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천진성과 원초적 생의 리듬
이숭원
1986년에 등단하고 1987년에 첫 시집을 내었으니 최영철의 시력이 이십 년이 훌쩍 넘었다. 그의 시 세계는 시집을 낼 때마다 조금씩 변해왔다. 돌이켜보건대 변화의 폭이 가장 큰 시집은 다섯번째 시집인 [일광욕하는 가구](문학과지성사, 2000)일 것이다. 소외된 존재에 대한 관심을 축으로 변주를 보이던 그의 시는 이 시집에서 자연과 사랑이라는 주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시정신의 고양과 작법의 갱신을 이룩한다. 그로부터 10년 후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그는 또 한 차례 커다란 변화를 보인다. 그 변화의 기틀을 포괄적으로 요약하면 ‘자연과 인간의 비차별적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최영철의 시에서 자연과 인간은 화해롭게 넘나든다. [씨앗]에서는 자연물이 화자가 되어 자신의 생각을 토로하는가 하면, [4월 꽃비]는 자연물이 시인에게 말을 걸고 면상을 후려치기도 한다. 많은 시편들에서 자연 현상을 표현하되 그것을 인간의 형상으로 바꾸어 묘사하고 인간의 사연을 서술하다가 그것을 다시 자연의 정경으로 환치한다. 그의 상상력이 작동하는 운동마당에서 자연과 인간은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작품이 자연을 인간의 형상으로 바꾸어 묘사하는 전형적인 예다.
잘 늙은 사내의 얼굴이다
여한은 없으되
막잔으로 맛있는 술 한 모금 하고
술빚 다 못 갚은 동무들 이름 적어 보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몇 줄 안부도 적어 보다
오늘은 모래펄 넓은 귀퉁이
저녁 해의 당부를 받아 적었다
골고루 따스하게
너희 모두를 비추지 못해 미안하다며
나 가고 없더라도
춥고 어두운 밤
서로 데우고 밝히며 살아가라고
구불렁구불렁 써놓은 글씨
모래펄 한 페이지를 다 채웠다
-[다대포 갯벌] 전문
‘다대포 갯벌’이라는 제목을 고려하지 않고 이 시를 그냥 읽으면 노동으로 살아온 늙은 사내가 술에 취하여 세상의 동무들에게 미리 유서를 남겨놓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제목과 관련지어 읽을 때 비로소 다대포 갯벌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남들이 따르지 못하는 최영철 시의 독특한 작법이다. 인간의 행적으로 읽어도 이해에 모자람이 없고 갯벌의 비유로 읽어도 의미의 얽힘이 없으며 그 둘의 접합으로 읽으면 더욱 아기자기한 복합적 쾌미를 맛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세상사에 관심이 많은 시인의 주제의식을 반영하여, 저녁 해의 당부라는 명목으로, 골고루 따스하게 서로를 비추어주며 춥고 어둡더라도 서로 데우고 밝히며 살아가라는 전언을 다대포 모래펄에 펼쳐진 노을의 이미지로 제시하였다.
자연과 인간이 호응하는 시에서는 인간사와 관련된 주제가 겉으로 드러나지만, 자연 자체를 노래하는 경우에는 생명의 천진한 자태를 통해 자연의 섭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을 취한다. &&잎들%%이나 &&봄, 화답%% &&봄봄%% 같은 시를 보면 자연을 정령화하여 표현하는 독특한 상상력이 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잎들%%에서 비상의 꿈을 지닌 잎이 새처럼 팔랑이는 날개를 키우고 바람처럼 가벼워져서 짧은 활공에 성공한다. 하늘을 날다 바닥에 가라앉아 지친 듯 단잠에 빠져 있는 잎들의 모습을 “소록소록 깨알처럼 작아져 처음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행진”이라고 묘사한 것,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대자연의 거룩한 원경을 “다시 하늘은 높고 깊은 눈”으로 압축한 것은 자연이 지닌 순환의 섭리를 객관적 형상으로 표현한 창조적인 명구다. 다음의 시 역시 인간을 개입하지 않고 자연을 정령화하여 표현한 대표적인 예다.
햇살 꽂힌다
잠든 척 엎드린 강아지 머리에
퍼붓는 화살
깼나 안 깼나
쿡쿡 찔러본다
비 온다
저기 산비탈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
죽었나 살았나
쿡쿡 찔러본다
바람 분다
이제 다 영글었다고
앞다퉈 꼭지에 매달린 것들
익었나 안 익었나
쿡쿡 찔러본다
-[찔러본다] 전문
자연의 핵심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인간의 미혹한 사념을 가능한 한 떨쳐내고 자연처럼 천진한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햇살 비치고 비 오고 바람 부는 평범한 자연 현상도 자연물끼리 관계를 맺는 다감한 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새롭고 깊게 관찰해야 한다. 자연의 섭리에 가까이 다가갈 만큼 천진한 마음의 자리가 마련될 때 위와 같은 새로운 생명 인식이 탄생한다. 잠든 척 엎드려 있는 강아지 머리에 비치는 따가운 햇살은 강아지가 깼나 안 깼나 확인해보기 위해 쿡쿡 찔러보는 동작이고 산비탈에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에 내리는 비는 그 다랑이논이 죽었나 살았나 알아보기 위해 찔러보는 것이며 영근 열매 꼭지에 부는 바람은 열매가 익었나 안 익었나 찔러보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생각의 연쇄가 일견 단순한 것 같지만 여기에는 우주의 비밀, 자연의 신묘한 섭리에 대한 관심이 담겨 있다. 강아지 머리에 떨어지는 햇살은 강아지를 편안히 잠들게도 하지만 잠든 강아지를 일으켜 새로운 역동과 성장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작용도 한다. 산비탈 다랑이논에 내리는 비는 잔돌 사이를 뚫고 스며들어 척박한 다랑이에 다시 생명이 움트게 하는 작용을 한다. 열매에 스쳐가는 바람 역시 성숙의 마지막 단맛을 열매에 불어넣는 최종적 확인과 점검의 작용을 한다. 이렇게 쿡쿡 찔러보는 자연의 동작이 있기에 동물은 생기를 얻고 작은 논밭에도 새 움이 돋고 열매는 충만한 성숙의 결실을 거두는 것이다. 우주의 자연 만물은 이렇게 서로 쿡쿡 찔러보는 상호작용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이러한 자연의 융합상은 인간에게 위안을 주기도 하고 교훈을 주기도 한다. &&용서%%라는 시는 풀에게서 용서와 관용을 배우는 반성적 자아를 설정했다. 논어에서 자공이 공자에게 묻기를 평생 실천할 만한 덕행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이 있겠느냐고 하자 공자는 ‘용서’(恕-헤아리다)라고 답하고, 다시 풀어 말하기를 “자기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뜻이라고 했다. 밭에서 풀을 뽑는 화자는 평소에 풀의 윗부분은 물론이고 뿌리까지 없애버리는데, 원한 같은 것은 까맣게 잊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얼굴 내밀고 꽃까지 피워 올려 빙그레 웃는 풀의 모습을 보고 공자가 말한 용서의 진수를 자연에게서 배우고 있다.
그런데 자연이 이렇게 천진한 자태로 우주의 섭리를 가르쳐주고 있지만 이러한 자연의 원융상도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을 받는다. 자연을 다른 각도에서 의인화하여 표현한 &&자연학교%%나 &&지구수족관%% 같은 시에 자연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연학교]는 우리가 대하는 자연 공간을 학교로 설정하여 재미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그런데 그 시의 끝부분은 “한동안 분교였으나 지금은 모두 다른 간판을 내걸고 있는 학교, 곧 지구에서 없어질 학교”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 이로운 것을 가르쳐주던 자연학교가 이제는 그 기능을 잃고 지구에서 사라질 것 같다는 위기감을 예고해준다. 또 [지구수족관]은 이보다 사정이 더 악화되어 숨 쉴 구멍이 없어지고 천지가 뒤집혀 거꾸로 박히고 아무 기척도 없이 사라질 참혹한 사멸의 장면을 예감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와 원인은 물론 인간에게 있다. 그러면 인간의 상황이 어떠하기에 이렇게 비관적인 예감을 갖게 되었을까? 그 단서를 알려주는 작품이 여러 편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는 윗도리 하나를 척 걸쳐놓듯이
원룸 베란다 옷걸이에 자신의 몸을 걸었다
딩동 집달관이 초인종을 누르고
쾅쾅 빚쟁이가 문을 두드리다 갔다
그럴 때마다 문을 열어주려고 펄럭인
그의 손가락이 풍장되었다
하루 대여섯 번 전화기가 울었고
그걸 받으려고 펄럭인
그의 발가락이 풍장되었다
숨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려고
창을 조금 열어두길 잘했다
옷걸이에 걸린 그의 임종을
해가 그윽이 내려다보았고
채 감지 못한 눈을 바람이 달려와 닫아주었다
살아있을 때 이미 세상이 그를 묻었으므로
부패는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진물이 뚝뚝 흘러내릴 즈음
초인종도 전화벨도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지는 눈물을
바람이 와서 부지런히 닦아주고 갔다
몸 안의 물이 다 빠져나갈 즈음
풍문은 잠잠해졌고
그의 생은 미라로 기소중지되었다
마침내 아무도 그립지 않았고
그보다 훨씬 먼저
세상이 그를 잊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식아 희야 하고 나직이 불러보아도
눈물 같은 건 흐르지 않았다
바람만 간간이 입이 싱거울 때마다
짠물이 알맞게 밴 몸을 뜯어먹으러 왔다
자린고비 같은 일 년이 갔다
빵을 꿰었던 꼬챙이만 남아
그는 건들건들 세월아 네월아
껄렁한 폼으로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경매에 넘어간 그를 누군가가 구매했고
쓰레기봉투에 쑤셔 넣기 전
쓸데없는 물건으로 분류된 뼈다귀 몇 개를
발로 한번 툭 걷어찼다
-[풍장] 전문
이 작품은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고 점착력 있는 묘사와 서술로 구성되었다. 어느 한 단어도 허술히 다루지 않고 적재적소에 시어를 배치하는 정교한 조어법이 경탄스럽다. 한 사나이가 자신이 거주하는 원룸 베란다 빨래건조대에 목을 매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는 죽음을 선택한 사나이의 마음이요, 그다음에 이어진 “윗도리 하나를 척 걸쳐놓듯이”는 숨이 끊어져 몸이 늘어진 사나이의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시각이 다른 두 문장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시적 섬광이 발생한다. 자신의 헛된 몸 하나 버리는 데 장소가 무슨 상관이냐는 자포자기의 무력증과 살던 몸을 버리는 것이 그저 옷걸이에 자신의 옷을 거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무망한 허탈감이 두 시행에 도발적으로 교차된다.
원룸에서 혼자 몸을 버린 사내이니 사연이 많을 것이다. 집달관이 초인종을 누르다 가고 빚쟁이가 문을 두드리다 갔고 전화벨도 하루 여러 번 울렸다. 그다음에 이어진 생각은 슬프면서도 유머러스하다. 그럴 때마다 그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움직이려 반응을 보였으나 모두 풍장되었다는 것이다. 생명을 잃은 몸이 어찌 움직일 수 있었겠는가? 죽어서도 생시에 하던 그대로 반응이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손가락 발가락부터 핏기를 잃으며 탈색되어가는 부식의 과정을 연상케 한다. “진물이 뚝뚝 흘러내릴 즈음”이라고 부패의 정도를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바닥에 떨어지는 눈물을/바람이 와서 부지런히 닦아주고 갔다”는 구절은 죽음이 남긴 누추한 생의 잔재를 자연이 말끔히 수습해 준다는 위안의 의미를 전달한다.
“자린고비 같은 일 년이 갔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시간이 자린고비처럼 흐르는가? 자린고비는 지나칠 정도로 인색한 사람이니 그에게는 일 년이 지나가는 것도 아주 조금씩 소모되면서 지나갈 것이다. 아주 천천히 진물이 빠지고 눈물이 빠지면서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시간이 지나가자 베란다 옷걸이에는 육신은 다 탈골되고 “빵을 꿰었던 꼬챙이만 남아” 건들건들 껄렁한 모양으로 걸려 있게 되었다. 매우 참혹한 이 장면도 시인은 하나의 객관적 정황을 제시하듯 드라이하게 묘사했다. 해골의 상태로 발견된 이 잔재는 무가치한 사물이 되어 비닐 봉투에 담겨 어느 조사실 같은 곳으로 운반될 것이다. 마지막 시행의 냉담한 묘사는 인간의 주검이 갖는 가치가 거의 없다는 현실에 대한 비정한 인식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도 어느 시각에서 보자면 이렇게 “쓸데없는 물건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부정적 생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연과 인간이 소통하고 자연이 인간에게 깨우침과 교훈을 주고 인간이 자연을 통해 정서적 울림을 갖고 하는 것은 모두 과장이고 가식이다. 인간이 한갓 빵을 꿰던 꼬챙이로 남아 무가치한 뼈다귀가 될 터인데 자연과의 호응이 무슨 사치스런 유희란 말인가? 인간은 각박한 삶의 한 끝에 매달려 무거운 몸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캄캄한 천길 벼랑을 탄탄대로라고 으스대며” 나서지만, 어디로 가는 것이 옳은지도 모르는 길을 “뒤집어진 채 사지가 잘린 채”[적막 또는 막막]) 기어간다. 지옥과 같은 상황이 엄습하는데도 오체투지의 자세로 배안에 밥을 쑤셔 넣는 일에만 열중하다가(&&오체투지%%) 종말의 시간이 오면 무너져 내려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존재가 우리 인간이다. 이것은 매우 끔찍스러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죽음을 연상하기도 하고 “망자들이 우리를 보며 울고 있다”([참배])고 생각한다. 이처럼 참혹한 상상은 아니지만, 세상살이의 어긋남이 가져오는 슬픔과 그 슬픔을 떠받치는 풍문의 덧없음을 다소 감상적으로 노래한 다음 시는, 비애와 회한으로 얼룩진 우리들 삶의 실상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것 같아 인상적이다.
낯선 저수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지난해 물에 빠져 죽었다는 그녀
어릴 적 고모네 가며 함께 걸었던 누이
그러고 두세 번 보았을까
시집가 아이 둘 낳았다는 풍문
신랑과 별거해 호프집 한다는 풍문
어느 날 가게 문 닫고 나가 감감무소식이라는 풍문
그리고 며칠 뒤
단골 총각과 함께 저수지 위로 떠올랐다는 풍문을
신문 귀퉁이에서 읽었다
고모는 우세스럽다며 입을 다물었지만
풍문에 쫓겨 수몰되었을 누이의 로맨스를
나는 알 것도 같다
풍문이 밝히지 못한 단말마의 흐느낌을
누구든 생의 끝 진실은 풍문이 되고 말 것이지만
누이의 늦은 사랑은 아무래도 풍문이 아닐 것 같다
그게 옳다면 바보처럼 죽지만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보라며
목이 멘 저수지 수면이 자꾸만 자꾸만
가슴을 쥐어뜯는다
나는 너무 늦게 이 저수지에 왔고
누이는 너무 늦게 사랑을 알았을 뿐
-[풍문] 전문
너무 늦게 사랑을 안 누이는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누이를 죽음으로 몰아낸 사연은 다른 사람에게 그저 가벼운 풍문이 되어 떠돌았을 뿐이다. 풍문에 가려진 진실은 죽은 두 사람만의 소유물인 것. 그 둘의 죽음으로 영원히 밀봉될 사랑의 진실, 사랑의 진실이 가져왔을 단말마의 흐느낌 같은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사람들은 진실의 심층보다 표층에 떠도는 소문의 선정성에 호기심을 느낄 뿐이다. 그 진심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화자도 누이와의 시간차 때문에 누이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풍문의 한 끝에 서서 그 안에 숨어 있을 진심을 짐작할 뿐이다. “나는 너무 늦게 이 저수지에 왔고/누이는 너무 늦게 사랑을 알았을 뿐”이라는 구절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에서 숱하게 대하는 생의 어긋남,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생의 위화감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면 이와 같은 삶의 어긋남, 그것이 가져올 순정성의 훼손, 거기서 올 극심한 절망의 탄식, 거기에 대한 대안은 없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앞에서 본 자연과 인간의 화해로운 조응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그 소통과 조응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 자연에 합치될 수 있는 인간의 천진성, 동심의 무죄함에 대한 성찰이다. [기도]라는 시는 미사 때 올리는 아이의 기도를 시의 화제로 삼았다. 순진하기 그지없는 아이는, 미사 볼 때 졸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졸 때 하느님이 다녀가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아이의 천진한 기도에 동화된 화자 역시 작고 소박한 기도를 한다. 집 나간 강아지가 무사하기를 빌고, “제발 무서운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해달라고” “잡아먹히더라도 개소주 같은 건 안 되게 해달라고” 빈다. 이 천진성이 자연과 호응하여 우주의 섭리를 알게 하는 동인이다. 무구한 천진성이 있어야 자연은 자신의 몸을 열어 인간을 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살색 그대로인 고추를 드러낸 아이들이 “재잘대는 말소리도 살색, 쿨럭쿨럭 기침소리도 살색”([고추]) 그대로 보여줄 때 자연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 그러한 유아적 천진성을, 살색 그대로의 꾸밈없는 마음을 우리 앞에 실현하는 존재들이 간혹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자연을 보는 눈이 유지되고 자연과의 화합도 꿈꿀 수 있다. 우리를 구원하여 진심의 세계로 이끄는 의인들. 그중의 하나가 다음 시에 있다.
땡볕 피해 잠시 그늘에 서서 땀 식히는데
건너편 공사장
함지에 돌무더기 담아 부지런히 이다 나르는 저 여자
노래방 도우미만 해도 한 시간 몇만 원이라는데
공짜 술에 노래에 장단이나 맞추어주면
넉넉한 하루 일당이라는데
참 딱하다 시원한 그늘을 두고
땡볕 아래 구슬땀 흘리며 가지 뻗는 저 여자
큰 나무가 드리워준 시원한 그늘을 마다하고
있는 힘 다해 그늘을 밀어내며
은근히 파고 들어온 남정네의 취한 손길을 밀어내며
참 딱하다 그늘에서 퍼낸 돌무더기
뙤약볕 아래 자꾸자꾸 내다 버리고 있는 저 여자
그녀가 버린 돌무더기
환한 땡볕 아래 모여 앉아 반질반질 윤기 나는 눈으로
이쪽 그늘의 나를 쳐다보는데
와르르 또 한 번의 돌무더기를 내려놓고
바삐 돌아서는 저 여자
그늘에 선 나를 쓸어 담아
와르르 뙤약볕 한가운데 내려놓으려고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저 여자
-[뙤약볕 저 여자] 전문
세상에는 묘하게도 “시원한 그늘을 두고/땡볕 아래 구슬땀 흘리며 가지 뻗는” 나무 같은 사람이 존재한다. 나무의 생리를 본받으려는 자연의 순례자들이다. “있는 힘 다해 그늘을 밀어내며” 혼자의 삶을 개척해가는 존재들. 그들이 우리에게 참다운 삶의 맛을 일깨워준다. 시인은 아직도 소외된 계층의 노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건강한 노동의 결과물인 버려진 돌무더기는 “환한 땡볕 아래 모여 앉아 반질반질 윤기 나는 눈으로/이쪽 그늘의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첫 시집의 표제작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에 나오는 “벌어진 널빤지 사이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는 응시의 눈길과 통한다. 이십여 년의 세월 속에서도 시인은 소외된 소수자들이 갖고 있는 강렬한 응시의 힘을 그대로 간직해온 것이다.
그 여자는 건강한 노동의 복판인 ‘뙤약볕 한가운데’에 있고 나는 행동의 중심에서 벗어난 ‘그늘’에 있다. 저 여자의 존재상은 어떤 것인가? “그늘에 선 나를 쓸어 담아/와르르 뙤약볕 한가운데 내려놓으려고/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여자라고 시인은 말하였다. 겉으로는 건강한 노동의 현장으로 나를 이끌고 가려는 존재인 것처럼 표현했지만 쉰 살을 넘긴 시인에게 건강한 노동은 무리다. 다만 그에게 건강한 삶의 천진성을 일깨워주는 존재다. 그래서 “뙤약볕 저 여자”는 강아지를 찔러보는 햇살, 다랑이를 찔러보는 비, 열매를 찔러보는 바람처럼 나를 찔러보는 존재다. 그 찔러봄이 소외된 소수자들이 갖고 있던 응시의 힘이고 야성으로 빛나던 강인한 생명력이고 자연의 진정성과 만나게 하는 견인의 힘이다.
황폐한 삶의 굴레 속에서도 시인으로 하여금 자연에 눈을 돌리게 하고 자연과 화합하게 하는 동인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게 되었다. 시적 주제의 측면에서 알아본 그런 이해와는 달리 시적 생리의 측면에서 이번 시집에서 발견되는 최영철 시의 색다른 발랄성에도 우리는 눈을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언어유희로부터 출발하여 독특한 가락과 장단을 통해 시의 새로운 리듬을 생산해내려는 시인의 노력이다. 가령 &&엄청난 무기%%에서 “어깨가 우쭐”과 “무엇이 걱정”을 반복해가며 자신의 천진한 꿈을 흥겹게 엮어나가는 연쇄적 리듬의 창조라든가 “4월 꽃비”에서 “야이 후레자식아”를 반복적으로 삽입해서 연이어 비처럼 떨어지는 꽃잎들의 흩날림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방법, &&쉰%% &&늙음%% 등의 시에서 시행을 ‘쉰’으로 끝맺거나 ‘늘 그럼’으로 시작하여 언어의 중의적 표현 속에 시의 리듬을 살리고자 한 노력 등은 현대시에 새로운 운율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학사적 성과로 평가되어야 한다. 새로운 리듬을 생산하려는 노력이 가장 집약적으로 응결된 작품은 다음의 시다.
숟가락 젓가락 어깨춤 배춤 먹다 만 국그릇 빈 밥그릇
간장 종지 짜게 갔다 싱겁게 돌아오는 지게목발 된서리
내 뺨따귀 네 허벅지 내 머리통 네 등허리
질펀 넓적 오동통 볼기짝 망할 놈 육시랄 놈
산에 가서 나무 베고 강에 가서 멱 감아
간들간들 봄바람 살랑살랑 여름바람 휘영청 갈바람
얼음장 칼바람 날 선 꽃샘바람 뻥 뚫는 빈 가슴 메아리
뚝딱 뚜다닥 뚝닥 뚜닥 어두운 담벼락
높이 선 적막을 밀어내고 잡귀를 쫒아내고
서에 번쩍 북에 번쩍 한달음에 도망가는 앞뒤 강 추임새
얼쑤 한번 일어나 덩실덩실 놀아보는 굿거리 세마치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엇모리
양은냄비 두레밥상 꽹과리가 깨앵깨앵 소리쳐 부르자
단잠 깨고 오종종 걸어와 묵직한 징소리로 엎드린
햇살 한 줌 궁……
-[장단] 전문
이 시를 읽으면 그가 추구하는 시적 리듬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 핏속에 흘러오는 전통적인 민요의 가락을 종합적으로 계승하여 인생사와 자연사에 병치되는 새로운 가락을 창조하려 한다. 이것은 이번 시집에서 새롭게 선보인 창조적인 시도다. 이 새로운 리듬은 그가 추구하는 자연과 인간의 비차별적 소통과 연결되며 소통의 기반이 되는 천진성의 회복과도 연결된다. 시의 리듬이야말로 시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자연 발생적인 기본 요소이기 때문이다.
시의 리듬은 이념이나 사유를 떠난 인간의 원초적인 생의 호흡을 반영한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살색 고추와 같은 것이다. 원초적인 생의 리듬은 인간의 천진성과 연결되고 인간의 천진성은 자연의 섭리에 다가갈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최영철 시의 리듬은 자연의 천진성과 인간의 천진성을 넘나들게 하는 신묘한 굿판의 장단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 인간, 리듬의 측면에서 최영철이 펼쳐낸 시적 진경은 21세기 한국시의 새로운 풍광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 시집 [찔러본다]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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