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낡은 집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앉은

집 속에는

비가 새고

바닥이 젖었다

써 놓고 부치지 못한 편지

지우지 못한 비밀이

가득하다

누가 밖에서 악쓰는 소리

가지고 있던 열쇠 꾸러미를

다 넣어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1.

禪家에서 말하는 사람의 생애란 때로 허망하기 그지없을 때가 있다. 꿈속에서 종기를 앓는 것으로 비유한 禪家龜鑑의 한 대목도 우리의 뒤통수를 친다. 곪아 터지는 종기를 치료한다고 사람들은 무진 애를 쓰지만 그 꿈에서 깨어나는 것만큼 완전한 치료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꿈에서의 깨어남이 깨달음의 경지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욕심만이 그 종기가 아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 하는 일도 모두 종기를 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지켜내려 얼마나 애를 쓰고 남을 속이고 눈치를 보며 노심초사해야 하는가. 그러는 가운데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란 자취를 감추고 가식과 허위의 발로 하루하루 연명해야 한다.

문득 나의 종기는 무엇일까 돌아보았다. 나 자신에 깊이 침잠해 볼 때 같이 깊어진다는 경험을 우리는 해왔다. 이제 나에게 드러난 종기는 시에 대한 집착이다. 좋은 시를 쓰겠다는 생각의 저편에는 상상도 못할 불순한 생각이 도사리로 있음을 발견한다. 이규보는 그것을 詩廦이니 詩魔이니 하는 말로 표현하였거니와 입신과 출세의 수단으로 시를 생각하는 경향은 우리에게도 늘 있어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시 쓰는 일에 눈이 뜨이고 살아온 지난 십여 년의 세월을 종기 앓는 일 정도로 치부해버리기란 쉽지 않았다. 무슨 호사를 바란다고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닌데 이마저 부질없는 일로 돌려야 하나. 도리어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한 부분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이것이 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내 스스로 떳떳치 못한 자리를 지키게 했다니,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괴롭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는 너무 조급하고 엉성했다. 치열하지 못하고 내 안의 나를 바로 보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 모습을 성실히 밝혀내지 않았다. 속았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속인 무수한 사물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종기임을 이제 조금씩 깨닫게 된 것이다.

 

2.

이것이 나의 깨달음의 도정이라면 그 길에 훌륭한 도반이 한 사람이 있다. 그이가 바로 최영철 시인이다. 같은 동인으로 얼굴을 마주친 지 여섯 해, 삶과 시에서 내가 받은 영향은 이제는 조금씩 정리하게 된다.

기실 나는 그의 생활을 답답하고 어리석게 보았다. 도대체 요령부득에 빠진 생활 태도를 보며 그런 인간이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차라리 기적이요 그나마 남은 우리 시대의 적선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늘 지기만 하는 사람, 늘 양보만 하는 사람, 내세우기도 전에 먼저 들어갈 생각을 하는 사람. 내가 정리해 보는 최영철의 이미지이다. 멀리 뛰어도 모자랄 판에 아직도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음을 기쁘고 반가워한다. 모르긴 해도 어디서 그런 사람을 발견했다기보다 자신을 그렇게 돌려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몇 해 전 그는 서울 생활을 경험했다. ‘열음사의 서울 사무소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의연한 서울에 슬그머니 발을 들여놓았다. 나는 그가 현실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맞춰나가는 시기가 온 것으로 생각했다. 뜻을 펼치자면 서울로 와야 하는 우리의 특수한 사정을 그도 인정했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그의 서울 생활은 일 년 반 만에 싱겁게 끝나버린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로서는 예상된 결과요 나에게는 무척이나 아쉬운 일이었다. 가끔 그의 사무실로 가 완전히 김빠진 듯한 그의 말을 들으며 그 속에서 촌철살인의 경구를 만나던 즐거움은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던가.

서울을 떠나는 심정을 그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서울은 온통 나날이 새로운 것들 뿐이었다. 하루라도 제자리에 붙박여 있는 것이 없었다. 날이 새면 늘 엉뚱하게 바뀌어 있는 서울의 사물에서 나는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것은 나의 상상력과 순발력의 부재를 반증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슬프고 원통했다.

 

서울이 자유로운 의식운동을 할 공간이 못된다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 그는 이렇듯 허허로이 귀향한다. 나는 그것을 굳이 낙향이라 말하지 않는다. 다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잘 보기 위해서 변방으로 가서 어슬렁거리며 맥을 놓고 사는 그의 모습이 나는 어쩐지 좋아 보이기만 한다. 물신화에 길들여지지 않고 맥을 풀고 느슨하게 산보하는 도중에 사물들이 흘려 보여주는 결정적인 모습을 발견한다는 그의 고백은 놀랍다. 시대를 앞서간다고 해서, 재빨리 변화하고 적응해낸다고 해서 사물의 본 모습을 바로 본다는 법은 결코 없다. 최영철은 시대의 뒤를 어슬렁거리며 따라가면서 본질을 본다.

그러나 이런 거창한 깨달음 보다 변방의 최영철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데서 더욱 값지다.

 

나는 변방에서 나의 장기인 휴머니티를 회복하였다. 사회면 기사의 한 구절에서 나는 다시 눈물이 솟구친다. 희망이 없는 세상, 원칙이 없는 세상이다. 이웃들의 원통한 아우성에 나는 대책 없이 가슴만 치며 운다. 나의 시가 그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함이 안타깝다.

 

안타까움이 어찌 그에게서 그치겠는가. 시에 대하여 겸허한 생각을 가진 이땅의 모든 시인에게 안타까움은 흘러 적셔진다.

 

3.

오랜만에 최영철 시인이 작품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낡은 집은 소품에 속할 짧은 시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담으면서 나는 이때까지 그에게서 보아온 것과는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1)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앉은

집 속에는

비가 새고

바닥이 젖었다

 

2)써 놓고 부치지 못한 편지

지우지 못한 비밀이

가득하다

 

3)누가 밖에서 악쓰는 소리

 

4)가지고 있던 열쇠 꾸러미를

다 넣어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나는 이 시를 번호를 매긴 것처럼 네 대목으로 나누어 읽는다. 단일한 심상을 극명히 부각시키면서도 유기적 연관관계를 따지자면 기승전결의 형식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짧은 시가 가지는 장점을 갖추었는가 하면 완결미를 주는 구조도 함께 담고 있다.

비가 새고 이윽고 적시는 낡은 집이 있다. 비에 젖었다는 이 상황은 어쩌면 더이상 아래로 떨어지지 못할 가장 낮은 상황을 암시한다.[1)] 그리고 그 안에서 써놓고 부치지 못한 편지가 놓여 있다. 회한을 가슴에 안고 살건 투명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건 누구에게나 정리하지 못한 찌꺼기는 있는 법이다. 시인은 그것을 비밀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했다[2)].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 있는데 그의 무의식을 뒤흔드는 외부의 압력이 밀려온다. 밖에서 악쓰는 소리가 그것이다. 조용하게 이어지던 시가 돌연 어떤 파문 같은 것에 한 번 흔들린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의식의 심연을 깨우는 것이기도 하다[3)].

그는 문을 열려고 열쇠 꾸러미를 들이댄다. 그의 손에는 제한된 숫자의 열쇠가 있다. 그리고 그가 들어가야 할 문은 대체로 그 열쇠 안에서 열려졌다. 그러나 웬일인지 오늘은 가지고 있는 열쇠를 다 써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돌발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이 문제는 오늘의 상황을 헤쳐나가지 못하는 장애요소이다[4)].

시인이 열려고 하는 문은 어떤 것일까.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무엇이 있다는 말일까. 적어도 이 시의 표면 공간에서 시인은 이것을 구체적으로 발언하지 않는다. 무엇을 추구한다는 말도 어디가 목적지라는 말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는 전적으로 상상에 의지해 그 행간을 읽어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기서 열리지 않는 문 속에 있다는 비밀스런 편지를 다시 주목하게 된다. 비마저 새는 낡은 집 안에 부치지 못하고 남겨둔 편지에는 무슨 비밀 이야기가 쓰여 있을까. 야박스럽게 떠난 옛 여인, 몰래 한 사랑의 기억들만 아니리라. 치장하고 세상을 살다가 내면의 공간으로 돌아와 반추해 보는 인간의 약하디 약한 고백이 거기에는 적혀 있지나 않은지. 짐짓 강한 척 해보이며 으스댔던 모든 허영의 껍질을 고해하는 일이나 아닌지.

그 문을 열고 회한의 가슴으로 껴안거나 모든 부조리를 척결하거나 조그만 안식을 구하거나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문은 닫혀 있고 지금 가지고 있는 열쇠로는 도대체 열 수가 없다. 어디선가 악쓰는 소리가 그를 더욱 초조하게 할 뿐이다. 해결의 실마리가 좀체 잡히지 않는 상황, 시인은 지금 그런 위치에 놓여 있음을 괴롭게 고백하고 있다. 희망 없고 원칙 없는 세상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어주지 못하는 시인의 자괴감의 표현으로도 보인다.

 

4.

낡은 집의 서사적 맥락은 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꿈속의 고통과 즐거움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문득 그 꿈속에서 깨어나야 함을 말하는 저 禪家龜鑑의 한 구절이 다시 생각난다. 그것이 막연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닐진대 보다 깊고 원숙한 세계를 향한 전망이 꿈에서 깨는 깨달음으로부터 나오리라 나는 믿는다.

☞ 「시대의 뒤를 어슬렁거리며 따라가기, 고운기, 1993. 9. 현대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