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갈치 사용설명서
최영철
무작정 끝까지 가 보고 싶어, 또는 더 살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득하기만 해, 막차를 타신 분들, 글쎄 태종대 자살바위 아래 부서져 흔적 없이 사라질 각오로 오신 분들, 그러지 말고 딱 한 번 자갈치까지만 오시라니까, 부산역에서 고작 10분, 일단 비장한 각오는 유보하시고 대가리 잘려서도 꿈틀, 끝까지 눈 치켜뜬 저놈들 보세요, 저놈들보다 못해선 안 되겠다고 죽을힘으로 신나게 살고 있는 아지매 아저씨들 보세요, 저기 영도다리 가랑이 아래 건어물 골목, 멸치들 아직 꼬들꼬들 다 마르지 않았어요, 도대체 죽은 놈으로 분류할 수가 없어요, 망망대해 싸돌아다니며 헛바람 든 거품 빠지는 중, 여기서는 바닥에 나뒹구는 생선 대가리 하나도, 아가리 벌리고, 눈 똑바로 뜨고, 아우성이에요, 악악, 바득바득, 절망하고 한숨 내쉴 틈 없어요, 수만 번 부서졌지만 다시 기세등등 달려오는 파도, 그렇지요, 아무래도 좀 더 철썩여 봐야겠지요, 방파제를 때리던 제 손을 거두어 철썩철썩 제 따귀를 때리고 있어요, 글쎄, 세상 그만 걷어차 버릴 각오로 기차를 탔지만, 여기서 다시 출발해 보는 거예요, 머리 디밀고 잠시 숨 고르기 하는 배들, 세파에 침몰하지 않으려면, 세파를 날렵하게 올라타야 해요, 터지고 찢긴 생선 상자 위에 기고만장 올라선 저 바닷바람, 보세요 끝까지 왔지만 여긴 종착이 아닌 시작이에요, 조금만 더 바둥대다 보면, 저렇게 시퍼런 비늘로 퍼덕이는, 하늘을 품에 안을 수 있다니까요, 차돌처럼 단단해진 파도가 온통, 저렇게, 깔깔대며, 달려오고 있다니까요.
-시집 [말라간다 날아간다 흩어진다] 중에서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는 동물이다. 난해한 학설과 철학적 이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유한자인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것, 즉 자의식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최영철의 이번 시집에도 꽤 많은 ‘죽음’의 장면들이 등장한다. 수학여행을 나섰다가 떼죽음을 당한 아이들(「이것」)의 죽음이 있고, “바퀴에 묻은 검은 핏자국”과 “검은 유골함”(「끝없는 전진」)이 상징하는 죽음도 있고, 망자(亡者)를 잿더미로 만드는 화장장(「화장의 기술」) 등이 환기하는 죽음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시인이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슬픔의 정서로 반응하지만, 정작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마침내 혈혈단신 비상하는 영혼을 보는”(「고독사를 꿈꾸며」) 고독사를 갈망하듯이 부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최영철의 시에 등장하는 ‘죽음’을 긍정과 부정 가운데 하나로 환원할 수는 없으나, 시인은 “이젠 전화하지 마/술도 건네지 마/넌 지척이지만 난 몇 겁의 하늘을 건너왔잖아”[「망일(亡日)」], “어떻게 따낸 졸업장인데 씩씩하고 유쾌하게 황천길 직행해야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오욕칠정 털고 가려면 만반의 준비가 필요해,”(「퇴로」)처럼 드물지 않게 ‘죽음’에 대해 비교적 밝은 목소리로 진술하고 있다.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유머와 명랑성의 어조가 삶과 죽음의 문제에 관한 사유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바다’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또는 교차하는 곳이다. 앞의 시에서 화자는 죽음을 계획하고 “태종대 자살바위”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갈치’에 오라고, 그곳에 와서 “대가리 잘려서도 꿈틀, 끝까지 눈 치켜뜬 저놈들”과 “저놈들보다 못해선 안 되겠다고 죽을힘으로 신나게 살고 있는 아지매 아저씨”를 보라고 권하고 있다. 전자가 죽음의 공간이라면 후자는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삶의 공간이다. ‘자갈치’에서는 “바닥에 나뒹구는 생선 대가리”에서도 ‘아우성’이 흘러나오고, 방파제를 때리는 거친 파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배들’은 파도에 날렵하게 올라탄다. 심지어 바람조차 “터지고 찢긴 생선 상자 위”에서 요란한 몸짓을 하고 있다. 이처럼 ‘자갈치’는 ‘종착’이 아니라 ‘시작’의 공간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최영철의 이번 시집 『말라간다 날아간다 흩어진다』에는 죽음을 모티프로 삼은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시집의 전반적 분위기는 ‘상승’보다는 ‘하강’의 이미지가 압도하는 듯한데, 시적 발상과 표현의 층위에서 이 ‘하강’의 중량감은 유머와 명랑성에 의해 상당 부분 상쇄되는 느낌이다. 요컨대 ‘죽음’에 관한 수많은 기호가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영철의 시는 결코 삶에 대한 부정이나 절망의 느낌을 주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염려가 양각(陽刻)되어 도드라지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그것이 ‘생명’에 대한 관심을 거대한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희망’과 ‘초월’과 ‘생명’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일까. 가령 숱한 현실적 고난을 겪었는데도 “색색의 꽃 터트리며/아 이것이라며/하늘로부터 받은/나의 소임/오로지 이것”(「씨앗들」)이라고 이야기하는 씨앗의 형상 같은 것이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죽음 이후에도 밝게 빛나는 ‘삶’의 자리에 주목하는 다음 구절이야말로 ‘죽음’이 아니라 ‘삶’에, ‘별’의 초월 세계가 아니라 “누추한/인간의 처소”(「산책의 새로운 방식-도요에서」)에 문학의 ‘판돈’을 건 시인의 윤리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하겠다.
- 고봉준 (문학평론가) 시집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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