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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읽기의 즐거움/문학동네 1997 봄

 

주변의 시학/오형엽

 

 

1. 주변의 의미와 미시비평에의 요청

찬 바람이 분다. 바람이 차가워질수록 피는 뜨거워진다. 찬 바람의 냉엄한 현실과 피의 뜨거운 불꽃이 맞부딪쳐 존재의 충일을 가져온다. 겨울 감각의 절정이다. “바람이 분다살아봐야겠다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절이나,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이육사의 시구절에도, 이러한 감각적 체험이 어느 정도 녹아 있는 것이 아닐까. 80년대를 우리는 이러한 시대 감각으로 살았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90년대 이후 우리가 느끼는 시대의 체감온도는 미지근한 것이 되고 말았다.

체감온도의 변화와 더불어 진행된 90년대 문학의 새로운 경향은, ‘세속성잉상성의 흐름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경우, 이 흐름을 따라가며 이전에 시의 전면을 차지했던 중심이 밀려나고 주변의 요소들이 새롭게 등장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중심에서 주변으로의 이러한 변모는 우선 시간적 측면에서, 시대의 중심에서 이탈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즉 당대라는 시간적 현실과 정면으로 맞서는 대결양상이, 과거를 추억함으로써 현재를 견디는 환멸혹은 기다림의 양상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그것을 시대적 주변성이라고 불러보자. 공간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도시적 공간을 소재로 한 경우, 도시의 중심에 놓인 과학문명과 자본의 욕망으로부터 도시 변두리의 후미진 공간과 불우한 이웃들을 시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리고 농촌의 공간을 소재로 한 경우, 농촌 문화의 중심으로 여겨졌던 전원적 자연 대신에 농촌 생활의 일상, 혹은 변두리에서 퇴색되어가는 누추한 존재들과 자연물을 시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를 도시적 주변성통촌적 주변성이라고 이름붙여 보자. 한편 존재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존재 혹은 자아의 중심을 차지했던 이성 의식 남성 대신에 감정 무의식 여성이 전면에 등장하는 현상이 생겨난다. 이를 존재적 주변성이라고 말해 보자.

그런데 이러한 주변의 시학은 소재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심에서 주변으로의 변모는 다양한 층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그것은 소재의 차원에서 시적 형상화의 방식과 주제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서로 겹쳐지며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시는 다양한 층위에서 주변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의 감식안과 비평방식으로는 우리 시대의 시를 더 이상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주변의 시학은 주변적인 요소의 중심화가 아니라, 그 자체가 주변적인 요소로 남아 새로운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것은 텅 빈 중심과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더 복잡하나 체위를 형성한다. 그 목소리와 신체에 근접하기 위하여 우리는 미시비평이라는 새로운 비평방식을 체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까지의 시비평은 소재주의에 함몰하거나, 그것으로부터 진전된 경우에도 형식론적 고찰과 의미론적 고찰의 어느 한 쪽에 치중하여 그 연결고리를 섬세하게 포착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시가 지닌 내밀한 살결과 숨결에 다가서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시비평은 소재비평 실증비평 형식비평 주제비평 입법비평 등의 거시비평을 왕래하며, 우리 시를 도시시 농촌시 민중시 노동시 해체시 신서정시 정신주의시 포스트모던시 환경생태시 등으로 분류하고 그 안에 포섭하려 했다. 공간적 시간적 실존적 계급적 인식적 측면 뿐 아니라, 시적 기법과 주제의 측면에 이르는 다양한 차원에서의 차이를 무시한 채 시도된 이러한 분류와 분석은, 너무 큰 그물코로 인해 우리 시의 은밀한 비밀과 보석을 놓쳐버리고 만다. 그래도 80년대는 시대적 모순에 맞서 싸우는 대항의 논리에 의해 그것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시대감각과 현실이 현저히 변모된 90년대 중반에도 이러한 비평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의 현실은 우리에게 주변의 시학을 건져올릴 미시비평의 안목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읽을 이 계절의 시집은 최영철의 [야성은 빛나다], 이정록의 [풋사과의 주름살], 김소연의 [극에 달하다] 등의 세 권이다. 각각 개성적인 차원에서 주변의 시학을 형상화하고 있는 이 시집들을 미시비평의 방식을 통해 접근해 보자. 그것은 시의 질료, 즉 시어 운율 이미지와 상징 어조 등의 구성요소를 매개로, 그 어법과 화법의 발화방식에 녹아 있는 시인의 시선을 미세하게 추적함으로써 시적 자질을 밝혀내는 것이다. 미시비평의 목표는 이를 토대로 시인의 의식과 세계인식 뿐 아니라, 시인의 무의식과 사회적 차원의 의미?까지도 밝혀내는 데 있다. 밖에서 안으로의 해석이 아닌, 안에서 밖으로의 이러한 접근은 분석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나 원리로 환원될 수 없는 시의 고유한 무늬와 숨소리를 섬세하게 감지하고 포착하는 작업이다. 비록 목표와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이 시도는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이다.

 

2. 시대의 주변, 시적 응축과 조감도

최영철은 지금까지 소외된 이웃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도시변두리의 삶을 형상화해왔다. 빙유나 상징 등의 시적 함축이 소거된, 그의 일상적 어법은 산문화의 경향을 보이지만, ‘중도를 견지하려는 태도가 시적 긴장을 형성한다. 중도는 도시 변두리에서 누추한 삶을 살아가는 이웃들에 대한 부끄러움의 시선과, 그들을 억압하는 도시 중심보, 다시 말해 돈과 권력의 욕망으로 구조화된 자본의 체계에 대한 비판의 시선이, 팽팽한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생겨난다. 즉 긍정의 시선과 부정의 시선이 만나 시적 긴장을 얻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네 번재 시집인[야성은 빛나다]에서도 유지되고 있지만, 한편으로 변모된 양상이 나타난다. 가장 먼저 발견되는 변모은 자아에 대한 의식의 변모이다. 이전 시에 나타난 중도의 시선과 태도에는, 자아에 대한 회의나 반성이 개입되지 않았다. 고유하고 타당한 주체로서의 자아를 상정하고, 그 자아가 이웃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본 셈이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시적 자아는, 과거의 열정을 상실한 채 소시민적 일상에 파묻힌 자신을 끊임없이 회의하고 반성한다.

 

나도 한때는 무럭무럭 열나던 찜통

갖은 만두속으로 배가 터질 것 같은 시절이 있었나니

불씨 내린 찜통처럼 식어가는 아낙의 꿈

--<마흔>

 

나 이미 사랑을 잊고 산 지 오래

삶은 추하도록 환하거나 무료한 것

엎드린 손바닥 위에 동전

도시락 딸랑거리며 오골오골 모여 기다리는

너희 식솔에게 돌아가고 있느냐

삶은 너무 숭고하거나 바닥이 뻔한 것

--<그리운 지상> 중에서

 

시인은 마흔의 나이에 들어선 현재의 자신을 점검하고 반성한다. 열정과 사랑으로 존재의 충일감을 맛보았던 과거를 회상하며, 시인은 자신이 현재으 일상 속에서 무료한 소시민으로 전락한 것을 한탄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전 시에서 산문화되어 풀어졌던 시적 진술이, 응축된 시어와 단정적 어조와 짧은 호흡을 통해 긴장감을 얻고 있는 데 주목한다. 이 긴장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시인의 자기반성이, 그 안에 새로운 삶을 추구하려는 갱신의 의지까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자기 갱신의 의지는 히죽이 웃는 대가리에서 야성을 캐다/홀로 돼지국밥을 먹는 이마에서 야성은 빛나다”(<야성은 빛나다>)라는 냉소적 태도로부터, “얼마나 지져야 내 삶이 다시 얼얼할까”(<내가 나의 남성까지도>)라는 자학의 태도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눈물샘 마르면 까칠한 정강이로/정강이 시리면/갈라진 발바닥으로 노래할 수 있네”(<길 떠난 집새에게>)라는 적극적 태도로 이어지며 전경화된다.

그러면 이러한 자기반성과 갱신의 의지는 다시 어디에서 동력을 얻는 것일까? 그것은 과거를 잊지 않음에서 오는 추억의 힘견딤의 자세이다. “격정의 시간을 건너온 고요한 이력불순의 시간을 견딘 폐허같은 주름”(<소주>)에는, 추억과 견딤으로부터 자기반성과 갱신의 의지로 나아가며 긴장을 획득하는, 최영철 시의 내력이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현실대응이 현재의 자아가 처한 폐허, 즉 텅 빈 주체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텅 빈 주체는 텅 빈 시대라는 중심없는 세월을 견뎌나가기 위해, 80년대의 추억으로부터 힘을 부여받는다. 결국 시인은 아직도 80년대의 사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길의 끝까지 가 본 적 있느냐

거기 어느 날 져다 보리고 온 몹쓸 과거가 있다

한 인생이 찍다 만 둥근 마침표 있다

아무리 구덩이 파도 돌아서고 나면

불쑥 고개 쳐들고 있는

떨치고 가는 우리 뒤통수 쏘아보는 외눈 있다

봉곳 솟아 어두울수록 점점 커지며

죽어서도 눈감지 않는 원한 있다

이제 우리 마음을 덮고

젖무덤 같은 사이길로 조용히 가자

얼마나 헛되이 그대를 보냈으며

얼마나 서둘러 그대 이름 지웠는가를

산짐승이 쓸고 간 녹슨 뼈 불러 수습할 때

토막난 혼들이 우짖는

저쪽에서도 우짖는

--<무덤의 추억>

 

시인은 버리고 온 몹쓸 과거를 기억한다. 그것은 고개를 쳐들고 우리를 쏘아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녹슨 뼈를 불러 수습하기 위해 마음을 덮고 젖무덤 같은 사이길로 조용히 가자고 말한다. 이 길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과거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죽음, 즉 추억으로 되살아나는 무덤이다. “젖무덤 같은 사이길은 허상의 풍요로 이 죽음을 잊게 만드는, 환각과 도취의 90년대적 현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길의 끝까지 가는 것은, 완결되지 못한 과거와 만나면서 현재의 환멸을 뚫고 나가는 것이 된다.

결국 최영철 시의 위상은 이전 시가 보여주었던 도시 변두리에서 시대의 변두리로 옮겨진다. 그의 시는 당대의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과거와의 관련 속에서 바라본다. 즉 시인은 90년대라는 현재의 중심에 서 있지 않고 80년대라는 과거를 추억하며 그 사이길로 걸어간다. 파시스트적 속도가 심화되는 현재의 흐름에 역생하면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시선은 결국 시대의 주변으로 향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그의 시는 불우한 이웃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을 포함한 현실에 대한 반성과 냉소적 풍자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분단이나 한일 관계 등의 국가적 문제를 시화하거나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시화하는 것도, 그러한 경향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정표를 따라 자동 안내 방송을 따라

종점이 가까워 온다 종점 가기도 전에

버스가 지하철이

콩나물 시루 같은 일생이 없어지리라는 생각,

한결 두꺼워진 무덤 위로 아래로

버스가 지하철이 상쾌하게 씽씽 달린다

훗날 누가 지층을 쪼개어 보면

쥐포처럼 납작해진 버스의 지하철의

콩나물 시루 같은 일생들의

촘촘한 화석을 보게 될 것이다.

--<촘촘한 화석> 중에서

 

이 시는 약간의 환상적 분위기를 통해, 버스와 지하철이 지상에 묻혀 그것을 무덤으로 삼고 마는 상황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과 태도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대상을 관찰한 후 요약하고 압축하여 표현하는, 시적 응축의 어법에 스며들어 있다. 앞서도 살핀 바 있는, 시적 응축은 현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감의 시선과, 시간대를 밀집시키는 시간의식에서 얻어지는 듯하다. 즉 이 시의 응결된 어법과 선 굵은 문체는, 높은 데서 인간사를 내려다보는 듯한 조망의 시선에서 생겨나며, 또한 그것을 다른 시간대로 연결시키는 시간의 압축을 통해 강화된다. 이러한 형상화의 기법과 방식을 시적 응축조감도라 불러 보자. 이전 시의 긴장이 이웃에 대한 애정과 세상에 대한 야유라는, 균형과 중도의 시선에서 생겨났다면, 이번 시집의 긴장은 이처럼 현실을 전체적으로 내려다보느 조감의 시선과, 시적 응축의 어법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중도와 이별한 시인의 사랑법이, 추억의 힘을 통해 단련됨으로써 얻어진다. 결국 시인은 시대의 변두리에 선 자신의 위상을 직시하고, 자기 성찰과 자기 갱신을 동시에 추구함으로써 새로운 시적 차원을 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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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와 싸우는 시인들/류신

 

󰊱 그리스 신화에서 시간의 신 크로노스’(Khronos)는 낫과 모래시계를 손에 쥐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낫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시간의 파괴력을, 모래시계는 시간의 공허한 반복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정작 크로노스의 속성은 고야의 그림에서 사실적으로 묘파된 것처럼, 제 자식을 낳는 족족 가차없이 잡아먹는 식인의 면모에서 단박에 드러난다. 인간의 총체성을 잘게 쪼개어 갉아먹는 시간의 가혹한 매커니즘에 대한 이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가. 자본주의 시계판의 분침과 시침 사이에 충직한 노예로 에속된 처참한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신화란 허구적 상상력의 창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설득력있는 개념 생산의 화수분이란 점을 새삼 통감케 된다. 그러나 이 신화에서 정작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가 토제를 사용해 아버지가 삼킨 남매들을 내뱉게 하는 사건이다.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폭압적인 시간의 유린을 부리친 인류 최초의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벽두, 거침없이 줄달음치는 시간이란 괴물의 발목을 붙잡은 제우스의 후예는 누구일까? 우리가 최근에 나온 시집 가운데 각기 개성있는 토제를 사용해 크로노스와 싸우는 김진경 최영철 김명수의 시집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김진경이 매끈하게 다림질된 시간을 겹겹이 주름잡아 느림의 권리를 모색한다면, [일광욕하는 가구]에서 최영철은 우리를 앞으로만 끌고가는 팽팽한 시간의 비가역성을 거슬러 올라가는 지난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 그는 왜 흘러간 시간의 뒤를 밟아가는가?

 

버스 타고 비행기 타고 우주선 타고 간

앞을 보내고

멀고 어둡고 긴 뒤를 밟아간다

차례대로 가서 처박힌다

줄줄이 늘어서서 발 동동 구르며 하품하는

앞은 절벽

--<앞으로 뒤로> 부분

 

인용된 시에서 명징하게 드러나듯, 한마디로 시인이 내다본 앞의 풍경이 심히 마뜩치 않기 때문이다. 암표를 사고 급행료까지 지불해가면서 버스 타고 비행기 타고 우주선 타고 간길의 끝은 장밋빛 복락원의 입구가 아니라, “절벽이나 천길 벼랑” (<세상 밖으로>)이라는 미래에 대한 비관적 인식이 시인을 뒤로 이끌게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길의 끝이 무덤이다”(<정상에서>)란 인식처럼 언젠가는 맞닥뜨릴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도 시인의 암울한 전망을 부추켰을 터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황금시대로 인식하는 낭만적 동경이 뒷걸음을 재촉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멀고 어둡고 긴 뒤를 밟아간다는 시구가 암시하듯, “부끄러움도 기다림도 남은 게 없는/풍비박산의 시간”(<노부부>)을 견디지 못해 저를 밟고 간 세월에 딱지가 앉아/곰보 얼굴이 된 난간”(<곰보다리>)이 흉물스럽게도 그의 귀로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퇴유곡의 암담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서늘한 퇴로”(<쥐스킨트를 읽는 밤>)를 고집하는 까닭은?

해답은 간명하다. “위로 뻗기만 하는 삶을 받치려고/실타래처럼 엉킨 땅 아래 상념들”(<대숲에서>)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재인식을 통해 생의 의지를 북돋우기 위함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렇게 만신창이로 허덕거린 사이/나는 다 망가져 처음으로 돌아왔다”(<20세기 공로패>)에서 들리는 삶의 초발심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이 독성 이 아귀다툼이 나를 새롭게 할 것이야

마디마디 박히는

민물장어 부스러진 뼈의 원한

힘이 솟는다

다 부서지면 나는 날아오를 것이야

--<이 독성 이 아귀다툼> 부분

과거로의 낭만적인 복귀는 재출발의 잠재력을 온축할 수 없는 법이다. “독성아귀다툼으로 생채기 난 삶을 온몸으로 뜨겁게 끌어안을 때, 비로소 비상의 의지와 부활의 심지를 세울 수 있게 되리라. 그에게 끝과 시작은 서로 상충하는 타자가 아니라 상보하는 타자다. 는 뒤집혀진 이다. 따라서 민물장어 부스러지 뼈의 원한과 같은 삶에 대한 고통과 번뇌를 극한까지 밀고 나갈 때, 생의 시작은 더욱 절실하고 치열하게 다가온다. 이제 시인은 낚시에 걸려 죽어도 따라오지 않으려는 바닷고기의 처절한 항전을 향해 부르짖는다. “파닥거려야지 갈갈이”!(<바보고기>) 이런 소생의 의지는 갯쑥부쟁이까지 피면 다시 출항이다여기까지 오게 한 음지의 근육들/탈탈 털어 말린 얼굴들이 햇살에 쨍쨍해진다란 시구로 각각 시를 종결하는 <폐선><일광욕하는 가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탈탈에서감지되는 과거 극복의 결의, “쨍쨍에서 느껴지는 미래를 향한 박동!

과거나 미래, 어느 한 편만을 절대화하고 특권화하는 유토피아주의는 절름발이 시간의식의 부산물이다. 그러나 이미아직’, 양편 모두의 한계에 대한 명료한 인식으로 빚어지는 긴장 속에서 자기 갱신을 企投할 때, 우리는 과거를 치유할 수 없느 sdud역으로 만들고 미래를 죽음과의 독대로 서둘러 몰고 가는 선형적인 세속시간의 궤도에서 벗어나, ‘미래는 과거보다 더 늦은 것이 아니며 과거는 현재보다 더 이른 것이 아니다“(하이데거)로 압축되는 나선적인 시간성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최영철의 시가 노정하는 과거로의 역행이 복고적 퇴행이나 소극적 도피가 아니라 편력의 길로 전환될 수 있는 계기가 여기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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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근한 것들의 맥놀이 -최영철의 시세계

 

 

조강석

 

 

1. 일상의 두께

 

최영철의 시세계가 전개되어온 경로는 한국 현대시가 1980년대 이후 갱신을 모색해온 이력과 묘하게 어긋난다. 정치적 격변에 대한 무매개적 반응으로서 필연적으로 도래한 르포르타지와 직정적 격문들, 모순과 불합리에 대한 분노와, 미래를 현재의 반작용으로 전유하려는 낭만적 열정 등을 1980년대의 시에서 우리는 충분히 목도할 수 있다. 흔히, 1980년대를 시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사실 이는 얼마나 아이러니한 말인가. 정치적 격변에 대한 작용이나 미래에 대한 호흡의 일환으로 추동받은 서정이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일까? 필연적으로 그것은 격동과 회한의 파고를 내장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불투명한 미래를 확실한 전망으로 섬기는 이들의 내면은 얼마나 높은 파고를 지니는가? 1980년대가 시의 시대인 것은 바로 이 내면의 파고 때문이다. 격정과 열망의 파고와 더불어 한 시대의 시가 씌어졌다. 그 결과 역사와 미는 혁명의 비결을 교환했다. 삶의 미적 보상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역사대신 언어가 개변되었고 시는 현실의 모든 소재들 속에서 발생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대신 언어가 혁명을 이루었고 대신에 역사 자신은 너울을 뛰었다.

격정이 회한으로 너울거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에 태동한 소위 신서정은 저 역사의 너울을 바라보는 이들의 심회 속에서 태동했다. 일상의 발견이 일상으로의 침잠이 되기까지, 신성의 장소가 역사에서 자연으로 바뀔 때까지 한국현대시의 독자들은 현기증 속에서 그 심회 속을 오래 들여다보아야 했다. 그런데, 애초에 파고가 아니라 심연을 택한 시인이 있다. 희망과 감동의 파고가 아니라 일상의 심연을 택한 시인은 우리에게 그 어떤 구호나 드라마보다도 일상 자체가 미적인 주목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파고의 무게중심보다 심연의 무게중심은 한결 낮은 곳에 있는 법, 시인 최영철은 우리의 현대시가 역사에서 일상으로, 분노에서 성찰로, 문화에서 자연으로 물길을 잡는 현장에서 항상 변방과 낮은 곳에 무게중심을 잡았다. 이때 최영철의 시는 구호나 성찰대신 낮고 작고 소소한 것들의 미적 무게중심을 마련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한 사람을 사랑하였네

나는 그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네

여자도 아닌 남자를

젊은이도 아닌 쭈그렁 늙은이를

내가 바라보는 줄도 모르고

내가 사랑하는 줄고 모르고

그는 내 앞을 무심히 지나치네

비오듯 쏟아지는 땀방울 뚝뚝 흘리며

구부정한 개미허리 구부리고

손수레 가득 물건을 싣고 가네

(중략)

 

내가 뒤에서 미는 줄도 모르고

쏟아지는 땀방울만 훔치고 있네

양은그릇들만 저희들끼리 덜커덕거리며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네

-몰래한 사랑1부분, 홀로가는 맹인 악사(1994, 푸른숲)

 

일상을 다룬 시는 몇 개의 경계를 지닌다. 예술의 역사에서 일상은 아주 빈번하게 도덕이나 성찰과 짝을 이루어 알레고리나 잠언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일상에 대한 예술의 지분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때로 도덕적 알레고리를 위하여 일상의 세목이 동원되는 경우나 깨달은 자의 잠언을 위해 일상적 사건이 소비되는 경우를 통해 ()’()’에 복속되는 현장을 우리는 종종 목도해왔다. 그러나, 일상을 다룬 시에서 우리가 정작 높이 사야 할 것은 그 일상이 도덕적이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기 때문에 도덕적일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인용된 시를 보라. 삶의 세목들은 무엇의 일부이거나 다른 것의 동기여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우리의 주목을 받을 준비를 언제나 갖추고 있음을 우리는 이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코앞을 바라보며 노동하는 이들의 땀방울, 그리고 손수레 가득 실린 잡동사니들이 언제 우리의 시선을 이렇게 통절하게 잡아끈 적이 따로 있었던가? 경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동의 가치나 삶의 신산함이라는 말로 풀리기 전에 저 화폭의 세목들은 스스로가 미적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자기웅변을 전개하고 있다. 시인은 저 웅변을 우리의 가시계에 풀어놓는 역할을 자임한다. 어떤 알레고리로 풀리지 않아도 이 현장은 우리의 가시계 내에 새로 기입될 자격을 지닌다. 일상은, 일상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렇게 비가시계에 은폐되어 있던 아름다움을 우리의 통상적 가시계 안으로 찔러넣는 시인들에 의해 세공된다. 바로 저 시인의 시계(視界)에 힘입어서 말이다.

 

이처럼, 일상의 세목이 우리의 가시계 안에 미적으로 현상하는 현장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중반까지의 최영철의 시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현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시에서 최영철은 일상 자체가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일상 속에서의 미의 수태고지 이외에도 일상이 생활의 표면보다 깊은 심연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성실하게 고해온다.

 

야성을 연마하려고 돼지국밥을 먹으러 간다

그것도 모자라 정구지 마늘 양파 새우젓이 있다

푸른 물 뚝뚝 흐르는 도장을 찍으러 간다

히죽이 웃고 있는 돼지 대가리를 만나러 간다

돼지국밥에는 쉰내 나는 야성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시장바닥은 곳곳에 야성을 심어 놓고 파는 곳

그 따위 현혹되지 않고 오로지 야성만을 연마하기 위해

일념으로 일념으로 돼지국밥을 밀고 나간다

둥둥 떠다니는 기름 같은 것

그래도 남은 몇 가닥 털오라기 같은 것

비계나 껍데기 같은 것

땀 뻘뻘 흘리며 와서 돼지국밥은 히죽이 웃고 있다

목 따는 야성에 취해 나도 히죽이 웃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면 마늘 양파 정구지가 있다

눈물 찔끔 나도록 야성은 시장바닥 곳곳에 풀어 놓은 것

히죽이 웃는 대가리에서 야성을 캐다

홀로 돼지국밥을 먹는 이마에서 야성은 빛나다

-야성은 빛나다전문, 야성은 빛나다(1997, 문학동네)

 

일상과 관련하여,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상을 다룬 시에서 독자를 피로감에 빠지게 하는 두 관행이 있다면 한 쪽은 일상의 잠언화요, 다른 쪽은 일상으로의 침잠이다. 앞서 살펴본 시에서 최영철이 어떻게 시가 도덕적 잠언이나 성찰의 경구로 평면화되는 것을 피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이고 혹은 주변적인 모든 것들을 우리의 시계의 중심에 놓아 이들을 미의 주역으로 내세우는 작업이 최영철의 초기시의 중요한 특징을 이룬다고 하겠다. 인용된 시에서 이제 최영철은 바로 그렇게 새삼 전경화된 일상의 세목에 두께를 부여한다. 이례적으로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추켜진 일상의 세목들은 이제 이력들을 부여받으며 스스로의 심연을 만들고 있다. 그러니, 이때 시인이란 바로 일상의 심연을 파는 자이다. 아니, 심연으로부터 일상을 끄집어내는 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 방향은 정확히 일상으로의 침잠과 반대방향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일상으로의 침잠은 일상의 신성화와 항상 동행한다. 그러나, 최영철은 일상을 신성화하거나 일상 속으로 매몰되는 대신 일상 각각에 족보를 부여한다. 다시 말해 최영철은 일상의 과거사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시인이라는 것이다. 보라, 인용된 시에서 한 끼의 식사는 사물의 과거사들의 접촉으로 묘사되고 있다. 먹는 일의 거룩함을 찬양하거나 일상의 비근함을 무표정하게 데생하는 대신 최영철은 일상의 세목들이 죄다 내력을 지닌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구체적인 것들의 배후와 두께를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 일상의 어떤 사건도 바로 내력들의 상견례이다. 홀연 돼지국밥집에서 야성의 내력들이 내공을 겨루다!

 

2. 고통이라는 주파수

 

최영철이 시계를 좁히고 관심의 초점을 일상 자체의 아름다움과 내력들에 맞춘다고 했을 때, 독자의 시선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 화폭을 이동하기 마련인데 이때, 최영철의 언어가 투사하는 화면의 한 켠에서 우리의 눈을 찔러오는 풍크툼(punctum)이 되는 것은 바로 난만한 고통이다. 풍크툼이란 무엇인가? 사진을 통해 이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풍크툼이란 어원상으로 상처, 찌름, 상흔 등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는 시각의 장에서 스투디움(studium)과 구별된다. 스투디움이란 우리가 지식과 교양에 따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영역이자 감상자에게 평균적감정 상태를 상기시키는 영역이다. 이와 달리 풍크툼이란 스투디움을 깨뜨리기 위해 마치 화살처럼 감상자를 찌르는 어떤 것이라고 롤랑 바르트는 설명한다. 최영철의 시가 일상적인 화면을 통해 시각장을 구성하는 특징을 지닌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이 시각장의 스투디움과 풍크툼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시에서 우리의 평균적 이해와 감정 상태를 뒤흔드는 풍크툼은 무엇일까? 다음의 화면에서 무엇이 반짝 우리의 눈을 찔러오는가?

 

아이들 뜀박질이 앞장서고 우렁찬 구령이 뒤따르고

호룩호룩 추임새에 펑펑 터지던 환호성들

호루라기 이제 싱그러운 가슴팍이 아니라

늙고 병든 저 할머니 머리맡에 걸려 있네

좋은 시절 다 보낸 빈털터리

할아버지 발치에 놓여 있네

호루라기 소리 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 때 있었지

얼굴 닦는둥 마는둥 밥숟갈 어서 놓고

이빨 닦는 둥 마는둥 한달음에 달려 나간 때 있었지

시퍼런 청춘을 목에 걸고 힘차게 불어재끼면

먼 산이 일렬횡대로 뛰어오고

졸고 있던 새들이 푸드득 날아올랐지

이제 호루라기 달려나가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느릿느릿 해 기우는 저녁으로 가기 위해 있네

가장 첫자리 새벽녘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로 오는 게 아니라

엉금엉금 기어가는 해소천식으로 일어나기 위해 있네

게으름 피고 늘어졌던 것들

일제히 불러일으키며 오는 게 아니라

뒷전으로 아래로 슬슬 몸을 빼기 위해 있네

호루라기 이제 설레는 아이들의 가슴에 있지 않고

무허가 냉방 빗물 떨어지는 비닐 하꼬방에 있네

자식ㄱ 가고 영감 할멈 먼저 가고 덩그러미 남은

한많은 세월의 대못 자리 위

사지를 늘어트리고 있네

-호루라기전문, 호루라기(문학과지성사, 2006)

 

세 개의 화면이 호루라기 이미지를 중심으로 중첩된다. 우렁찬 구령에 맞추어 아이들이 뜀박질을 하고 환호가 터지고 저절로 미소가 머금어지는 현장에서 호루라기는 작은 열정과 커다란 희망을 조율하는 출발음을 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만큼 가벼운 것이 어디 있으랴. 호루라기는 여기서 상승하고 발산하는 소리들의 표상이다. 아이들의 웃음이 어찌 풍크툼이 되랴.

점호와 기상으로 점철되는 청년의 한 때도 있다. “시퍼런 청춘을 목에 걸고모든 거친 일상을 열정으로 넘고야 마는 하루하루에 호루라기는 도약과 팽창의 표상이다. 어떤 구속도 자신을 팽창시키는 계기로 삼고야 마는 시절의 일성은 부풀라는 신호이다. 이것이 어찌 풍크툼이 되랴. 희망과 열정은 삶의 스투디움은 될지언정 우리의 눈을 찔러오는 것은 아닐 게다.

그러나, 이 시에서 우리의 눈을 찔러오는 것이 있다. 바로 마모와 소멸의 기운이 그것인데, 시인은 이를 진술하지 않고 압축한다. 병든 육신의 기별을 전할 파발마로 머리맡이나 발밑에 놓인 호루라기, 마모와 소멸 쪽으로 향하는 시간의 운동을 재촉하는 바로 그 호루라기는 우리의 평균적 감정상태를 뒤흔든다. “무허가 냉방 빗물 떨어지는 비닐 하꼬방에 덩그러니 남은 호루라기는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서늘한 인지충격을 줌으로써 역시 우리의 평균 감정상태를 뒤흔든다. 마모된다. 소진한다. 지나간다. 우리의 눈을 찌르는 풍크툼으로서 호루라기가 전하는 말이란 이런 것들이다. 그러니, 최영철은 일상의 세목이 충분히 미적 주목의 대상이 될 만한 자격이 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한 가운데 우리의 평균 감정 상태를 뒤흔드는 풍크툼들이 내장되어 있음을 고지한다.

 

몸살로 여러 날 아프다 아프니까 내가 살아 있다 아프지 않을 땐 내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아프지 않을 땐 내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맥박은 뛰는지 숨은 쉬는지 몰랐다 아프니까 할딱거리는 내가 들렸다 할딱거리는 내가 만져졌다 약을 타려고 줄선 구부정한 뒤통수가 보였다 살려고 죽을 퍼 담고 있는 쪼그라든 부대자루가 흔들렸다 아프니까 며칠 전 들은 아프리카 생각이 간절했다 할례를 한 엄마 품을 통과하느라 작게 작게 만들어진 아이들이 어두운 교실 바닥에 따개비처럼 붙어 책을 읽고 있다 폭삭 늙어버린 아버지들이 밀림으로 가고 있다 아프니까 아프리카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처녀들이 더 새까매졌다 아프니까 아프리카가 된 것인지 아프리카니까 아픈 것인지 아프리카가 아프니까 나도 아픈 것인지 내가 아프라고 아프리카가 한 발 먼저 아팠던 것인지 모르겠다 아프니까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아프리카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해주지 않는다 나도 이제 아프니까 어느 날 그만 아프리카로 가봐야 하지 않을까 아프리카처럼 새까맣게 누워 있어야 하지 않을까 눈만 번득이다가 그것도 안 되면 이빨만 희게 빛내다가 아프리카를 지고 좀 더 큰 병원으로 가 봐야 하지 않을까

-아프리카전문, 찔러본다(문학과지성사, 2011, 이하 시 인용은 모두 같은 시집)

 

아마도 우리네 일상에서 평균적 감정상태를 가장 강렬하게 뒤흔드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은 생의 한 가운데 있는 죽음의 기미와 마주할 때일 것이다. 몸 아픔은 삶 가운데 죽음이 놓여 있다는 정연한 사실을, 생의 리듬과 죽음의 너울이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님을 새삼 인지하게 한다. “아프니까 내가 살아 있다는 역설은 바로 이런 발견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상처와 고통을 통해 아집만을 확인하는 이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악착같이 생을 사수하는 의지가 패악이 되는 현장도 우리는 삶의 여러 대목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시인은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쉽지 않은 인식의 발걸음을 뗀다. 우선, 그는 고통을 삶의 한 고개로 승인한다. 아프니까 살아 있다는 인식은 얼마나 아집과 먼 것인가. 아파서 고동치는 부대자루로 하루를 보내는 일을 고집과 욕심의 전조로 삼는 대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삶의 비의 가운데 하나를 개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삶은 죽음이다. 삶은 죽어감이다. 그리고 죽어감은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이 진실된 역설을 승인하는 이가 시인이다. 이만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측해보라, 상처와 고통이 생의 리듬의 한 고비라는 것을 파악한 이의 다음 행보를.

놀랍게도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타자와의 연대의 비결로 삼는다. 연대에는 여러 가지 형식이 있다. 연민과 동정, 분노와 투쟁, 보증과 책임 등등의 형식으로 우리는 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의 연대라니, 방 한 가운데, 몸 곳곳에 도래한 고통을 주파수 삼아 그는 저 멀리 있는 고통마저 자신의 호흡에 싣는다. 내 몸의 고통을 통해 삶과 죽음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이가, 그 발견마저도 종요로운 것인데, 나아가 고통을 세계의 주파수로 삼는 현장은 여러 번 발견되어 마땅하다. 보라, 다음과 같은 구절을 예사롭게 부리는 이의 심회를.

 

아프리카가 아프니까 나도 아픈 것인지 내가 아프라고 아프리카가 한 발 먼저 아팠던 것인지 모르겠다

 

나도 이제 아프니까 어느 날 그만 아프리카로 가봐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고통은 연대를 위한 주파수가 된다. 고통이라는 주파수를 통한 연대는 연민이나 분노보다 근원적이며 굳건한 것이다. 연민과 분노와 희망과 전망이 아니라 고통, 바로 그 고통만은 온전히 스스로의 것이며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최영철은 과장하는 시인이 아니다. 최영철은 거리의 한 가운데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최영철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외치지도 않고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고 채근하지도 않고 함께 함이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권유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고통에 예민한 정신이 상처를 내부로부터 외부로 개방하는 기예를 담고 있는 그의 예사로운 말투는 조금 더 근본적 수위에서 우리의 심회를 조율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근본주의자이다. 그의 근본주의의 강령은 일상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에 대한 자생적 관심이며 도구는 풍크툼이다. 고통의 연대에 기반한 시의 정당 하나를 그는 거느리고 있다. 곡진하다.

 

3. 비가시계의 기미와 세계의 맥놀이

 

그렇다면, 시인으로 하여금 제 몸의 고통을 세계의 고통에 접속시키는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그것은 타자의 주파수를 감지하는 공감능력으로부터 비롯된다. 세계의 온갖 안부가 궁금한 이들만이 품을 수 있는 공감능력을 최영철 시인은 여러 시에서 펼쳐 보이는데, 이 공감능력이 부단한 발품에 의해 수련된 것임을 다음과 같은 시는 보여주고 있다.

 

햇살 꽂힌다

잠든 척 엎드린 강아지 머리

퍼붓는 화살

깼나 안 깼나

쿡쿡 찔러본다

 

비 온다

저기 산비탈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

죽었나 살았나

쿡쿡 찔러본다

 

바람 분다

이제 다 영글었다고

앞다퉈 꼭지에 매달린 것들

익었나 안 익었나

쿡쿡 찔러본다

-찔러본다전문

 

그러니까, 시인은 찔러보는 자이다. 아니 이를 지금까지의 맥락에서 재진술하자면 범상한 현상들 속에서 주목할 만한 풍크툼을 인지하고 그것들에 대해 오체투지’(오체투지)하여 눈을 맞춰보는 이가 시인이다. 인용된 시의 배후에는 세계의 기운들이 일렁이는 기미가 있고 표면에는 눈을 자꾸만 찔러오는 것들과 눈을 맞추는 운동이 있다. 햇살 비추고 바람 불고 비 내리는 것은 기미가 운동이 되는 마술이다. 그것은 비가시적인 기미가 가시계에 안부를 전하는 운동이다. 그러니 시인은 시선의 교차를 매개로 비가시계와 가시계의 상견례를 주재하는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이 중매를 통해 강아지와 다랑이논과 영근 열매와 같이 비근한 것들은 세계의 안부를 전하는 특사들로 자신의 지위를 높인다. 시인이 오체투지하는 것은 결국, 이처럼 세계의 만유연관을 응시하고 만상을 자신의 머리 위로 높이기 위함이다. 비가시계의 기미를 전하는 전령 강아지가 햇살에 고개를 들고, 세계의 기운을 전하는 대사 다랑이논이 빗물에 출렁이고, 세계가 한 파동에 뛰논다는 사실을 고지하는 특사 열매가 대지의 심연 속으로 떨어진다. 최영철은 일상을 성화하는 대신 일상의 미를 분절시켰고 제 고통에 침전하는 대신 고통을 주파수 삼아 상처받는 이들의 연대를 감행했으며 세계의 기운이 만유의 공명을 북돋는 현장에 가락을 심어놓았다. 작게 귀를 기울이면 크게 너울대는 맥놀이를 듣게 하는 것이 바로 그의 시이다. 다음과 같은 시를 잡동사니들의 축제로 문학사에 기록해두자, 또 하나의 거대한 뿌리를 우리는 얻게 되었다.

 

숟가락 젓가락 어깨춤 배춤 먹다 만 국그릇 빈 밥그릇

간장 종지 짜게 갔다 싱겁게 돌아오는 지게목발 된 서리

내 뺨따귀 네 허벅지 내 머리통 네 등허리

질펀 넓적 오동통 볼기짝 망할 놈 육시랄 놈

산에 가서 나무 베고 강에 가서 멱 감아

간들간들 봄바람 살랑살랑 여름바람 휘영청 갈바람

얼음장 칼바람 날 선 꽃샘바람 뻥 뚫는 빈 가슴 메아리

뚝딱 뚜다닥 뚝닥 뚜닥 어두운 담벼락

높이 선 적막을 밀어내고 잡귀를 쫓아내고

서에 번쩍 북에 번쩍 한달음에 도망가는 앞뒤 강 추임새

얼쑤 한번 일어나 덩실덩실 놀아보는 굿거리 세마치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엇모리

양은냄비 두레밥상 꽹과리가 깨앵깨앵 소리쳐 부르자

단잠 깨고 오종종 걸어와 묵직한 징소리로 엎드린

햇살 한 줌 궁……………………

-장단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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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견뎌내는 자의 고독한 내면

 김신우, 내일을 여는 작가, 2004년 봄

 

어렸을 적 나는 잠을 자고 있는 엄마 곁에 다가가 숨소리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엄마가 꼭 죽은 것처럼 느껴지곤 했기 때문이다.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을 때 난느 종종, 엄마가 이대로 숨이 멎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 몇 번씩 엄마의 숨소리를 듣거나 심지어는 가슴 께에 손을 얹어보고 나서야 안심이 되기도 했다. 잠을 잘 때뿐만이 아니라 어린 나에게 엄마는 꼭 정물쳐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엄마가 마루에 앉아 먼 들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나 혹은 태양이 작열하고 있을 때 시들어가는 맨드라미나 채송화를 검게 그을린 얼굴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도 나는 엄마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마치 미라처럼 느껴지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순간이야말로 엄마가 고단함 삶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언젠가 몸을 다쳐 하루의 대부분을 병상에 누워서 지내야만 했을 때 나는 내가 돌덩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했던 기억이 있다. 시체처럼 누워서 잠을 자다 눈을 떠도 한낮이거나 한밤이었을 때 삶은 너무도 초라한 것이었다. 그 지리멸렬한 시간들을 견디는 동안 나는 삶을 그렇게 견뎌야 하는 순간들을 반복하면서 나도 엄마처럼 나이를 먹어가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조명숙의 헬로우 할로윈은 내게 그런 느낌을 강하게 남겨주는 소설이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은 어둡고 남루한 삶을 배경으로 하여 그려진 흑백판화와도 같았다. 세밀한 칼날이 파놓고 지나간 자리에는 치명적일 만큼의 상처가 진한 먹물처럼 스며 들어가 있지만 이들은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한마디의 신음소리조차 뱉어내지 않는다. 다만 침묵 속에서 담담하게 견디고 있을 뿐 절망스러운 표정까지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작품의 곳곳에서 삶의 어떤 진실들을 알아가는 일은 가혹하거나 서글픈 일이었다.

우리말이 아닌 제목의 책을 대하면 낯선 느낌부터 드는 구닥다리 정서를 아직도 갖고 있는 나로서는 헬로우 할로윈이라는 제목의 이 책을 약간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읽을수록 삶에 대한 진지한 고백들로 가득 채워진 작품이라는 생각에 여러 문장 밑줄을 긋기도 했다.

 

바늘이 살을 꿰뚫은 자리가 듬성듬성한 아버지의 코는 쓰다가 아무렇게나 뭉쳐둔 고무찰흙덩어리의 가운데를 손으로 꾹 눌러놓은 것 같다. 무엇을 만들려다 만들지 못하게 되었을 때 손바닥에 고약한 냄새만 가득 남기던 고무찰흑이었다. 문방구에서 사 들었을 때 초록이나 노랑 빨강으로 선명하게 포장되어 있던 그것은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난 후 시커먼 덩어리가 되어서 책상 서랍 한 귀퉁이나 가방 속에 오래 머물러 있곤 했다. (9)

 

헬로우 할로윈은 결국, ‘하루 종일 유리 너머 로비를 내다보고 있으면 가끔 나 자신이 누군가 몰래 내놓은 쓰레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행복이라는 조건에서 소외되어 지친 삶을 오랜 시간동안 겪은 이가 그 시간들을 견디면서 세상과 타인에게, 혹은 스스로의 일상에게 건네는 고독하고도 멋쩍은 인사이다.

 

착시와도 같은 시간의 뒤범벅은 엄마가 집을 나가기 시작하던 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언제 엄마가 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땜ㄴ에 하루하루를 힘들게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 방법을 터득했다. 어제와 일 주일 전, 그제와 열흘 전을 분간하지 않고 지나간 모든 시간을 과거로 규정지어 버리고 나면 한결 마음이 편했다.(10)

 

냄새를 견디지 못한다는 이유로 습관처럼 집을 나가는 엄마와 고엽제 피해로 인해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아버지 사이에서 소외된 주인공이 삶을 견디는 방식은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가기 보다는 세상과의 거리를 섬뜩하리만치 일정하게 유지하며 참아내는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어진 현실을 참아내지 못하고 떠도는 삶을 산다면 주인공인 토용처럼 꿋꿋하게 현실을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작 자신은 고통에도 꿈쩍하지 않는 정물로써 세상에 저항한다.

 

밤이다. 할로윈의 밤. 나는 빨래를 꾹꾹 짜서 대야에 담아 옥상으로 올라간다. 죽어 썩은 몸들이 거리로 나와 흐느적흐느적 산 몸들과 어울려 춤을 추는 밤. 누가 살았고 누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채, 깊어갈수록 점차 밝게 살아 움직이는 저 불빛들.(35)

 

그럴 때 세상은 에게 어느 순간 할로윈의 밤처럼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뒤섞인 것으로 다가오게 되며 동시에 내가 그 세상과 함께 어울려 춤을추어줄 수 있을 만큼 는 성숙해진 내면으로 고통조차 적당히 즐길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얀 토끼인형에서처럼 조명숙 소설의 주인공에게 때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현실과 환영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며 모호함 속에서 무엇인가 솟아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인 것처럼 현실을 정면으로 대응하고 싶어하지도 않지만 제라늄의 집에서는 제라늄 냄새처럼 독한 의지로 삶을 지속시켜나가려는 주인공의 강한 애착이 엿보이기도 한다.

 

색이 바래고 깊게 먼지가 앉았을 때 언제든 내버릴 수 있는 가벼움에 끌려 그들은 그것을 샀겠지. 그리고 사람 사는 집의 벽들이 차차 허술해지고 검푸른 이끼가 골목과 마당을 줄기차게 점령해 가는 것처럼 그림도 바래고 낡아졌젰지. 그림은 스산하고 웅숭깊은 그들의 한때 희망이었을 것이다.(86)

 

남루하고 궁색하게 살아가는 남포동 버스 종점 마을사람들 중 하나인 에게도 역시 삶에 대한 희망은 있지만 그것은 이발소 그림처럼 쉽게 바래고 먼지가 내려앉아 버리는 불확실한 것이다. 그곳의 일상에는 행복이라는 것이 좀처럼 올 것 같지 않다. 그곳 사람들은 아버지가 왜 함께 살지 않는가에 대해 물었고, 집 앞을 쓸어달라거나 방범비를 내라거나 집단 방역을 하자거나 반상회에 나오라고 했으며, 초대하지 않아도 쳐들어와서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 있곤한다. 심지어 그들은 한밤중에 문을 두드려 세 번째 집의 소동을 구경하러 가자고 엄마를 깨우기도한다. ‘는 그런 이웃들이나, ‘사람 사는 일은 구경하지 않아도 다 겪고 사는 거라고말하는 엄마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다. 그들 모두는 이발소 냄새를 풍기는존재로 에게 여겨질 뿐이며, ‘는 그들과 함께 섞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엄마에게서 풍기는 집 곳곳에 놓아둔 제라늄과 같은 독한 냄새가 결국 자연스럽게 세상과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냄새라는 것을 는 알게 된다.

 

며칠 동안 비어 있던 속에서는 쓴 위액이 올라왔다. 아주 쓴 위액이 입 안에 고이자 그만 눈물이 나왔다. 나는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미지근하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희미하게 향기가 났다. 슬픔과 고통으로 뒤집어진 속을 어루만지면서 향기는 천천히 내 속으로 들어왔다. 코에서 목으로 방금 쓴 위액을 토해낸 위로, 그것은 죽처럼 편안하게 흡수되어 혈관으로 퍼졌다.(95)

 

그렇게 부정하고 싶었던 어머니의 제라늄 냄새는 주인공인 에게 어느새 깊은 향기가 되어 있으며 그 향기로 인해 는 절망적이고 비관적이었던 생의 단면들을 끌어안게 된다. 그러한 내적 의지들이 만추에서는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주인공 져아즌 남편이 죽고 고등학생이 된 아이가 집을 나가버린’, 역시 행복한 가정생활이라는 조건에서 소외당한 인물이다. 그녀가 힘겨운 일상을 견디는 방식은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밥을 지어야 하고 가게에 나가 앉아 화장품을 팔고 돌아오는 저녁이면 피곤한 몸은 잠을 불러오고 혼곤한 잠에 빠져 일어나면 어딘가에 부딪힌 것처럼 몸 구석구석이 얼얼한생활의 반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얇디 얇은 막으로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은근히 알려주는 것처럼 이상의 흔적도 없이 깨끗한 시신은 무거운 짐을 부려놓은 듯 평온해보였다. 파리가 앉았던 자리처럼 의미 없이 남편은 도시에서 지워져 버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는 뜨고 바람이 불었고 사람들은 부지런히 지하철에서 버스로 버스에서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때로 비가 내리고 온도의 변화에 따라 옷을 갈아입었다. 큰길에서 산동네로 올라가는 길목을 따라 이어진 좁은 거리에 가게를 얻고 매일 가게문을 열었다. 화장품을 사러 오는 여자들과 수다를 조금 떨거나 어쩌다 이웃가게 주인들과 점심을 먹기도 하면서.(111)

 

주인공인 그녀에게 불행이라는 것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다가와서 삶의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마음속의 슬픔을 극도로 자제하며 담담함을 유지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삶을 견뎌내는 자의 섬뜩한 내면을 느끼게 한다. ‘희망과 절망 사이의 그 정교한 접속이야말로 인생이 아니겠는가 하는 질문을 작가는 독자에게 던져주고 있다. 주인공 여자가 자신의 삶의 아픔을 풋풋하게 껴안 듯이 주변 이웃들인 순자 씨난쟁이를 껴안는 시선은 따스하기 그지없다. 그것들을 전부 수용하여 의 상처들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만추에서는 훨씬 깊고 끈끈하게 삶을 바라보고 포용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돋보인다. 그것은 꼭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어르고 토닥거려가면서, 때로는 불연속적이고 우연과 필연이 알게 모르게 겹쳐진 생(바람의 계곡161)이라고 체념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조명숙의 헬로우 할로윈을 다 읽고 책을 덮은 한밤중, 봄비 같은 겨울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얼어붙은 땅이 스펀지처럼 촉촉하게 빗물을 머금고 있는 것 같아 행복했다. 겨울 속에 봄이 함께 있다는 것은 모순이지만 그러한 모순 속에서 늘 꿈을 꾸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생이 아닐까 싶었다. 적막한 일상에서 할로윈을 꿈꿔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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