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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찾아가는 아홉 갈래 길

최 영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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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람들은 시 창작을 전문적이며 특별한 훈련이나 지식이 필요하고 천성적으로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되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시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와는 동떨어져 있어서 평범한 생활인의 경험이나 생각으로는 범접할 수 없다고 아예 담을 쌓아 버린 분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학교에서의 문학 교육이 잘못된 탓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대부분의 시들이 비일상적인 것인 데다 그것을 획일적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배웠으니 시를 골치 아픈 존재로 여길만도 합니다. 그러나 시가 생성된 배경이나 본래의 기능은 오히려 골치 아픈 것을 해소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또 갈수록 일상적인 소재와 평이한 화법을 구사하며 발전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쁠 때나 슬플 때 노래를 흥얼거리듯이 눈물과 함성과 탄식을 토하듯이 시 역시 인간의 마음속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희로애락을 담고 해소하는 기능을 합니다. 다른 감정 표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발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노래를 예로 들면 자신이 창조한 가락을 흥얼거리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아마 무의식적으로 그런 즉흥곡을 콧노래로 흥얼거렸던 경험이 있을 줄 압니다.
그것처럼 시를 쓸 수 있는 마음도 이미 모든 사람이 갖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아직 발견해 내지 못한 것이지요. 시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느낌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수많은 느낌에 휩싸여 살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상쾌하다는 느낌, 잠을 좀 더 자고 싶다는 느낌, 물이 차갑다는 느낌, 이빨이 시리다는 느낌, 음식이 짜다는 느낌… 또 밖으로 나가면,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 하늘이 푸르다는 느낌, 누군가 보고 싶다는 느낌… 그뿐 아니라 잠든 시간에도 우리는 꿈을 꾸며 어떤 느낌들에 계속 사로잡혀 있습니다.
시를 쓰기 위한 첫 단계는 우선 이런 느낌들을 그냥 흘려 버리지 말고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라는 것입니다.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면 속으로 ‘바람이 시원하다’고 한 번 중얼거려 보십시오. 그러면 짧은 느낌으로 그냥 흘려 버렸을 때보다 바람의 시원함을 몇 곱절 더 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바람이 시원하다’는 느낌은 누구나 갖는 것이니까 바람이 어떻게 시원한지를 느껴 보기 바랍니다. ‘막혔던 가슴속 응어리를 뚫어 주듯이 시원하다’ ‘바람에 실려 그리운 사람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 … 이와 같은 방식으로 순간 순간의 느낌을 반추하는 습관을 가진다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보다 몇 곱절 더 풍부한 인생을 사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느낌의 양이나 질이 점차 향상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 모두에게 어떤 느낌을 가지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대문 앞의 쓰레기통을 보며 ‘너는 매일 그렇게 음식을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구나.’ 라든지, 이리저리 뒹구는 휴지 조각을 보며 ‘너는 아직도 이렇게 배회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부여해 보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여러분은 저도 모르게, 우주 삼라만상과 대화하고 그것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생명을 부여하는 시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남과 다른 글쓰기

문학지망생들을 만나면 예외없이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기성문인들은 뭔가 자기 나름대로 글을 잘 쓰는 비법이 있다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글 쓰는 일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막연한 작업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비법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세상 모든 일처럼 정도가 있을 뿐이지요.
그 정도라는 것은 여러분도 다 알다시피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그런 과정에서 자신만의 내밀한 요령을 터득하는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미세한 경험과 깨달음들의 결과이기 때문에 남에게 뭐라고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이 못됩니다.
대학마다 문학에 관한 전공학과가 설치되어 있고 시중에는 많은 문예창작 지침서들이 나와 있지만 그런 것들이 정작 자기 글을 쓰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글쓰기는 정해진 공식이나 이론에 대입시킨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글쓰기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행착오를 통해 얻어지는 필연과 우연의 만남입니다. 여기에 글쓰기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그저 우직하게 우리가 다 알고 있는 3多의 과정을 좇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가’하는 문학지망생들의 질문이 ‘어떻게 하면 글을 남과 다르게 쓸 수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봄이 오면 산과 들에 온갖 꽃들이 피어납니다. 아름답습니다. 그 꽃을 보고 글을 쓴다고 합시다. 여러분 중의 대부분은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그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꽃의 아름다움은 문학이라는 형식이 존재하고부터 수많은 문장가들이 온갖 미사여구로 찬탄한 것이어서 여간해서는 그 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꽃이 아름답다는 발견은 이미 일반화된 사실이어서 새롭지도 않습니다. 다른 이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바른 방식으로 쓰는 것이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꽃이 기지개를 켠다’든지 ‘꽃이 하늘로 가고 있다’든지……
이렇게 남과 다르게 쓰려면 남과 다르게 볼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지 않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글쓰기가 단순히 좋은 말로 매끈한 문장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는 것만 깨달으시면 가능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겠지만 세계를 보는 자기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남과 다르게 본다는 것은 남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은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다른 정도가 남과 비교해 판이하게 다를 때도 있고 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할만큼 미세할 때도 있지만 분명 여러분은 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과 비교해 다릅니다.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아무리 닮은 일란성 쌍둥이라도 다른 부분이 있기 마련이지요. 생김새도 그렇지만 생각이 각기 다른 것은 성장한 환경과 그동안의 체험이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삶의 과정에서 생성된 이런 독특한 체험들을 우리가 쓰려고 하는 대상에 투영하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자신만의 글, 남과 다른 글쓰기가 가능해 집니다. 자신이 어떤 체험공간을 가지고 있느냐를 잘 판별해서 자신이 쓰고자 하는 글에 적극적으로 반영해보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또 하나의 절대적 가치를 지닌 새로운 시인의 요건입니다.


무엇부터 써야 할까

평소에 줄곧 독서를 해온 분들은 누구나 자기 글을 한 번 써 보고 싶은 욕구를 가집니다. 그런 욕구를 부추기는 동기는 대략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첫번째는 나도 이런 멋진 글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감이고, 두번째는 내가 쓰면 이보다는 더 잘 쓸 것이라는 자만심이고 세번째는 이런 이야기도 글이 되는 걸 보면 내 인생도 충분히 글이 되겠구나 하는 자신감입니다.
그러나 이런 동기를 가졌다 해도 대부분은 시작도 해 보지 않고 포기하는 수가 많습니다. 첫번째 경우는 기대감이 열등감으로 바뀌어서 그렇고, 두번째 경우는 욕심과 의욕만 앞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쳐서 그렇고, 세번째 경우는 게으르거나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됩니다.
그래도 이 중에서는 마지막 경우가 가장 성실하게 글쓰기를 해 나갈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습니다. 앞의 두 경우는 막연한 동경이나 지나친 자만심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제동 장치가 없는 자동차가 되기 쉽습니다. 저는 출판 일을 오래 해 온 탓에 그런 유형의 분들을 더러 만났습니다. 대부분 자기 글에 대한 맹신을 갖고 있어서 책으로 출판하기만 하면 곧 베스트셀러가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단순한 열정이나 치기로 글쓰기를 시작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남의 글을 읽으며 우리는 오만해지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문학작품은 절대적인 평가가 불가능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눈물을 쏟게 하는 감동일 수 있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유치한 신파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모든 독자를 감동시키는 글이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지요.
그렇지만 최대치는 항상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고 감동을 받은 글들은 주제나 소재가 유별나서가 아니라 대체로 자신의 세계를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깊은 울림을 준 것들입니다. 부끄럽고 추한 부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미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숨김없이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는 흥미와 감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글이 아주 먼 나라의 이야기이거나 원대하고 초월적인 세계를 쓰는 것이 아니라 대수롭지 않은 자기 이야기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있어 내 경험은 진부하고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타인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충격과 간접 경험의 단서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생각들이지만 타인에게는 남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글감을 먼 곳에서 찾지 말고 자기 주변에서부터 찾아보십시오. 빨래하고 설거지한 일, 친구를 만나고 시장을 한바퀴 돌아보면서 느낀 것, 남을 증오하고 시기한 것, 그런 것들을 우선 하나도 놓치지 말고 단 한 두 줄이라도 좋으니 적어보십시오. 형식은 일기나 편지가 되어도 좋고 문장 구조를 갖추지 않은 메모가 되어도 좋습니다.
지금부터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디에 있더라도 필기구를 늘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필기구는 꿈속에라도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어떤 세계관을 가질 것인가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글로 옮기는 작업입니다. 아무리 풍부한 지식과 아름다운 언어들을 알고 있다 해도 창조적인 생각이나 느낌이 없는 사람은 문학적인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논리적이고 실용적인 글을 쓸 수 있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글을 잘 쓸 수 있느냐 없느냐는 높은 학식과 많은 경험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자신의 내부에서 저도 모르게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어떤 생각과 느낌들이 많고 적으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글쓰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좀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잡념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건망증이 심하다는 놀림을 받기도 합니다. 여러분 중에 그런 증세를 가진 분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글을 잘 쓸 수 있는 가능성이므로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또 어줍잖은 연속극이나 신문기사 한 줄에도 쉽게 눈시울을 적시는 분이 있는데 그런 분들도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자신이 남보다 뜨거운 가슴을 갖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며 그만큼 이 세계를 절실하게 느끼고 받아들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한때 컴퓨터가 시를 쓸 수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주제로 시를 쓰라고 지시하면 미리 입력된 사랑과 관련된 여러 단어들을 불러들여서 컴퓨터가 조합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보다 훨씬 완벽하게 ‘사랑’과 관련된 언어들을 시의 형식으로 조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유와 느낌이 결여된 공산품의 가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혼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길에 아무렇게나 놓여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는 돌멩이가 있다고 합시다. 보통 사람들은 이 돌멩이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귀찮은 존재로 여기기도 할 것이고 기껏 관심을 갖는다고 해 봐야 주어다가 어디 써먹을 데가 없을까를 생각할 것입니다. 자기 중심, 더 나아가 인간 중심으로 그 돌멩이를 보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생긴 것입니다.
만약 돌멩이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요. 무심코 자기를 걷어차는 사람들의 발길이 있기도 할 것이고 흙과 풀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또 대굴대굴 굴러서 자기 짝을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점점 돌멩이의 시각으로 생각을 확대해 나간다면 하찮게 보이는 돌멩이 하나를 통해 이 세계 전체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삼라만상의 모든 물질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면 엄청나게 신비하고 새로운 상상의 세계가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생명과 무생물, 어떤 현상까지를 포함해 세계 전체를 내가 지닌 자아와 동등하게 보는 시각은 글쓰기를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자연과 더불어 사는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요즘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환경문제라는 것도 다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이 빚어낸 무서운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범신론적 세계관이 마음만 먹는다고 금방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상을 향한 열린 시각, 치우침 없는 균형 감각, 부분을 보더라도 전체 속에서의 관계를 조망하는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선행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어휘 문장 구성의 기본기

늦은 나이에 글쓰기를 시작하는 분들일수록 조급하게 서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축적된 자기 이야기가 태산같이 쌓여있다보니 그것들을 단번에 그럴듯한 작품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욕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이나 시 창작으로 바로 들어가는 경우를 흔히 보는데 십중팔구는 뚜렷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늦을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글쓰기는 이야기거리가 두둑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아무리 좋은 재료가 준비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버무리고 조리할 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음식의 맛이 손끝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글쓰기도 글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우선 제가 권해드리고 싶은 방법은 간단한 산문 형식의 글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운문부터 시작하는 것은 축약과 비약의 요소에 먼저 길들여질 우려가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데생을 충분히 해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문을 통해 기본적인 어휘력과 문장력, 구성력을 터득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든 문학 장르의 기본이 되는 요소입니다. 수필과 소설 같은 산문 장르는 말할 것도 없지만 시나 극본 같은 장르 역시 어휘력과 문장력, 구성력이 바탕이 되어있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습니다. 이런 기본기가 충분히 습득되지 않은 채 시를 쓰면 생경하고 난해한 시가 되기 쉽고 거칠고 짜임새 없는 극본이 되기 쉽습니다.
어휘력은 단어를 풍부하게 알고 그것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말은 워낙 그 표현이 풍부해서 한 가지 뜻 안에 여러 가지 단어군들이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어휘들을 충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있어야 하며 또 같은 종류의 말이라도 전체 문맥의 흐름과 분위기에 맞게 잘 골라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쓸쓸하다’고 해야 할 자리에 ‘고독하다’고 하면 의미의 단절과 과장을 불러오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지요. 한 문장 속에 스며들어 빛을 발하는 가장 적절한 어휘는 단 하나 뿐입니다. 가장 적절한 말을 골라서 쓸 줄 아는 능력이 어휘력인 것이지요.
어떤 분들은 이 어휘력 배양을 위해 국어사전을 외기도 하는데 문학에 있어서의 어휘는 문장 속에 융화되어 있어야 제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므로 뛰어난 작품을 많이 읽는 것이 어휘력 향상의 가장 바람직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 말들이 자신의 무의식 속에 육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문장력은 어휘력이 바탕이 되고 남의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습득됩니다. 좋은 문장은 필요없는 군더더기가 없고 읽기에 편하도록 적절한 호흡을 가진 것입니다. 너무 긴 문장이 장황하게 계속되면 문맥의 의미가 불투명해지고, 너무 짧은 문장이 반복되면 단조로운 느낌을 주게 됩니다. 탄력있는 문장은 사랑의 줄다리기를 하듯이 길고 짧은 문장이 적당하게 섞이면서 이어져야 합니다.
구성력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능력입니다. 글을 기승전결로 배치하는 것은 너무 흔한 방식이므로 때에 따라 결말을 먼저 제시하거나 절정 부분을 글머리에 내세우는 등 여러 가지 구성의 변화를 시도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시와 산문은 어떻게 다른가

형식적인 면으로 보면 산문은 긴 줄글로 되어 있고 운문은 짧고 리듬이 있으며 행과 연을 나눕니다. 담는 내용에 있어서도 산문이 일관된 흐름을 갖춘 이야기 구조를 가진다면 운문은 주관적인 감정을 드러낸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서사와 서정의 차이라고 합니다.
물론 운문에도 서사적인 요소를 도입할 수 있고 산문에도 서정적인 문체를 구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시 소설이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정착한 오늘날에는 시는 서정적인 특성을, 소설은 서사적인 특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쪽으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습작기에는 이런 시와 산문의 차이를 정확히 인식하여 자신의 감성이 어느 장르에 적합한지를 빨리 간파하는 것이 좋습니다.
흔히들, 시는 춤에, 산문은 도보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도보는 일정한 보폭으로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한 결음씩 나아가는 것이지만 춤은 아무런 형식의 구애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느리고 빠르기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가 심하며 공중을 향해 훌쩍 솟구치기도 하고 쓰러지며 뒹굴기도 합니다. 춤은 일정한 방향을 염두에 두지 않으므로 제자리걸음이나 뒷걸음질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춤과 도보의 차이점을 시와 산문에 대입하여 생각해 보면 어렴풋이나마 그 특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형식적인 차이는 시 정신과 산문 정신의 차이에서 나오는 결과들입니다. 시 정신이 주관적인 진실을 추구한다면 산문 정신은 객관적인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주관적인 진실은 말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만 진실인 것이고 객관적인 진실은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진실입니다. ‘만년필 속에 잉크가 들어 있다’고 쓰면 객관적인 진실을 드러낸 것이지만 ‘만년필 속에 옛사랑의 추억이 있다’고 쓰면 주관적인 진실을 드러낸 것이 됩니다. 만년필에서 옛사랑의 추억을 읽는 것은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인식이 발동한 것이므로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인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사적인 바탕이 없이 서정적인 요소를 무리하게 도입한 산문은 생경하고 황당한 서술이 되고 마는 것이며, 반대로 서정적인 바탕이 없이 서사적인 요소를 도입한 시는 감칠 맛이 전혀 없는 상식 수준의 뻔한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행과 연을 나누어 형식을 갖추어도 이것은 시가 될 수 없습니다. 시 정신과 산문 정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지 못한 예를 초보자들의 작품에서 흔히 발견합니다.
저는 이것을 나무와 꽃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뿌리에서 몸통이 자라고 거기서 가지와 잎이 뻗어 가는데 여기까지는 나무 본연의 모습과 색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누가 보아도 뿌리와 몸통과 가지와 잎이 하나의 계통으로 일관된 연관성을 갖고 뻗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가끔 피워 내는 꽃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 나무에서 어떻게 저런 꽃이 피워났을까 싶을 정도로 형태와 색깔과 질감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빨강 노랑 하양의 색색으로 보드랍기 그지없는 꽃망울을 터트립니다. 앞의 과정이 산문의 세계라면 뒤의 과정이 시의 세계일 것입니다.


시의 언어를 찾아

흔히 시를 언어 예술이라고 합니다. 시적인 체험과 느낌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니까요. 최근에는 실험적인 시의 한 양상으로 사진 그림 악보 등이 시의 한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자가 주가 된 상황을 보조하는 차원이지 그 차제가 주 표현방식이 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시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 갈지 모르지만 언어를 주 표현수단으로 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제한된 언어를 통해 표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색깔이나 소리도 없고 움직임이나 형상도 없는 말들을 조합해서 이 세계의 복잡다단한 결들을 드러내는 일은 너무 막연하고 난감하게만 느껴집니다. 초보자들이 시에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춤과 노래와 그림처럼 언어에도 희로애락이 있고 색깔과 소리, 형상과 움직임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시 한 편을 읽고 환희와 격정과 비애를 느끼며 어떤 소리와 색채와 움직임을 감지합니다. 때로는 색채와 소리로 형상화된 예술보다 더 큰 진폭으로 그런 것들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 더 나아가 우리의 모든 감각을 총체적으로 건드려 주는데 시가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합니다.
인간의 모든 감각을 언어를 통해 총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시의 장점이며 매력이겠지만 처음 시를 쓰려는 분들에게는 대단한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어를 캐내고 다듬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언어가 곧 시의 재료인 만큼 멋진 말들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시 쓰기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러는 국어사전이나 남의 작품 속에 있는 좋은 말들을 밑줄을 쳐가며 외우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말만 번드레한 사람이 남에게 오히려 거부감을 주는 것처럼 자신의 진심이 실리지 않은 언어는 남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문학에서의 언어는 곧 자신의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신이 가진 현재의 언어 밑천만을 가지고 시 쓰기를 시도하라고 권합니다. 시 쓰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여러 분 속에 녹아 있는 언어만을 가지고도 충분히 시 쓰기가 가능합니다.
개인이 가진 언어군은 그 사람이 나고 자란 환경, 접촉한 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전라도에서 자란 사람과 경상도에서 자란 사람, 산골이나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과 도시에서 자란 사람의 언어군은 분명히 다릅니다. 이렇게 어떤 상황에 반응하고 갈등하면서 형성된 것이 그 사람의 언어 습관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학습된 것이 아닌 오랜 시간 서서히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축적된 것들입니다.
그 언어들만 가지고도 일상 생활의 의사소통에 아무 문제가 없듯이 시를 쓰는데도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시를 쓰는데 사용되는 별도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자신의 몸 속에 육화된 언어야말로 남이 흉내낼 수 없는 자신만의 개성적인 언어이며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시의 언어인 것입니다.


단풍나무가 되는 나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죽여야겠다고/가을 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오도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안도현 시인의 ‘단풍나무 한 그루’라는 시입니다. 온 산이 붉게 물든 이 늦가을에 무척 어울리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가을은 그리운 누군가가 절실하게 더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곧 퇴락의 겨울을 맞게 될 것이므로 지금 만나지 않으면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드는 것이지요.
시 쓰기에 앞서 남이 쓴 좋은 시를 많이 읽어 보는 것이 꼭 필요한데 이는 남의 좋은 부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며 시의 발상에서완성까지의 구체적인 방법을 익히는 공부가 됩니다. 남의 시를 읽다가 자기 마음에 와 닿는 작품을 만나면 그 시인의 시집을 구해서 꼼꼼히 읽는 게 좋습니다. 자신이 공감한 시를 쓴 시인은 자신의 체질이나 성향에 맞는 시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그만큼 배울 점이 많습니다. 문학의 스승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나집니다.
그렇게 선택된 시를 읽을 때는 그 시를 쓸 당시의 시인의 마음이 되어서 읽어보십시오. 그 시인이 처한 환경 조건이나 심정을 유추하며 한 행 한 행 같이 시를 써 나가는 기분으로 읽는 것이지요. 위의 시 같은 경우는 가을비가 오는 날 단풍나무 아래 서 보는 것입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 온통 몸이 달아 벌겋게 된 단풍잎, 그 사이에서 알절부절 못하고 찬비를 맞고 있는 나… 목석이 아니라면 누구나 처연한 심정이 될 것입니다. 처연한 심정이 되면 모든 것이 간절해지는 법이고 그러면 누군가가 못견디게 그리워질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수순은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도달할 수 있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그 정황들을 어떤 식으로 엮어 구체적으로 드러낼 것인가를 생각하면 그만 막연해집니다.
이제 그 한 해답을 안도현 시인에게서 얻어 봅시다. 우선 가을산 찬비와 나의 관계를 엮는 고리로 시인은 ‘너 보고 싶은 마음을 눌러 죽’이는 지독한 그리움의 감정을 설정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연히 아무도 없는 가을산에서 찬비를 맞고 있은 자신에게 무엇인가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이런 발상이 떠올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의도적이라고 해도 그런 발상을 거쳐 그런 마음을 먹은 시인은 더욱 처연한 심정이 됩니다. 빗소리만 들리는 고적한 산중턱, 그리운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나. 이 정황은 비장한 정적이며 폭발 직전의 절정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이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이려고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그 하나의 발상이 가을산과 빗소리의 분위기를 시적인 정황으로 창조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풍나무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엮어가고 있습니까. ‘너 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에서 드러나듯이 보고 싶은 마음을 더 이상 어쩌지 못해 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비장한 인내와 비 오는 가을산의 정적이 드디어 단풍으로 폭발하고 만 것입니다. 시적 대상과 시 쓰는 자아가 동일시되는 서정시의 전형적인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개속에 묻힌 나를 찾아

어느새 일 년의 마지막 달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때쯤이면 늘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의 속도와 티끌만큼 남은 시간의 유한함에 몸을 떨게 됩니다. 한 장만 달랑 남아 있는 달력을 보며 괜스레 마음이 바빠지고 다 이루지 못한 일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 달이기도 합니다. 정말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잠시도 멈추거나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문학은 이런 세계의 유한함에 대항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한한 시간을 인정해 버리고 거기에 무방비로 던져진 상태의 인간은 무력해지거나 즉물적인 쾌락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종말을 앞두고도 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는 사람은 내가 끝나더라도 세상은 끝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끝나면 세상도 끝나는 것으로 압니다.
문학은 이를테면 그런 현세적인 가치체계에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입니다. 자기만의 것에 골몰한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의 인생과 사고방식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 우리와 함께 공존하고 있는 삼라만상에 눈을 돌리도록 하는 것, 유한한 것이라고 믿는 인간의 시간을 무한한 순환의 수레바퀴로 돌려놓는 작업이 곧 문학이 추구하는 일입니다. 자기 살기도 바쁜 세상에 남의 인생까지를 참견해야 하는 문학은 그래서 고통스럽고 복잡다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강의 물을 따라가며 안개가 일었다/ 안개를 따라가며 강이 사라졌다 강의/ 물 밖으로 오래 전에 나온/ 돌들까지 안개를 따라 사라졌다/ 돌밭을 지나 초지를 지나 둑에까지 올라온 안개가 망초를 지우더니/ 곧 나의 하체를 지웠다/ 하체 없는 나의 상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나는 이미 나의 지워진 두 손으로/ 지워진 하체를 툭툭 쳤다/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강변에서 툭툭 소리를 냈다.

위의 시는 오규원 시인의 「안개」라는 시입니다. 여기서 우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안개가 나를 가린다’가 아니라 ‘안개가 나를 지운다’고 말한 점입니다. 나 위주로 판단하면 안개는 분명히 나의 시야를 가리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나’는 강과 돌, 초지와 둑, 망초같은 것들과 동격입니다. 그런 사물들과 함께 내 육체도 안개에 의해 서서히 지워지고 있습니다. 나의 의식은 내 몸을 강둑에 버려둔 채 팔짱을 끼고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자기자신까지도 객관화시켜 전체의 맥락 속에 놓을 수 있어야 참다운 글쓰기가 가능해집니다.
여기서의 안개는 무심히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가는 시간일 수도 있고 우리의 존재를 지배하는 외부적인 힘이나 나태한 관습, 고정관념 따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안개에 가려 길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때 위기 상황을 인식한 내가, 내 존재의 여부를 확인해 보기 위해 하체를 손으로 툭툭 쳐 보는 것입니다.
문학은 이렇게 끝없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형체없는 안개가 자기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것까지도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한 촉수로 무감각해진 자기 존재의 하체를 한 번 툭툭 건드려보시기 바랍니다.


[출처] 시를 찾아가는 아홉 갈래 길 / 최영철|작성자 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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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봄에게

 

 

다봄아 안녕?

이렇게 인사하는 내가 누군지 알겠니? 넌 아직 말을 못하니까 내가 누군지 알아도 누구시잖아요하고 말할 수 없겠지. 또 내가 누군지 몰라도 누구세요?’하고 말할 수도 없겠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단다. 내가 누구라는 것을 다봄이는 잘 알고 있을 거라는 걸.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지금 똘망똘망 나를 쳐다보고 있는 네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지. 넌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구나.

아이 참 할아버지도. 제가 할아버지도 모를 줄 알아요. 할아버지가 소개하지 않아도 저는 할아버지를 알아요.

아 참 그랬구나. 아직 할아버지 소리가 듣기 싫어 그랬는데. 그래 내가 할아버지라는 걸 어떻게 알아봤니?

십개월 동안 엄마 뱃속에 있으면서 할아버지 목소리 할머니 목소리를 수없이 들었잖아요.

그래 그렇구나. 그때는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 것 같던?

목소리만 듣고 사람을 다 알아볼 수는 없지만, 할아버지가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느껴졌어요. 아직 철 안든 개구쟁이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 맞아. 할아버지는 아직 철이 덜 들었단다. 그래서 할아버지 이름도 영철이잖니. 영 철 안 드는 영철이 말이야.

호호 정말 그러네요. 할머니는 조금 더 철이 드신 것 같고요.

그래 맞아. 둘 다 철이 안 들어서야 어떻게 네 엄마를 키우고 공부시키고 했겠니. 이 철 안 드는 할아버지 때문에 할머니가 무척 고생을 하셨단다.

하지만 저는 그런 할아버지가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도 철이 없으니 말이 통할 것 같아요.

맞아. 다봄아 네 말아 맞아. 철 안드는 거, 그게 중요한 거야. 할아버지는 앞으로도 철이 안 들 거야. 마냥 어린아이 같았으면 한단다.

왜요? 철이 안 들고 나이만 먹으면 좀 모자라는 어른이 되는 거잖아요.

아니지. 철이 안 들면 모자라는 게 아니라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있을 수 있는 거란다. 그래야 우리 다봄이 하고 같이 놀 수도 있고 말이 통할 수도 있지.

그건 그래요. 그런데 제가 자꾸 커서 어른이 되어버리면 할아버지하고 말이 통하지 않을 텐데 어쩌지요?

그래 맞아. 할아버지도 그게 걱정이란다. 하지만 좋은 방법이 있기는 해. 뭐냐 하면 우리 다봄이도 계속 어린아이로 있으면 되지.

아이 참 할아버지도. 제가 아무리 그러고 싶어도 저절로 어른이 되어버릴 텐데 어떻게 어린아이로 있을 수 있어요.

아니야. 그건 말이야. 키가 자라고 나이가 드는 것 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란다. 마음만 어린아이처럼 깨끗하면 계속 어린아이로 있을 수 있는 거란다.

마음만 어린아이라고요. 그건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요?

그건 어른처럼 되지 않는 거지.

아이 참. 나이를 먹으면 어른이 되는데 어떻게 어른처럼 되지 않아요?

그건 말아야. 매일매일 새로운 꿈을 꾸는 거지. 그리고 매일매일 새로운 꿈을 찾아내는 거지.

어떻게요?

그건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는 건데, 이를테면 이런 거란다. 꽃들의 향기가 좀 더 멀리멀리 퍼져갔으면 좋겠다. 하늘의 별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 머리맡에 내려앉았으면 좋겠다. 다봄이라는 이름처럼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모든 게 다 봄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제 이름을 다봄이라고 지어주신 거예요?

그렇단다. 우리 다봄이가 살아갈 세상은 모두 다 봄이었으면 좋겠구나.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산들바람을 따라 모두 새롭게 싹을 내미는 봄 말이야. 그렇게 핀 새싹과 새 꽃들을 다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야 신난다. 그러고 보니 제 이름에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그래 그렇단다. 넌 이미 그 두 가지를 우리에게 다 보여주었잖니. 네가 태어난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봄을 안겨준 것이고, 넌 태어나자마자 너를 맞이하러온 우리 모두를 고개를 돌려가며 다 바라보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온 세상을 골고루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제가 그런 큰일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란다. 그건 절대 큰일이 아니란다. 누구라도 예쁜 마음을 가지면 누구라도 다 할 수 있는 일이란다.

알았어요. 할아버지, 그렇게 하도록 노력할게요.

그래 다봄이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 어린이들이 다 그랬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되도록 저도 노력할게요.

그래 고맙다. 이 할아버지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게.

 

최영철,  2010년 시힘 동인 동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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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도시철도 2호선

 

바다에서 강으로 가는 직행열차

 

최영철

 

도시 생활자에게 도시철도는 이제 가장 편리한 이동수단이 되었다. 만성적인 교통 체증으로 중요한 약속을 어기는 실례를 심심찮게 범하고 살았던 노장세대에게도 그렇지만 값싸고 빠르고 정확하게 도심을 오갈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젊은 세대에게도 오아시스로 가는 직행열차에 가깝다. 권역별 중심가라고 할만한 요충지에 마련된 환승역의 친소공간에서는 문화공간과 편의시설들이 마련되어 있다. 특히 소일거리 없는 어르신들에게는 이보다 고마운 공간이 없다. 하루 종일 어슬렁거려도 핀잔주는 이 없고 다양한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폭염과 혹한의 계절에도 쾌적한 냉난방이 제공되니 이만한 후식처가 없다. 한낮 한가한 시간대에 도시철도를 타보면 이런 조건들을 유유자적 즐기고 있는 지공거사들이 과반은 된다.

 

도시철도가 바꾸어놓은 것들

 

도시철도가 바꾸어놓은 시민의 생활패턴은 역세권이라는 신조어에 잘 드러난다. 버스나 택시를 주요 이동수단으로 하던 시절, 그러니까 도로를 통해 이동하던 시절에는 오랫동안 형성 유지되었던 변화가가 도시의 중심이었다. 부산의 경우 서면과 남포동이 거기에 해당될 것이다. 모든 도시들이 중심가를 축으로 상권이 형성되고 사람들의 기억과 추억은 대부분 그 주변의 처소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도시철도 이후 그 전통적인 장소성은 역세권이라는 다양한 범위로 확대되었다. 한두 곳이 독차지하던 도심 기득권이 주요 환승역 역세권으로 분산되며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부산의 도시철도의 중심 선로인 1, 2호선은 서면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어있다. 1호선의 북쪽 끝 노포는 금정산 너머 영남알프스의 수려한 산등성이를 향해 있고 남쪽 끝 신평은 강과 바다의 경계인 을숙도 다대포와 연결된다. 2호선의 서쪽 끝 호포는 낙동강 젖줄에 발목을 담그고 있고 동쪽 끝 장산은 바다로 연결된다. 지금 부산의 도시철도는 부산 외곽의 산과 강과 바다의 싱싱한 기운을 쉴새없이 도심으로 실어 나르고 있는 중이다.

부산의 전동차 안에서는 이렇게 승하차한 강과 산과 바다가 어울린 시큼하고 짭짤하고 상큼한 냄새가 난다. 우뚝한 산과 요동치는 바다와 조용히 흐르는 강, 그리고 그 강과 바다와 산의 생명력을 실어 나르는 도시철도가 이제 부산을 늘 요동치게 한다. 대도시마다 도시철도는 있지만 부산의 전동차는 부산사투리가 내는 굴곡 때문에 더욱 술렁인다. 취객들이 드문드문 섞이는 저녁시간에는 무척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그 틈을 비집고 다니는 종교인이나 잡상인의 일장 연설도 만만치가 않다. 좀 과장한다면 서울지하철 안은 정숙한 공부방 같고 부산지하철 안은 활기찬 난전 같다. 특히 2호선은 최근 급부상한 센텀시티, 경성대부경대, 덕천 등을 관통하고 있다.

 

부산을 수평으로 잇는 2호선

 

서면 환승역에서 대거 물갈이를 한 후 2호선 전동차는 다소 썰렁해졌다. 모덕 구남 구명 율리 같은 낯선 역 이름들을 하나 하나 쓰다듬으며 가는 동안 혼자 있고 싶을 때마다 아무 버스나 타고 종점까지 갔다오곤 했던 한때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부산 도시철도 2호선은 수직으로 구성된 1호선에 대비하여 부산을 수평으로 잇는 노선으로, 해운대구 신시가지에서부터 수영구 남구 부산진구 사상구 북구를 거쳐 경남 양산시를 연결한다. 서면역에서 1호선과, 덕천역 수영역에서 3호선과 만나고 사상에서 부산-김해 경전철로 환승할 수도 있다. 총연장 45.242개의 역이 있고 노선은 부산의 서북쪽에 위치한 양산시에서 남쪽방향으로 이어지다가 사상역에서는 동서방향으로 연장된다.

왁자지껄하게 승하차가 이어지던 전동차에 빈자리가 하나둘 늘어나고 금곡을 지나 지상으로 올라온 차창 밖으로 신기루 같은 고층 아파트와 그 배후의 산과 강이 펼쳐졌다. 조금씩 저물고 있는 해가 강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 하고 나는 탄성을 지를뻔 했다. 그래 저 강이야, 저걸 보고 싶어 나는 무작정 2호선을 탔던 것이야.

강은 반도의 동쪽 허리쯤에서 발원하여 먼길을 달려왔지만 바다와 셖여 더 넓은 길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호포역 철로 앞에 앉아 전동차가 서너번 지나갈 때까지 나는 해가 강물에 발목을 담그는 풍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강은 너무 지척이어서 귀를 조금만 더 열면 졸졸졸 물결 아래로 흐르는 낮은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다가 지척인 장산역에서 강이 지척인 호포역까지 한 시간 남짓이었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범위는 부산의 모든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부산은 팍팍한 바다이기도 하고 유장한 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호선은 이제 호포에서 멈추지 않고 양산의 수려한 산등성이를 향해 힘차게 더 나아가고 있다.





다 붙잡지 못해 놓아버린 것들

이리 와 물이 된다

보태고 감춘 흙의 것들 하나씩 불러내

얼쑤얼쑤 무등 타고 와

더 이상 안되겠구나 몸 날려 떨어진 자리

어스름 넘어가는 해

마저 남은 묵은 때 씻어낸

산 그림자 슬금슬금 그늘을 만든다

땅의 것들 거기에 숨어

밤의 연희복 갈아입는 동안

물은 하루 꼬박 걸어온 낮의 발목을 씻어준다

땅의 일은 그만 잊어라

저 반짝이는 불빛에 더는 눈길 주지 말고

여러 갈래 걸어온 산들

철로변 물길에 나란히 얼굴 맞댄다

오래 천천히 굽이치며

강 하나 바다 하나 불러 모아

말라버린 것들 다 적시고 오너라

저기 산너머

목마른 것들 기다리고 있으니

     

- 최영철 시 호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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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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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편의 잘 알려진 시에 묻혀 상대적으로 낯설어 보이는 윤동주의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나도 모르게 동감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라는 감정은 비슷한 경험을 했거나 앞으로 그럴 소지가 있는 사람들끼리 나누어가지는 느낌이다. 구구한 부언설명이 없어도, 굳이 안에 숨기고 있는 흉터를 까뒤집어 보여주지 않아도, 서로의 지나온 발자취가 어렴풋이 짐작되는 상태, 그래서 단박에 남이 아닌 것 같은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게 동감이 가지는 마력이다. 왜 그런 기분 있지 않던가.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몇 마디 말이 오가면서 그 첫인상은 보다 더 확실해져서 바지를 올리고 슬그머니 허벅지의 흉터를 보여주고 싶은 충동까지 이는, 그러면 상대도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셔츠를 올려 가슴에 난 흉터자국을 보여줄 것 같은 경우 말이다.

그처럼 동감의 진수는 못나고 불편하고 아픈 것으로 하나될 때 더 효과적으로 형성된다. 사람의 감정이란 게 참 묘해서 가족이나 절친이 아니면 좋은 일은 공유하기가 쉽지 않다. 대저 좋은 일은 자신에게만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먼 타인의 경사에는 무덤덤할 수 있지만 가까운 이의 경사에는 미묘한 심정이 되는 건 그 때문이다. 겉으로는 박수치고 있음에도 속 한편은 쓰리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담에 비춰보건대 경사를 공유할 관계는 삼촌까지가 아닌가 싶다. 아무튼 타인의 흉사 앞에서는 진심어린 위로가 가능하지만 경사 앞에서는 축하하고 돌아서는 자신이 왠지 초라해 보여 싫다. 그래서 남에게도 자신과 똑같은 경사가 발발했다면 그건 이미 경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건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흉사는 나누어 가질수록 좋아서 우리의 상호부조 정신은 오랜 미덕이 되었지만 경사는 어디까지나 독점의 양식이다.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 문과 재학 중이던 194012월 스물셋의 나이에 쓴 시다. 시 전편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고요한 정적이다. 하지만 그 정적은 평화롭고 나른하고 느슨한 정적이 아니라 언제 닥칠지 모를 불길한 조짐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 조마조마 가슴을 졸이게 하는 정적이다. 병원은 그런 곳이다. 스물셋의 한참 나이를 병원에서 보내고 있는 시인의 심사는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에 고스라니 드러난다. 병원 뒤뜰에서 본 환우인 젊은 여자를 묘사하는 윤동주의 시선에 잘 나타나듯이 인생의 정점이라 할만한 청년기의 한때를 병원에서 보내는 시인의 심정은 울적하고 애잔하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열다섯 나의 봄날이 떠올랐다. 어쩔 작정이었는지 그해 봄날 나는 막연한 허무로 집을 나와 며칠을 굶은채 낯선 길을 배회했고 늦은 밤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의료기술이 좋지 않던 시절이었고 더욱 난감하게도 변두리 병원에 이송되는 바람에 수술이 잘못 되었는지 나의 부러진 대퇴부는 몇 달 동안이나 붙지 않고 썩어가고 있었다. 나는 발끝에서 가슴까지 석고붕대에 결박되어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다. 이른 봄에서 늦은 가을에 이르는 오랜 면벽이었다.

동병상련이란 말도 있지만 병원에서 만난 환우들은 대부분 격의없이 어울린다. 힘든 일을 같이 겪고 있을 때 인간은 더 빨리 하나가 되는 법이다.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는 진술에 그런 감정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자신의 아픔을 인정받고 위로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슬픔과 불만이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는 독백 속에 묻어 있다.

시인은 아름다운 생성에 탄성을 지르는 자이면서 불편부당한 조건에 비명을 지르는 자이기도 하다. 지금 매일같이 이어지는 반인륜의 엽기적인 사건사고들을 생각할 때 오늘의 시인들은 심각한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때 윤동주가 아팠던 것처럼 오늘의 시인들도 곳곳에서 비슷한 증세로 아파해야 할 것인데 대부분 그러지 못한 것 같아 걱정스럽다.     (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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