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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에 쓰는 사전장례의향서

 

  

                                                                             최영철 

 

 

 

이제부터 그 어떤 인위적인 연명조치도 사절이네

죽음이란 고단한 삶을 덮어주는 솜이불 같은 것

오래 망설여 도착한 손님 앞에 절대 눈물짓지 마시게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나 모처럼의 휴가 즐기고 있으니

빈소가 크고 번잡하지 않았으면 하네

그만 하면 못다 한 이야기 나누기에 부족함 없으니

부의금 부디 사절이네

이렇다할 유산이 없을 것이니 미안하고도 다행한 일

쥐꼬리만한 저작료 수입 생기거든

여름밤 날 잡아 후배들 막걸리 파티나 열어주게

너무 버거운 걸 지고 왔으니

가장 헐한 나무관에 입던 옷이면 족하겠네

헤진 육신의 늙은 오장육부 쓸만한 게 있거든

어여 훨훨 벗어주시게

그래야 나 콧노래 흥얼거리며 먼 길 떠날 수 있으리

남은 가죽일랑 불꽃에 놓아주시게

한 줌 재가 남거든

저 먼 허공까지 날 데려다 줄

새가 쪼아 먹을 몇 톨 밥알이었으면 하네

이제 막 피어난 꽃송이 주렁주렁 앞세우지도 말게

그 또한 막 물오른 섬섬옥수의 가혹한 순장 아니던가

허방만 짚은 한 생 반추하느라

적적할 틈 없을 것이니

매년 이 날이 혹여 생각나거든

잠자코 먼 북망이나 한번 바라봐 주시게

침침한 길을 히죽이 웃으며 지나간 우둔한 사내였으니

망각에 들어 비로소 자유를 얻을 것이네

부디 그대 기억 속에 나를 가두지 말기를

그리하여 그때도 생전 처음인 듯

봄이 그대 삽짝 밖에 당도해 있기를

모처럼 볕살 따스하거든 그린내여

한 생을 마냥 주저하다가 끝내 하지 못한

몇 마디 중얼거림이라 여겨주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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