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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의 진정한 의미/장석주/현실시각 2/85

 

  최영철이 선보인 세 편의 작품은 하나같이 반복의 수법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리드미컬한 운율감을 부각시키고 있다. 최영철은 이러한 운율감을 새롭게 형성해 나아가면서 언어와 언어 사이의 매듭을 유연하게 이어가는 시인으로, 작품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나무에서 특히 그러한 특성을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라는 제목은 매우 상징적이다. 시인이 언어를 다루고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유독 시적일 수 있는 요인 가운데 하나는 그러한 것들을 실제보다 축소시키거나 과장시킴으로써 시적 상황을 낯설게 만드는 데 있는 바, 최영철의 작품은 후자의 방법을 사용한 대표적 실례이다. 하루 스물 네 시간, 일년 삼백육십오 일의 자연적인 시간 관념을 무시하고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짤막한 순간을 주관적이요, 문학적인 시간으로 전환시켜 급속도로 변화하는 인생 혹은 삶의 여러 가지 양태를 그려보이고 있다.

  이와같이 변화무쌍한 것이 인생이고 자연임을 관념적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절감하는 최영철은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소망을 숨길 수가 없게 되고 그러한 심정을 형상화하기에 이르는데, 바로 나무라는 작품이 그러한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무를 심지 않는다 나무 이외의 뜬구름도

  뜬구름만큼의 행복도 믿지 않는다 믿을 것이라곤

  그래도 나무 뿐이다 싫으나 좋으나 제자리걸음의

  뜬구름 뿐이다 뜬구름처럼 가냘픈

  행복 뿐이다 그러나 나는 오래 전부터

  나무 따위는 그냥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인

  흘러가거나 지겨울 뿐인 행복 따위는

  믿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무엇인가 믿기 위해서는

  나무라도 몇 그루 서 있었으면 좋겠다 푸른 하늘에

  뜬구름 둥실 떠 있는 내일일지라도

                 -나무부분

 

  나무와 뜬구름에 대한 화자의 심경이 행갈이가 될 때마다 뒤바뀌지만 이것은 모든 인간들의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발견되는 내적 풍경에 다름 아니다. 나무나 뜬구름에 대한 불신나무나 뜬구름에 대한 또다른 믿음나무나 뜬구름을 상징하는 행복에 대한 불신나무나 뜬구름이라도 믿고자 하는 소망으로 시의 전개가 숨가쁘게 이루어지면서 시인은 행복에 대한 믿음과 불신, 그리고 기대를 한꺼번에 오버랩시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언어를 이어가는 시적 기교가 예사롭지 않은 작품으로 흥미있는 독서를 가능케 해준다.

  그러나 작품 지금도 지금도는 알레고리 수법을 동원한 까닭에 교훈적일 뿐 아니라 진부한 느낌을 배제하기 어렵다. 만남, 화합, 결속 등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하여 돌고 있는 레미콘 속의 시멘트와 등 돌린 인간들을 대비시킨 것은 관념적인 시조 시인들이 절개를 강조하기 위하여 곧게 뻗은 대나무와 인간들의 변절행위를 대비시키는 관습적인 수법과 그리 멀지 않다. 대상을 해방된 상상력으로 자유롭게 투시하지 않고 계산된 의도 혹은 인위적 논리를 가지고 바라다보았을 때 그 대상은 시인의 의도와 논리에 구속되고 마는 것이다.

 

  지금도 레미콘은 돌고 있다

  그대들이 잠들어 있거나

  명상에 젖어 온 밤을 지새울지라도

  미묘한 음반처럼

  레미콘은 돌고 있다

  등 돌린 그대들의 화합을 위하여

  모래와 자갈은 아프게

  물과 시멘트는 성질을 죽이고

  레미콘은 돌고 있다

  그대들이 까마득히 잊고 있을 때에도

  길을 걷거나 걷지 않을 때에도

  따뜻한 화합을 위하여

  그대들 먼발치에 우뚝 멈추어선

  콘크리트는 위험하지

  순하게 섞여 물에 물 탄 듯

  물에 물 탄 듯 부서지지 않는

  시멘트는 모래가 되고

  모래는 자갈이 되어

  지금도 레미콘은 돌고 있다

  오랜 미아로 서성대는

  그대들의 어깨 너머

  다시 만남을 위하여

  알게 모르게 절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때에도.

                -지금도 지금도

  새로운 사물이나 새로운 사람들에게 걸었던 기대 내지는 호기심이 항상 백 퍼센트 만족스럽게 충족되는 경우란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그러한 기대와 호기심이 어느 정도나마 충족되었을 때, 더욱이나 그들에게서 발전의 빛이 확실하게 비추어 올 것을 조금이나마 확신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의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상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애정이 담긴 채찍의 언어를 조심스럽게 전달할 뿐이다.

 

  잠시눈을감았다뜨니

  그새어둡게날이저물어

  꿈이아닌가

  하늘위로무심코걸어가는

  코끼리의발바닥

  잠시눈을감았다뜨니

  온유하던뭇날짐승

  무더기무더기로떨어져

  이럴수가이럴수가

  잠시눈을감았다뜨니

  청명한그대어깨위로빗방울

  웬일일까그새물이넘쳐

  우리들세상이서서히숨막히게

  잠겨가고가라앉고

  잠시눈을감았다뜨니

        -잠시눈을감았다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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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502-Copyrights 1995-, 매일신문사

 

 

 

기도

 

최영철

 

 

 

 

미사 시간에 한 아이가

 

미사 볼 때 제발 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내 조는 사이에 하느님이 다녀가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무엇을 빌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는 그저께 집나간 반달이가

 

부디 좋은 주인 만나 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구박받다 울며 돌아왔을 때

 

집 비우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빌었다

 

저 아이에 비하면 너무 큰 욕심인 것 같아

 

제발 무서운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잡아먹히더라도 개소주 같은 건 안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

 

아이들은 하느님이다. 부처님이다. 마호메트님이다. 빛이요, 물이요, 공기이다. 티 없이 웃는 아이의 모습처럼 세상에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지금 하느님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다. 햇살 한 줌보다 더 착한 소원. 아마 하느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 같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빌어볼까. 이 지구상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달라고 빌어볼까. 아프리카 여성들 음핵 절제당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빌어볼까. 중국 장기 밀매업자들에게 간 빼앗기는 사람이 없도록 해달라고 빌어볼까. 이런 기도는 너무 사소해서 하느님이 쉽사리 들어주시지 않을 듯하다.

 

엄마 없이 할머니하고 사는 소라 어린이날 혼자 지내지 않도록 해달라고 빌어볼까. 한 달 새 체중이 10빠져 췌장암 검사해놓고 기다리고 있는 옆집 윤식이 엄마 별일 없도록 해달라고 빌어볼까. 이런 기도는 너무 커서 잘 들어주시지 않을 듯하다.

 

옳지, 술집 종업원들에게 두들겨 맞은 아들 대신 주먹으로 복수한 어떤 재벌, 경찰에서 무사히 풀려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빌어야겠다. 아마 하느님은 들어주실 거야. 이 얼마나 눈물겨운 숭고한 부정(父情)인데.

 

장옥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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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동아일보. 행복한 책 읽기

 

기도

 

최 영 철

 

미사 시간에 한 아이가

미사 볼 때 제발 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내 조는 사이 하느님이 다녀가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무엇을 빌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는 그저께 집 나간 반달이가

부디 좋은 주인 만나 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구박받다 울며 돌아왔을 때

집 비우는 일 없게 해달라고 빌었다

저 아이에 비하면 너무 큰 욕심인 것 같아

제발 무서운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잡아먹히더라도 개소주 같은 건 안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

내가 올린 몹쓸 기도를 떠올려 본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이다. "신발을 가져간 놈이 누군 줄 알고 있어요. 제가 신발 코에 쇠 부지깽이로 무좀이라고 써 놓았거든요. 근데 훔쳐간 놈이 자기가 무좀이라고 지져놓았다는 거예요. 하느님, 그 녀석의 무좀이 도져서 목발을 짚게 해주세요."

기도가 잘못 전달이 되었는지 아직도 내 발가락 사이엔 무좀균이 들락날락한다.

, 다시 하나 떠오른다. 고등학교 이학년 늦가을 때다. 아버지가 아파서 가을걷이가 늦어졌다. 간경화 판정을 받은 아버지로부터 농사일을 다 떠맡자니 시험이 걱정이 되었고, 중간고사 핑계로 들녘에 어린 동생과 어머니만 남기고 군립도서관에 가자니 양심이란 놈이 수수이삭처럼 도리질을 쳤다. 시험과목을 논두렁에 펼쳐놓고 벼를 베었으니, 헛된 기도만이 두렁거리는 논두렁이었다.

"하느님! 제가 공부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거 아니잖아요. 다 아시죠? 그러니까, 아는 것만 나왔으면 좋겠고요, 찍는 족족 성령이 임하시고요, 가능하다면 인쇄실에 불이 나서 시험이 연기되거나 기말고사만 봤으면 좋겠어요. 소원을 이뤄주시면 교회도 다시 나가고 헌금도 많이 할게요. 어미 염소가 새끼 낳은 거 아시죠 염소 팔아서 헌금할게요. 아멘."

하느님을 겁주는 기도라니, 생각해 보면 참 어이없고도 끔찍한 기도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어린이들의 순수한 기도문들이 올라와 있다. 하느님도 웃으신 기도문 중 몇 개만 옮긴다.

"만일 알라딘처럼 마술램프를 주시면, 하느님이 갖고 싶어 하시는 건 다 드릴게요. 돈이랑 체스 세트만 빼고요.(라파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학교에 못 갔던 날 있잖아요. 기억하세요? 한 번만 더 그랬으면 좋겠어요.(가이)"

"하느님은 천사들에게 일을 전부 시키시나요? 우리 엄마는 우리들이 엄마의 천사래요. 그래서 우리들한테 심부름을 다 시키나 봐요. (마리아)"

"사랑하는 하느님, 왜 새로운 동물을 만들지 않으세요? 지금 있는 동물들은 너무 오래된 것뿐이에요.(죠니)"

"하느님, 사람을 죽게 하고 또 사람을 만드는 대신, 지금 있는 사람을 그대로 놔두는 건 어떻겠어요?(제인)"

내가 하느님이라면 아이들의 기도만 듣겠다. 이제 기도는 하지 말고 하느님의 너털웃음이나 엿들어야겠다. 한없이 낮게 기도해야 하리라. 작은 기도만이 무릎에 연꽃을 피우리니.(이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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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오늘은 버릴 것이 없었습니다 / 최영철(1956~)

 

 

부산일보

입력 : 2021-08-31 18:52:59수정 : 2021-08-31 18:55:15게재 : 2021-08-31 18:58:41 (22면)

 

말수 적은 전화라도 곁에 있어 주어 고맙다, 한 장 남은 달력 팔랑대는 며칠, 내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아 고맙다, 다 하지 못한 말들, 이리 오래 받아주어 고맙다, 입 열면 모처럼의 꼬드김에 넘어갈까 봐 입 앙다물고 잠자코 있어주어 고맙다, 허튼 짓거리 하나 안 하나 종일 귀 곤두세우고 나만 노려보고 있어 고맙다, 저기 저 아이들처럼 외로워 괴로워 못살겠다고 쉬지 않고 보채고 소리 지르고 부르르 몸 떨지 않아 고맙다, 내가 성가실까 봐 언제인지도 모르게 은근슬쩍 용건만 쑤셔넣고 달아나버려 고맙다, 정말 이게 마지막이라고 말해 주지 않아 고맙다, 내일 또 올게, 울지 말고 내 꿈 꿔, 심심하면 이거나 먹어, 이 말만은 하지 않으려 했는데 다시는 못 볼지도 몰라, 주먹 쥐고 뻔한 대사 중얼거리며 허공에 하트를 그려 놓고 가지 않아 고맙다

-시집 〈멸종 미안족〉(2021) 중에서-

 

한번 사랑을 하면 상대방이 아무리 배신을 해도 끝까지 사랑해 주는 시인이 있다. 젊고 패기만만했을 때 사랑했던 시 때문에 평생을 시만 가지고 지내온 시인이 있다. 시도 사람이 만든 것인데 어찌 시라고 사람을 배신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시 때문에 벼랑 끝 시간들을 견디게 해주었다고 시에게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는 시인이 있다. 시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그는 말하지만 이제 삶 자체가 시가 되어가는 시인이 있다. 아무도 옆에 없어도 모두를 보듬고 가는 시인. 남들은 이 시인을 느림의 시인이라고 말하지만, 시와 삶에 대한 그의 지독한 사랑 앞에 감히 그를 독한 시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지독한 시인의 14번째 매운 시집을 읽고 있으면 지독한 시인이 멸종되어가는 현실이 미안해서 눈물이 난다. (이규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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