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문학예술 진흥을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

 

최 영 철

 

지난 일년여 동안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원회) 문학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웠던 점은 여러 위원들이 낸 각각의 의견 중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 때였다. 주어진 안건을 결정하는 것이 아닌 새롭고 바람직한 제안을 보태는 것만 허용된 소위원회 활동은 어떤 식이든 회의의 결과물을 도출해 내야 했으므로 마지막에는 통일된 의견이 필요했다. 그런 난감한 궁지는 회의 때마다 모든 위원들을 괴롭혔을 것인데 양단간 결정을 내리는 일에 누구보다 서툰 나로서는 더할 수 없는 고역이었다. 이렇게 보면 이쪽의 의견이 낫고 저렇게 보면 저쪽의 의견이 나았지만 반대쪽이 가진 장점을 버리는 일이 힘들었다. 또 그 둘을 절충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다소 흐리터분한 제안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나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그 절충안이든 모두 다 괜찮다고 여기거나 또는 모두 다 괜찮지 않다고 여기는 쪽이었다. 무슨 기업행위나 정치행위도 아니고 그것이 예술진흥을 위한 정책일 바에야 그 득실은 균등하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원칙도 기준도 필요치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술위원회의 사업들은 국가 예산과 공적 기금을 집행하는 기관이고 엄밀한 의미에서는 국민의 혈세를 쓰는 기관이다. 그 수혜대상을 선정하는데 있어 객관성과 공정성을 가져야 하는 것은 기본적인 선결조건이다. 객관적인 공정성은 지각 있는 사람이면 모두 납득하고 수용하는 범주를 만드는 초석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객관성과 공정성은 예술의 속성과 상반된다. 그것은 다수가 수긍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을 만들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공산품처럼 품질과 디자인 등에 있어 최선의 것을 도출해 낼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은 그것이 불가능하며 그것을 거부하고 뛰어넘는다. 예술을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이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큰 반향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무 느낌도 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학식이나 연령대, 남녀간 성 차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성장환경, 직업과 취향, 작품을 접하는 그 순간의 여건, 심리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동일한 작품에서 받는 감흥은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시시각각 변화한다. 아침에 접한 것과 저녁에 접한 것이 다를 수 있으며 흐린 날과 맑은 날의 감흥이 다를 수 있다. 그것은 예술이 설득의 방식이 아니라 감동의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생산자나 수혜자 모두에게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착상되고 완성되고 전달된다. 인간의 감정을 표준화할 수 없듯이 예술 또한 표준화할 수 없다.

 

선택과 집중이 놓칠 수 있는 것

현재 예술위원회가 표방하는 지원의 원칙은 ‘선택과 집중’이다. 우수한 작품과 대상을 선택해 집중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그 원칙은 일단 고른 동의를 얻고 있는 듯하다. 문학의 경우만을 예를 들어 보더라도 소위 등단 절차를 거친 문인들만 만여 명에 이르고 있고, 각종 지면과 개인 창작집 등을 통해 발표되는 작품은 엄청난 양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방식이든 선택은 필요하다. 발표된 작품과 문인 전체에 골고루 지원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의미도 없다. 남는 문제는 어떤 식으로 선택할 것인가에 있다. 무작위 추첨을 통해서, 또는 활동 경력이나 작품의 양에 따라, 시장이나 수혜자의 반응에 따라……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모두 적당치가 않다.

그러나 그 각각의 수준을 엄격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확연하게 구분되는 함량미달의 작품을 균등한 수혜 대상에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역시 선택의 기준은 작품의 질적 성취도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어떤 방식으로 선택할 것이냐가 남는다. 예술위원회의 고민도 여기에 집중되어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을 얼마나 눈 밝은 인사들로 구성할 것인가. 그러면서도 세대별 성향별 지역별로 폭넓은 안배를 이룰 것인가. 그러나 이 또한 쉬운 문제가 아닌 듯하다. 심사위원의 주된 구성원이 되고 있는 주요 평론가의 경우 대부분 한 두 개 이상의 문학 매체 편집에 관여하고 있고, 학연이나 지연, 자신의 문학적 성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 창작자를 심사위원으로 위촉할 경우에도 앞의 한계들은 똑같이 도출된다. 개인적 정리나 주관적 잣대가 많이 작용할 것이고 자기 작품이 대상이 되는 경우에는 심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사실 일정 수준 이상의 예술 작품을 두고 우열을 가리는 일은 위험하고도 무의미한 일이다. 완성도가 높은 시집 한 권을 놓고 여러 사람에게 읽힌 후 좋은 시 한편을 골라보라고 하면 제각각 그 선택이 다르게 나타나곤 하는데 그것이 정상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예술의 가치와 위대함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생산자가 아닌 수혜자에 의해 시시각각 다르게 탄생되고 다르게 부각되는 것, 공산품의 품질 검사처럼 오탈자나 매끈하지 못한 언어나 불쾌하고 칙칙한 분위기가 감점 요인이 될 수는 없다. 의도적인 형식 파괴가 얼마든지 가능하며, 당대의 평가가 머지않은 훗날 수정되는 경우 또한 있다. 예술위원회의 큰 방향은 선택과 집중이지만 어떤 방식으로 선택하고 집중하느냐는 지금도 모색 중에 있는 듯하다. 현재의 방식들은 그 한 과정에 불과하며 계속 환경에 따라 변화하고 적응하고 융통성 있게 흘러가면서 최선의 방식에 근접해 갈 것으로 보인다.

 

규칙은 넘어서기 위해 있는 것

 

문학과 예술의 특성이 그러하거니와 예술지원정책 역시 보다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고뇌와 시도가 필요하리라 본다. 정해진 원칙이나 규칙을 고수하며 문학예술의 생산자와 수혜자들이 정해진 틀 안에 들어오기를 종용하는 것은 또 다른 억압이며 규제가 될 소지가 있다.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넘어서고 극복하기 위해서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원칙과 규칙은 최소한의 영역에서 그 정당성을 주장해야 한다. 문학예술의 신장은 정해진 규범을 탈피하고 사회적 다수가 지향하는 보편성을 극복하려는 의지에서 싹튼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연말 문학위원회 첫 회의에 참석한 김병익 예술위원회 위원장의 모두 발언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한 여성문인이 편지를 통해 호소한 내용을 소개하면서, 문학예술의 진흥이 이른바 일부의 일급 예술가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는 취지의 말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변두리 동네 곳곳에 산재한 예능교습소의 중요성을 예로 들었다. 거기에서 미래의 일급 예술가가 탄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비유적 표현이 숨기고 있는 이야기는 예술의 발전은 다양한 모색의 장을 폭넓게 열어두는데 있고, 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재원을 격려하고 육성하는 일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지금 현재의 메이저급 예술가도 중요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메이저급으로 성장할 수 있는 현재의 마이너급을 육성하고 격려하는 일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취지였다. 예술작품의 창작 과정이 그러하듯이 예술을 지원하고 평가하는 일 역시 인간적 고뇌를 동반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그런 고민의 일단이 이를테면, 우수 작품과 우수 작품집 선정에서 특정 문인과 출판사의 최대한도를 정해놓은 일이며, 지역 출판사 발행 도서가 최소치 이상 선정되도록 정해 놓은 일이다. 이런 예외 조항은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는 위배되는 것이지만 보다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만들어진 조항일 것이다.

예술의 진흥책은 가능한가

정확한 구분은 아니지만, 90년대를 경계로 해서 거칠게 구분해 본다면 90년대 이전 세대들은 문예진흥기금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았다. 아예 기금 신청서조차 내보지 않았던 작가들도 많았을 것이다. 신청해서 받으면 좋고 받지 못해도 그뿐이었다. 판권에 표기하게 되어 있는 수혜 사실을 밝히기 싫어 문예진흥원에 보낼 몇 권의 책에만 그 사실을 표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랏돈을 받으면 어용이 되는 것 같아서 그걸 떠벌리고 다니지도 않았다. 그 시절 문예진흥기금이 큰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은 지원액수도 적었을 뿐더러 지원방식도 창작집 지원 등 몇 가지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추진 사업이 단순했으므로 문예진흥원 문학 담당 부서는 문학미술부 안에 포함되어 있었고 전담직원은 한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의 지원제도와 액수는 엄청난 규모로 확대되어 있다. 문학지원 프로그램을 나중에 정리해 소개하겠지만 지원방식과 문학관련 전담 직원들이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늘었다. 작년에는 한시적으로 문학회생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 덕에 시집을 비롯한 문학출판이 활발해지고 컴퓨터나 영상 쪽으로 몰려갔던 독자층의 관심을 문학 쪽으로 조금씩 이끌어오는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이버문학광장 문장>이나 최근 가동을 시작한 <도종환의 시배달> 등이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문학이 부흥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학의 부흥은 작가와 매체와 독자가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동시에 성장할 때 가능해진다. 작가는 매체를 고무하고, 독자는 작가를 긴장시키고, 매체는 독자의 욕구를 능가하는 잘 짜인 삼각구도가 형성될 때 문학 산업의 발전은 가능해진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예술위원회 정책은 삼자를 동시에 고무시킨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이다. 이 삼각구도가 바람직한 긴장관계를 이루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이 소요될지는 미지수다. 대중장르에 깊숙하게 경도되어 있는 독자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만 가능할 뿐이다.

달콤하고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진 독자들을 깊고 은근한 문학의 맛에 동화시키는 일은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우리는 그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공감하고 각오를 다져야 한다. 자신의 작품이 창작지원이나 우수작품, 우수작품집 선정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크게 낙심하는 작가들을 보기도 했고,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올곧게 자기 세계를 유지해가는 작가들을 보기도 했다. 어떤 이는 앞으로 글을 쓰지 못할 것 같다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고, 어떤 이는 예술위원회를 폭파하러 가겠다는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또 어떤 중견 작가는 자기 작품을 탈락시켜주어 고맙다고 예술위원회 담당자들에게 점심을 사고 갔다고도 한다.

잠시 낭패감을 맛볼 수는 있겠으나 지원에서 배제되었다고 해서 전체를 부정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지원을 받아 잠시 희희낙락하는 것보다 그 혹독한 시련이 작가에게는 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소수의 기를 살리기 위해 다수의 의지를 꺾는 제도적 모순의 문제점도 한번쯤 재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학예술의 지원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둔 개인과 집단에게도 돌아가야 하지만 추임새를 넣어주면 더 잘 할 수 있는 경우도 같이 살펴서 지원해야 한다. 문학예술에 대한 지원은 현재의 성과에 대한 격려이기도 하지만 미래의 성과를 위한 독려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술위원회에서 만난 한 소설가는 사석에서 우스개 삼아, 문학에 지원되는 총 지원 금액이 100억 정도인데 그것을 여러 사업에 나누어 쓰지 말고 매년 100명의 문인을 선정해 1억씩 주자는 이야기를 했다. 지금처럼 다양한 사업에 나누어 지원하는 방식은 힘만 소진될 뿐 가시적인 성과를 이끌어내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문학의 발전은 무엇보다 좋은 작품을 생산하게 하는데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획기적인 방법일 수도 있겠으나 우려가 남는 아이디어였다. 우선 백 명의 작가를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용케 어떤 기준이 마련된다고 해도 거기에 들지 못한 만여 명의 문인들이 받을 상실감은 더 큰 부작용을 낳을 것이다. 물론 더 용기백배해 매진하는 작가도 있겠으나 자존심과 자긍심에 상처를 받고 문학판을 떠나는 작가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1억이라는 거액을 받은 작가에게 가해질 포만감과 부담감이다. 돈은 작가를 나태하게 하는 독약이 될 수도 있다. 천부적인 작가는 다르겠으나 대체로 무명의 외로움과 가난의 설음이 빛나는 작품을 생산하는 좋은 보약이 되지 않았던가. 또 1억의 가치에 상응하는 작품을 만드느라 작가는 균형감각을 잃고 휘청댈 확률도 높다. 작가를 계속 쓰게 만드는 동력은 어떤 모종의 결여된 조건일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작가는 쓰고 또 쓴다.

예술위원회의 문학 지원방식은 대체로 그런 속성들을 인식하고 있으며 작가를 위한 지원뿐 아니라 문예지(우수문예지 지원)와 문학출판(우수 작품집 구입 배포), 독자)각종 문학향수 프로그램)를 함께 아우르는 지원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럼 이쯤에서 예술위원회가 진행 중인 문학지원프로그램을 간단히 열거해 보겠다. 연간 100억 정도의 막대한 예산이 문학 진흥을 위해 쓰이고 있지만 작가들은 그 사실 자체도 모르고 있거나 어떤 지원 프로그램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예술위원회에 대한 이해와 여러 지원 사업들

 

우선 예술위원회가 어떤 기관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기존의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계승하여 2005년 8월 설립된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문화예술의 가치를 창조하고 확산하는 일을 하는 곳이다. 문학, 시각예술, 공연예술, 전통예술, 다원예술 등 문화예술계 안팎에서 합의하고 있는 기초예술 분야와 문화산업의 비영리적 실험영역을 대상으로 그 창조와 매개, 향유가 선순환 구조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그것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를 통해, 예술의 자생력을 신장시키고, 예술 창조를 견인하며, 예술적 융성과 사회생산력의 신장을 동시에 발전시켜 예술시장의 생산력을 확보하는 한편, 궁극적으로 국민 모두가 문화예술이 주는 창조적 기쁨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다.

이와 같은 목표를 추진하기 위해 예술위원회가 집행하는 문화예술진흥기금(이하 '문예진흥기금‘)은 문화예술진흥법에 의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조성·관리·운용하는 기금으로써,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진흥을 위한 가장 중요한 재원이다. 문예진흥기금은 영화관, 공연장을 비롯한 문화시설의 입장료에 일정액을 부가한 모금과 문예진흥기금 적립금의 이자수익, 개인이나 기업의 기부금,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자체사업 수입, 국고와 방송발전기금 등 공공부문 재원으로 조성되고 있다. 그 가운데 모금 제도는 2004년 1월 1일부터 폐지되었으며, 2004년도부터는 통합복권법에 의한 복권판매 수익금 중 일부를 문예진흥기금으로 조성하여 여러 지원사업에 집행하고 있다.

그 문예진흥기금을 집행하는 영역은 다음과 같다. 문화예술의 창작, 매개, 향수와 관련된 사업이나 활동.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정책연구·개발 및 교육·연수 사업이나 활동. 민족전통문화의 보존·계승 및 발전을 위한 사업이나 활동. 지역 문화예술의 진흥을 위한 사업이나 활동. 남북 및 국제 문화예술의 교류 사업이나 활동. 문화예술 기반시설의 활성화를 위한 사업이나 활동. 문화예술인의 창작환경개선 및 후생복지증진과 국제 경쟁력 제고를 위한 사업이나 활동. 문화예술 재원의 확충 및 조성을 위한 연구 및 사업이나 활동. 기타 문화예술의 진흥을 위한 사업이나 활동 및 시설의 설치·운영 등이다.

다음으로 문학관련 지원프로그램을 정리해 본다.

창작 활동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체제인 <예술창조 역량강화> 프로그램에는 개인 작품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을 대상으로 주어지는 창작프로그램 지원, 기획프로그램 지원, 청년인턴 채용 지원, 올해의 예술작품 시상, 신진예술가 뉴스타트 및 지속프로그램 지원 등이 있다.

국민들이 예술 활동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고, 세대간 계층간 지역간의 문화적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문화예술 향수 기회 확대> 프로그램에는, 장애인 문화접근성 확대 지원, 마로니에전국여성백일장, 청소년문예지 발간 지원, 교정시설·군부대시설 문화프로그램 제공, 기초예술과 함께하는 문화나눔사업, 소외지역을 찾아가는 문화향수 프로그램, 소외지역 공동체 문화환경 조성, 사회취약계층 대상 문화예술교육 등이 있다.

문화예술 시설, 비평가, 행정가, 경영자 양성 및 교육지원, 문화예술 관련 저널이나 서적 발간 등의 매체 지원 등을 통해 창작과 향수를 이어주는 영역확대를 꾀하는 <문화예술 매개활동 확대>에는, 예술보존조사연구 지원, 사이버문학광장 활성화, 전국문학관 활성화 지원 사업 등이 있다.

지역의 각종 문화예술 활동을 협력·지원함으로써 중앙과 지방간의 문화격차 해소와 지역의 문화역량을 확대하기 위한 <지역문화예술 교류 활성화>프로그램에는, 지역문예진흥지원, 지역문화기반시설 활용 문예프로그램 지원 등의 사업이 있다.

남북간 및 재외동포와의 민족문화예술 교류사업, 우리 문화예술의 해외 소개와 함께 해외 우수 문화예술과의 상호교류사업을 지원하는 <문화예술교류 활성화> 프로그램에는, 문화예술 국제교류 지원, 국제기구 가입단체 지원 등의 사업이 있다.

그리고 국무총리 복권위원회와 문화관광부의 후원을 받아 한국문학의 성과와 의미를 전 국민과 함께 나누는 것을 목표로 진행되는 <문학나눔사업> 도 몇 가지 문학관련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분기별로 우수문학도서를 선정하여 문화소외지역에 보급하는 <우수문학도서선정 보급사업>과, 순수문예지를 구입하여 문화소외지역에 배포하는 <우수문예지 구입배포 사업>이 있다. 또 우수문학도서 독서감상문대회, 문학나눔 콘서트, 작가와의 만남, 문학집배원 ‘도종환의 시배달’, 소외계층과 함께하는 문학나눔 큰잔치, 점자책 오디오북 제작배포사업 등을 정기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독자와 함께 하는 문학향수층 확대사업>이 있다.

끝으로 소개할 것은 사이버 문학광장 문장(www. munjang.or.kr)이다. 2005년 5월 서비스를 시작한 <문장>은 문학향수의 폭넓은 장이 되고 있는데, 에비작가들에게 발표와 평가의 기회를 제공하고 문학에 대한 청소년과 아동의 관심을 유도해 작가와 독자 간의 지속적인 교류를 시도하고 있다. 문학의 위기를 불러온 원인 중의 하나인 사이버 공간을 적극 활용, 문학에 대한 다양하고 흥미로운 콘텐츠를 생산하고 서비스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고전을 포함한 근 현대 문학작품과 문학용어사전 및 영상과 음성 정보 등을 제공하는 문학도서관, 발표와 평가의 장으로 창작 지도를 병행하고 있는 사이버창작광장, 시노래와 낭송 등의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청소년문학상을 연중 공모하고 온라인작품공모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2006년 5월 기준 가입회원 수는 1만 6천여명이며 하루 평균 방문자는 9백여명이다. 막대한 내용과 힘을 쏟아 부은 것에 비해 아직 방문자 수가 만족할 수준은 아니다.

 

문학하기 좋은 환경

 

동료들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먹고 살기가 나아지고 각종 지원이 넘치는 지금보다 배고프고 괄시받고 억압당하던 시절의 환경이 문학에는 더 좋았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한다. 그렇지만 독자도 젊은 패기의 지망생도 거의 다 빠져나가고 없는 고사 직전의 문학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은 쉽지 않지만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가치관의 혼란으로 빚어지는 여러 사회적 병리현상을 치유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문화예술이 담당해야 할 몫이다. 신세대들이 기초예술에 관심과 흥미를 갖고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지원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와 더불어 원로와 중진 예술가, 지역, 사회적 소외계층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일도 중요하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으나 예술진흥은 더욱더 단기적 부양책으로는 효과를 얻을 수 없다. 독보적인 한 예술가의 출현은 어느 날 불쑥 솟구치는 것이며 독자의 의식 신장은 끈질기게 기다리는 인내심이 만들어낸다. 다른 길로 나아가려는 신진세력의 발목을 일시적으로 붙잡는 미끼가 아니라 보다 항구적인 진흥책이 필요할 것이다.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뛰어난 예술가가 진정으로 존경받는 사회적 분위기도 조성되어야 한다. 끝으로 문학위원회의 의견을 모아 필자가 정리한 <문화예술위원회시대 문학지원정책의 방향과 추진방안> 중의 일부 내용을 여기에 소개한다.

이 시대 기초예술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이겠으나, 문학의 위기는 바람직한 가치관의 부재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무척 심각한 사태로 인식해야 한다. 문학 생산자들은 급변하는 사회 제 문제를 첨예하게 따라잡지 못하고 있고, 수혜자들은 진지한 성찰이 결여된 대중문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다. 현재 당면한 문학의 위기를 타파할 처방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가장 확실한 돌파구는 대중 영상매체로 기울어진 신세대 독자들을 어떻게 문학으로 이끌어 들이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뛰어난 신세대문학을 어떻게 창출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자기 세대의 감각과 문법으로 진지한 문학적 담론이 형성되어 나갈 때 비로소 문학은 쉬지 않고 흐르는 동력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문학이,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을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학 지원의 최대 목표는 작가가 좋은 작품을 생산하게 하는 것과 그것의 효과적인 향수와 보급에 있다. 그 두 목표 중 어느 쪽에 중점을 둘 것이냐를 두고 이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동전의 양면처럼 그것은 팽팽한 균형관계로 공존해야 한다. 독자가 없는 작품은 공허하지만 반대로 독자를 지나치게 배려한 작품은 그 질을 담보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예술에 관한 최상의 정책은 예술을 내버려두는 일’이라고 했던 아도르노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지만 작가를 위한 최상의 정책이 작가를 마냥 내버려두는 일이 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작가가 좋은 작품을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은 경제적 지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방만한 지원은 작가를 나태하게 하거나 문학시장의 자생력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작가의 첨예한 문제의식과 독자의 진지하고도 자발적인 접근을 유도하는 방식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문학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희망을 가진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이끌어내야 한다.

문학 지원의 전체적인 방향은 그렇게 문학적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를 촉발하는 데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창작 주체(작가)와 환경(출판사, 서점)에 대한 동시적 고려가 필요하다. 문학 시장의 작동을 도와주고,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주는 지원정책이 되어야 한다. 시장과 무관한 지원이라면 문학을 박물관으로 끌고 가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리고 작가에게는 결과에 대한 보상(상)과 가능성에 대한 투자(지원) 사이의 균형이 중요해 보인다. 단발성과 일회성을 극복하는 장기적인 정책 과제가 개발되어야 한다.

지원금의 수준을 정하는 일도 중요할 것이다. 대상자를 줄이고 지원금을 높이는 지원 방식과 대상자를 늘리고 지원금을 낮추는 지원 방식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가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집중과 분산 중 각각의 프로그램 성격에 맞추어 어느 한쪽을 분명히 선택해야 할 것이다. 문학의 창작지원은 문학인에 대한 복지라는 외관을 지녀서는 곤란하다. 문학은 경제적 효과를 낳을 수 있는 투자의 대상이다. 문학의 발전은 사회 전체의 창조적 잠재력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국가 전체의 문화적 베이스를 공고하게 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창작 지원은 장기적인 투자여야 하고 그 효과 또한 천천히 나타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내일을 여는 작가 06 여름 별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