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오늘도 비우면 취하는 뜻에 따라”

시 안에서 찰랑이는 소주
010-11-02 16:59 수정 2020-05-02 04:26

한겨레 박미향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에는 알베르 카뮈가 술과 관련해 남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실려 있다. “병영에 이런 삐라가 붙었다. ‘알코올은 인간의 불을 끄고 그 동물에 불을 붙인다.’ 이것을 읽으면 왜 사람이 알코올을 사랑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당신에게 인간의 불을 끄는 술은 무엇인가? 나에게 그 술은 소주다. 맥주처럼 맛이 좋은 것도 아니고 속 시원하게 꿀꺽꿀꺽 들이켤 수 있는 것도 아닌 이 술을 도대체 왜 마시나 싶으면서도 간혹 물처럼 술을 마시게 되는 날이 있다면, 그래서 깜박깜박 인간으로서의 시간을 잘라먹게 되는 날이 있다면 그날은 어김없이 소주를 마신 날이다.

소주는 인간을 동물로 탈바꿈하게 하는 악마 같은 습성을 품고 있으면서도 제 스스로는 이슬과 같은 성정을 지녔다. 소주를 ‘노주’라 부르기도 하는데, 소주를 증류할 때 증기가 냉각돼 액화되는 과정에서 술이 이슬방울처럼 맺혀 떨어진다고 해서 이슬 로(露)자를 쓴다. 또한 소주는 양조주에 비해 잘 부패하지 않는데, 불순물을 거의 다 제거하면서 증류해 얻은 순수 알코올을 기반으로 삼기 때문이다. 청명하게 맑은 그 빛깔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래서 최영철 시인은 시집 의 ‘소주’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느새 이슬처럼 차고 뜨거운 장르에 왔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 아니라/ 격정의 시간을 건너온 고요한 이력이 있다/ …/ 불순의 시간을 견딘 폐허 같은 주름이 있다.”

‘불순의 시간’을 건너온 이 ‘고요한 이력’의 술은 그래서 가만가만 사람들 안에 스며들어 술자리를 공유하는 이들을 취기 어리게 하는 것 아닐까. 그러다 금세 ‘격정’적으로 ‘인간의 불을 끄고 동물에 불’을 붙여 ‘폐허 같은 주름’을 자아내게도 하지만.

그러나 술에 취해 인간으로서의 불을 끈 그 순간은 카뮈가 말했듯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지난 술자리들을 돌이켜보자. 인간이 아닌 인위를 버려 오히려 조금 더 인간다워 보였던, 그래서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꼭 끌어안아주고 싶은 동료가 있지는 않았는지, 평소 뾰족하게 굴던 친구가 고양이가 주인 품을 파고들듯 따뜻한 기운을 건네오진 않았는지. 그래서 동물의 본성이 깨어나 몽롱하게 흐느적거리는 그 시간들은 알코올 내음이 없는 낮 시간보다 더 따뜻하고 오히려 더 인간적이다.

한편, 술기운에 젖은 시간은 새로운 차원으로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다음의 시가 이해되는 이들이 꽤 있을 듯하다. 김영승 시인의 ‘반성 16’은 숨결마다 번지는 술내가 훅 하고 끼친다.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술의 시간은 다시 술에 물드는 시간이 되어야만 이해될 수 있나 보다.

 

어제 마신 술이 채 깨지도 않았는데 인간의 불을 끈다거나 불순의 시간을 건넌다는 말에 머리가 지끈거린다면, 다시 술에 물들 오늘밤을 위한 다음의 구절을 읊어보자. “나는 마시느니 오오늘도/ 비우면 취하는/ 뜻에 따라.”(정현종, ‘술잔 앞에서’ 부분)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728x90

동아일보 2003-08-22 17:46 2009-10-10 13:00

 

우짜노

최영철

 

, 비 오네

자꾸 비 오면

꽃들은 우째 숨쉬노

 

젖은 눈 말리지 못해

퉁퉁 부어오른 잎

 

자꾸 천둥 번개 치면

새들은 우째 날겠노

 

노점 무 당근 팔던 자리

흥건히 고인 흙탕물

 

몸 간지러운 햇빛

우째 기지개 펴겠노

 

공차기하던 아이들 숨고

골대만 꿋꿋이 선 운동장

 

바람은 저 빗줄기 뚫고

우째 먼길 가겠노

 

-시집 그림자 호수’(창작과 비평사)

세상만사 걱정도 가지가지 돈 많은 사람 돈 많은 대로, 가난한 사람 가난한 대로, 하늘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걱정부터 복에 겨운 팔자치레 푸념에 이르기까지 애인 품보다 걱정 품에 사는 사람이 많기도 많은 모양이지만 저 우짜노를 들으니 세상이 환해지는 건 우짠 일인가?

빗방울 속에 꽃잎이 숨쉴 걱정, 천둥 번개 속에 새들이 날 걱정, 무 당근 팔던 노점 할머니 생계 걱정, 공차기하던 아이들 뛰어놀 걱정, 심지어 무생물인 바람 길마저 걱정인 저 오지랖에 눈이 맑아지는 건 웬일인가?

우산 장수는 짚신 장수 굶거나 말거나, 짚신 장수는 우산 장수 굶거나 말거나, 모두들 제 집, 제 주머니, 제 통장, 제 자식 걱정할 때 저렇게 바보 같은, 아니 성현 같은 우짜노가 있다니?

나는 세상사람 모두가 저런 우짜노를 연발했으면 좋겠다. 창문 밖 장맛비를 내다보며 정치인이, 군인이, 장사꾼이, 도둑놈이, 시인이 모두 손을 놓고 꽃잎 걱정, 풀잎에 매달려 빗방울 뭇매를 맞을 왕아치, 풀무치, 때까사리, 소금쟁이 걱정을 하다가 제가 정치인인지 사기꾼인지 도둑놈인지 시인인지 몰라 잠시 멍청해지는 그런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덕분에 전쟁광이 좀 손해보고, 무기상이 셈하다 갸우뚱하고, 도둑놈 장물 수입이 줄고, 히히- 시인은 시 한 편 더 건지는 그런 시간이 많이많이 늘었으면 좋겠다.

지루한 장마 속에 과일은 떨어지고, 야채는 녹아 겨우 인물 갖춘 것들이 금싸라기란다. 여느 해 보다 빠른 귀성길이 코앞에 닥쳐왔는데 저렇게 장대비 오면 올 추석 제물은 우짜노’?(반칠환 시인)

 

 
728x90

우짜노

 

최영철

 

 

, 비 오네

자꾸 비 오면

꽃들은 우째 숨쉬노

 

젖은 눈 말리지 못해

퉁퉁 부어오른 잎

 

자꾸 천둥 번개 치면

새들은 우째 날겠노

 

노점 무 당근 팔던 자리

흥건히 고인 흙탕물

 

몸 간지러운 햇빛

우째 기지개 펴겠노

 

공차기하던 아이들 숨고

골대만 꿋꿋이 선 운동장

 

바람은 저 빗줄기 뚫고

우째 먼길 가겠노

 

----------------

시인 최영철 형은 느긋하다. 걸음걸이도 느긋하고 말투도 느긋하다. 어디 급한 데가 없다. 그러나 생각만은 단호하다. 나는 이런 영철이 형을 무척 좋아한다. 영철이 형은 어느 날 내게 이렇게 말했다. “무릇 시인이란 마음 씀이 많은 사람이다.” 영철이 형은 무척 마음 씀이 많은 시인이다. 이런저런 모든 여린 것들에 마음을 나눈다. 내가 형의 시 중에서 무척 좋아하는 시를 꼽으라면 우짜노를 먼저 꼽는다. 시집 그림자 호수에 실린 시를 잠시 인용해보면 비 오는데 어디 한군데 마음을 쓰지 않은 곳이 없다.

지난봄, 화분에 새싹이 올라오는 좋은 날 내가 거처하는 누옥엘 영철이 형이 다녀가셨다. 영철이 형은 내 고향 선배이기도 하고 한국일보 신춘 선배이기도 하다. 우리는 봄도다리를 안주로 낮술을 마셨다. 그날도 내가 영철이 형을 처음 만난 스무살 적 얘기를 또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내 젊은 시절과 형의 아득하던 시절에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 비 온다, 우짜노. (성선경 시인)

 
728x90


[서울경제] [시로 여는 수요일] 
입력2023-05-31 07:00:28 수정 2023.05.31 07:00:28

저승꽃

최영철


세상이 행한 모든 검사 필하였다는 품질보증서

혹독했으나 견딜 만은 했지

더 이상 살펴볼 것도 없다며 하늘에서 내린 인증마크

여기 살다 다른 세상 갔을 때

자랑스레 꺼내 보일 입국허가서

천지사방 쏘다녀도 좋은 특수여권

오늘 보니 저 어르신 별 하나 더 달아

큰별 모두 일곱 개

그 아래 총총 떠오른 잔별 수두룩

검색대 무사통과하며 빙긋이 웃으시네

거기 가면 별이 많아야 1등

--------------

꽃이라도 환영받지 못하던 꽃, 이승에 핀 저승꽃. 잘못 배달된 편지에 박힌 우표처럼 여겼는데 품질보증서라니. 하늘에서 내린 인증마크이자 입국허가서이자 특수여권이었다니. 안쓰럽던 어머니가 갑자기 자랑스럽다. 세상엔 참 겸손한 사람이 많기도 하다. 훈장 같은 저승꽃 가리려고 컨실러 바르고, 레이저 시술을 받으러 간다. 곧 멸종 위기종 꽃이 될 것이다. <시인 반칠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