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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떠난 집새에게

 

 

                                                                       최영철

 

 

  

빈 새장이 노래하네

집새 날아가버린 그루터기

둥우리만 남아 노래하네

새가 없으면 새장으로

가슴이 없으면

싸늘한 등으로 노래할 수 있네

 

어슴푸레한 미명에 깃털 털어내며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눈물샘 마르면 까칠한 정강이로

정강이 시리면

갈라진 발바닥으로 노래할 수 있네

 

새가 없으면 모이통이

모이통 비면

한 점 먹고 하늘 보던

물그릇이 노래하네

 

집새 떠난 새장이 노래하네

해질녘 뒷산까지 울려 퍼진

빈 둥우리의

모이통의

물그릇의 노래소리

집 떠나 길 잃은 집새들 돌아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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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아직도 힘이 세다

 

최영철

 

1.

 

한 편의 시는 살아있는 생명체다. 한 인간이 그러하듯이 저마다의 운명을 타고나 영욕의 세월을 보내다 간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으나 오래 사랑받으며 장수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열과 성을 다해 세상으로 내보냈으나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묻혀버리기도 한다.

시와 산문의 운명은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산문의 경우 거듭된 퇴고와 수정이 보다 좋은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인 데 비해 시의 경우 지나친 퇴고는 초고의 생동감을 깎아내는 헛 공사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런 탓인지 독자에게 오래 사랑받는 시일수록 단숨에 거침없이 쓰여진 경우가 많다. 좋은 시는 성실하게 쓰고 고치는 공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막막한 기다림 끝에 그저 주어지는 뜻하지 않는 선물에 가깝다. 게으르고 무심하게 딴전을 피우는 예측 불허의 조건들이 만들어내는 결실일 때가 많다.

이것이 시가 갖는 매력이고 유혹이다. 나를 포함한 시인들은 그 유혹에 걸려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은 족속들이다. 산문은 어떤 얼개로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 의도를 지니면서 작업이 시작되지만 시는 불현듯 느닷없이 찾아온 낯선 손님에 의해 시작된다. 매정하게 분류하면 산문은 쌓아 올리고 다듬는 공의 속성으로 완성되고 시는 예측 불허의 추임새로 발동된 예의 속성으로 완성된다. 산문의 작업자는 그 발상과 전개와 결말에 깊숙이 관여하지만 시의 작업자는 다듬고 고치고 정돈하는 조력자의 역할만을 수행한다.

그래서 시인은 주최자나 주인공이 아니라 대리인에 불과하고 섬광처럼 지나가는 생각의 파편 중애서 그럴싸한 것을 선택하고 조합하는 직분을 담당한다.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정체모를 시적 자아를 잘 떠받들고 관리하는 소임을 맡는다.

시는 언제 올지 모른다. 운전 중일 때도 있고 용변 중일 때도 있고 수면 중일 때도 있다. 책을 읽고 있거나 무료한 망상에 빠져있을 때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다부지게 무슨 일인가를 수행하고 있을 때는 시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하는 둥 마는 둥 게으름을 피우고 있을 때, 현재의 상황을 벗어날 핑계거리를 찾고 있을 때, 잠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딴 짓거리를 하고 있을 때 시는 찾아온다.

그렇게 빈틈을 만들어 놓은 자리에 슬며시 시는 들어온다. 스파이처럼, 날강도처럼. 우선 급하게 메모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라면 십중팔구 그것을 놓쳐버리기 쉽다. 날아가 버린 그 단상은 어떤 금은보화보다 귀하게 여겨질 것이다.

 

2

 

"요르단 취업이 확정됐어요."

저녁에 들어온 아들이 불쑥 던진 말이었다. 요르단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애써 무심한 척 며칠 더 생각해보라는 말만 했다. 최종 면접을 보러 서울을 다녀올 때만 해도 설마 거기까지 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며 여러 곳에 지원서를 냈고 부산의 한 중견기업에 용케 취직이 됐었다. 그런 아들이 입사 6개월쯤 지나 사직서를 냈다는 말을 했을 때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왜 일이 마음에 들지 않던?" 하고 물었다. "단순 관리업무여서 성취감이 없고 마흔을 갓 넘긴 선배들이 명퇴하는 걸 보고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아들은 말했다.

그때는 녀석의 결단력이 대견했다. 나를 닮아 매사에 모질지 못해 주위로부터 우유부단하다는 놀림을 받던 아들이었다. 그래 잘했다. 길고 긴 네 인생에서 몇 년의 재투자는 아무것도 아니지. 먹고사는 게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밥벌이에 모든 걸 거는 건 인간으로 할 도리가 아니지. 나는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나온 녀석을 술까지 사주며 격려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머나먼 열사의 땅 요르단이란 말인가. "거기는 분쟁지역 아니니?" 나는 어떻게든 녀석을 만류해볼 생각에 어깃장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의 결심은 확고했다. 요르단에 관한 정보를 이것저것 찾아내 나에게 보여주고 텔레비전에 방영된 요르단 기행 동영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가기로 한 회사가 유수한 국내 대기업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래도 그렇지.

요르단을 두고 분쟁지역 어쩌고 했지만 그건 다 아들을 품에서 떠나보내기 싫어 내놓은 핑계였다. 군대에 가 있던 기간을 빼고는 집을 나가본 적이 없고 앞으로 살림을 나더라도 가까운 곳에 살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무슨 효도를 받자는 게 아니라 우리 부부의 심정적인 울타리가 되어주었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그 정도 바라는 게 과했단 말인가. 갈 땐 가더라도 며칠이라도 우리 때문에 주저하거나 고민하는 내색을 보여주었더라면 그렇게 섭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자식의 앞길을 가로막는 부모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어보려 했다. 자식의 장래를 부모가 쳐둔 울타리에 가둘 수는 없는 일이라고도 생각해봤다. 아내와 며칠 연달아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를 위로하고 독려했다. 함께 눈물도 흘렸던 것 같다. 온갖 경계가 허물어진 세계화 시대가 아닌가. 대세에 역행하는 어리석은 부모가 되지 말자는 말은 자기최면이었다. 소중한 것일수록 멀리 두고 바라보는 법이라고 서로를 타일렀다. 나라를 위해서라도 녀석을 보내주자는 거창한 대화마저 오갔다. 우리가 만든 전자제품을 만방에 수출한다잖느냐. 힘들고 거친 일은 마다하고 보기 좋은 떡만 집어드는 세상에 불편한 타지로 나가겠다는 녀석이 오히려 대견하지 않냐.

간신히 마음을 고쳐먹고 보름 가까이 아들의 살림살이를 장만했다. 그 과정에서 느낀 게 많았다. 녀석의 방은 그 큰 덩치에 비해 턱없이 좁고 답답했고, 옷가지며 생활도구 역시 쓸만한 게 없었다. 느닷없는 이별의 서러움에 우리가 해준 게 없다는 아쉬움이 더해졌다.

불평 한마디 없이 30년을 우리 곁에 있어준 녀석이 고맙고도 기특했다. 눈앞에 다가온 이별 앞에 아쉽고 서운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보험회사에서 약간의 돈을 빌려 손에 쥐여주었지만, 그것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해 시 한 편을 썼다. 시인이라고, 먼 길을 떠나는 아들에게 아비로서 해줄 게 이것밖에 없었다. 시로서는 산도 옮기고 하늘도 마음대로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어서 나는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을 시에 담아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녀석의 주머니에 몰래 찔러 넣어 주었다.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먼 서역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뭘 쥐여 보낼까 궁리하다가 나는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녀석의 가슴주머니에 무언가 뭉클한 것을 쥐여 보냈다 이건 아무 데서나 꺼내보지 말고 누구에게나 쉽게 내보이지도 말고 이런 걸 가슴에 품었다고 함부로 말하지도 말고 네가 다만 잘 간직하고 있다가 모국이 그립고 고향 생각이 나고 네 어미가 보고프면, 그리고 혹여 이 아비 안부도 궁금하거든 이걸 가만히 꺼내놓고 거기에 절도 하고 입도 맞추고 자분자분 안부도 묻고 따스하고 고요해질 때까지 눈도 맞추라고 일렀다 서역의 바람이 드세거든 그 골짝 어딘가에 몸을 녹이고 서역의 햇볕이 뜨겁거든 그 그늘에 들어 흥얼흥얼 낮잠이라도 한숨 자두라고 일렀다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 도통 우러러볼 고지가 없거든 이걸 저만치 꺼내놓고 그윽하고 넉넉해질 때까지 바라보기도 하라고 일렀다 그 놈의 품은 원체 넓고도 깊으니 황망한 서역이 배고파 외로워 울거든 그걸 조금 떼어 나누어줘도 괜찮다고 일렀다 그렇게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살다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때는 무엇보다 먼저 그것부터 잘 모시고 와야 한다고 일렀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네가 바로 그것이라고 일렀다 이 아비의 어미의 그것이라고 일렀다'(시 '금정산을 보냈다')

 

3.

 

앞의 글은 2010년 한 일간지에 실었던 칼럼이다. 산문을 포함해 뒤에 븉인 시 한 편까지 나는 이 글을 눈물을 글썽이며 단숨에 썼다. 아들을 요르단으로 보낼 당시 마침 나는 한 중앙일간지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고 아들과 공항에서 이별하고 돌아와 마감 시간에 쫒기며 이 글을 쓴 것이었다.

다소 특별한 사연을 지난 글이긴 하지만 이 짧은 산문은 몇 가지 후일담을 남겼다. 우선 아들에게 큰 선물이 되었다. 요르단에 도착해 살림집을 마련하고 직장과 대사관에 인사를 갔더니 사람들이 신문에 난 글을 잘 읽었다며 반갑게 인사를 하더라고 헸다. 대사관의 오찬이 있을 때마다 초대되는 특별대우를 받았다고도 했다. 고마운 일이지만 아들이 이런 행운을 누린 것은 제 애비가 쓴 글 때문이 아니라 한국 최고 부수를 자랑하는 그 신문의 위력인 것만 같아 뒷맛이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 시를 표제작으로 한 나의 시집 『금정산을 보냈다』는 부산 시민들의 투표를 거쳐 결정되는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의 2015년 원북원 도서로 선정되어 한 해 동안 여러 방식으로 독자들과 만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런 반면 세월호 관련 시 「난파 2014」가 수록된 시집이고 세월호 사고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성명서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정부 보조금 사업에서 제외되는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단체로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촉구하는 재판이 진행되었지만 나는 중도에 소를 취하했다. 그 사이 정권이 바뀌었고 내가 당한 탄압은 그 역시 한 편의 시로써는 과분한 영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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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까머리 시절 필담을 나누던 벗에게…

최영철

 

기사입력 2018-09-25 07:55:19기사수정 2018-09-25 07:55

[부치지 못한 편지]

원본보기
 
 

 

50년 전쯤 편지를 주고받았던 짧은 인연에 기대어 그대에게 다시 편지를 씁니다. 그 사이 어떻게 지내셨나요? 벌써 반세기 전의 일이 되어서 그대나 저나 서로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이가 되고 말았지만 밤잠을 설치며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편지를 이어가던 까까머리 시절의 기억은 아직 저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답니다.

그때의 청소년들은 참 답답한 오리무중의 한 시절을 보냈던 것 같아요. 10대 중·후반을 지칭하던 ‘하이틴’이란 말은 붕붕 하늘을 향해 치솟던 꿈 많은 시절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온갖 금기와 규제를 짊어진 수행자의 시기라고 해야 할 정도로 힘겨웠지요.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중고생 남녀가 어깨를 나란히 해 걸어가는 것만으로 비행 청소년 취급을 받던 때이니까요. 설마 그럴 리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겠지만 정말 그랬답니다. 그러니 소년 소녀가 정답게 손을 잡고 걸어간다든지 분식집에 마주 앉아 김밥이라도 나누어 먹고 있다면 교외단속반 선생님에 의해 단속 대상이 되기 십상이었지요.

그렇다고 출구가 완전히 없었던 건 아니었어요. 울며 겨자 먹기로, 달리 보면 낭만과 품위를 갖춘 방식으로, 우리 세대 소년 소녀들에게는 펜팔이라는 서신을 통한 교제가 있었으니까요. 아, 맞아! 하고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맞장구를 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그대와 나도 그렇게 잠시 인연이 닿았던 것이겠지요. 1970년대 초입의 어느 시점, 그 즈음에는 학생들을 위한 각종 매체가 많았습니다. 잡지와 신문들, 저는 그 시절을 풍미하던 학생 잡지 뒷면에 실린 펜팔난에서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의 여학생이 올려놓은 주소를 발견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쓸 마음을 먹었습니다. 취미는 사색, 음악감상, 낙서 등, 들뜬 마음으로 밤을 꼬박 지새우며 미지의 소녀에게 첫 편지를 씁니다. 우선 자신의 소개부터 해야 했지요. 사는 곳과 학교, 취미와 장기, 장래 희망 같은 것 등등. 그렇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편지지 절반쯤 써내려가다가 구겨버리고, 또 한 바닥 가까이 쓴 자기소개가 마뜩찮아 또 구겨버립니다. 이 주소로 편지를 쓸 또래 학생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이 정도 편지로는 답장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될 게 뻔합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의 하이틴들은 사방 높게 둘러쳐진 담장 안의 어린 토끼들이어서 이렇게라도 뜀뛰기를 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편지로 소통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한 번으로 편지가 끝난 적도 있고 또 어떤 친구는 한참을 이어가며 소소한 고민거리를 털어놓는 사이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편지로만 소통하는 것이니 과장과 허풍과 엄살도 심했을 테고 진도가 잘 나가면 가장 멋지게 나온 사진 한 장씩 교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왜 그런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저를 나무라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편지를 쓰는 저를 탓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 늙어 자식들 알면 민망스럽다고 손을 내저으실지도 모르겠군요. 저도 그렇긴 해요. 환갑을 넘긴 제가 까까머리 중학생 때 이야기를 하려니 부끄럽기는 해요. 그러나 온갖 망상으로 힘들긴 했지만 그 시절이 아름답게 추억되는 건 어쩔 수 없나봐요.

요즘은 손전화 문자 발송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일상이 되었지만 편지는 여간해서 써볼 엄두가 나지 않는 구습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그건 초등학생만 되어도 갖게 되는 편리한 손전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소통해야 하는 오늘의 변화된 생활 방식 때문이기도 할 거예요. 아이들의 경우 예전에야 집과 학교를 오가는 것이 정해진 동선이고 기껏해야 학교 운동장이나 마을 공터에서 잠시 뛰노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방과 후 몇 군데 과외 학원을 거치며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야 하니 어른들 못지않은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제가 어렸을 때는 그런 교감이 이루어지는 기회가 흔치 않았어요. 그럴 만한 사회적 환경도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던 시절이었지요. 콩나물시루 같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학교 교실은 만원이었고 이렇다 할 문화생활도 누리지 못하던 때여서 여유로운 문화적 혜택이나 친교가 이루어질 기회가 적었던 시절이었어요. 텔레비전도 동네에서 잘사는 친구 집 마루에 엉거주춤 앉아 눈동냥하듯 봐야 했는데 그때마다 안방에서 비스듬히 누워 과자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던 또래와 너무나 먼 격차를 느끼기도 했지요.

그에 비하면 미지의 친구와 주고받던 필담은 참으로 낭만적인 교감이었어요.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중학생 무렵부터 편지로 친구를 사귀는 걸 좋아했어요. 이른바 펜팔이라는 것이었지요. 그 디딤돌을 마련해준 건 여러 형태로 발간되던 청소년 잡지와 신문의 펜팔난이었어요. 자신의 취미와 나이, 주소 같은 걸 밝히면 편지로 맺어지는 친구가 생기던 시절 이야기예요.

그 시절의 학생 잡지는 말미에 독자문예란을 마련해 시와 산문들을 실어주었는데 제 글도 가끔 거기에 올라갔고 그 바람에 전국에 있는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어요. 제 문장 수련은 그 시절 편지쓰기로 다 이루어진 것 같아요. 편지를 주고받으며 삶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해요.

저의 열대여섯 살은 그렇게 편지를 쓰며 성장했어요. 편지란 긴한 용무가 있어 작정하고 쓰는 경우도 있지만 불현듯 낙서처럼 끼적인 것에 진심을 살짝 얹어 쓰는 경우도 있는 것이겠지요. 어른들은 그걸 편지질이라고 면박을 주곤 했는데, 아마 쓸데없는 해작질 정도로 여겼던 것 같아요. 해외 펜팔은 글로벌한 친구 사귀기와 영어 학습의 한 수단으로 장려되었지만 또래끼리의 이성 펜팔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던 것 같아요. 하지만 편지로만 소통하는 그 방식이 또래끼리의 고민과 현실 저 너머의 꿈을 이야기하는 데 적절한 방식이었던 것도 같아요.

편지로 우정을 나누던 그리운 벗들, 이제 우리 나이가 예순을 넘기기는 했지만 그 시절의 낭만과 사랑을 담아 누군가에게 고운 꽃편지 한 통 띄워보내면 어떨까요.

 

최영철(崔泳喆) 시인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으로 ‘말라간다 날아간다 흩어진다’, ‘돌돌’, ‘금정산을 보냈다’, ‘찔러본다’, ‘호루라기’, ‘그림자 호수’ 등이 있고 육필시선집 ‘엉겅퀴’, 성장소설 ‘어중씨 이야기’, 산문집 ‘변방의 즐거움’이 있다. 백석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최계락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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