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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을 향해 울부짖는 늑대/김윤식/문학사상2005.10

조명숙 씨의 <미즈 맘Ms.Mam)(문학사상 9월호)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자의 내면 묘사와 그 극복방식을 절실하게 다룬 작품. 현이라 이름한 36세의 여인이 있습니다. 어느 비 오는 날 학교에 간 아이의 우산을 챙겨 마중 갔을 때 그녀의 눈앞에서 덤프트럭에 아이가 치어죽었군요. 이 여인은 그 충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소설 주제치고는 심각한 것. 방법은 사람에 따라 각각이겠지요. 발광하기, 목매달기, 팔자소관으로 믿고 다시 아기 낳고 체념하기, 종교나 고아원 등 사회사업에 관심 두기 등등이 가능하겠지요. 작가 조씨의 해결책은 어떠할까.

두 가지 기둥을 세웠군요. 남편의 욕망에서 벗어나 아이 보상금 통장을 갖고 가출하기가 그 하나. 가출하여 허름한 동네의 옥탑방에 세 듭니다. 어째서 하필 옥탑방이어야 했을까. 달 때문입니다. 작가의 자질이 번득인 곳.

 

이곳에 오기 전, 아파트 베란다에서 달을 보면서 그것을 알았다. 조그마해서 보이지 않던 아이는 바라보면 볼수록 조금씩 커져서, 눈에 보이지 않던 작은 물방울이 모여서 구름이라는 큰 문덩어리로 마침내 osns에 보이게 되듯이, 현이가 볼 수 있는 곳으로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가 빗방울을 따라 내려오는 곳은 꼭 제가 다니던 학교였다. 그리고 학교가 파하는 그 시각이었다. 얼마쯤 배가 고프고, 얼마쯤은 지친,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 엄마 곁에서 간식을 먹으며 세상의 위험함을 잊어버리고 싶은 바로 그 시각.(106)

 

아이를 잃은 여인이 정신 나간 상태에서 달을 보고 있었다는 것. 이는 분명 환각이지요. 그런데 그 환각이란 달무리빗방울비 내리기로 연상되어 있습니다. 비 오는 날 아이가 죽었으니까 이 죽음을 달로써 생리화하기인 것. 달이란 새삼 무엇인가. 초승달이 자라 보름달이 되고 다시 작아지기 시작해 아예 그믐달에로 향하지요. 이 반복이 여성성을 상징함은 모두가 아는 일. 이 달거리를 기둥으로 삼음으로써 작가는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미묘하기 짝이 없는 생리적 감각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의 기둥은 아래와 같습니다.

 

달빛과 외등,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이 만들어내는 침울한 분위기 속으로 피토키오의 코처럼 자라나는 그림자가 보였다. 현이가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림자는 천천히 난간을 따라 옥상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돈 다음 달을 향해 섰다. 보름을 대엿새 넘긴 달이 떠올라 있는 하늘을 향해 그림자가 늑대처럼 고개를 치켜들자, 문득 우우우 하는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165)

 

보름달을 향해 울부짖는 늑대의 울음은 분명 환청이겠지요. 이 환청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몽유병을 앓는 이웃집 여자입니다. 그녀의 딸은 아직 미성년이면서 임신한 상태, 이름은 지나. 이런 어미 밑에서 자란 딸이 임신한 새 생명도 소중하긴 마찬가지. 지나가 낳은 아기이면 어떠랴. 미즈이자 어미면 어떠하랴.

이 작품의 주조음이랄까 정서의 소설적 바탕의 강점은 여성성의 부각에 있습니다. ‘달무리비 내리기의 연속성이 그것.

중요한 것은 달과 달무리, 비오기의 연속성이란 우리의 전통적(할머니) 속담이랄까 민담과 관련되었음에 찾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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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떠난 집새에게

 

 

빈 새장이 노래하네

집새 날아가 버린 그루터기

둥우리만 남아 노래하네

새가 없으면 새장으로

가슴이 없으면

싸늘한 등으로 노래할 수 있네

 

어슴푸레한 미명에 깃털 털어내며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눈물샘 마르면 까칠한 정강이로

정강이 시리면

갈라진 발바닥으로 노래할 수 있네

 

새가 없으면 모이통이

모이통 비면

한 점 먹고 하늘 보던

물그릇이 노래하네

집새 떠난 새장이 노래하네

 

해질녘 뒷산까지 울려퍼진

빈 둥우리의

모이통의

물그릇의 노래소리

길 떠나 길 잃은 집새들 돌아오네.

 

갇힌다는 것과 열려 있다는 것.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은 열려 있는 쪽에 속하기를 원할 것이다. 자유와 속박,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대체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기를 원하고 있을까? 최영철 시인은 시 길 떠난 집새에게에서 까다로운 철학적 명제로 이 문제를 내놓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 시는 기르던 새가 날아가버린 빈 새장을 보며 그 새를 그리워하고 그 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평범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결국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갇히는 기쁨, 그것도 자유로움을 보통 사람보다 더 원하는 기질을 갖는 게 보통인 시인인 자신이 생각하는 갇힘에 대한 찬미라고 생각된다. ‘새장으로 상징되는 속박 -그것은 집이나 가족, 자신의 일 등 모든 일상에서 우리가 붙들려 행해야 하는 역할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스스로 택하는 울타리일 뿐 악의적인 속박이 아니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나는 김승희의 시 지붕 아래서를 떠올렸다. 비슷해서가 아니라 반대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 인간이 몸 담고 있는 이 낯익은 공간은 여러 가지의 역설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지붕이라고 부르면 따뜻한 보호의 느낌을, ‘이라고 부르면 가두어버리는 구속의 의미와 단절의 의미가 된다. ‘새장이라고 부른다면 이 좁은 공간이 주는 느낌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갇힘과 속박이 된다. 김승희는 그녀의 시에서 해질 무렵,/ 떨어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아, 이제, 더 이상 지붕 아래서/ 살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라고 노래했다. 보호와 안락의 의미를 가진 집과 일상에 대한 환멸이다. 여자의 공간이라고 알려진 에 대한 그의 철저한 반항과 철저한 자유에 대한 의지, 그래서 그녀의 시는 참신한 발견을 독자들에게 주었었다.

그런데 이 시는 정반대로 새장을 속박의 공간이 아닌 노래의 터로 그리고 있다. 이것 또한 새로운 발견이다. 사실 이 시에서 던지고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노래이다. 새가 날아가버린 후에도 빈 새장이, 새가 있던 그 자리가, 새가 먹던 모이통이, 새가 한 점 먹고 하늘 보던 물그릇이 여전히 노래한다. “이가 없으며 잇몸으로, 눈물샘 마르면 까칠한 정강이로, 정강이 시리면 갈라진 발바닥으로 노래할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어쩐지 눈물겨워진다. 그는 상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 모든 잃어버림으로 흔들리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노래는 이 시인의 시쓰기이다. 시인의 가장 치열한 살기는 시쓰기이므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고달픈 삶의 모든 국면에서도 그의 삶의 종교가 되어 있는 바로 그 노래하기(시쓰기)’이다.

다시 좀 쉽게 이 시를 읽어 보기로 한다. ‘길 떠난 집새는 늘 일상의 자자분한 일거리들에서, 고운 때가 묻어 있는 살림살이에서, 가족들에게서 떠나고 싶어하는 시인 자신이었다고. 그래서 그는 이 새장에서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린 거라고.(몸은 떠날 수도 있지만 몸을 집에 둔 채로 마음이 훌쩍 떠나가버릴 수도 있잖겠는가. 그러니 시인이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었는지 여전히 어스름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왔는지 따지지는 말자.) 그러면 시점은 새장 밖에서 새를 들여다보는 주인의 입장이 아니라 새장 밖에서 자신이 몸담았던 새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새의 입장으로 바뀌게 된다. 새는 늘 자신은 새장 안에 갇혀 있는 거니까 기회만 나면 푸르고 넓은 세상으로 날아올라 가버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본능이 시킨 것일 수도 있고 통념이 시킨 일일 수도 있다. 아무튼 새장에 갇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게 통념이니까. 하지만 그는 집새였고 집새는 광활한 천지에서는 노래부를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새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노래한다. 빈 둥우리, 조그만 그루터기, 모이통, 물그릇, 이 모든 것들이 노래의 원천이었고 지금도 노래의 여운에 싸여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새는 돌아올 수밖에 없다.

속박이라고 생각하던 공간이 자기의 보금자리였음에 대한 깨달음, 그래서 시인은 새장으로 돌아온다. 속박이라고 생각했던 그 답답하고 조촐한 생활과 의무와 어려움, 그것 모두에 노래가 서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새장 속에서 그는 자유를 노래할 수 있고, 고통 속에서 그는 노래하는 일의 가치를 발견한다. 아니, 고통 그 자체가 그를 노래하게 한다. 그리고 노래하기 때문에 새는(시인은) 아름답다.

내가 아는 최영철 시인은 말이 없다. 글쓰는 사람들은 모두 글로 자신을 표현하는 데 능숙하지만, 말로 표현하는 데는 서투른 사람도 있고 능숙한 사람도 있다. 그는 말로 표현하는 데는 서투른 편이다. 말이 없는 사람은 대개 닫혀 있는 것처럼,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듯 싶다. 새장 밖에서 자신이 버리고 나온 빈 새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마 시인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결코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꺼이 그 좁은 새장 안 조촐한 자리에 둥우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일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새는 노래할 수 있으며(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시인은 시를 쓸 수 있으며), 때문에 그가 새장 안에 있다(세상과 단절된다 또는 소유가 결핍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시인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다른 작품들에서도 최영철 시인의 시각은 대체로 내려다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 도시 소시민의 삶, 그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의 삶. 그의 시는 빠르게 전환되는 물질 중심의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거칠지 않으며 끈끈하고 욕심 없고 따뜻하다. 그래서 사실 당당하기까지 하다(그의 시집 제목의 하나가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임에 주목하자. 이는 화장실 문화의 세대교체를 말하고 있는데 풍요로운 물질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집새가 자기 새장으로 돌아와서 모이통에서 모이를 쪼고 물통에서 물을 머금으면서 노래로 세상을 가득 채우기를 바란다. 갈라진 발바닥으로, 까칠한 정강이로, 싸늘한 등으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천부의 목청으로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자물쇠는 툭 쳐서 조금 열어 놓아도 좋을 것이다. 그의 새는 갇힌 것이 아니라 새장 안에 스스로의 뜻으로 거주하는 것이니까.

갇힘과 풀림, 양애경, 1996. 8. 현대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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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날

 

 

헌 달구지 지나간 발자국 멀리

패인 황톳길 복날

칼날처럼 서늘해지는 속을

또 한 번 다치려고

시장 좌판에 앉아 마시는

칼날 지나간 더운 국물,

한은 쉼없이 담금질하는 것

황톳길 달구지 위에

오래 짓눌려

쫄깃해진 피

세파에 절어 단내가 나는

구부정한 서른여덟,

선지에 베어 더 서늘해진 속이

이제 조금 알겠다는 듯

목이 메는 복날.

 

전반적으로 허약하고 쇠잔한 느낌을 주는 이 달의 시단 가운데 다음의 젊은 시인 네 사람의 작품이 활력을 불어넣는다. 유하의 삑삑새가 버린 울음으로(현대시 10월호), 김혜수의 그녀에게선 양파냄새가 난다(현대시학 10월호), 강연호의 비단길(현대시학 10월호), 최영철의 복날(현대문학 10월호)이 그것이다. 이 시인들은 모두 30대들이다. 그 나이에 걸맞게 그들은 한결같이 섬세한 언어감각과 예리한 시적 인식을 보인다. 최근 시의 병폐 가운데 하나로 시적 언어가 너무 진술적이고 쓸데없이 길게 늘어지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다변으로 시상들을 일일이 설명해 나가는 시들을 자주 보게 된다. 이미지의 연결과 충돌로 독자들의 마음속에 시상과 정서를 각인시키는 시들이 절실히 요망되는 것이다. 위의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요망에 상당 정도로 부응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위의 젊은 시인들의 작품이 대체로 깊고 그윽한 삶의 정서를 환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자연적 나이는 아직 젊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의 시에는 삶의 격랑을 한바탕 겪고 난 후 체득되는 깊고 아득한 삶의 질감이 배어 있다. 그들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생의 잠언적 진술이 엿보이는 것도 바로 이와 관련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위의 작품들은 젊음의 섬세한 감각과 삶의 깊은 정서가 적절히 어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위의 작품들을 읽어 보자.

최영철의 시 복날은 압축과 절제의 구문으로 짤막한 시행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 짤막한 시행의 행간 속에서 아득히 깊고 그윽한 정서적 울림이 진동하고 있다. 요설적이고 장황한 진술의 시들에 아주 식상한 터에 이러한 함축적인 시들을 만나니 우선 반갑다. 이 시는 복날개고기를 먹으면서 느끼는 심정을 시화하고 있다. 아마도 시인은 황톳길의 달구지에 끌려가는 개를 바라보면서 시장 좌판에 앉아 개고기를 먹는 것 같다. 물론 이 시에는 그러한 구체적인 정황이 생략되어 있어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굳이 그러한 정황이 아니더라도 황톳길달구지의 토속적인 분위기와 역시 개고기의 토속적인 함축이 절묘하게 충돌하면서 어떤 깊은 정서가 환기된다. 그 깊은 정서는 바로 이다. 시인은 개고기를 칼날 지나간 더운 국물이라고 말한다. 칼로 베어져서 뜨거움을 발산하는 개고기에서 시인은 의 정서를 느끼는 것이다. 또 그러한 한이 깃든 개고기를 먹는 것을 칼날처럼 서늘해지는 속을/ 또 한 번 다치려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개고기를 먹는 것은 시인의 마음 속에 맺힌 을 더욱 심화시키는 행위에 해당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한은 쉼 없이 담금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복날에 죽어가는 이 시인의 과 등가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황톳길 달구지 위에/ 오래 짓눌려 쫄깃해진 피의 한맺힘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한맺힘이기도 한 것이다. 이 시는 복날’ ‘개고기 음식과 같은 우리의 토속적인 문화와 식성에서 깊이 있는 시적 체험을 발휘하여 우리의 뿌리깊은 전통적인 정서를 일구어낸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 「젊은 시인들의 섬세한 감각과 깊은 정서, 고형진, 1993. 11. 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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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집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앉은

집 속에는

비가 새고

바닥이 젖었다

써 놓고 부치지 못한 편지

지우지 못한 비밀이

가득하다

누가 밖에서 악쓰는 소리

가지고 있던 열쇠 꾸러미를

다 넣어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1.

禪家에서 말하는 사람의 생애란 때로 허망하기 그지없을 때가 있다. 꿈속에서 종기를 앓는 것으로 비유한 禪家龜鑑의 한 대목도 우리의 뒤통수를 친다. 곪아 터지는 종기를 치료한다고 사람들은 무진 애를 쓰지만 그 꿈에서 깨어나는 것만큼 완전한 치료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꿈에서의 깨어남이 깨달음의 경지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욕심만이 그 종기가 아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 하는 일도 모두 종기를 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지켜내려 얼마나 애를 쓰고 남을 속이고 눈치를 보며 노심초사해야 하는가. 그러는 가운데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란 자취를 감추고 가식과 허위의 발로 하루하루 연명해야 한다.

문득 나의 종기는 무엇일까 돌아보았다. 나 자신에 깊이 침잠해 볼 때 같이 깊어진다는 경험을 우리는 해왔다. 이제 나에게 드러난 종기는 시에 대한 집착이다. 좋은 시를 쓰겠다는 생각의 저편에는 상상도 못할 불순한 생각이 도사리로 있음을 발견한다. 이규보는 그것을 詩廦이니 詩魔이니 하는 말로 표현하였거니와 입신과 출세의 수단으로 시를 생각하는 경향은 우리에게도 늘 있어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시 쓰는 일에 눈이 뜨이고 살아온 지난 십여 년의 세월을 종기 앓는 일 정도로 치부해버리기란 쉽지 않았다. 무슨 호사를 바란다고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닌데 이마저 부질없는 일로 돌려야 하나. 도리어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한 부분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이것이 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내 스스로 떳떳치 못한 자리를 지키게 했다니,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괴롭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는 너무 조급하고 엉성했다. 치열하지 못하고 내 안의 나를 바로 보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 모습을 성실히 밝혀내지 않았다. 속았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속인 무수한 사물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종기임을 이제 조금씩 깨닫게 된 것이다.

 

2.

이것이 나의 깨달음의 도정이라면 그 길에 훌륭한 도반이 한 사람이 있다. 그이가 바로 최영철 시인이다. 같은 동인으로 얼굴을 마주친 지 여섯 해, 삶과 시에서 내가 받은 영향은 이제는 조금씩 정리하게 된다.

기실 나는 그의 생활을 답답하고 어리석게 보았다. 도대체 요령부득에 빠진 생활 태도를 보며 그런 인간이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차라리 기적이요 그나마 남은 우리 시대의 적선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늘 지기만 하는 사람, 늘 양보만 하는 사람, 내세우기도 전에 먼저 들어갈 생각을 하는 사람. 내가 정리해 보는 최영철의 이미지이다. 멀리 뛰어도 모자랄 판에 아직도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음을 기쁘고 반가워한다. 모르긴 해도 어디서 그런 사람을 발견했다기보다 자신을 그렇게 돌려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몇 해 전 그는 서울 생활을 경험했다. ‘열음사의 서울 사무소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의연한 서울에 슬그머니 발을 들여놓았다. 나는 그가 현실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맞춰나가는 시기가 온 것으로 생각했다. 뜻을 펼치자면 서울로 와야 하는 우리의 특수한 사정을 그도 인정했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그의 서울 생활은 일 년 반 만에 싱겁게 끝나버린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로서는 예상된 결과요 나에게는 무척이나 아쉬운 일이었다. 가끔 그의 사무실로 가 완전히 김빠진 듯한 그의 말을 들으며 그 속에서 촌철살인의 경구를 만나던 즐거움은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던가.

서울을 떠나는 심정을 그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서울은 온통 나날이 새로운 것들 뿐이었다. 하루라도 제자리에 붙박여 있는 것이 없었다. 날이 새면 늘 엉뚱하게 바뀌어 있는 서울의 사물에서 나는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것은 나의 상상력과 순발력의 부재를 반증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슬프고 원통했다.

 

서울이 자유로운 의식운동을 할 공간이 못된다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 그는 이렇듯 허허로이 귀향한다. 나는 그것을 굳이 낙향이라 말하지 않는다. 다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잘 보기 위해서 변방으로 가서 어슬렁거리며 맥을 놓고 사는 그의 모습이 나는 어쩐지 좋아 보이기만 한다. 물신화에 길들여지지 않고 맥을 풀고 느슨하게 산보하는 도중에 사물들이 흘려 보여주는 결정적인 모습을 발견한다는 그의 고백은 놀랍다. 시대를 앞서간다고 해서, 재빨리 변화하고 적응해낸다고 해서 사물의 본 모습을 바로 본다는 법은 결코 없다. 최영철은 시대의 뒤를 어슬렁거리며 따라가면서 본질을 본다.

그러나 이런 거창한 깨달음 보다 변방의 최영철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데서 더욱 값지다.

 

나는 변방에서 나의 장기인 휴머니티를 회복하였다. 사회면 기사의 한 구절에서 나는 다시 눈물이 솟구친다. 희망이 없는 세상, 원칙이 없는 세상이다. 이웃들의 원통한 아우성에 나는 대책 없이 가슴만 치며 운다. 나의 시가 그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함이 안타깝다.

 

안타까움이 어찌 그에게서 그치겠는가. 시에 대하여 겸허한 생각을 가진 이땅의 모든 시인에게 안타까움은 흘러 적셔진다.

 

3.

오랜만에 최영철 시인이 작품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낡은 집은 소품에 속할 짧은 시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담으면서 나는 이때까지 그에게서 보아온 것과는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1)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앉은

집 속에는

비가 새고

바닥이 젖었다

 

2)써 놓고 부치지 못한 편지

지우지 못한 비밀이

가득하다

 

3)누가 밖에서 악쓰는 소리

 

4)가지고 있던 열쇠 꾸러미를

다 넣어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나는 이 시를 번호를 매긴 것처럼 네 대목으로 나누어 읽는다. 단일한 심상을 극명히 부각시키면서도 유기적 연관관계를 따지자면 기승전결의 형식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짧은 시가 가지는 장점을 갖추었는가 하면 완결미를 주는 구조도 함께 담고 있다.

비가 새고 이윽고 적시는 낡은 집이 있다. 비에 젖었다는 이 상황은 어쩌면 더이상 아래로 떨어지지 못할 가장 낮은 상황을 암시한다.[1)] 그리고 그 안에서 써놓고 부치지 못한 편지가 놓여 있다. 회한을 가슴에 안고 살건 투명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건 누구에게나 정리하지 못한 찌꺼기는 있는 법이다. 시인은 그것을 비밀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했다[2)].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 있는데 그의 무의식을 뒤흔드는 외부의 압력이 밀려온다. 밖에서 악쓰는 소리가 그것이다. 조용하게 이어지던 시가 돌연 어떤 파문 같은 것에 한 번 흔들린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의식의 심연을 깨우는 것이기도 하다[3)].

그는 문을 열려고 열쇠 꾸러미를 들이댄다. 그의 손에는 제한된 숫자의 열쇠가 있다. 그리고 그가 들어가야 할 문은 대체로 그 열쇠 안에서 열려졌다. 그러나 웬일인지 오늘은 가지고 있는 열쇠를 다 써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돌발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이 문제는 오늘의 상황을 헤쳐나가지 못하는 장애요소이다[4)].

시인이 열려고 하는 문은 어떤 것일까.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무엇이 있다는 말일까. 적어도 이 시의 표면 공간에서 시인은 이것을 구체적으로 발언하지 않는다. 무엇을 추구한다는 말도 어디가 목적지라는 말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는 전적으로 상상에 의지해 그 행간을 읽어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서 열리지 않는 문 속에 있다는 비밀스런 편지를 다시 주목하게 된다. 비마저 새는 낡은 집 안에 부치지 못하고 남겨둔 편지에는 무슨 비밀 이야기가 쓰여 있을까. 야박스럽게 떠난 옛 여인, 몰래 한 사랑의 기억들만 아니리라. 치장하고 세상을 살다가 내면의 공간으로 돌아와 반추해 보는 인간의 약하디 약한 고백이 거기에는 적혀 있지나 않은지. 짐짓 강한 척 해보이며 으스댔던 모든 허영의 껍질을 고해하는 일이나 아닌지.

그 문을 열고 회한의 가슴으로 껴안거나 모든 부조리를 척결하거나 조그만 안식을 구하거나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문은 닫혀 있고 지금 가지고 있는 열쇠로는 도대체 열 수가 없다. 어디선가 악쓰는 소리가 그를 더욱 초조하게 할 뿐이다. 해결의 실마리가 좀체 잡히지 않는 상황, 시인은 지금 그런 위치에 놓여 있음을 괴롭게 고백하고 있다. 희망 없고 원칙 없는 세상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어주지 못하는 시인의 자괴감의 표현으로도 보인다.

 

4.

낡은 집의 서사적 맥락은 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꿈속의 고통과 즐거움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문득 그 꿈속에서 깨어나야 함을 말하는 저 禪家龜鑑의 한 구절이 다시 생각난다. 그것이 막연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닐진대 보다 깊고 원숙한 세계를 향한 전망이 꿈에서 깨는 깨달음으로부터 나오리라 나는 믿는다.

☞ 「시대의 뒤를 어슬렁거리며 따라가기, 고운기, 1993. 9. 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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