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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날

 

 

헌 달구지 지나간 발자국 멀리

패인 황톳길 복날

칼날처럼 서늘해지는 속을

또 한 번 다치려고

시장 좌판에 앉아 마시는

칼날 지나간 더운 국물,

한은 쉼없이 담금질하는 것

황톳길 달구지 위에

오래 짓눌려

쫄깃해진 피

세파에 절어 단내가 나는

구부정한 서른여덟,

선지에 베어 더 서늘해진 속이

이제 조금 알겠다는 듯

목이 메는 복날.

 

전반적으로 허약하고 쇠잔한 느낌을 주는 이 달의 시단 가운데 다음의 젊은 시인 네 사람의 작품이 활력을 불어넣는다. 유하의 삑삑새가 버린 울음으로(현대시 10월호), 김혜수의 그녀에게선 양파냄새가 난다(현대시학 10월호), 강연호의 비단길(현대시학 10월호), 최영철의 복날(현대문학 10월호)이 그것이다. 이 시인들은 모두 30대들이다. 그 나이에 걸맞게 그들은 한결같이 섬세한 언어감각과 예리한 시적 인식을 보인다. 최근 시의 병폐 가운데 하나로 시적 언어가 너무 진술적이고 쓸데없이 길게 늘어지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다변으로 시상들을 일일이 설명해 나가는 시들을 자주 보게 된다. 이미지의 연결과 충돌로 독자들의 마음속에 시상과 정서를 각인시키는 시들이 절실히 요망되는 것이다. 위의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요망에 상당 정도로 부응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위의 젊은 시인들의 작품이 대체로 깊고 그윽한 삶의 정서를 환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자연적 나이는 아직 젊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들의 시에는 삶의 격랑을 한바탕 겪고 난 후 체득되는 깊고 아득한 삶의 질감이 배어 있다. 그들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생의 잠언적 진술이 엿보이는 것도 바로 이와 관련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위의 작품들은 젊음의 섬세한 감각과 삶의 깊은 정서가 적절히 어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위의 작품들을 읽어 보자.

최영철의 시 복날은 압축과 절제의 구문으로 짤막한 시행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 짤막한 시행의 행간 속에서 아득히 깊고 그윽한 정서적 울림이 진동하고 있다. 요설적이고 장황한 진술의 시들에 아주 식상한 터에 이러한 함축적인 시들을 만나니 우선 반갑다. 이 시는 복날개고기를 먹으면서 느끼는 심정을 시화하고 있다. 아마도 시인은 황톳길의 달구지에 끌려가는 개를 바라보면서 시장 좌판에 앉아 개고기를 먹는 것 같다. 물론 이 시에는 그러한 구체적인 정황이 생략되어 있어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굳이 그러한 정황이 아니더라도 황톳길달구지의 토속적인 분위기와 역시 개고기의 토속적인 함축이 절묘하게 충돌하면서 어떤 깊은 정서가 환기된다. 그 깊은 정서는 바로 이다. 시인은 개고기를 칼날 지나간 더운 국물이라고 말한다. 칼로 베어져서 뜨거움을 발산하는 개고기에서 시인은 의 정서를 느끼는 것이다. 또 그러한 한이 깃든 개고기를 먹는 것을 칼날처럼 서늘해지는 속을/ 또 한 번 다치려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개고기를 먹는 것은 시인의 마음 속에 맺힌 을 더욱 심화시키는 행위에 해당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한은 쉼 없이 담금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복날에 죽어가는 이 시인의 과 등가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황톳길 달구지 위에/ 오래 짓눌려 쫄깃해진 피의 한맺힘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한맺힘이기도 한 것이다. 이 시는 복날’ ‘개고기 음식과 같은 우리의 토속적인 문화와 식성에서 깊이 있는 시적 체험을 발휘하여 우리의 뿌리깊은 전통적인 정서를 일구어낸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 「젊은 시인들의 섬세한 감각과 깊은 정서, 고형진, 1993. 11. 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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