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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친 날의 풍년가

          최 영 철

 

 

 

어느 봄날 춘궁기 주막거리 외상값 떼먹고

깡마른 들판을 내팽개치고 나온

그들은 지금 인력시장 옆 구멍가게에서

주전부리가 한창이다 일당 놓치고

라면에 빵에 늦은 아침을 때우는데

마침 가는 빗줄기가 그들이 앉은 평상 위로 떨어졌고

초가을 가랑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 중 하나

에이 오늘도 공쳤다며 막걸리 서너 통 바닥에 늘어놓았다

일찍부터 줄 선 젊은 아이들 보며

오늘 또 공친 줄 벌써부터 알았던 중늙은이들이

입맛 다시며 엉덩이 당겨 앉으며

때마침 마누라에게 고해바칠 핑계거리가 되어준

가랑비가 고마웠던 것이다

먹다 만 라면 국물 동그란 파문으로 깨어나

주섬주섬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던 훈김들이

빗줄기에 덜미가 잡혀 처음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오늘은 공친 날, 대포 한 잔 하는 사이

새우깡이 젖고 히끗하게 날선 머리카락이 젖고

어제도 그제도 땀을 받아먹지 못해 빳빳해진

작업복이 젖고 있었다 후줄근히 어깨 힘을 풀고

막걸리 두어 잔에 비는 땀처럼

둘러앉은 대여섯을 골고루 적셨다 젖을 만큼 젖자

한나절 가대기를 하고 난 몸처럼 모두 말수가 적어졌고

젤로 늙어 보이는 영감 하나

시키지도 않은 노랫가락을 뽑아낸 것이었다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금수강산 풍년이 왔네 지화 좋다 얼씨구나,

웬 느닷없는 풍년가냐고 머쓱해 하던 사내들

늦게 감 잡고, 노가다 일당은 흉년이라도

들판 나락은 풍년이라네 얼씨구절씨구 풍년이라네

미리 약속이나 한 듯 으쓱으쓱 모 심고

덩실덩실 벼 베는 어깨춤을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 읽을 때 평범해 보이는 시가 있습니다. 두 번 읽고 세 번 읽을 때 시가 보여주는 풍경들이 차츰 진득해지고 네 번 넘게 읽을 때 눈밑 어딘가 묵직한 통증 같은 것이 지나가는 경험이 가능한 것이 시의 세계입니다. 공친 날의 풍년가가 그려주는 세계가 그렇습니다. ‘공친 날풍년가도 이 현란한 2000년대에 시제로 삼기에는 꺼려지는 말들이지요. 남루하고 촌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시에 등장하는 중늙은이 사내들의 모습은 우리 현실의 현재형이지요. 농촌 어디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가난한 농민들이 일거리 없는 춘궁기의 깡마른 들판을 나와 노가다판 일용직 노무자로 가기 위해 인력시장에 모여 앉아 있습니다. 일용직 인력시장에서도 경쟁력이 떨어지는 중늙은이사내들, 하루 일거리를 또 놓친 그들의 남루한 아침에 내리는 빗줄기가 시 전체의 이미지를 살금살금 만져주며 나직하게 이끌어갑니다. ‘라면 국물’-‘막걸리’-‘으로 연결되는 액체 이미지는 내리는 빗줄기의 액체성 속에서 조화롭게 결합하며 이미지의 구체성을 만듭니다. 기화된 훈김들도 빗줄기에 덜미가 잡혀 처음 자리인 국물(액체)로 돌아오는데요.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봄비의 낭만성 대신 먹고사는 일의 현장인 대지를 적시는 봄비의 생산성이 남루한 사내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환기됩니다. 농사의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인 는 구체적 노동의 물증인 으로 결합하여 사내들을 골고루 적신 자리에서 공친 날흉년-결핍풍년가풍년-충만을 역설적인 슬픔으로 조직하며 결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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