성문을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한 줄의 반성문도 쓰지 못했다. 무엇을 반성하란 말인가. 생은 나에게 아무 동의 절차도 없이 나를 세상에 내보냈다. 어떡하란 말인가. 아무 지침도 아무 자산도 없이 혹독한 세월만 쥐어 내보낸 비정하고 얄미운 운명을 어떻게 수락하란 말인가. 그러니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처음부터 잘못 내려진 것이었고 엉뚱한 곳에 내린 죄값을 치루고 있는 중이었다. 스님들의 면벽 수행에 버금가는 긴 고행이었다.

그 여파였는지 나의 청춘은 우울하고 어둡고 적적했다. 스무살 넘도록 나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올라가는 완행열차 차비만 얻어 밤차를 탔다.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전날 저녁,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밤을 집에서 보내며 차고 있던 시계를 벗어 동생에게 끼어주었다. 아직 말짱한 시계를 왜 벗어주느냐고 동생이 휘둥그레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아우야, 너는 나처럼 허둥대지 말고 바른 시간을 바르게 살아가거라.

그리고 어찌어찌 하다가 개심사 종각 앞에 섰다. 상처는 나보다 더한 것 앞에서 치유되는가 보다. 내 인생이 왜 이러냐고 원망과 한탄을 늘어놓던 사람도 자신보다 더한 상황 앞에서는 잠시 자신의 불운을 내려놓고 눈시울을 붉히지 않던가. 나 역시 그랬다. 십대 중반부터 나를 엄습헸던 허무는 좀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았고 석고붕대에 묶인 몇 년의 면벽으로도 나는 답을 얻지 못했다. 나는 나에게 짐 지워진 이 무거운 수레바퀴를 수락할 수 없었다. 종소리에 이끌려 열심히 교회를 다니기도 했으나 이렇다할 답을 얻지 못했다. 내가 바랐던 것은 위안이나 구원이 아니었다. 나는 절망의 바닥까지 내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염치없고 과분한 욕심인지를 알게 되었다. 무겁고 무거운 업을 떠받들고 있는 개심사 종각의 네 기둥은 그것을 지고 가느라 사지가 비틀리고 굽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만방을 향해 맑은 종소리를 내보내는 종각 앞에서 나는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무거우면 무겁다고 진즉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이제 그만 이 짐 내려달라 하시지 그러셨어요

내가 이만큼 이고 왔으니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좀 나누어 지라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쉬엄쉬엄 한숨도 쉬고 곁눈도 팔고

주절주절 신세타령도 하며 오시지 그러셨어요

등골 휘도록 사지 뒤틀리도록 져다 나른 종소리

지금 한눈팔지 않고 저 먼 천리를 달려가고 있습니다

뒤틀린 사지로 저리 바쁘게 달려가는 당신 앞에서

어찌 이승의 삶을 무겁다 하겠습니까

고작 반백 년 지고 온 이 육신의 짐을

어찌 이제 그만 내려달라 하겠습니까

-「개심사 종각 앞에서」


시의 적은 포만이다

 

이제 까마득한 옛일이 되었지만 수시로 되살아나는 기억이 있다. 스무 살 무렵이었다. 손전화는 고사하고 유선 전화도 귀했던 시절, 개인의 통신 수단이라고는 편지나 전보가 고작이었다. 아지 못할 불덩이 하나씩을 안고 살았던 그 시절, 이런저런 경로로 좋은 시를 만나면 책 뒷면에 나와 있는 주소로 편지를 쓰거나 물어물어 집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허탕을 치는 일도 있었고 용케 만나져서 꽤 오래 우정을 나눈 경우도 있다. 그런 인연의 매개가 되어준 그시절의 책자는 지금의 인쇄술에 비하면 너무나 볼품없는 것이어서 철필로 긁어 등사한 것도 많았다. 그런데도 눈을 빛내며 그것들을 샅샅이 읽고 귀하게 소장했다. 여러 차례 이사를 다니면서도 그중 몇 묶음은 차마 버리지 못하고 아직 가지고 다닌다. 가난했던 시절의 다짐들이 그대로 배어 있는 것이어서 가끔 그것들을 어루만지고 있으면 다시 가슴이 더워진다.

내게 있어 문학에 대한 열정은 주어진 여건과 반비례했다. 하라는 공부는 않고 쓸데없는 책만 본다고 타박하던 어머니의 눈을 피해 읽었던 책이 아직 기억에 남아 있고 그 귀퉁이에 적어놓고 완성하지 못한 습작들이 놓쳐버린 불후의 명작처럼 아쉽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전쟁통에 읽을 게 없어 사방 벽에 도배된 신문을 돌아가며 다 읽었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거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나의 70년대 역시 간절한 그 무엇이 있었고 그 열정을 지속시킨 동력은 허기였다. 어쩌다 수북하게 담긴 고봉밥으로도, 사방 빽빽하게 꽂힌 도서관의 책으로도 야간통금시간에 쫒기며 마신 술로도 채워지지 않던 허기. 시의 미덕 중 하나인 치열성은 이 아지 못할 허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시의 적은 과잉이다. 지금 우리 시가 구가하고 있는 환경은 풍요를 넘어 범람에 가깝다. 시 같은 걸 써서 장차 이 험한 세상 뭘 먹고 살아갈 거냐고 타박하던 어른들도 없고, 책 사볼 돈이 없어 서점 진열대 앞에 서서 눈치껏 보고 싶은 책 몇 줄을 읽고 나오거나 헌책방을 전전하지 않아도 되는 형편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획득한 이 풍요는 간절한 그 무엇, 열열한 그 무엇을 앗아가 버렸다. 결여와 억압과 상실이 교차하던 시절에는 힘들고 가난했으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명이 있었다. 마음껏 밖으로 분출할 수 없었던 신명은 부정과 저항의 시로 첨예하게 점화되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80년을 전후한 뛰어난 저항시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모처럼 도심에 나와 빼곡하게 사람들을 싣고 달리는 전동차를 타고 가며 엉뚱한 상념에 빠졌다. 내가 사는 이 도시에도 시인이 천 명쯤 된다는데 이 전동차에도 지금 시인 한두 명쯤은 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사람들 틈바구니에 꼼짝달싹 못하게 묶여 인상을 구기고 있는 저 아주머니, 조금 전 필사적으로 인간장벽을 뚫고 탈출한 그 초로의 아저씨가 시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시인이 많은 나라가 되었는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시인을 평범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문화적 허영심으로 가득찬 유별난 부류쯤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시의 소용을 연애편지가 유효했던 시절의 장식품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노래를 시키듯 술자리애서 시 한 수 낭송해보라는 청을 넣기도 한다. 덜떨어진 시인을 향한 날선 야유인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손에 꼽을만한 두세 권의 시집, 더 나아가 단 한 권의 유고시집으로 남았던 선배시인들에 비해 우리는 지금 얼마나 많은 시집을 남발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동어반복으로 자기 표절을 거듭하고 있는가. 세상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망해가는데, 나는 말장난으로 허명을 구걸하고 있지는 않는가.

시는 참다 참다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어 터져 나온 몇 마디 말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영혼을 바쳐 빚은 것이어야 안하무인 돌덩이가 된 저 견고한 아집들을 무장해제시킬 수 있다. 여러 정황을 감안할 때 지금 나의 시는 결여가 아닌 과잉으로 죽어가고 있다. 나는 나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처음 그때처럼 간절한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정한 무엇이 있는가? 불덩이가 있는가? 매운 채찍이 있는가? 날카롭게 번득이는 칼날이 있는가? 저 허다한 아픔을 덮어줄 더운 가슴이 있는가?

인류의 종말이 그러할 것이지만 시의 종말 역시 결여가 아닌 과잉으로 찾아올 것이다. 나는 다시 가난해져야 한다. 한 마디의 말, 한 줄의 노래를 찾아 사막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유일무이한 것, 작정하고 궁글리고 조합해서 완성된 것이 아닌 저도 모르게 터져나온 몇 줄의 노래. 그렇게 본다면 지금 나의 시는 절정의 언어가 아닌 꾸역꾸역 쑤셔 넣은 포만을 이기지 못해 반복하는 딸꾹질에 가깝다. 시의 범람, 시인의 범람. 나는 어떤 기득권도 가지지 않은 적빈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시의 적이 과잉이듯이 지금 당면한 인간의 위기도 과잉에서 비롯될 것이다.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욕구에 포위되어 익사 직전까지 와 있다. 범람하는 급물살을 따라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시가 추구하는 세계는 본래 크고 높고 화려하고 빠르고 시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들을 피해 그것들을 물리치며, 그것들을 넘어서는 세계였다. 작고 적고 낮은 것의 가치, 약하고 여리고 조용하고 느린 것의 미덕을 발견하며 함께 조화를 이루는 세계를 꿈꾸었다. 그런 면에서 시는 흔히 말하는 사양 산업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권장산업이 될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내 시의 바람직한 재료는 눈물이다. 나에 대해 세상에 대해 긍휼함을 잃지 않는 것, 눈물의 양과 순도와 질량과 온도가 적절한지를 끊임없이 가늠해 보는 것. 그래서 무작정, 아무데나, 오래 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번 울었던 곳에서 또 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남이 보는 데서, 남들도 울어주기를 강요하며 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나는 지금 울고 있는가? 적절한 때 적절한 곳에서 잘 울고 있는가? 나에 대해 너에 대해 우리에 대해 잘 울고 있는가.

 

눈물 한 방울 없이 나는 그 이야기를 다 들었다 철철 넘쳐흐르던 눈물이 마르다니, 나는 이제 사람도 아니다 눈물이 한숨이 어느새 다 빠져나간 담담한 응시, 나는 이제 빈껍데기만 남았다 나는 언제라도 마른 장작처럼 물불 안 가리고 호탕하게, 솟구쳐, 휘날려, 없어질 수 있다 눈물은 세상의 가운데로 노 저어 가는 더운 강, 나를 그만 미끄러지게 하고 두 손 두 발 들고 여죄를 자백하게 하는 채찍질, 떨리는 오욕칠정 다 빠져 달아난 오후, 너의 고통을 나의 평화를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이 서툰 달관, 용서해서는 안 된다 끊어진 눈물을 향해 물 한 바가지 퍼부었다 빗방울들이 가야 할 곳을 마른 땅이 다 잡아먹은 쨍쨍한 날의 고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여러 날이 삽시간에 지나갔다 돌멩이라도 걷어차 보다가, 그걸 주워 손안에 궁굴려 보다가, 힘껏 내던지지 않아도 해가 지고 저녁이 오는 이 무서운 무사태평, 물끄러미 손 놓고 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다가 주먹을 쥐었다가, 이건 어쩌면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닌 것 같아, 손가락을 다시 폈다 참, 어느새, 정말, 이렇게, 눈물이, 마르고, 너도, 마르고

-「어느새,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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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적

                                                                                             최영철

 

이제 까마득한 옛일이 되었지만 수시로 되살아나는 기억이 있다. 스무 살 무렵이었다. 손전화는 고사하고 유선 전화도 귀했던 시절, 개인의 통신 수단이라고는 편지나 전보가 고작이었다. 알지 못할 불덩이 하나씩을 안고 살았던 그 시절, 이런저런 경로로 좋은 시를 만나면 책 뒷면에 나와 있는 주소로 편지를 쓰거나 물어물어 집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허탕을 치는 일도 있었고 용케 만나져서 꽤 오래 우정을 나눈 경우도 있다. 그런 인연의 매개가 되어준 그시절의 책자는 지금의 인쇄술에 비하면 너무나 볼품없는 것이어서 철필로 긁어 등사한 것도 많았다. 그런데도 눈을 빛내며 그것들을 샅샅이 읽고 귀하게 소장했다. 여러 차례 이사를 다니면서도 그중 몇 묶음은 차마 버리지 못하고 아직 가지고 다닌다. 가난했던 시절의 다짐들이 그대로 배어 있는 것이어서 가끔 그것들을 어루만지고 있으면 다시 가슴이 더워진다.

내게 있어 문학에 때한 열정은 주어진 여건과 반비례했다. 하라는 공부는 않고 쓸데없는 책만 본다고 타박하던 어머니의 눈을 피해 읽었던 책이 아직 기억에 남아 있고 그 귀퉁이에 적어놓고 완성하지 못한 습작시들이 놓쳐버린 불후의 명작처럼 아쉽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어려웠던 시절에 읽을 게 없어 사방 벽에 도배된 신문을 돌아가며 다 읽었다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거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나의 70년대 역시 간절한 그 무엇이 있었고 그 열정을 지속시킨 동력은 허기였다. 어쩌다 수북하게 담긴 고봉밥으로도, 사방 빽빽하게 꽂힌 도서관의 책으로도 야간통금시간에 쫒기며 마신 술로도 채워지지 않던 허기. 시의 미덕 중 하나인 치열성은 이 아지 못할 허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시의 적은 과잉이다. 지금 우리 시가 구가하고 있는 환경은 풍요를 넘어 범람에 가깝다. 시 같은 걸 써서 장차 이 험한 세상 뭘 먹고 살아갈 거냐고 타박하던 어른들도 없고, 책 사볼 돈이 없어 서점 진열대 앞에 서서 눈치껏 보고 싶은 책 몇 줄을 읽고 나오거나 헌책방을 전전하지 않아도 되는 형편이 되었다. 히지만 그렇게 획득한 이 풍요는 간절한 그 무엇, 열열한 그 무엇을 다 앗아가버렸다. 결여와 억압과 상실이 교차하던 시절에는 힘들고 가난했으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명이 있었다. 마음껏 밖으로 분출할 수 없었던 신명은 부정과 저항의 시로 첨예하게 재점화되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80년을 전후한 뛰어난 저항시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모처럼 도심에 나와 빼곡하게 사람들을 싣고 달리는 전동차를 타고 가며 엉뚱한 상념에 빠졌다. 내가 사는 이 도시에도 시인이 천 명쯤 된다는데 이 전동차에도 지금 시인 한두 명쯤은 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사람들 틈바구니에 꼼짝달싹 못하게 묶여 인상을 구기고 있는 저 아주머니, 조금 전 필사적으로 인간장벽을 뚫고 탈출한 그 초로의 아저씨가 시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시인이 많은 나라가 되었는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시인을 평범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문화적 허영심으로 가득찬 유별난 부류쯤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시의 소용을 연애편지가 유효했던 시절의 장식품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노래를 시키듯 술자리애서 시 한 수 낭송해보라는 청을 넣기도 한다. 덜떨어진 시인을 향한 날선 야유인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손에 꼽을만한 두세 권의 시집, 더 나아가 단 한 권의 유고시집으로 남았던 선배시인들에 비해 우리는 지금 얼마나 많은 시집을 남발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동어반복으로 자기 표절을 거듭하고 있는가. 세상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망해가는데, 우리는 말장난으로 허명을 구걸하고 있지는 않는가. 시는 참다 참다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어 터져 나온 몇 마디 말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영혼을 바쳐 빚은 것이어야 안하무인 돌덩이가 된 저 견고한 아집들을 무장해제시킬 수 있다. 여러 정황을 감안할 때 지금 우리의 시는 결여가 아닌 과잉으로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처음 그때처럼 간절한가?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정한 무엇이 있는가? 불덩이가 있는가? 매운 채찍이 있는가? 날카롭게 번득이는 칼날이 있는가? 저 허다한 아픔을 덮어줄 더운 가슴이 있는가?

인류의 종말이 그러할 것이지만 시의 종말 역시 결여가 아닌 과잉으로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다시 가난해져야 한다. 한 마디의 말, 한 줄의 노래를 찾아 사막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유일무이한 것, 작정하고 궁글리고 조합해서 완성된 것이 아닌 저도 모르게 터져나온 몇 줄의 노래. 그렇게 본다면 지금 우리의 시는 절정의 언어가 아닌 꾸역꾸역 쑤셔 넣은 포만을 이기지 못해 반복하는 딸꾹질에 가깝다. 시의 범람, 시인의 범람. 지금의 우리 시는 하향평준화라는 비판을 피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날선 백지상태, 어떤 기득권도 가지지 않은 적빈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시의 적이 과잉이듯이 지금 당면한 인간의 위기도 과잉에서 비롯될 것이다.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욕구에 포위되어 익사 직전까지 와 있다. 범람하는 급물살을 따라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시가 추구하는 세계는 본래 크고 높고 화려하고 빠르고 시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들을 피해 그것들을 물리치며, 그것들을 넘어서는 세계였다. 작고 적고 낮은 것의 가치, 약하고 여리고 조용하고 느린 것의 미덕을 발견하며 함께 조화를 이루는 세계를 꿈꾸었다. 그런 면에서 시는 흔히 말하는 사양 산업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권장산업이 될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런 제안을 해본다. 우리의 제도교육에서 초중고 12년 동안 매주 좋은 시 한 편을 읽고 암송하게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시의 흥과 멋과 맛이 한 인간의 몸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했으면 좋겠다. 글을 께우칠 8세에서 세상에 눈뜰 19세까지 각자의 마음 속에 6백여 편의 시를 품는다면 세상은 훨씬 더 훈훈하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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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사회 2019 봄

 

 

정태규 시 5편

 

 

백운사 가는 길

 

 

 

눈이 내린다

바람도 그치고 새소리도 그친 영실 숲길

눈이 내린다 고요히

눈 맞고 서있는 이정표 앞에서

나는 자꾸 길을 잃고

눈이 내린다

눈은 내려 쌓여

세상의 모든 모난 모서리를 지우고

내 마음의 온갖 모진 예각도 다 지우고

바위와 나무, 숲에도 길에도 차별 없이

눈이 내린다

숲은 참선에 든 지 오래

묵언수행 중인 나뭇가지에서

스스로의 무게를 못 이기고 추락하는 눈 더미

내 어깨에 떨어지는 죽비소리로 들리고

눈이 내린다

날마다 절 마당에 내려앉은 구름을

쓸었다는 백운사 옛 스님은

구름과 함께 무엇을 쓸었을까

눈은 내리고

나는 자꾸 길을 잃고

백운사는 어디 있나

눈은 내리고

다시 눈 더미가 가지에서 미끄러지고

내 어깨를 내려치는 죽비

나는 그제야 화들짝 깨닫는다

온 세상이 백운사라고

온 세상이 구름을 쓰는 도량이라고

눈이 내린다

숲 위로

저 장엄한 적멸무이(寂滅無二)*의 보궁(寶宮) 위로

눈이 내린다

 

------------------------------------------------------

 

 

안개

 

 

안개 속에 서서 나는 알겠네

희미할수록 아름답다는 것을

나무와 나무의 윤곽이 희미하게 지워지고

나무와 나의 경계가 희미하게 희미하게 지워지고

세상과 나무, 세상과 나의 분별이 지워지는

그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안개에 젖어 나는 알겠네

그토록 수줍던 옛사랑의 고백이

그토록 사랑했던 그대의 얼굴이

희미하게 지워진다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안개 속에서 나는 작별하네

잘 가거라 옛사랑아

모든 윤곽과 경계와 분별아

미지에서 내미는 차가운 손을 잡으며

나는 비로소 알겠네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

 

 

 

병상에서 5

- 기도

 

 

주여!

저는 지금

비옥한 가을에 있습니다

 

당신은 또 이렇게

단풍나무 숲에 붉은 길을 여셨습니다

곧 찬 바람 불고 눈 내리는 겨울 지나

다시 이 숲에 봄이 오고

매미 소리 푸른 여름도 오겠지요

 

주여!

계절을 강물처럼 흐르게 하신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제 홀로 피어 있는 구절초의 의미를

깊이 느끼게 하소서

 

오늘도

창가에 바람이 붑니다

바람의 길과 꽃의 길 사람의 길이

다르지 않음을 알게 하시고

당신의 길 또한 그러하리란 말씀

부디 믿게 하소서

 

황량한 유배지를 건너 온

낙타의 고독을 헤아려 주시어

오아시스 밤하늘에 뿌려진 별들의

교향곡을 듣게 하소서

 

주여!

주께서 허락하신 날까지

조금만 울게 하신 후

그 무한의 길을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지금 저는

찬란한 가을에 있습니다

 

----------------------------------------------------

 

 

집으로 가는 길

 

 

청보리 언덕길을 올라

과수원 울타리 찔레꽃 희게

오리목 새잎 돋는 숲을 지나

저 혼자 핀 상사화 붉어

봄물 우러나는 개울을 건너

푸른 풀밭 위로 하얀 길을 걸어

 

자작나무 숲에서

연둣빛 얼굴로

웃던 처녀야

깨어진 그릇을

울지 말아라

잃어버린 손거울도

슬퍼 말아라

 

길은 마음 따라 열리거늘

어느 길목에선들

내 기다리지 않으랴

어느 숲어귀에선들

그대 기다리지 않으랴

마을에선 따뜻한 저녁상이

우릴 기다리리

 

우리 길에는

꽃도 울지 않고

새도 피지 않고

눈보라 치는 어느 겨울날

그대 찾아 길을 나서도

좋으리

 

길은 마음 따라 열리거늘

울지 말아라 처녀야

어느 사람의 마을이

우릴 기다리지 않으랴

 

@장쯔이 데뷔작 <집으로 가는 길>(1999)을 보고

 

 

 

--------------------------------------------------

 

 

별리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서

너는

뭐라고, 뭐라고

깃발처럼 펄럭이지만

너의 손짓은

안개 속에 흐려지는

그림자

마침내 저쪽 강기슭에 닿아

너는 또

뭐라고, 뭐라고

바람처럼 윙윙대지만

너의 신호는

어둠에 묻혀 까만 소리로

들릴 뿐

이승의 억겁 인연이

지금은

강을 사이에 두고

두 귀머거리로 섰을 뿐

간절하여라

돌아오지 않는 배

 

@후배 옥태권 소설가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직 다 쓰지 못 한 작품이 한 가득일텐데 어찌 눈을 감았을꼬. 옥작가, 아픈 선배 두고 니 먼저 훌쩍 가뿟나~ 부디 잘 가래이~

 

 

 

======================================================================================================

 

 

 

[정태규 시에 붙이는 발문]

 

 

 

오아시스 밤하늘에 뿌려진 별들의 교향곡을 듣게 하소서

- 정태규 시 5편을 선보이며

 

 

최영철

 

 

문학하며 사는 즐거움 중 하나는 문학판에서 여러 선후배 동료들과 맺는 인연일 것이다. 최근 들어 세상사는 방식이 바뀌고 있어서 그 살가움이 예전 같지 않지만 동병상련으로 엮인 끈끈한 정은 다른 집단에 비해 아직 그래도 살가운 편이다. 크고 작은 문학 모임과 행사가 많았던 80년대에는 시내 서너군데 단골 술집에 무작정 나가도 같이 술 마실 동료 선후배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점심 때 둘이서 시작한 술판이 차수를 변경하면서 점점 인원이 불어나 밤이 이슥할 즈음에는 십여명이 모인 걸죽한 술판으로 커져 있기도 했다. 가끔은 그 중 질긴 몇 사람의 주도로 밤을 꼬박 세우며 갑론을박하다 서로의 집까지 쳐들어가 아침 해장국까지 먹고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크고 작은 문학모임들이 매개가 되었지만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그런 결속이 가능하였던지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기만 하다. 그만큼 문학에 대한 열정과 목마름이 유별났던 시절이었다.

 

소설가 정태규는 그런 문학의 시대를 함께 걸어온 나의 절친이다. 그는 58 개띠였고 나는 56 원숭이해 동짓날에 태어났지만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바람에 호적에는 58년생으로 등재되어 그와 법적인 동갑내기였다. 나는 부산에서 출판 일을 하면서 1984년 무크지 지평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정태규도 비슷한 시기에 부산의 지면에 소설을 발표하고 있었다. 장르가 다르니 가까이 지낼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서로의 활동만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그와 나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1985년 겨울에 알게 되었다. 그해 12월 말경 나는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통보를 받고 인터뷰를 하기 위해 상경해 문학 담당 기자와 마주 앉았는데 이야기 끝에 정태규 씨를 아느냐고 물었다. 잘 안다고 했더니 소설 부문에 두 작품이 마지막까지 경합하다가 심사위원 간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 일단 연락을 해 보기로 하고 먼저 정태규 씨에게 전화를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아 다른 사람을 가작으로 결정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한국일보는 조석간 동시 발행으로 사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고 문화부에는 장명수 부장과 김훈 박래부 기자가 문학담당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신춘문예 역시 최고의 상금으로 시 소설만 공모하고 있어서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었다. 뒤에 정태규 형에게 확인한 바로는 하숙집 주소와 전화로 작품을 응모해 놓고는 방학을 맞아 진주 집에 가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 뒤로도 안타까운 마음에 그 일을 몇 번 들먹였지만 그는 거기에 크게 게의치 않고 열심히 소설을 쓰는 눈치였다. 소설 활동을 염두에 두었던지 서울의 한 중학교로 발령 받아 거처를 옮기기도 했으나 얼마 있지 못하고 다시 부산으로 복귀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소설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또 하나의 기억은 그와 나눈 엄청난 양의 술과 이야기가 떠오른다. 지금의 문학판은 주사파 보다 실속파들이 우세해서 모처럼 술판이 시작되었다 해도 필요한 몇 마디 이야기만 주고받다가 곧 흐지부지 끝나기 일쑤지만 그 시절에는 어떤 식으로든 끝장을 보고 뿌리를 뽑아야 자리가 끝났다. 언쟁과 격론이 수시로 이어졌고 얼굴을 붉히며 과격한 말이 오가기도 했다. 밤을 꼬박 새우며 술 마시는 일도 다반사여서 어느 날은 평론가 구모룡 형과 셋이서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 새벽녘 광안리 모래사장까지 슬판을 이어갔던 적도 있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문학 동지들과 의기투합하고 동병상련으로 고통을 함께했던 기억은 우리 세대가 누린 큰 축복이었다.

 

우리의 오랜 벗 정태규는 지금 루게릭으로 병상에 누워 있다. 이 글을 쓰며 그와의 여러 기억들을 반추하다 나는 오래전 서울에서 58년생 개띠 시인 소설가들이 모여 밤늦게 술을 마신 기억을 떠올렸다. 정태규 조명숙 두 소설가와 함께 나도 호적상 58년생이라는 구실로 그 술판에 합세했었는데 막판은 시끌벅적 개판이 되었던 것 같다. 궁핍했던 베이비붐 시절에 태어나 밥 굶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형제간끼리도 먹을 걸로 아귀다툼을 벌이며 컸으니 58 개띠들의 운명은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때 술잔을 주고받으며 문학하는 팔자가 다 그런 거 아니겠느냐고 자조했던 것 같다. 평생을 발발거리고 다니며 짖고 꼬리치며 온 골목을 쏘다녀야 하는 고단한 팔자,

그런데 정태규는 지금 그것을 넘어서는 혹독한 시련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 운동신경세포만 선택적으로 파괴하는 루게릭병으로 온몸이 마비된 채 벌써 몇 년째 누워만 있다. 그에게나 그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나 그 시간은 혹독한 견딤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시를 한번 써 보면 어떻겠느냐는 재안을 조심스럽게 해 보았다. 안구 마우스를 움직여 힘들게 한 자 한 자 의사표현을 해야 하는 그가 그 연약한 노동력을 이용해 할 수 있는 일은 시가 가장 적합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뒤 몇 편의 시를 나에게 보여주었고 나는 행간에 깃든 그의 영혼의 기록을 받들어 읽을 수 있었다. 그 옛날 선비들이 유배지에서 귀양살이의 설음과 고통을 한 자 한 자 써내려갔던 것처럼 정태규 역시 글 감옥에 갇혀 이 혹독한 옥중시들을 썼을 것이다. 찰라적 흥과 한을 받아 적는 양식인 시는 그에게 새로운 출구요 대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시에 허용된 무한한 상상력과 비약이 그의 영혼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 믿는다.

시는 무엇보다 쓰는 자를 먼저 위무하는 양식이다. 그가 쓰는 시가 먼저 자기 자신을 위무하고 나아가 먼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우리 모두를 위무해 주기를 바란다. 시의 무한한 상상력이 그에게 새로운 자유를 선사해주리라 믿는다.

 

이제 그에게서 노동의 값에 비례하는 소설 대작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졌지만 촌철살인으로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절창 시의 탄생을 기대할 수는 있게 되었다. 부디 좋은 시로 새로운 자유를 누리며 우리 곁에 오래 있어주기를 바란다. 그런 면에서 시와 함께 할 그의 시간은 ‘황량한 유배지’가 아닌 ‘찬란한 가을’이 될 것이라 믿는다.

 

황량한 유배지를 건너 온

낙타의 고독을 헤아려 주시어

오아시스 밤하늘에 뿌려진 별들의

교향곡을 듣게 하소서

 

주여!

주께서 허락하신 날까지

조금만 울게 하신 후

그 무한의 길을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지금 저는

찬란한 가을에 있습니다

 

- 정태규 시 「병상에서 5」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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