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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는다,

조명숙 

 

1.

아이들은 옛이야기에 속지 않는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에 더 심각하게 속는다. 어른들은 과학소설에 속지 않는다. 그들은 여성 잡지에 나오는 이야기에 속는다. 나는 늘 내게 속는다.

이제 좀 뭘 써야겠다고 마음먹어도 눈만 뜨면 보이는 게 자잘한 일이다. 하루종일 집안을 맴도는 나에게 그만큼 좋은 핑계는 없다. 내가 쓰든 못 쓰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쓰고 싶으면 언제 어디서든 쓰면 되고, 언제 어디서든 쓰지 못하면 안 쓰면 된다. 변명의 여지없이, 쓰고 안 쓰고는 내 문제인 것이다. 텔레비전이 시끄럽다, 밤에 불을 켜놓을 수 없다, 잡일이 많다 뭐 이런 것들을 들이댄다고 해서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을 거들어줄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이 내 일을 거들어줄 수는 없다.

몸을 핑계로 두 달을 어영부영하다가 황토방을 들여다보았다. 날이 더워지면 책이 있는 방(서재라고 한번도 불리지 못한) 보다는 황토방이 훨씬 시원할 것이다. 아이 둘이 왔다갔다 하면서 황토방에 남겨둔 짐들을 혼자 이리 옮기고 저리 치웠다. 버릴 거 버리고 보낼 거 보내는 데 며칠이 걸렸다. 시골에서는 필수품인 방충망만 설치하면 끝날 단계. 그런데 작년에 쓰던 커튼식 방충망을 꺼냈더니 문제가 있었다. 양쪽을 젖히고 드나들어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다시 안 쓰려고 떼어낼 때, 고정용 벨크로까지 제거해버렸던 것이다.

인터넷으로 벨크로 주문하면 또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여닫이식 방충망을 설치하자니 돈도 돈이지만 그것의 시퍼런 색과 질감을 생각하니 썩 내키지 않았다. 그 시퍼런 방충망 안에 앉아 있으면 내가 벌레가 될 것처럼, 취향의 문제기는 하겠지만 아무튼, 그걸 피하려고 작년에도 꽤나 고민을 했던 터다.

이래저래 생각하다 문틀에 못을 박아 방충망을 고정해보기로 했다. 새시로 된 문틀에 망치로 못을 박을 수는 없는 일, 도움을 청했다. 늘씬하고 잘 생긴 배우가 와서 전동드릴로 구멍을 뚫어 못 네 개를 박아주었다. 배우는 천에도 구멍을 뚫어야겠고, 양 모서리를 고정시켜야 할 것 같다는 데까지 신경을 써주었다. 섬세함이 배우들의 성품이라는 걸, 좋은 배우는 남자든 여자든 아주 섬세하다는 걸 이곳에 와서 알았다. 자신을 내던지고 또다른 자신을 항상 창조하는 위대한 인간들이 배우다.

우여곡절을 거쳐 방충망이 설치되었다. 다이소에서 벨크로 조각을 사서 양옆을 붙이고, 통나무 다탁도 하나 얻어왔다. 한 동네 사는 화가들을 불러 방을 보여주고 막걸리도 한 잔 먹었다. 다실로 쓰거나 술 먹기에 딱 좋을 방이지만 손님이 그렇게 자주 오는 것도 아니어서 온전히 내 차지가 됐다. 숨어 있기 좋은 방, 글쓰기 좋은 방, 잠자기 좋은 방, 울기 좋은 방, 놀기 좋은 방에서 오랜만에 사지를 벌리고 늘어지게 잠을 잤다. 쪽창과 방충망을 통과한 바람이 시원했다.

꿈을 꾸었던가. 사방에서 물어뜯는 느낌에 눈을 뜨니 온 방이 파리였다. 바람이 불었고, 가벼운 방충망이 바람에 흔들렸고, 그 틈을 비집고 무수한 파리떼가 쳐들어온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봄부터 강가에 나가 이런저런 풀을 뜯어다 설탕에 재워둔 항아리가 바로 황토방 앞에 있었다. 이제 막 발효를 시작한 항아리에서 솔솔 풍기는 달콤쌉싸름한 냄새를 좋아라 했더니, 파리는 집중적으로 항아리에 달라붙어 있었고, 나머지는 내 몸을 마구 물어뜯고 있었다.

정신없이 파리채를 휘두르고, 에프킬러를 뿌리다 보니 내가 또 속았구나 어찌나 허탈하던지. 도대체 나는 얼마나 더 나에게 속아야 하는 걸까. 어떻게든 해 보려고 해도, 난관이 생기면 어떻게든 뚫고 나가보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결국엔 제대로 되는 게 없는 것이다. 그냥 돈을 좀 쓸 걸. 그 한결같이 시퍼렇고 빤질거리는 방충망을 참아낼 걸…….

며칠 공들인 일이 억울했지만 황토방을 포기할 순 없었다. 포기는 나의 덕목이 아니니까. 죽든 살든, 덤비고 봐야 하는 게 내 인생이니까. 이튿날 항아리부터 손을 댔다. 찌꺼기를 거르고, 작은 항아리에 옮기고, 비닐로 봉하고, 주변을 닦고 하는 데 하루를 거의 다 썼다. 속으면 속을수록 오기가 발동하는 성미 탓에, 몸이 좋네 안좋네 하면서 계속 일을 만든다는 지청구를 들어가며, 쓰다 둔 망사천과 재봉틀을 꺼내 기다란 주머니를 만들었다. 작은 주머니 여러 개를 달면 좋겠지만 여러 개에 잡힐 일손이 겁나서 길게 두 개를 만들었다. 모래를 채우면 흙가루가 날릴 테고, 작은 돌은 주우러 가야할 테고, 멀쩡한 곡식을 넣자니 좀 켕기고……. 문득 누가 준 찜질용 팥주머니 생각이 났다. 준 사람에겐 미안했지만 아주 조금만 꺼내 쓰기로 했다. 주둥이가 좁은 주머니에 팥을 넣기 위해 페트병을 잘라 깔때기까지 만들었으니까 딴엔 엄청 머리를 썼다.

팥이 채워진 주머니 주둥이를 메운 다음 무명실을 바늘에 꿰었다. 방충망 아래 길게 팥주머니를 매달고 보니 낭창한 것이, 꽤 무게감이 있는 것이, 웬만한 바람에는 너끈히 견디는 것이, 딱 맘에 들었다. 팥이란 게 뭐 액을 막아주기도 한다니까. , 이제 됐구나. 방충망 밖에서 알짱대는 파리에게 메롱을 몇 번이나 해줬다. 여긴 내 방이야. 들어오지 마! 찌질한 날들이여, 안녕. 스피커 볼륨을 올리고 벨벳언더그라운드도 실컷 듣고 안나 비샤도 실컷 들을 거야. 도어즈나 너바나도 볼륨을 높일 거야. 폐인 만세. 난 딱 폐인 체질인데, 이렇게 폐인으로 있을 때 생각도 되고 상상도 되고 공부도 되고 글도 되는데, 그동안 너무 오래 사거리 난장에 앉아 있었지 뭐야. 눈 감고 귀 닫고 입도 닫고 살아 보자, 이제.

때맞춰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세수를 안 해도 되고, 썬크림을 안 발라도 된다. 세수 한 번 안하는 것뿐인데도 엄청 일이 줄어든다. 하루는 비가 얼마나 오나 보려고 내다보는데 방충망이 왠지 묵직했다. 짧은 추녀를 넘어온 비가 팔주머니를 적시고 있었다. 팅팅 불은 팥이 금방이라도 주머니를 뚫고 나올 기세였다. 콜드플레이를 듣고 있을 때였다. Viva la vida! 인생 만세!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함정이 없으면 인생도 없다더니, 나는 또다시 함정에 빠진 거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가 판 함정에 빠져, 난감한 채로, 혼자 어쩔 줄 몰랐다. 그 모든 것이 내가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팥주머니가 장마를 견딜지 못 견딜지 아직은 모르겠다. 어느 날 아침 우수수 쏟아진 팥을 쓸어담으며 내가 쓴 웃음을 지을지, 햇빛이 팅팅 불은 팥을 가슬가슬 말려줄지, 그 누가 알겠는가.

 

2.

개 한 마리가 벌레처럼 죽어 있었다. 산책하러 가던 길에 개의 주검을 보았다. 내장이 항문으로 비져나와 널브러져 있는 것이 꼭, 벌레였다. 작은 벌레가 자전거바퀴에 깔렸을 때 저런 모습이리라. 내장이 터져나오고 머리가 으깨지고, 짧거나 긴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벌레의 주검은 자세하지 않고 개의 죽음은 자세해서 더 놀랐을 뿐이겠지.

하루 종일 개 한 마리가 벌레처럼 죽어 있었다를 입에서 굴렸다. 머릿속에서도 같은 문장이 굴러다녔다. 목숨에는 차이가 없건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차이 때문에 가볍거나 무겁게 느낀다. 동그란 집을 지고 천천히 길을 가로질러가는 달팽이를 내 자전거바퀴가 깔아뭉갠 것이나, 조심성없이 지나가는 개를 자동차바퀴가 깔아뭉갠 것이나 다를 바 없건만 개의 죽음은 참혹하고 달팽이의 죽음은 조금 덜 참혹한 듯.

개의 주검은 하루 넘게 방치되었다. 하루 넘는 시간 동안 세 번 더 개의 주검을 지나쳐야 했다. 파리가 들끓는 주검이 쨍쨍한 햇빛 아래 누워 나를 고문했다. 내 죽음을 잘 보아두라고 죽은 개가 계속 짖었다. 개 짖는 소리가 쟁쟁, 묵은 상처를 후볐다. 죽는다는 거, 죽음을 기다린다는 거, 담담해야 하건만 한 번도 그 담담을 보지 못했다. 과정도 그렇거니와 여러 면에서 죽는다는 건 엄청 일이 많다. 노인들일수록 죽음을 더 겁내는 것이 아마 과정의 어려움과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열 달을 기다렸다가 때가 되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출생과 달리 죽음은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또 해결하지 못한 채 치러진다. , 지랄 같은 것이다.

로드 킬은 흔한 일이라고, 나는 개의 죽음을 견뎠다. 개와 뱀, 벌레와 고라니, 난데없는 꿩과 까마귀들이 길에서 죽는다. 태풍이 왔던 어느 밤, 밤새도록 개가 울부짖은 적도 있지 않았던가. 아침에 나무 아래 죽어 있는 개를 보았지. 나도 개처럼 어느 순간에 비명을 지르겠지. 고통을 잠재우기 위한 주사약을 꽂고 호흡기를 매단 채 헐떡거릴지도 모른다. 원래 그런 것이었는데 알지 못하고 있을 뿐. 내장이 튀어나오는 사고를 피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작년에는 정면으로 대면한 임종 때문에 오래 아팠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모습, 고통 때문에 허공을 맴돌던 눈동자, 아쉽고 아까운 것이 많은 이곳으로부터 저곳으로 끌려가는 강제 앞에서 발버둥치던 몸. 감당할 수 없는 그 임종의 일을 내색 못하고 감당하는 동안 내 몸도 요동을 쳤다. 나는 쑥쑥 가라앉았고, 가라앉은 채로 꿈틀꿈틀 숨을 쉬었다.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고 수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한편으로는, 깔끔하게 사라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다.

사는 게 꼭, 내기 같다.

 

3.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을 뒤늦게 읽었다. ‘라고 하기엔 뭣한 일상의 기록이었다. 시에는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선생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깊은 외로움과 대적하면서 살을 저미고 뼈를 깎았을 선생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글이란 것이 이런 뼈저림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대작(大作)도 유명(有名)도 사양하고 싶었다.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는 생. 그 갈피를 아주 조금 들여다보기만 했는데도 이런데, 정작 선생의 하루 하루는 어땠을까. 사방으로 달아나는 마음을 다잡아 컴퓨터 앞에 앉으면서 자전이란 말을 곱씹어 본다.

내게 자전이 있었나? ‘자전이란 것을 집어던지기 전에는 결코 소설가가 되지 못한다. 자전적이 되면 소설은 재미가 없어진다. 내 경우다. 나는 별로 재미가 없는 인간이고 상상력도 부족하고 재치도 없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힘들게 고개를 넘던 중에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다. 간신히 고개를 넘었지만 달라진 건 별로 없다. 그동안 쓴 몇 권의 책과 유명무실한 이름, 쓸데없는 자존심과 명백한 가난, 쓰다 만 작품들의 끄트머리에 적어둔 메모처럼, 후회만 남았다. 나는 자전적인 걸 좋아하지 않고, 소설에서 자전적인 냄새가 나면 실패했다고 친다. 때론 성공하고 때론 실패하는, 그렇지만 아주 참람하지만은 않은,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진부하지 않고 답답하지 않은 그런 소설을 아직은 쓰고 싶다. 그렇지만 이젠, , 힘들지 않을까, 겁도 난다.

시골에 살러 갔다니까 누가 말했다. <토지> 같은 거 쓰면 되겠네요. 뉘앙스 끝에 왜 그런 거 못 쓰세요?가 매달려 있었다. 할 말이 없었다. 자기는 황동규처럼 못 쓰면서 나더러 박경리처럼 쓰라니, 딴엔 격려였는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야유였다. 누구와 비교된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한참 술 잘 먹다가 느닷없이 소설가라고? 참 웃기네 하는 표정과 함께 나 오정희 좋아하는데를 늘어놓던 사람도 잊히지 않는다. 나도 오정희 선생을 좋아한다. 대목 대목을 외우고 줄줄 꿰찰 만큼 맹렬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아직도 이런 경우에 마주쳐 참담하게 절망하는 나는 늙은 걸까, 늙지 않은 걸까. 아직 더 쓸 수 있는 걸까, 이제 그만 써야 하는 걸까. 내 벽은 박경리 선생이나 오정희 선생이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치졸하고 용렬하게, 번번이 독자 아닌 독자들인가. 나는 겁이 나는 것이다. 선생처럼 외로울 자신도 없고, 선생처럼 견딜 용기도 없어서, 겁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핑계를 대는 것이다.

문학은 내게 구원이었을까, 형벌이었을까. 구원도 형벌도 아닌 하나의 직업, 사소한 벌이, 경건하지 않은 삶 앞에서 경건한 체하는 사기술, 자기기만과 표현욕구 과잉의 허장성세 같은 말들이 계속해서 괴롭힌다. 알 수 없는 건 그래도 여전히 쓰려고 하고 쓰고 있다는 것이다. 죽기 전에 꼭 써야 할 대작의 계획도 없고, 미치도록 닦달하는 열망도 없으면서 담담하게, 그냥 살아 있고 싶어서. 그러니까, 지금까지 나는 내 소설을 속였고, 내 소설 또한 날 속였던 것이다. 속고 속이고, , 내 인생이 그랬다는 것이다.

이십 년만에 연락이 온 친구는 내가 쓴 소설을 보내주겠다고 하니까 아예 주소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 보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섭섭하기는커녕,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아주 끔찍이 내 글을 좋아하는 한 사람의 독자를 만난 듯, 내 책 같은 건 읽지 않아도 내 사는 걸 훤히 보고 있는 것 같은, 보지 않아도 다 아는, 내 진짜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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