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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斷時論】-


인생은 마라톤이라 했다.
다른 생각은 접고 결승점을 향해 힘껏 달리기만 하면 되는 단거리가 아니라 긴 과정을 완주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도 있고 예기지 않은 상황이나 자신의 신체조건에 맞추어 그때그때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도 있을 것이다.
경쟁자들을 의식하며 목표를 향해 숨 가쁘게 달리기만 하면 되는 단거리 경주와는 달리 마라톤은 예측할 수 없는 여러 상황과의 싸움이다. 수시로 자기 내부를 엄습할 여러 유혹들과도 싸워야 한다. 스스스로를 격려하며 자신에게 힘을 불어넣는 일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경제 부흥이 최우선 과제였던 시절에 성장한 우리 세대는 주로 단거리 체질이었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설정해둔 목표치는 언제나 높았고 성실하고 뛰어난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에 못 미치거나 그로부터 도태되었다. 느리게 걷는 것만으로도 열등인간 대우를 받던 시절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느린 천성에다 십대 중반에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까지 겹쳐 매사에 굼떴다. 걸음이 빠른 친구들은 저만큼 먼저 가버려 나에게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가끔 뒤를 돌아보는 친구들이 있었으나 끝까지 기다려주지는 않았다. 목표치는 항상 높았고 거기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또 다른 목표가 설정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혼자 걷기를 즐긴다. 좋은 점이 몇 가지 있다. 언제 어디까지 갔다 올 것인지 정할 필요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길 수 있어 좋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풍경을 혼자 대면할 수 있다. 자유롭게 교차하는 생각들을 방해받지 않고 이어갈 수도 있다.
내 경험으로 인생은 다행히 단거리 경주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나는 벌써 도태되거나 기권했을 것이다. 단거리 경주는 순위를 정하기에는 적합할지 모르나 한 사람의 운명을 부여하고 그가 가진 기량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데는 좋은 방식이 아니다. 일사불란한 진행과 소정의 결과물을 얻는 데는 적절할지 몰라도 모두 같이 바람직한 결과에 가닿기는 힘들다.
달리기는 도달해야 할 한 지점만을 바라보지만 걷기는 전방과 측면과 후방을 두루 살핀다. 달리기는 달려 나갈수록 가속도가 붙어 위급할 때 멈추기가 힘들지만 걷기는 언제든 멈출 수 있다. 금방 지나온 길에 미련이 남거나 놓친 것이 있을 때 걸음을 되돌릴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달리기로는 곧게 뚫린 길, 확실한 지름길밖에 갈 수 없지만 걷기로는 구부러진 낯선 길목으로도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 달리기로는 잘못 접어든 길임을 깨달았다 해도 달려온 관성이 그 길을 한동안 계속 가게 하지만 걸어서 가는 길은 미련 없이 새 길을 찾아가게 한다. 달리기는 혼자 앞서려는 욕망이지만 걷기는 여러 사람과의 교감이며 동행이다. 뒤쳐진 것들을 위해 멈추고 양보하고 기다린다. 시종일관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퉁이를 돌 때마다 얼마쯤 왔나 뒤를 돌아보게 한다. 갈 길이 얼마 남았나 앞을 가늠해 보게도 한다. 함께 가는 사람의 보폭에 제 걸음을 맞추기도 한다.
걸어가는 길은 양보와 기다림과 동행의 방식이다. 달리기는 이제 곧 날아오를 준비를 하는 것이지만 걷기는 언제라도 멈추거나 방향을 바꿀 준비를 하는 행동이다. 걷기는 수시로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뒤쳐진 것은 없는지 살피는 행동이지만 뛰기는 뒤쫓아 오는 것들을 계속 물리치고 내버리며 가야 하는 길이다.

최영철(시인)

출처 : 한국불교신문(http://www.kbulgy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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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대, 새로운 가족의 의미는 무엇인가


                                                                                                                  최영철  

 

내 아는 후배들 중에는 결혼 적령기를 넘기고도 혼자 사는 분들이 여럿 있다. 인사치례 삼아 더 늦기 전에 어서 결혼하셔라는 말을 건네보지만 묵묵부답이거나 단호하게 손을 내젖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를 물어보기가 뭣해 더 이상 말을 보태진 않았지만 내심 서운하고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만큼 내가 구세대가 된 것 같은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독신으로 사는 게 부러운 일일 수도 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세상에 결혼은 자유로운 진로를 가로막는 족쇄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부모님과 처자식들 사이에 에워싸여 힘겨운 가장 노릇을 하다보면 독신의 자유를 만끽하고 사는 그들이 내심 부러울 때도 있다. 가족의 벽은 이중삼중으로 애워싼 울타리 같은 것이어서 생각하기에 따라 무척 힘겹고 거추장스러운 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렇기만 한 것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고 보니 십여년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나의 아버지는 시골의 가난한 농가 셋째 아들로 테어나셨는데 젊어 부산으로 나와 화물차 조수를 하셨다. 아는 사람을 대신해 가셨는지 군대를 두 번 갔다는 이야기도 하신적이 있다. 어머니와 결혼해 시골 큰집 부엌 문간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해 나를 낳았다고 하셨다. 아는 사람의 주선으로 얻은 첫 직장이 화물차 조수였는데 내가 태어날 즈음에는 부산 법일동 산동네에서 셋방살이를 하셨다. 그 방이란 게 작은 방 하나를 합판으로 나누고 벡열등 하나를 같이 쓰는 구조였다고 했다. 내가 울음을 터트리기라도 히면 어머니는 나를 업고 가파른 달동네 골목을 배회해야 했다.

이런 사정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우리 세대 대부분이 겪은 성장사였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와 비슷하게 무작정 도시로 나와 공장 노동자가 되었던 우리의 누이들은 고향에 두고온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어엿한 소녀가장이었다.

 

어려운 시절을 버티게 한 힘

 

이 이야기를 아직 우리 아이들에게 해보지는 않았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만큼이나 캐캐묵은 이야기인데다 그런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 저의를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우했던 자기 세대의 경험을 다음 세대의 나태와 나약을 다스리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좋은 방식이 아니다. 그 시절 그렇게 살았던 것은 험난했던 시대상황과 무능했던 선조들과 무기력했던 자기 세대 탓이지 이제 태어난 자식 세대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대간의 거리는 세상의 변화 속도와 비례해 형성된다. 1920년대생 부모세대와 1950년대생 자녀 세대가 느꼈던 세대차보다 1970년대생 부모와 2000년대생 자녀 세대가 느끼는 세대차는 미교할 수 없을만큼 크댜. 이대로 가다가는 부모 부양이나 효도 같은 개념이 케케묵은 이야기를 넘어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될 공산이 크다. 내리사랑이라는 말대로 가족 사랑은 서로 주고 받는 게 아니라 계속 아래로 대를 물려 이어지는 게 맞다. 그렇지 않고 그 공덕을 보상받으려 한다면 예기치 않은 갈등과 파국을 자초할 수 있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이니 효의 방식 또한 그에 맞춰 변화해 갈 것이다.

 

위기의 시대, 가족의 가치는 무엇인가

 

가족간의 사소한 말다툼이 끔찍한 참상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우리는 가끔 보고 있다.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새상의 변화에 아랑곳없이 낡은 옛날 방식으로 신세대 삶의 방식을 제단한다는 반론에 부딫칠 수 있다. 세대 차와 세대 갈등은 자기중심적일 때 커진다. 1950년대 생이 겪었던 세대 갈등보다 2000년대 생이 겪는 세대 갈등이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큰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조부모와 부모님은 물론이고 다수의 삼촌 고모 사촌과 형제들 사이에서 성장한 나와,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주위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우리 손주들의 가치관과 인성이 같을 수는 없다.

가족의 구성은 삶의 방식과 보조를 맟추어 변화해 왔다. 농경이 주를 이루던 사회에서는 대가족의 협업이 필요했지만 오늘과 같은 정보 사회에서는 개개인의 창의성을 바탕으로 사회는 움직인다. 한 사무실에 근무하면서도 서로의 업무 공간은 개방형이 아니라 밀패형이다. 같은 부서에 일하면서도 동료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롸같은 구조는 가족 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의 가정은 단촐한 핵가족이어서도 그렇지만 서로 긴 이야기를 나눌만한 공통화재를 찾기 어렵다. 우스개말이지만 부부 간에도 밥 먹었나?, 애는?, 자자, 이 세 마디를 넘어서는 대화를 이어가기가 힘들어졌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세 마디 말을 경상도식 가족 사랑의 축약된 표현으로 이야기한바 있다. 밥 먹었나?‘는 가정 경제를, ’애는?‘ 자녀의 무탈을, ’자자는 부부의 사랑을 담은 말로 풀어보았었다. 이 세 마디 말에 담긴 가족 사랑이 지금도 유효한 것은 책임을 공유하며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주려는 가족 구성원끼리의 배려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속이 전제되지 않는 배려야말로 모든 공동체가 지향해야 말 최선의 규범일 것이다. 가족은 짐이 아니라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최근 지구촌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큰 위기를 겪고 있다. 공포스러운 전염력 만큼이나 무서운 것은 오랜 세월 인류가 유지해온 소통과 유대의 공동체 정신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너나없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서로의 눈길을 피하며 바삐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공포심을 느꼈다.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이 굳게 닫아 건 빗장을 활짝 열고 모두가 아름다운 대자연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과 맑은 헷살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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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말의 위력


                                                                                                                     최영철

  

말솜씨가 어눌한 나는 말 잘 하는 사람이 부럽다. 소박한 재료를 가지고도 맛깔스런 음식을 빚어내는 요리사처럼 흔한 일상어로 그럴듯한 말의 성찬을 빚어놓는다. 그런 사람들의 재주가 있어 한 마디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생겼을 것이다. 그와 달리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말로 곤란한 지경에 처하는 경우도 있다. 잠시 의절을 하기나 평생 반목하는 사이가 되기도 하고 심하면 살인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이웃끼리 무단주차를 시비로 사냥총을 난사한 사건이 있었는가 하면 명절 날 사소한 말다툼으로 형제간에 칼부림이 일어난 사건도 있었다. 사업상 크고 작은 거래를 결정하는 일에도 한마디 말이 가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불리한 조건을 성심을 다한 성의 있는 말로 극복하는 경우도 있고 너무 자신만만하게 방심하다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 경우도 있다. 앞뒤를 가늠하는 과정이 주어지는 글과 달리 엉겁결에 제어할 겨를도 없이 튀어나오기 말 때문에 빚어지는 불화들이다. 글은 다시 읽고 고칠 여유를 주지만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 방식이 너무 조급하고 폭력적이며 예의가 없고 무책임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상대방을 따뜻하게 배려하고 모자라는 부분을 가만히 감싸주는 언술이 아니라 그저 상대방의 허점과 결점을 들추어내고 이간질하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런 자극에 충동적으로 대응해서 험악한 상황이 벌어지고 마는 것이 요즘의 소통방식이다.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사람들을 뜯어말려 진정시킨 뒤에 그 연유를 들어보면 지극히 사소한 일이 발단이 된 경우가 많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지금 나라 안은 온갖 허장성세가 난무하고 있다.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는데 치중하기 보다는 남을 헐뜯고 깎아내리는 일에 더 열심이다. 누가 더 나은 후보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덜 부패된 후보인지를 판가름해야 할 지경에 처해 있다. 많은 유권자들은 또 잠시 정치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영양가 있는 말이 그리운 이즈음천마디를 이긴 한마디(헬게헤세 지음. 박종대 옮김. 북스코프)|는 소크라테스에서 조지부시에 이르기까지 26백년동안의 명언에 얽힌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시간은 돈이다처럼 누구나 좌우명으로 삼을만한 금언, ‘주사위는 던져졌다처럼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한마디, ‘나에게는 꿈이 있다처럼 전 인류의 가슴을 울린 말 등 총 70인의 한마디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엮었다. 그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어원을 문제 삼은 부분도 몇 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의 말이라고 알고 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서양 철학의 출발을 알린 탈레스의 말이라는 것.

이와 달리 설화, 역사를 뒤바꾼 치명적 말실수(이경채 지음. 현문미디어)는 한 마디 말로 화를 자초했던 역사 속 인물들의 삶을 재구성하고 있는 책이다. 앞의 책이 한마디 말의 위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경우라면 이 책은 한마디 말로 화를 자초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묻혔던 사람들의 경우이다. 태종의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 기개가 하늘을 찔렀던 남이 장군, 신숙주의 아들 신정, 잘못된 선택으로 멸문지화를 당한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등 우리 역사에서 세치 혀의 말실수로 불행한 말로를 보낸 인물들을 소개했다.

한편사람이 따르는 말 사람이 떠나는 말(히구치유이치 지음. 홍성민 옮김. 대교베텔스만)이 꼽고 있는 말실수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도덕적인 설교, 근거 없는 결론, 트집, 추상적이고 어려운 말, 자기 자랑, 허세, 흔한 말, 차별의식, 쉽게 감동하고 지나치게 친절한 말 등을 예로 들었다.

또 다른 책 직장인이 자기 발등을 찍는 말 한마디(오쿠시아유미 지음. 정은지 옮김. 예문|는 현대판 설화를 방지할 여러 가지 조언을 담은 책이고,내 말에 상처 받았니(상생화용연구소 지음. 커뮤니케이션북스)는 한국식 말하기의 종류를 무심코 말하기, 자존심 긁기, 권위로 누르기, 배려하여 말하기, 상황 바꾸어 말하기 등 재미있는 사례 중심으로 소개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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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너나너나너

 

 

최영철

 

 

 

    나는 너의 고장
    잘못 배달된 폐기물
    거꾸로 돌아간 나사못
    나 아닌 너 아닌
    나 같은 너 보다
    너 같은 나는 더욱 아닌
    나와 너의 맞잡다 만
    떨리는 빈손 낭떠러지
    너의 실패 나의 낭패
    관중이 다 빠져나간 세리머니
    위험천만 아슬아슬 원격조정
    너의 나를 나의 너를
    한 구덩이에 버려야 할 밑닦이
    다른 데로 너무 멀리 가버려
    나의 네가 돌아올 수 없는 뜬구름
    아무렇게나 끼워 맞춘 밑구멍
    너의 내가 몇 점 남은 부스러기
    헛도는 수레바퀴 돌돌
    안개 위에 내갈긴 낙서
    아무리 닦아도 오물이 지워지지 않아
    엉망진창 두꺼운 무쇠 등판이 되고 만
    나 아닌 너 아닌 나너나너 너나너
    얼굴만 홀쭉해지고 만 너희
    아니 우리? 아니 낯선 배반?

 

 

 

 

 

 

 

 

 

 

 

 

 

 

오늘은 버릴 것이 없었습니다

 

 

 

 

    말수 적은 전화라도 곁에 있어 주어 고맙다, 한 장 남은 달력 팔랑대는 며칠, 내 손을 잡고 놓아 주지 않아 고맙다, 다하지 못한 말들, 이리 오래 받아 주어 고맙다, 입 열면 모처럼의 꼬드김에 넘어갈까 봐 입 앙다물고 잠자코 있어 주어 고맙다, 허튼 짓거리 하나 안 하나 종일 귀 곤두세우고 나만 노려보고 있어 고맙다, 저기 저 아이들처럼 외로워 괴로워 못살겠다고 쉬지 않고 보채고 소리 지르고 부르르 몸 떨지 않아 고맙다, 내가 성가실까 봐 언제인지도 모르게 은근슬쩍 용건만 쑤셔 넣고 달아나 버려 고맙다, 정말 이게 마지막이라고 말해 주지 않아 고맙다, 내일 또 올게, 울지 말고 내 꿈 꿔, 심심하면 이거나 먹어, 이 말만은 하지 않으려 했는데 다시는 못 볼지도 몰라, 주먹 쥐고 뻔한 대사 중얼거리며 허공에 하트를 그려 놓고 가지 않아 고맙다(문장웹진)

 

 

 

 

 

 

 

 

 

 

 

 

 

 

최영철 작가소개 / 최영철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말라간다 날아간다 흩어진다』, 『돌돌』, 『금정산을 보냈다』, 『찔러본다』, 『호루라기』, 『그림자 호수』, 『일광욕하는 가구』, 육필시선집 『엉겅퀴』, 성장소설 『어중씨 이야기』, 산문집 『동백꽃 붉고 시린 눈물』 등. 백석문학상·이형기문학상·최계락문학상 등 수상.

 

   《문장웹진 201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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