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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떠난 집새에게

 

 

빈 새장이 노래하네

집새 날아가 버린 그루터기

둥우리만 남아 노래하네

새가 없으면 새장으로

가슴이 없으면

싸늘한 등으로 노래할 수 있네

 

어슴푸레한 미명에 깃털 털어내며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눈물샘 마르면 까칠한 정강이로

정강이 시리면

갈라진 발바닥으로 노래할 수 있네

 

새가 없으면 모이통이

모이통 비면

한 점 먹고 하늘 보던

물그릇이 노래하네

집새 떠난 새장이 노래하네

 

해질녘 뒷산까지 울려퍼진

빈 둥우리의

모이통의

물그릇의 노래소리

길 떠나 길 잃은 집새들 돌아오네.

 

갇힌다는 것과 열려 있다는 것.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은 열려 있는 쪽에 속하기를 원할 것이다. 자유와 속박,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대체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기를 원하고 있을까? 최영철 시인은 시 길 떠난 집새에게에서 까다로운 철학적 명제로 이 문제를 내놓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 시는 기르던 새가 날아가버린 빈 새장을 보며 그 새를 그리워하고 그 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평범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결국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갇히는 기쁨, 그것도 자유로움을 보통 사람보다 더 원하는 기질을 갖는 게 보통인 시인인 자신이 생각하는 갇힘에 대한 찬미라고 생각된다. ‘새장으로 상징되는 속박 -그것은 집이나 가족, 자신의 일 등 모든 일상에서 우리가 붙들려 행해야 하는 역할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스스로 택하는 울타리일 뿐 악의적인 속박이 아니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나는 김승희의 시 지붕 아래서를 떠올렸다. 비슷해서가 아니라 반대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 인간이 몸 담고 있는 이 낯익은 공간은 여러 가지의 역설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지붕이라고 부르면 따뜻한 보호의 느낌을, ‘이라고 부르면 가두어버리는 구속의 의미와 단절의 의미가 된다. ‘새장이라고 부른다면 이 좁은 공간이 주는 느낌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갇힘과 속박이 된다. 김승희는 그녀의 시에서 해질 무렵,/ 떨어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아, 이제, 더 이상 지붕 아래서/ 살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라고 노래했다. 보호와 안락의 의미를 가진 집과 일상에 대한 환멸이다. 여자의 공간이라고 알려진 에 대한 그의 철저한 반항과 철저한 자유에 대한 의지, 그래서 그녀의 시는 참신한 발견을 독자들에게 주었었다.

그런데 이 시는 정반대로 새장을 속박의 공간이 아닌 노래의 터로 그리고 있다. 이것 또한 새로운 발견이다. 사실 이 시에서 던지고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노래이다. 새가 날아가버린 후에도 빈 새장이, 새가 있던 그 자리가, 새가 먹던 모이통이, 새가 한 점 먹고 하늘 보던 물그릇이 여전히 노래한다. “이가 없으며 잇몸으로, 눈물샘 마르면 까칠한 정강이로, 정강이 시리면 갈라진 발바닥으로 노래할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어쩐지 눈물겨워진다. 그는 상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 모든 잃어버림으로 흔들리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노래는 이 시인의 시쓰기이다. 시인의 가장 치열한 살기는 시쓰기이므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고달픈 삶의 모든 국면에서도 그의 삶의 종교가 되어 있는 바로 그 노래하기(시쓰기)’이다.

다시 좀 쉽게 이 시를 읽어 보기로 한다. ‘길 떠난 집새는 늘 일상의 자자분한 일거리들에서, 고운 때가 묻어 있는 살림살이에서, 가족들에게서 떠나고 싶어하는 시인 자신이었다고. 그래서 그는 이 새장에서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린 거라고.(몸은 떠날 수도 있지만 몸을 집에 둔 채로 마음이 훌쩍 떠나가버릴 수도 있잖겠는가. 그러니 시인이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었는지 여전히 어스름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왔는지 따지지는 말자.) 그러면 시점은 새장 밖에서 새를 들여다보는 주인의 입장이 아니라 새장 밖에서 자신이 몸담았던 새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새의 입장으로 바뀌게 된다. 새는 늘 자신은 새장 안에 갇혀 있는 거니까 기회만 나면 푸르고 넓은 세상으로 날아올라 가버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본능이 시킨 것일 수도 있고 통념이 시킨 일일 수도 있다. 아무튼 새장에 갇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게 통념이니까. 하지만 그는 집새였고 집새는 광활한 천지에서는 노래부를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새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 노래한다. 빈 둥우리, 조그만 그루터기, 모이통, 물그릇, 이 모든 것들이 노래의 원천이었고 지금도 노래의 여운에 싸여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새는 돌아올 수밖에 없다.

속박이라고 생각하던 공간이 자기의 보금자리였음에 대한 깨달음, 그래서 시인은 새장으로 돌아온다. 속박이라고 생각했던 그 답답하고 조촐한 생활과 의무와 어려움, 그것 모두에 노래가 서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새장 속에서 그는 자유를 노래할 수 있고, 고통 속에서 그는 노래하는 일의 가치를 발견한다. 아니, 고통 그 자체가 그를 노래하게 한다. 그리고 노래하기 때문에 새는(시인은) 아름답다.

내가 아는 최영철 시인은 말이 없다. 글쓰는 사람들은 모두 글로 자신을 표현하는 데 능숙하지만, 말로 표현하는 데는 서투른 사람도 있고 능숙한 사람도 있다. 그는 말로 표현하는 데는 서투른 편이다. 말이 없는 사람은 대개 닫혀 있는 것처럼,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듯 싶다. 새장 밖에서 자신이 버리고 나온 빈 새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마 시인 자신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결코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꺼이 그 좁은 새장 안 조촐한 자리에 둥우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일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새는 노래할 수 있으며(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시인은 시를 쓸 수 있으며), 때문에 그가 새장 안에 있다(세상과 단절된다 또는 소유가 결핍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시인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다른 작품들에서도 최영철 시인의 시각은 대체로 내려다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다. 도시 소시민의 삶, 그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의 삶. 그의 시는 빠르게 전환되는 물질 중심의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거칠지 않으며 끈끈하고 욕심 없고 따뜻하다. 그래서 사실 당당하기까지 하다(그의 시집 제목의 하나가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임에 주목하자. 이는 화장실 문화의 세대교체를 말하고 있는데 풍요로운 물질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집새가 자기 새장으로 돌아와서 모이통에서 모이를 쪼고 물통에서 물을 머금으면서 노래로 세상을 가득 채우기를 바란다. 갈라진 발바닥으로, 까칠한 정강이로, 싸늘한 등으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천부의 목청으로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자물쇠는 툭 쳐서 조금 열어 놓아도 좋을 것이다. 그의 새는 갇힌 것이 아니라 새장 안에 스스로의 뜻으로 거주하는 것이니까.

갇힘과 풀림, 양애경, 1996. 8. 현대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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