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시] 본전 생각 | |||
부산일보 2007/05/21일자 021면 서비스시간: 09:40:44 | |||
호박씨야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씨를 키운 흙의 노고는 적게 잡아 오백 원 해와 비와 바람의 노고도 적게 잡아 각각 오백 원 호박잎을 거둔 농부의 노고야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잎을 실어 나른 트럭의 노고도 적게 잡아 오백 원 그것을 파느라 저녁도 굶고 있는 노점 할머니의 노고도 적게 잡아 오백 원 그것을 씻고 다듬어 밥상에 올린 아내의 노고는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잎을 사들고 온 나의 노고도 오백 원 그것을 입 안에 다 넣으려고 호박 쌈을 먹는 내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 최영철, 시집 '호루라기'(2006, 문학과 지성사) 내가 먹어온 것들이 그렇게 완벽한 세계였던가. 높은 언덕을 넘어온 것들, 깊은 강물을 건너온 저 고단한 꿈들. 자연도 사람도 한 발짝씩 나를 향해 오고 있었던가. 호박잎과 아름다운 '오백원'들과 나는 이 광대한 우주에 어떤 고리로 연결되었던가. 억울할 때마다 우리는 본전 생각을 한다. 이왕이면 제대로, 진정한 본전을 생각할 일. '지금, 여기'가 본전 뽑고도 남는 자리이다. 값을 따질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저녁 밥상 하나로도 '지금, 여기'는 충분히 넘치는 것을. 김수우/시인 |
리뷰
본전생각
어느 날의 횡재
동아일보 [이 아침에 만나는 시]
어느 날의 횡재 - 최영철
시장에 들어서며 만난 아낙에게 두부 한 모 사고
두부에게 잘게잘게 숨어든 콩 한 짐 얻고
주름투성이 꼬부랑 할멈에게 상치 한 다발 사고
푸른 밭뙈기 넘실대며 지나간
해와 바람의 입맞춤 한 아름 얻고
시장 돌아나오며 늘어선 아름드리 조선 소나무
어깨 두드려주는 덕담 한 마디씩 듣고
자리 못 구해 그 아래 보따리 푼 아지매
시들어가는 호박잎 한 다발 사고
호박이 넝쿨째 넝쿨째 내게로 굴러 들어오고
하루 공친 공사판 박씨 무어라 시부렁대는
낮술 주정 한 사발 얻어걸치고
아줌씨가 받아먹을 잘 달구어진 욕지거리
무단히 길 가던 내가 공으로 받아먹고
성난 볼때기 가만가만 어루만지는 저물녘 해
내 뒷덜미에 와서 편안히 눕고
내일 뜰 해는 저 산동네 입구 강아지 집에 먼저 와 있고
아무렴 그렇게 되로 주고 말로 받고
말로 주고 가마니로 얻고
- 시집 '호루라기'(문학과지성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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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복권이라도 된 걸까? 횡재를 했다고 콧노래를 부르며, 어깨를 흔들며 걷는 저 시인을 살며시 쫓아가보니, 허름한 비닐봉지에 두부 한 모, 상치 한 단, 호박잎 한 다발이 고작이렷다. 게다가 솔솔 풍기는 이것은 영락없는 홀아비 내음새-. 쯧쯧 혀를 차려다보니, 저 웃음, 저 노래, 저 출렁이는 어깨춤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찾고 또 찾던 보물이 아니던가? 저 보물을 고작 푸성귀 몇 단 값으로 샀다니 정말로 '횡재'한 것 아닌가? 저 정도의 비용이라면 우리도 날마다 누리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찌푸린 얼굴은?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돈보다 '느끼고, 감사할 줄 아는 재주'가 아닌가? 벌거숭이로 태어난 우리에게 이 세상은 그야말로 횡재가 아닌가?
- 시인 반칠환
5월
‘5월’
최영철(1956~)
왕피천 바닥이
알 낳고 죽은 은어로 가득하다
봄 지나 여름으로 가던 따끔따끔한 햇살들
투명한 수의를 만들며 개울을 덮는다
갈매기 몇 마리 물어뜯다 간
주검의 사타구니 사이
옹알옹알 알들이 깨어나
제 어미의 길을 간다
아니라아니라 물길을 거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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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염천, 은어란 이름은 산들바람보다 시원스럽다. 어느 간물 속에서 급류를 향한 숨결을 가다듬으리. 은어의 가장 큰 특장은 위턱이 희고 아래턱이 풀색이란 점. 문지르면 그냥 풀물이 들 것 같은 은어. 울진 왕피천은 은어들이 바다로 뛰쳐나가는 곳, 다시 죽으러 돌아오는 곳. 시인은 투명한 수의를 덮는 물속의 햇살을 들여다본다. ‘아니라아니라 물’의 생사가 바쁘고 눈부시다.
<고형렬·시인>
시가있는아침]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