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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론

 

우리가 잠시라도 두드리지 않으면

불안한 그대들의 모서리와 모서리는 삐걱거리며 어긋난다

우리가 세상 어딘가에 녹슬고 있을 때

분분한 의견으로 그대들은 갈라서고

벌어진 틈새로 굳은 만남은 빠져나간다

우리가 잠시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그 누가 일어나 두드릴 것인가

무시로 상심하는 그대들을 아프게 다짐해줄 것인가

 

그러나 더불어 나아갈 수 없다면

어쩌랴 아지 못할 근원으로 한쪽이 시들고

오늘의 완강한 지탱을 위하여 결별하여야 할 때

팽팽한 먹줄 당겨 가늠해 본다

톱날이 지나가는 연장선 위에

천진하게 엎드려 숨죽인 그대들 중

남아야 할 것과 잘려져 혼자 누울 것은

무슨 잣대로 겨누어 분별해야 하는가를

 

또다시 헤어지고 만날 것을 빤히 알면서

단호한 못질로 쾅쾅 그리움을 결박할 수는 없다

언제라도 피곤한 몸 느슨히 풀어 다리 뻗을 수 있게

-자나 +자로 따로 떨어져

스스로 바라보는 내일이 있기를

수없이 죄었다가 또 헤쳐 놓을 때

그때마다 제각기로 앉아 있는 그대들을 바라보며

 

몽키스패너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이스플라이어의 꽉 다문 입술로

오밀조밀하게 도사린 내부를 더듬으며

세상은 반드시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

제나름으로 굳게 맞물려 돌고 있음을 본다

 

그대들이 힘 빠져 비척거릴 때

낡고 녹슬어 부질없을 때

우리의 건장한 팔뚝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누가 달려와 쓰다듬을 것인가

상심한 가슴 잠시라도 두드리고

절단하고 헤쳐 놓지 않으면

누가 나아와 부단한 오늘을 일으켜 세울 것인가.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 작품은 가끔 복잡한 현대 속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인간관계를 생각해 보게 해준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이 시는 연장론이라는 제목부터가 좀 특이하다고 할 텐데요. 서정시에 대패, , , 망치, 몽키스패너, 바이스프라이어 등과 같은 연장들이 등장하는 게 색다른 것이지요. 이 모든 연장들은 각기 생김새도 다를 뿐 아니라, 쓰임새 또한 차이가 나는 것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연장들의 모습은 마치 우리 인간들이 각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생김새와 개성, 그리고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실과 서로 대응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점에서 우리는 이 시의 제목인 연장론에 담긴 뜻과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시가 연장들의 생김새와 쓰임새를 말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연장에 비유해서 사람들의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이야기하려고 한다는 점을 말입니다.

이 시에서 힘주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각양의 연장들이 우리의 삶에 모두 필요하다는 사실을 통해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서도 화해와 협동을 이루어 가야만 한다는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각개의 연장들이 서로 제 기능을 다하면서 서로 함께 어울려야만 어떤 작업이든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듯이, 인간들에 있어서도 자기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상부상조해야만 바람직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나아가서 사람다운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현실의 세계상은 과연 어떠합니까.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지역과 지역, 인종과 인종, 국가와 국가 등은 서로 삐걱거리며/ 어긋나고/ 갈라서고/ 빠져나가고/ 녹슬고 있는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더욱 고단하고 힘들어지는 것이겠지요. 바로 여기에서 이 시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서로 단절되고 불신이 깊어만 가는 시대에 있어서 서로 화해하고 협동함으로써 바람직한 삶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조화의 사상, 평화의 철학이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연장과 일의 관계, 개인적 실존과 사회적 삶의 관계는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각기 개성과 다양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고 통일을 지향해 나아가는 데서 올바른 현대적 삶의 지평이 획득될 수 있다는 소중한 깨달음과 확신이 연장의 비유를 통해서 적절하게 형상화된 것입니다.

☞ 「오월 서정시의 몇 가지 표정, 김재홍, 1989. 5. 현대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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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친 날의 풍년가

          최 영 철

 

 

 

어느 봄날 춘궁기 주막거리 외상값 떼먹고

깡마른 들판을 내팽개치고 나온

그들은 지금 인력시장 옆 구멍가게에서

주전부리가 한창이다 일당 놓치고

라면에 빵에 늦은 아침을 때우는데

마침 가는 빗줄기가 그들이 앉은 평상 위로 떨어졌고

초가을 가랑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 중 하나

에이 오늘도 공쳤다며 막걸리 서너 통 바닥에 늘어놓았다

일찍부터 줄 선 젊은 아이들 보며

오늘 또 공친 줄 벌써부터 알았던 중늙은이들이

입맛 다시며 엉덩이 당겨 앉으며

때마침 마누라에게 고해바칠 핑계거리가 되어준

가랑비가 고마웠던 것이다

먹다 만 라면 국물 동그란 파문으로 깨어나

주섬주섬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던 훈김들이

빗줄기에 덜미가 잡혀 처음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오늘은 공친 날, 대포 한 잔 하는 사이

새우깡이 젖고 히끗하게 날선 머리카락이 젖고

어제도 그제도 땀을 받아먹지 못해 빳빳해진

작업복이 젖고 있었다 후줄근히 어깨 힘을 풀고

막걸리 두어 잔에 비는 땀처럼

둘러앉은 대여섯을 골고루 적셨다 젖을 만큼 젖자

한나절 가대기를 하고 난 몸처럼 모두 말수가 적어졌고

젤로 늙어 보이는 영감 하나

시키지도 않은 노랫가락을 뽑아낸 것이었다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금수강산 풍년이 왔네 지화 좋다 얼씨구나,

웬 느닷없는 풍년가냐고 머쓱해 하던 사내들

늦게 감 잡고, 노가다 일당은 흉년이라도

들판 나락은 풍년이라네 얼씨구절씨구 풍년이라네

미리 약속이나 한 듯 으쓱으쓱 모 심고

덩실덩실 벼 베는 어깨춤을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 읽을 때 평범해 보이는 시가 있습니다. 두 번 읽고 세 번 읽을 때 시가 보여주는 풍경들이 차츰 진득해지고 네 번 넘게 읽을 때 눈밑 어딘가 묵직한 통증 같은 것이 지나가는 경험이 가능한 것이 시의 세계입니다. 공친 날의 풍년가가 그려주는 세계가 그렇습니다. ‘공친 날풍년가도 이 현란한 2000년대에 시제로 삼기에는 꺼려지는 말들이지요. 남루하고 촌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시에 등장하는 중늙은이 사내들의 모습은 우리 현실의 현재형이지요. 농촌 어디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가난한 농민들이 일거리 없는 춘궁기의 깡마른 들판을 나와 노가다판 일용직 노무자로 가기 위해 인력시장에 모여 앉아 있습니다. 일용직 인력시장에서도 경쟁력이 떨어지는 중늙은이사내들, 하루 일거리를 또 놓친 그들의 남루한 아침에 내리는 빗줄기가 시 전체의 이미지를 살금살금 만져주며 나직하게 이끌어갑니다. ‘라면 국물’-‘막걸리’-‘으로 연결되는 액체 이미지는 내리는 빗줄기의 액체성 속에서 조화롭게 결합하며 이미지의 구체성을 만듭니다. 기화된 훈김들도 빗줄기에 덜미가 잡혀 처음 자리인 국물(액체)로 돌아오는데요.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봄비의 낭만성 대신 먹고사는 일의 현장인 대지를 적시는 봄비의 생산성이 남루한 사내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환기됩니다. 농사의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인 는 구체적 노동의 물증인 으로 결합하여 사내들을 골고루 적신 자리에서 공친 날흉년-결핍풍년가풍년-충만을 역설적인 슬픔으로 조직하며 결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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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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