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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사회 2019 봄

 

 

정태규 시 5편

 

 

백운사 가는 길

 

 

 

눈이 내린다

바람도 그치고 새소리도 그친 영실 숲길

눈이 내린다 고요히

눈 맞고 서있는 이정표 앞에서

나는 자꾸 길을 잃고

눈이 내린다

눈은 내려 쌓여

세상의 모든 모난 모서리를 지우고

내 마음의 온갖 모진 예각도 다 지우고

바위와 나무, 숲에도 길에도 차별 없이

눈이 내린다

숲은 참선에 든 지 오래

묵언수행 중인 나뭇가지에서

스스로의 무게를 못 이기고 추락하는 눈 더미

내 어깨에 떨어지는 죽비소리로 들리고

눈이 내린다

날마다 절 마당에 내려앉은 구름을

쓸었다는 백운사 옛 스님은

구름과 함께 무엇을 쓸었을까

눈은 내리고

나는 자꾸 길을 잃고

백운사는 어디 있나

눈은 내리고

다시 눈 더미가 가지에서 미끄러지고

내 어깨를 내려치는 죽비

나는 그제야 화들짝 깨닫는다

온 세상이 백운사라고

온 세상이 구름을 쓰는 도량이라고

눈이 내린다

숲 위로

저 장엄한 적멸무이(寂滅無二)*의 보궁(寶宮) 위로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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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안개 속에 서서 나는 알겠네

희미할수록 아름답다는 것을

나무와 나무의 윤곽이 희미하게 지워지고

나무와 나의 경계가 희미하게 희미하게 지워지고

세상과 나무, 세상과 나의 분별이 지워지는

그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안개에 젖어 나는 알겠네

그토록 수줍던 옛사랑의 고백이

그토록 사랑했던 그대의 얼굴이

희미하게 지워진다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안개 속에서 나는 작별하네

잘 가거라 옛사랑아

모든 윤곽과 경계와 분별아

미지에서 내미는 차가운 손을 잡으며

나는 비로소 알겠네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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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에서 5

- 기도

 

 

주여!

저는 지금

비옥한 가을에 있습니다

 

당신은 또 이렇게

단풍나무 숲에 붉은 길을 여셨습니다

곧 찬 바람 불고 눈 내리는 겨울 지나

다시 이 숲에 봄이 오고

매미 소리 푸른 여름도 오겠지요

 

주여!

계절을 강물처럼 흐르게 하신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제 홀로 피어 있는 구절초의 의미를

깊이 느끼게 하소서

 

오늘도

창가에 바람이 붑니다

바람의 길과 꽃의 길 사람의 길이

다르지 않음을 알게 하시고

당신의 길 또한 그러하리란 말씀

부디 믿게 하소서

 

황량한 유배지를 건너 온

낙타의 고독을 헤아려 주시어

오아시스 밤하늘에 뿌려진 별들의

교향곡을 듣게 하소서

 

주여!

주께서 허락하신 날까지

조금만 울게 하신 후

그 무한의 길을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지금 저는

찬란한 가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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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청보리 언덕길을 올라

과수원 울타리 찔레꽃 희게

오리목 새잎 돋는 숲을 지나

저 혼자 핀 상사화 붉어

봄물 우러나는 개울을 건너

푸른 풀밭 위로 하얀 길을 걸어

 

자작나무 숲에서

연둣빛 얼굴로

웃던 처녀야

깨어진 그릇을

울지 말아라

잃어버린 손거울도

슬퍼 말아라

 

길은 마음 따라 열리거늘

어느 길목에선들

내 기다리지 않으랴

어느 숲어귀에선들

그대 기다리지 않으랴

마을에선 따뜻한 저녁상이

우릴 기다리리

 

우리 길에는

꽃도 울지 않고

새도 피지 않고

눈보라 치는 어느 겨울날

그대 찾아 길을 나서도

좋으리

 

길은 마음 따라 열리거늘

울지 말아라 처녀야

어느 사람의 마을이

우릴 기다리지 않으랴

 

@장쯔이 데뷔작 <집으로 가는 길>(1999)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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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리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서

너는

뭐라고, 뭐라고

깃발처럼 펄럭이지만

너의 손짓은

안개 속에 흐려지는

그림자

마침내 저쪽 강기슭에 닿아

너는 또

뭐라고, 뭐라고

바람처럼 윙윙대지만

너의 신호는

어둠에 묻혀 까만 소리로

들릴 뿐

이승의 억겁 인연이

지금은

강을 사이에 두고

두 귀머거리로 섰을 뿐

간절하여라

돌아오지 않는 배

 

@후배 옥태권 소설가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직 다 쓰지 못 한 작품이 한 가득일텐데 어찌 눈을 감았을꼬. 옥작가, 아픈 선배 두고 니 먼저 훌쩍 가뿟나~ 부디 잘 가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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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규 시에 붙이는 발문]

 

 

 

오아시스 밤하늘에 뿌려진 별들의 교향곡을 듣게 하소서

- 정태규 시 5편을 선보이며

 

 

최영철

 

 

문학하며 사는 즐거움 중 하나는 문학판에서 여러 선후배 동료들과 맺는 인연일 것이다. 최근 들어 세상사는 방식이 바뀌고 있어서 그 살가움이 예전 같지 않지만 동병상련으로 엮인 끈끈한 정은 다른 집단에 비해 아직 그래도 살가운 편이다. 크고 작은 문학 모임과 행사가 많았던 80년대에는 시내 서너군데 단골 술집에 무작정 나가도 같이 술 마실 동료 선후배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점심 때 둘이서 시작한 술판이 차수를 변경하면서 점점 인원이 불어나 밤이 이슥할 즈음에는 십여명이 모인 걸죽한 술판으로 커져 있기도 했다. 가끔은 그 중 질긴 몇 사람의 주도로 밤을 꼬박 세우며 갑론을박하다 서로의 집까지 쳐들어가 아침 해장국까지 먹고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크고 작은 문학모임들이 매개가 되었지만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그런 결속이 가능하였던지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기만 하다. 그만큼 문학에 대한 열정과 목마름이 유별났던 시절이었다.

 

소설가 정태규는 그런 문학의 시대를 함께 걸어온 나의 절친이다. 그는 58 개띠였고 나는 56 원숭이해 동짓날에 태어났지만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바람에 호적에는 58년생으로 등재되어 그와 법적인 동갑내기였다. 나는 부산에서 출판 일을 하면서 1984년 무크지 지평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정태규도 비슷한 시기에 부산의 지면에 소설을 발표하고 있었다. 장르가 다르니 가까이 지낼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서로의 활동만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그와 나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1985년 겨울에 알게 되었다. 그해 12월 말경 나는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통보를 받고 인터뷰를 하기 위해 상경해 문학 담당 기자와 마주 앉았는데 이야기 끝에 정태규 씨를 아느냐고 물었다. 잘 안다고 했더니 소설 부문에 두 작품이 마지막까지 경합하다가 심사위원 간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 일단 연락을 해 보기로 하고 먼저 정태규 씨에게 전화를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아 다른 사람을 가작으로 결정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한국일보는 조석간 동시 발행으로 사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고 문화부에는 장명수 부장과 김훈 박래부 기자가 문학담당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신춘문예 역시 최고의 상금으로 시 소설만 공모하고 있어서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었다. 뒤에 정태규 형에게 확인한 바로는 하숙집 주소와 전화로 작품을 응모해 놓고는 방학을 맞아 진주 집에 가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 뒤로도 안타까운 마음에 그 일을 몇 번 들먹였지만 그는 거기에 크게 게의치 않고 열심히 소설을 쓰는 눈치였다. 소설 활동을 염두에 두었던지 서울의 한 중학교로 발령 받아 거처를 옮기기도 했으나 얼마 있지 못하고 다시 부산으로 복귀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소설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또 하나의 기억은 그와 나눈 엄청난 양의 술과 이야기가 떠오른다. 지금의 문학판은 주사파 보다 실속파들이 우세해서 모처럼 술판이 시작되었다 해도 필요한 몇 마디 이야기만 주고받다가 곧 흐지부지 끝나기 일쑤지만 그 시절에는 어떤 식으로든 끝장을 보고 뿌리를 뽑아야 자리가 끝났다. 언쟁과 격론이 수시로 이어졌고 얼굴을 붉히며 과격한 말이 오가기도 했다. 밤을 꼬박 새우며 술 마시는 일도 다반사여서 어느 날은 평론가 구모룡 형과 셋이서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 새벽녘 광안리 모래사장까지 슬판을 이어갔던 적도 있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문학 동지들과 의기투합하고 동병상련으로 고통을 함께했던 기억은 우리 세대가 누린 큰 축복이었다.

 

우리의 오랜 벗 정태규는 지금 루게릭으로 병상에 누워 있다. 이 글을 쓰며 그와의 여러 기억들을 반추하다 나는 오래전 서울에서 58년생 개띠 시인 소설가들이 모여 밤늦게 술을 마신 기억을 떠올렸다. 정태규 조명숙 두 소설가와 함께 나도 호적상 58년생이라는 구실로 그 술판에 합세했었는데 막판은 시끌벅적 개판이 되었던 것 같다. 궁핍했던 베이비붐 시절에 태어나 밥 굶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형제간끼리도 먹을 걸로 아귀다툼을 벌이며 컸으니 58 개띠들의 운명은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때 술잔을 주고받으며 문학하는 팔자가 다 그런 거 아니겠느냐고 자조했던 것 같다. 평생을 발발거리고 다니며 짖고 꼬리치며 온 골목을 쏘다녀야 하는 고단한 팔자,

그런데 정태규는 지금 그것을 넘어서는 혹독한 시련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 운동신경세포만 선택적으로 파괴하는 루게릭병으로 온몸이 마비된 채 벌써 몇 년째 누워만 있다. 그에게나 그를 바라보는 우리에게나 그 시간은 혹독한 견딤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시를 한번 써 보면 어떻겠느냐는 재안을 조심스럽게 해 보았다. 안구 마우스를 움직여 힘들게 한 자 한 자 의사표현을 해야 하는 그가 그 연약한 노동력을 이용해 할 수 있는 일은 시가 가장 적합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뒤 몇 편의 시를 나에게 보여주었고 나는 행간에 깃든 그의 영혼의 기록을 받들어 읽을 수 있었다. 그 옛날 선비들이 유배지에서 귀양살이의 설음과 고통을 한 자 한 자 써내려갔던 것처럼 정태규 역시 글 감옥에 갇혀 이 혹독한 옥중시들을 썼을 것이다. 찰라적 흥과 한을 받아 적는 양식인 시는 그에게 새로운 출구요 대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시에 허용된 무한한 상상력과 비약이 그의 영혼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 믿는다.

시는 무엇보다 쓰는 자를 먼저 위무하는 양식이다. 그가 쓰는 시가 먼저 자기 자신을 위무하고 나아가 먼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우리 모두를 위무해 주기를 바란다. 시의 무한한 상상력이 그에게 새로운 자유를 선사해주리라 믿는다.

 

이제 그에게서 노동의 값에 비례하는 소설 대작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졌지만 촌철살인으로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절창 시의 탄생을 기대할 수는 있게 되었다. 부디 좋은 시로 새로운 자유를 누리며 우리 곁에 오래 있어주기를 바란다. 그런 면에서 시와 함께 할 그의 시간은 ‘황량한 유배지’가 아닌 ‘찬란한 가을’이 될 것이라 믿는다.

 

황량한 유배지를 건너 온

낙타의 고독을 헤아려 주시어

오아시스 밤하늘에 뿌려진 별들의

교향곡을 듣게 하소서

 

주여!

주께서 허락하신 날까지

조금만 울게 하신 후

그 무한의 길을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지금 저는

찬란한 가을에 있습니다

 

- 정태규 시 「병상에서 5」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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