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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심초사의 즐거움

 

 

  최영철

 

 

막다른 강마을에 들어와 산지 7년이 되었습니다. 살던 집을 세놓고 올 수도 있었지만 저는 정들었던 집을 팔고 이리로 왔습니다. 둘을 가지는 게 버겁고 둘 이상을 건사하는 게 힘들고 둘 이상을 생각하는 게 차차 어려워졌습니다. 처음엔 퇴행인줄 알고 낙심했지만 차차 그것도 진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료 우리가 진보인줄 알고 건너뛰고 넘어온 길들이 무지막지한 퇴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날은 녹슬어가는 기계에 기름칠을 하는 심정으로 구구단을 혼자 되뇌어보는 날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구구단을 외우며 어쩌면 이 셈법이 지금은 맞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2 곱하기 36인데 60이라고 우기거나 100 나누기 1001인데 90을 따로 제쳐놓고 10으로 100을 나누라고 우기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공정한 분배는 인간 사회뿐 아니라 지구 생태계 전체가 지켜야 할 규칙이요 미덕일 것인데 이제 그런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이 주범이었습니다. 돈이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을 버텨내는 힘은 돈 안 되는 것들에 있을 것인데 돈에만 집착했습니다. 돈 안되는 것들을 내쫒고 괄시하고 폐기처분했습니다. 시도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수록, 더더욱, 시의 위의는 이제 돈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데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꽃 한 송이와 바람 한 줌과 나는 똑같은 무한대일 것인데 온갖 너를 짓밟고 선 너만 무한대라고 우깁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폐허에 딴지를 걸 수 있는 것도, 또 다른 차원에서 말도 안 되는 시밖에 없어 보입니다. 밑도 끝도 없는, 지나치게 과장된, 두서없는, 허무맹랑한 세상을 넘어가기 위해 시의 밑도 끝도 없는, 지나치게 과장된, 두서없는, 허무맹랑한 어법이 필요합니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하루 네댓 번이고 구멍가게도 하나 없고 이야기 통하는 사람 허나 없는 이곳을 저는 잘 살아내고 있습니다. 대화상대는 제 안에 도사린 온갖 잡다한 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제가 심심할까봐 길고양이와 새들과 벌레들이 제 머리맡에 와 놀다 갑니다. 그놈들은 느닷없이 저에게 시비를 걸고 친한 척 위로를 보내고 두서없는 말로 수다를 떱니다. 기분이 좋은 날은 무슨 말이든 해보라고 기뢰를 주기도 합니다.

 

勞心焦思

평화로운 변방에 들어와 살면서 유유자적하지 않으려고 몇 년 전 제가 저에게 내린 행동강령입니다. 노심초사, 좀 가혹한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저란 놈은 매사에 게으르고 요령부득이어서 이렇게 무언가로 딱 부러지게 끊임없이 닦달하지 않으면 옆길로 빠지기 일쑵니다. 하여 이런 어마어마한 지침을 하달하게 되었습니다.

저만큼, 무작정, 엉뚱한 길로 접어들고 있는 저에게 저는 어이, 어디 가? 그리로 가면 길이 없어.’ 하고 말해주었지만 도통 먹혀들지 않아 인정사정없이 저를 다시 채포해 온 것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풍경에 반하고 향기에 반하고 적요에 반해 몽롱하고 혼미해진 저를 다그치려면 이렇게 단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노심초사,

사실 그건 새롭게 떠올린 말이 아닙니다. 온갖 크고 작은 상념과 씨름했던 십대 중반에 이미 거머쥐었던 말이고 그 뒤로 희희낙락하려는 저를 내리치는 매운 죽비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무 짓도 않고 아무 생각도 않고 물끄러미, 잔잔하고 평화롭게,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고 있는 저에게 노심초사의 죽비를 내려졌습니다.

 

낙동강이 지척인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그런지 저는 유순한 강을 좋아했습니다. 무심에 들게 하는 평화가 거기에 있습니다. 산과 바다도 좋지만 저는 분명 강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이 강마을에 왔을 때 그렇게 기분이 좋았었나봅니다. 처음 몇 달간 어슬렁어슬렁 유유자적 풍류를 즐기며 강변을 걸었는데 어느 날 불현듯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은 평화를 구가할 때가 아니지 않니?

세상은 더 오리무중이고 아비규환인데

너 혼자 달관할 때가 아니지 않니?

저는 강을 따라 팔자걸음을 걷고 있는 저에게 이렇게 추궁했고 곧 강변 산책을 그만 두었습니다. 제가 바라볼 지점은 아직까지는 이 유순한 강이 아닌 저 건너 도시 변두리의 시끌벅적한 난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아직이 아니라 어쩌면 죽을 때까지 도시 변두리의 번다스러운 일상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예감도 들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부여된 과업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시골마을에 이삿짐을 풀어 놓고 처음 얼마간 탐닉했던 고요한 평화야말로 얼마나 나에게 불길한 조짐이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얼떨결에 주어진 평화를 서둘러 강물에 던져버리고서야 저는 안심하고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더 이상 아쉽지도, 그립지도 안타깝지도, 슬프지도, 허전하지도, 외롭지도 않다면 그보다 더한 감옥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서럽고 아픈 마음에 경배합니다.

소음이라고는 가끔 개짓는 소리가 전부였습니다. 개들은 이 놈의 고요가 불만이라는 듯 한번 짖기 시작하면 아무 대꾸도 없는 허공을 향해 줄기차게 혼자 짖어댑니다.

, , , ,

골목 건너 이웃집의 수저 달그락거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평화를 깨고 개는 그렇게 일정한 간격과 높이로 짖어댑니다. 이 적요는 불길하다고, 이 적요는 거짓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적만이 뒷짐 지고 걸어다니는 골목, 지나는 행인도 없는 길을 향해 줄기차게 짖어내는 개의 항변은 분명 나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생각은 거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놈,

이 놈,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니?

백주 대낮에 무장해제하고

앞산 뒷산 꽃향기에 파묻혀

유유자적 콧노래나 흥얼대며

그렇게 소리치는 동네 개들의 질타를 듣고 있다가 불현듯 이 말이 제게 왔습니다.

 

노심초사

하늘이 저를 어여삐 여겨 저를 닦달할 매운 회초리 하나를 내려주신 것입니다.

옮거니, 저는 엎드려 그 회초리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노심초사는 다시 저에게 왔습니다.

불현 듯, 밑도 끝도 없이, 집 나간 잔소리꾼 시누이가 돌아오듯이.

두 번 다시 보지 말자며 대판 싸우고 헤어진 진검승부 라이벌이 멋쩍게 웃으며 돌아오듯이.

단숨에 이혼 도장 찍고 재산 분할까지 마친 30년 조강지처가 돌아오듯이.

보나마나 저는 이 녀석들과 다시 죽기 살기로 사투를 벌여야 할 것입니다. 얼마간 안방 차지를 하고 있던 유유자적이란 놈이 흥 별꼴이야콧방귀를 뀌며 집을 나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녀석은 아주 사라진 게 아니라 근처 어디에 숨어 다시 비집고 들어올 틈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저는 그렇게 지금 노심초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는 잠시도 쉬지 않고 세상 앞에 애태우는 마음 노동자입니다.

 

(계간 발견 2016년 가을호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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