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아직도 힘이 세다
최영철
1.
한 편의 시는 살아있는 생명체다. 한 인간이 그러하듯이 저마다의 운명을 타고나 영욕의 세월을 보내다 간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으나 오래 사랑받으며 장수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열과 성을 다해 세상으로 내보냈으나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묻혀버리기도 한다.
시와 산문의 운명은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산문의 경우 거듭된 퇴고와 수정이 보다 좋은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인 데 비해 시의 경우 지나친 퇴고는 초고의 생동감을 깎아내는 헛 공사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런 탓인지 독자에게 오래 사랑받는 시일수록 단숨에 거침없이 쓰여진 경우가 많다. 좋은 시는 성실하게 쓰고 고치는 공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막막한 기다림 끝에 그저 주어지는 뜻하지 않는 선물에 가깝다. 게으르고 무심하게 딴전을 피우는 예측 불허의 조건들이 만들어내는 결실일 때가 많다.
이것이 시가 갖는 매력이고 유혹이다. 나를 포함한 시인들은 그 유혹에 걸려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은 족속들이다. 산문은 어떤 얼개로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 의도를 지니면서 작업이 시작되지만 시는 불현듯 느닷없이 찾아온 낯선 손님에 의해 시작된다. 매정하게 분류하면 산문은 쌓아 올리고 다듬는 공의 속성으로 완성되고 시는 예측 불허의 추임새로 발동된 예의 속성으로 완성된다. 산문의 작업자는 그 발상과 전개와 결말에 깊숙이 관여하지만 시의 작업자는 다듬고 고치고 정돈하는 조력자의 역할만을 수행한다.
그래서 시인은 주최자나 주인공이 아니라 대리인에 불과하고 섬광처럼 지나가는 생각의 파편 중애서 그럴싸한 것을 선택하고 조합하는 직분을 담당한다.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정체모를 시적 자아를 잘 떠받들고 관리하는 소임을 맡는다.
시는 언제 올지 모른다. 운전 중일 때도 있고 용변 중일 때도 있고 수면 중일 때도 있다. 책을 읽고 있거나 무료한 망상에 빠져있을 때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다부지게 무슨 일인가를 수행하고 있을 때는 시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하는 둥 마는 둥 게으름을 피우고 있을 때, 현재의 상황을 벗어날 핑계거리를 찾고 있을 때, 잠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딴 짓거리를 하고 있을 때 시는 찾아온다.
그렇게 빈틈을 만들어 놓은 자리에 슬며시 시는 들어온다. 스파이처럼, 날강도처럼. 우선 급하게 메모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라면 십중팔구 그것을 놓쳐버리기 쉽다. 날아가 버린 그 단상은 어떤 금은보화보다 귀하게 여겨질 것이다.
2
"요르단 취업이 확정됐어요."
저녁에 들어온 아들이 불쑥 던진 말이었다. 요르단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애써 무심한 척 며칠 더 생각해보라는 말만 했다. 최종 면접을 보러 서울을 다녀올 때만 해도 설마 거기까지 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며 여러 곳에 지원서를 냈고 부산의 한 중견기업에 용케 취직이 됐었다. 그런 아들이 입사 6개월쯤 지나 사직서를 냈다는 말을 했을 때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왜 일이 마음에 들지 않던?" 하고 물었다. "단순 관리업무여서 성취감이 없고 마흔을 갓 넘긴 선배들이 명퇴하는 걸 보고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아들은 말했다.
그때는 녀석의 결단력이 대견했다. 나를 닮아 매사에 모질지 못해 주위로부터 우유부단하다는 놀림을 받던 아들이었다. 그래 잘했다. 길고 긴 네 인생에서 몇 년의 재투자는 아무것도 아니지. 먹고사는 게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밥벌이에 모든 걸 거는 건 인간으로 할 도리가 아니지. 나는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나온 녀석을 술까지 사주며 격려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머나먼 열사의 땅 요르단이란 말인가. "거기는 분쟁지역 아니니?" 나는 어떻게든 녀석을 만류해볼 생각에 어깃장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의 결심은 확고했다. 요르단에 관한 정보를 이것저것 찾아내 나에게 보여주고 텔레비전에 방영된 요르단 기행 동영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가기로 한 회사가 유수한 국내 대기업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래도 그렇지.
요르단을 두고 분쟁지역 어쩌고 했지만 그건 다 아들을 품에서 떠나보내기 싫어 내놓은 핑계였다. 군대에 가 있던 기간을 빼고는 집을 나가본 적이 없고 앞으로 살림을 나더라도 가까운 곳에 살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무슨 효도를 받자는 게 아니라 우리 부부의 심정적인 울타리가 되어주었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그 정도 바라는 게 과했단 말인가. 갈 땐 가더라도 며칠이라도 우리 때문에 주저하거나 고민하는 내색을 보여주었더라면 그렇게 섭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자식의 앞길을 가로막는 부모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어보려 했다. 자식의 장래를 부모가 쳐둔 울타리에 가둘 수는 없는 일이라고도 생각해봤다. 아내와 며칠 연달아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를 위로하고 독려했다. 함께 눈물도 흘렸던 것 같다. 온갖 경계가 허물어진 세계화 시대가 아닌가. 대세에 역행하는 어리석은 부모가 되지 말자는 말은 자기최면이었다. 소중한 것일수록 멀리 두고 바라보는 법이라고 서로를 타일렀다. 나라를 위해서라도 녀석을 보내주자는 거창한 대화마저 오갔다. 우리가 만든 전자제품을 만방에 수출한다잖느냐. 힘들고 거친 일은 마다하고 보기 좋은 떡만 집어드는 세상에 불편한 타지로 나가겠다는 녀석이 오히려 대견하지 않냐.
간신히 마음을 고쳐먹고 보름 가까이 아들의 살림살이를 장만했다. 그 과정에서 느낀 게 많았다. 녀석의 방은 그 큰 덩치에 비해 턱없이 좁고 답답했고, 옷가지며 생활도구 역시 쓸만한 게 없었다. 느닷없는 이별의 서러움에 우리가 해준 게 없다는 아쉬움이 더해졌다.
불평 한마디 없이 30년을 우리 곁에 있어준 녀석이 고맙고도 기특했다. 눈앞에 다가온 이별 앞에 아쉽고 서운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보험회사에서 약간의 돈을 빌려 손에 쥐여주었지만, 그것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해 시 한 편을 썼다. 시인이라고, 먼 길을 떠나는 아들에게 아비로서 해줄 게 이것밖에 없었다. 시로서는 산도 옮기고 하늘도 마음대로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어서 나는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을 시에 담아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녀석의 주머니에 몰래 찔러 넣어 주었다.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먼 서역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뭘 쥐여 보낼까 궁리하다가 나는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녀석의 가슴주머니에 무언가 뭉클한 것을 쥐여 보냈다 이건 아무 데서나 꺼내보지 말고 누구에게나 쉽게 내보이지도 말고 이런 걸 가슴에 품었다고 함부로 말하지도 말고 네가 다만 잘 간직하고 있다가 모국이 그립고 고향 생각이 나고 네 어미가 보고프면, 그리고 혹여 이 아비 안부도 궁금하거든 이걸 가만히 꺼내놓고 거기에 절도 하고 입도 맞추고 자분자분 안부도 묻고 따스하고 고요해질 때까지 눈도 맞추라고 일렀다 서역의 바람이 드세거든 그 골짝 어딘가에 몸을 녹이고 서역의 햇볕이 뜨겁거든 그 그늘에 들어 흥얼흥얼 낮잠이라도 한숨 자두라고 일렀다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 도통 우러러볼 고지가 없거든 이걸 저만치 꺼내놓고 그윽하고 넉넉해질 때까지 바라보기도 하라고 일렀다 그 놈의 품은 원체 넓고도 깊으니 황망한 서역이 배고파 외로워 울거든 그걸 조금 떼어 나누어줘도 괜찮다고 일렀다 그렇게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살다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때는 무엇보다 먼저 그것부터 잘 모시고 와야 한다고 일렀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네가 바로 그것이라고 일렀다 이 아비의 어미의 그것이라고 일렀다'(시 '금정산을 보냈다')
3.
앞의 글은 2010년 한 일간지에 실었던 칼럼이다. 산문을 포함해 뒤에 븉인 시 한 편까지 나는 이 글을 눈물을 글썽이며 단숨에 썼다. 아들을 요르단으로 보낼 당시 마침 나는 한 중앙일간지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고 아들과 공항에서 이별하고 돌아와 마감 시간에 쫒기며 이 글을 쓴 것이었다.
다소 특별한 사연을 지난 글이긴 하지만 이 짧은 산문은 몇 가지 후일담을 남겼다. 우선 아들에게 큰 선물이 되었다. 요르단에 도착해 살림집을 마련하고 직장과 대사관에 인사를 갔더니 사람들이 신문에 난 글을 잘 읽었다며 반갑게 인사를 하더라고 헸다. 대사관의 오찬이 있을 때마다 초대되는 특별대우를 받았다고도 했다. 고마운 일이지만 아들이 이런 행운을 누린 것은 제 애비가 쓴 글 때문이 아니라 한국 최고 부수를 자랑하는 그 신문의 위력인 것만 같아 뒷맛이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 시를 표제작으로 한 나의 시집 『금정산을 보냈다』는 부산 시민들의 투표를 거쳐 결정되는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의 2015년 원북원 도서로 선정되어 한 해 동안 여러 방식으로 독자들과 만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런 반면 세월호 관련 시 「난파 2014」가 수록된 시집이고 세월호 사고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성명서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정부 보조금 사업에서 제외되는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단체로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촉구하는 재판이 진행되었지만 나는 중도에 소를 취하했다. 그 사이 정권이 바뀌었고 내가 당한 탄압은 그 역시 한 편의 시로써는 과분한 영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