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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천진성과 원초적 생의 리듬

 

 

                                                                                                                  이숭원

 

 

 

1986년에 등단하고 1987년에 첫 시집을 내었으니 최영철의 시력이 이십 년이 훌쩍 넘었다. 그의 시 세계는 시집을 낼 때마다 조금씩 변해왔다. 돌이켜보건대 변화의 폭이 가장 큰 시집은 다섯번째 시집인 [일광욕하는 가구](문학과지성사, 2000)일 것이다. 소외된 존재에 대한 관심을 축으로 변주를 보이던 그의 시는 이 시집에서 자연과 사랑이라는 주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시정신의 고양과 작법의 갱신을 이룩한다. 그로부터 10년 후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그는 또 한 차례 커다란 변화를 보인다. 그 변화의 기틀을 포괄적으로 요약하면 ‘자연과 인간의 비차별적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최영철의 시에서 자연과 인간은 화해롭게 넘나든다. [씨앗]에서는 자연물이 화자가 되어 자신의 생각을 토로하는가 하면, [4월 꽃비]는 자연물이 시인에게 말을 걸고 면상을 후려치기도 한다. 많은 시편들에서 자연 현상을 표현하되 그것을 인간의 형상으로 바꾸어 묘사하고 인간의 사연을 서술하다가 그것을 다시 자연의 정경으로 환치한다. 그의 상상력이 작동하는 운동마당에서 자연과 인간은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작품이 자연을 인간의 형상으로 바꾸어 묘사하는 전형적인 예다.

 

 

잘 늙은 사내의 얼굴이다

여한은 없으되

막잔으로 맛있는 술 한 모금 하고

술빚 다 못 갚은 동무들 이름 적어 보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몇 줄 안부도 적어 보다

오늘은 모래펄 넓은 귀퉁이

저녁 해의 당부를 받아 적었다

골고루 따스하게

너희 모두를 비추지 못해 미안하다며

나 가고 없더라도

춥고 어두운 밤

서로 데우고 밝히며 살아가라고

구불렁구불렁 써놓은 글씨

모래펄 한 페이지를 다 채웠다

                      -[다대포 갯벌] 전문

 

‘다대포 갯벌’이라는 제목을 고려하지 않고 이 시를 그냥 읽으면 노동으로 살아온 늙은 사내가 술에 취하여 세상의 동무들에게 미리 유서를 남겨놓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제목과 관련지어 읽을 때 비로소 다대포 갯벌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남들이 따르지 못하는 최영철 시의 독특한 작법이다. 인간의 행적으로 읽어도 이해에 모자람이 없고 갯벌의 비유로 읽어도 의미의 얽힘이 없으며 그 둘의 접합으로 읽으면 더욱 아기자기한 복합적 쾌미를 맛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세상사에 관심이 많은 시인의 주제의식을 반영하여, 저녁 해의 당부라는 명목으로, 골고루 따스하게 서로를 비추어주며 춥고 어둡더라도 서로 데우고 밝히며 살아가라는 전언을 다대포 모래펄에 펼쳐진 노을의 이미지로 제시하였다.

자연과 인간이 호응하는 시에서는 인간사와 관련된 주제가 겉으로 드러나지만, 자연 자체를 노래하는 경우에는 생명의 천진한 자태를 통해 자연의 섭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을 취한다. &&잎들%%이나 &&봄, 화답%% &&봄봄%% 같은 시를 보면 자연을 정령화하여 표현하는 독특한 상상력이 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잎들%%에서 비상의 꿈을 지닌 잎이 새처럼 팔랑이는 날개를 키우고 바람처럼 가벼워져서 짧은 활공에 성공한다. 하늘을 날다 바닥에 가라앉아 지친 듯 단잠에 빠져 있는 잎들의 모습을 “소록소록 깨알처럼 작아져 처음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행진”이라고 묘사한 것,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대자연의 거룩한 원경을 “다시 하늘은 높고 깊은 눈”으로 압축한 것은 자연이 지닌 순환의 섭리를 객관적 형상으로 표현한 창조적인 명구다. 다음의 시 역시 인간을 개입하지 않고 자연을 정령화하여 표현한 대표적인 예다.

 

 

햇살 꽂힌다

잠든 척 엎드린 강아지 머리에

퍼붓는 화살

깼나 안 깼나

쿡쿡 찔러본다

 

비 온다

저기 산비탈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

죽었나 살았나

쿡쿡 찔러본다

 

바람 분다

이제 다 영글었다고

앞다퉈 꼭지에 매달린 것들

익었나 안 익었나

쿡쿡 찔러본다

                    -[찔러본다] 전문

 

자연의 핵심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인간의 미혹한 사념을 가능한 한 떨쳐내고 자연처럼 천진한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햇살 비치고 비 오고 바람 부는 평범한 자연 현상도 자연물끼리 관계를 맺는 다감한 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새롭고 깊게 관찰해야 한다. 자연의 섭리에 가까이 다가갈 만큼 천진한 마음의 자리가 마련될 때 위와 같은 새로운 생명 인식이 탄생한다. 잠든 척 엎드려 있는 강아지 머리에 비치는 따가운 햇살은 강아지가 깼나 안 깼나 확인해보기 위해 쿡쿡 찔러보는 동작이고 산비탈에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에 내리는 비는 그 다랑이논이 죽었나 살았나 알아보기 위해 찔러보는 것이며 영근 열매 꼭지에 부는 바람은 열매가 익었나 안 익었나 찔러보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생각의 연쇄가 일견 단순한 것 같지만 여기에는 우주의 비밀, 자연의 신묘한 섭리에 대한 관심이 담겨 있다. 강아지 머리에 떨어지는 햇살은 강아지를 편안히 잠들게도 하지만 잠든 강아지를 일으켜 새로운 역동과 성장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작용도 한다. 산비탈 다랑이논에 내리는 비는 잔돌 사이를 뚫고 스며들어 척박한 다랑이에 다시 생명이 움트게 하는 작용을 한다. 열매에 스쳐가는 바람 역시 성숙의 마지막 단맛을 열매에 불어넣는 최종적 확인과 점검의 작용을 한다. 이렇게 쿡쿡 찔러보는 자연의 동작이 있기에 동물은 생기를 얻고 작은 논밭에도 새 움이 돋고 열매는 충만한 성숙의 결실을 거두는 것이다. 우주의 자연 만물은 이렇게 서로 쿡쿡 찔러보는 상호작용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이러한 자연의 융합상은 인간에게 위안을 주기도 하고 교훈을 주기도 한다. &&용서%%라는 시는 풀에게서 용서와 관용을 배우는 반성적 자아를 설정했다. 논어에서 자공이 공자에게 묻기를 평생 실천할 만한 덕행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이 있겠느냐고 하자 공자는 ‘용서’(恕-헤아리다)라고 답하고, 다시 풀어 말하기를 “자기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뜻이라고 했다. 밭에서 풀을 뽑는 화자는 평소에 풀의 윗부분은 물론이고 뿌리까지 없애버리는데, 원한 같은 것은 까맣게 잊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얼굴 내밀고 꽃까지 피워 올려 빙그레 웃는 풀의 모습을 보고 공자가 말한 용서의 진수를 자연에게서 배우고 있다.

그런데 자연이 이렇게 천진한 자태로 우주의 섭리를 가르쳐주고 있지만 이러한 자연의 원융상도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을 받는다. 자연을 다른 각도에서 의인화하여 표현한 &&자연학교%%나 &&지구수족관%% 같은 시에 자연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연학교]는 우리가 대하는 자연 공간을 학교로 설정하여 재미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그런데 그 시의 끝부분은 “한동안 분교였으나 지금은 모두 다른 간판을 내걸고 있는 학교, 곧 지구에서 없어질 학교”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 이로운 것을 가르쳐주던 자연학교가 이제는 그 기능을 잃고 지구에서 사라질 것 같다는 위기감을 예고해준다. 또 [지구수족관]은 이보다 사정이 더 악화되어 숨 쉴 구멍이 없어지고 천지가 뒤집혀 거꾸로 박히고 아무 기척도 없이 사라질 참혹한 사멸의 장면을 예감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와 원인은 물론 인간에게 있다. 그러면 인간의 상황이 어떠하기에 이렇게 비관적인 예감을 갖게 되었을까? 그 단서를 알려주는 작품이 여러 편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는 윗도리 하나를 척 걸쳐놓듯이

원룸 베란다 옷걸이에 자신의 몸을 걸었다

딩동 집달관이 초인종을 누르고

쾅쾅 빚쟁이가 문을 두드리다 갔다

그럴 때마다 문을 열어주려고 펄럭인

그의 손가락이 풍장되었다

하루 대여섯 번 전화기가 울었고

그걸 받으려고 펄럭인

그의 발가락이 풍장되었다

숨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려고

창을 조금 열어두길 잘했다

옷걸이에 걸린 그의 임종을

해가 그윽이 내려다보았고

채 감지 못한 눈을 바람이 달려와 닫아주었다

살아있을 때 이미 세상이 그를 묻었으므로

부패는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진물이 뚝뚝 흘러내릴 즈음

초인종도 전화벨도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지는 눈물을

바람이 와서 부지런히 닦아주고 갔다

몸 안의 물이 다 빠져나갈 즈음

풍문은 잠잠해졌고

그의 생은 미라로 기소중지되었다

마침내 아무도 그립지 않았고

그보다 훨씬 먼저

세상이 그를 잊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식아 희야 하고 나직이 불러보아도

눈물 같은 건 흐르지 않았다

바람만 간간이 입이 싱거울 때마다

짠물이 알맞게 밴 몸을 뜯어먹으러 왔다

자린고비 같은 일 년이 갔다

빵을 꿰었던 꼬챙이만 남아

그는 건들건들 세월아 네월아

껄렁한 폼으로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경매에 넘어간 그를 누군가가 구매했고

쓰레기봉투에 쑤셔 넣기 전

쓸데없는 물건으로 분류된 뼈다귀 몇 개를

발로 한번 툭 걷어찼다

                                                    -[풍장] 전문

 

이 작품은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고 점착력 있는 묘사와 서술로 구성되었다. 어느 한 단어도 허술히 다루지 않고 적재적소에 시어를 배치하는 정교한 조어법이 경탄스럽다. 한 사나이가 자신이 거주하는 원룸 베란다 빨래건조대에 목을 매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는 죽음을 선택한 사나이의 마음이요, 그다음에 이어진 “윗도리 하나를 척 걸쳐놓듯이”는 숨이 끊어져 몸이 늘어진 사나이의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시각이 다른 두 문장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시적 섬광이 발생한다. 자신의 헛된 몸 하나 버리는 데 장소가 무슨 상관이냐는 자포자기의 무력증과 살던 몸을 버리는 것이 그저 옷걸이에 자신의 옷을 거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무망한 허탈감이 두 시행에 도발적으로 교차된다.

원룸에서 혼자 몸을 버린 사내이니 사연이 많을 것이다. 집달관이 초인종을 누르다 가고 빚쟁이가 문을 두드리다 갔고 전화벨도 하루 여러 번 울렸다. 그다음에 이어진 생각은 슬프면서도 유머러스하다. 그럴 때마다 그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움직이려 반응을 보였으나 모두 풍장되었다는 것이다. 생명을 잃은 몸이 어찌 움직일 수 있었겠는가? 죽어서도 생시에 하던 그대로 반응이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손가락 발가락부터 핏기를 잃으며 탈색되어가는 부식의 과정을 연상케 한다. “진물이 뚝뚝 흘러내릴 즈음”이라고 부패의 정도를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바닥에 떨어지는 눈물을/바람이 와서 부지런히 닦아주고 갔다”는 구절은 죽음이 남긴 누추한 생의 잔재를 자연이 말끔히 수습해 준다는 위안의 의미를 전달한다.

“자린고비 같은 일 년이 갔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시간이 자린고비처럼 흐르는가? 자린고비는 지나칠 정도로 인색한 사람이니 그에게는 일 년이 지나가는 것도 아주 조금씩 소모되면서 지나갈 것이다. 아주 천천히 진물이 빠지고 눈물이 빠지면서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시간이 지나가자 베란다 옷걸이에는 육신은 다 탈골되고 “빵을 꿰었던 꼬챙이만 남아” 건들건들 껄렁한 모양으로 걸려 있게 되었다. 매우 참혹한 이 장면도 시인은 하나의 객관적 정황을 제시하듯 드라이하게 묘사했다. 해골의 상태로 발견된 이 잔재는 무가치한 사물이 되어 비닐 봉투에 담겨 어느 조사실 같은 곳으로 운반될 것이다. 마지막 시행의 냉담한 묘사는 인간의 주검이 갖는 가치가 거의 없다는 현실에 대한 비정한 인식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도 어느 시각에서 보자면 이렇게 “쓸데없는 물건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부정적 생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연과 인간이 소통하고 자연이 인간에게 깨우침과 교훈을 주고 인간이 자연을 통해 정서적 울림을 갖고 하는 것은 모두 과장이고 가식이다. 인간이 한갓 빵을 꿰던 꼬챙이로 남아 무가치한 뼈다귀가 될 터인데 자연과의 호응이 무슨 사치스런 유희란 말인가? 인간은 각박한 삶의 한 끝에 매달려 무거운 몸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캄캄한 천길 벼랑을 탄탄대로라고 으스대며” 나서지만, 어디로 가는 것이 옳은지도 모르는 길을 “뒤집어진 채 사지가 잘린 채”[적막 또는 막막]) 기어간다. 지옥과 같은 상황이 엄습하는데도 오체투지의 자세로 배안에 밥을 쑤셔 넣는 일에만 열중하다가(&&오체투지%%) 종말의 시간이 오면 무너져 내려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존재가 우리 인간이다. 이것은 매우 끔찍스러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죽음을 연상하기도 하고 “망자들이 우리를 보며 울고 있다”([참배])고 생각한다. 이처럼 참혹한 상상은 아니지만, 세상살이의 어긋남이 가져오는 슬픔과 그 슬픔을 떠받치는 풍문의 덧없음을 다소 감상적으로 노래한 다음 시는, 비애와 회한으로 얼룩진 우리들 삶의 실상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것 같아 인상적이다.

 

 

낯선 저수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지난해 물에 빠져 죽었다는 그녀

어릴 적 고모네 가며 함께 걸었던 누이

그러고 두세 번 보았을까

시집가 아이 둘 낳았다는 풍문

신랑과 별거해 호프집 한다는 풍문

어느 날 가게 문 닫고 나가 감감무소식이라는 풍문

그리고 며칠 뒤

단골 총각과 함께 저수지 위로 떠올랐다는 풍문을

신문 귀퉁이에서 읽었다

고모는 우세스럽다며 입을 다물었지만

풍문에 쫓겨 수몰되었을 누이의 로맨스를

나는 알 것도 같다

풍문이 밝히지 못한 단말마의 흐느낌을

누구든 생의 끝 진실은 풍문이 되고 말 것이지만

누이의 늦은 사랑은 아무래도 풍문이 아닐 것 같다

그게 옳다면 바보처럼 죽지만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보라며

목이 멘 저수지 수면이 자꾸만 자꾸만

가슴을 쥐어뜯는다

나는 너무 늦게 이 저수지에 왔고

누이는 너무 늦게 사랑을 알았을 뿐

                                                  -[풍문] 전문

 

 

너무 늦게 사랑을 안 누이는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누이를 죽음으로 몰아낸 사연은 다른 사람에게 그저 가벼운 풍문이 되어 떠돌았을 뿐이다. 풍문에 가려진 진실은 죽은 두 사람만의 소유물인 것. 그 둘의 죽음으로 영원히 밀봉될 사랑의 진실, 사랑의 진실이 가져왔을 단말마의 흐느낌 같은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사람들은 진실의 심층보다 표층에 떠도는 소문의 선정성에 호기심을 느낄 뿐이다. 그 진심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화자도 누이와의 시간차 때문에 누이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풍문의 한 끝에 서서 그 안에 숨어 있을 진심을 짐작할 뿐이다. “나는 너무 늦게 이 저수지에 왔고/누이는 너무 늦게 사랑을 알았을 뿐”이라는 구절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에서 숱하게 대하는 생의 어긋남,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생의 위화감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면 이와 같은 삶의 어긋남, 그것이 가져올 순정성의 훼손, 거기서 올 극심한 절망의 탄식, 거기에 대한 대안은 없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앞에서 본 자연과 인간의 화해로운 조응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그 소통과 조응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 자연에 합치될 수 있는 인간의 천진성, 동심의 무죄함에 대한 성찰이다. [기도]라는 시는 미사 때 올리는 아이의 기도를 시의 화제로 삼았다. 순진하기 그지없는 아이는, 미사 볼 때 졸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졸 때 하느님이 다녀가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아이의 천진한 기도에 동화된 화자 역시 작고 소박한 기도를 한다. 집 나간 강아지가 무사하기를 빌고, “제발 무서운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해달라고” “잡아먹히더라도 개소주 같은 건 안 되게 해달라고” 빈다. 이 천진성이 자연과 호응하여 우주의 섭리를 알게 하는 동인이다. 무구한 천진성이 있어야 자연은 자신의 몸을 열어 인간을 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살색 그대로인 고추를 드러낸 아이들이 “재잘대는 말소리도 살색, 쿨럭쿨럭 기침소리도 살색”([고추]) 그대로 보여줄 때 자연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 그러한 유아적 천진성을, 살색 그대로의 꾸밈없는 마음을 우리 앞에 실현하는 존재들이 간혹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자연을 보는 눈이 유지되고 자연과의 화합도 꿈꿀 수 있다. 우리를 구원하여 진심의 세계로 이끄는 의인들. 그중의 하나가 다음 시에 있다.

 

 

땡볕 피해 잠시 그늘에 서서 땀 식히는데

건너편 공사장

함지에 돌무더기 담아 부지런히 이다 나르는 저 여자

노래방 도우미만 해도 한 시간 몇만 원이라는데

공짜 술에 노래에 장단이나 맞추어주면

넉넉한 하루 일당이라는데

참 딱하다 시원한 그늘을 두고

땡볕 아래 구슬땀 흘리며 가지 뻗는 저 여자

큰 나무가 드리워준 시원한 그늘을 마다하고

있는 힘 다해 그늘을 밀어내며

은근히 파고 들어온 남정네의 취한 손길을 밀어내며

참 딱하다 그늘에서 퍼낸 돌무더기

뙤약볕 아래 자꾸자꾸 내다 버리고 있는 저 여자

그녀가 버린 돌무더기

환한 땡볕 아래 모여 앉아 반질반질 윤기 나는 눈으로

이쪽 그늘의 나를 쳐다보는데

와르르 또 한 번의 돌무더기를 내려놓고

바삐 돌아서는 저 여자

그늘에 선 나를 쓸어 담아

와르르 뙤약볕 한가운데 내려놓으려고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저 여자

                                               -[뙤약볕 저 여자] 전문

 

세상에는 묘하게도 “시원한 그늘을 두고/땡볕 아래 구슬땀 흘리며 가지 뻗는” 나무 같은 사람이 존재한다. 나무의 생리를 본받으려는 자연의 순례자들이다. “있는 힘 다해 그늘을 밀어내며” 혼자의 삶을 개척해가는 존재들. 그들이 우리에게 참다운 삶의 맛을 일깨워준다. 시인은 아직도 소외된 계층의 노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건강한 노동의 결과물인 버려진 돌무더기는 “환한 땡볕 아래 모여 앉아 반질반질 윤기 나는 눈으로/이쪽 그늘의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첫 시집의 표제작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에 나오는 “벌어진 널빤지 사이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는 응시의 눈길과 통한다. 이십여 년의 세월 속에서도 시인은 소외된 소수자들이 갖고 있는 강렬한 응시의 힘을 그대로 간직해온 것이다.

그 여자는 건강한 노동의 복판인 ‘뙤약볕 한가운데’에 있고 나는 행동의 중심에서 벗어난 ‘그늘’에 있다. 저 여자의 존재상은 어떤 것인가? “그늘에 선 나를 쓸어 담아/와르르 뙤약볕 한가운데 내려놓으려고/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여자라고 시인은 말하였다. 겉으로는 건강한 노동의 현장으로 나를 이끌고 가려는 존재인 것처럼 표현했지만 쉰 살을 넘긴 시인에게 건강한 노동은 무리다. 다만 그에게 건강한 삶의 천진성을 일깨워주는 존재다. 그래서 “뙤약볕 저 여자”는 강아지를 찔러보는 햇살, 다랑이를 찔러보는 비, 열매를 찔러보는 바람처럼 나를 찔러보는 존재다. 그 찔러봄이 소외된 소수자들이 갖고 있던 응시의 힘이고 야성으로 빛나던 강인한 생명력이고 자연의 진정성과 만나게 하는 견인의 힘이다.

황폐한 삶의 굴레 속에서도 시인으로 하여금 자연에 눈을 돌리게 하고 자연과 화합하게 하는 동인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게 되었다. 시적 주제의 측면에서 알아본 그런 이해와는 달리 시적 생리의 측면에서 이번 시집에서 발견되는 최영철 시의 색다른 발랄성에도 우리는 눈을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언어유희로부터 출발하여 독특한 가락과 장단을 통해 시의 새로운 리듬을 생산해내려는 시인의 노력이다. 가령 &&엄청난 무기%%에서 “어깨가 우쭐”과 “무엇이 걱정”을 반복해가며 자신의 천진한 꿈을 흥겹게 엮어나가는 연쇄적 리듬의 창조라든가 “4월 꽃비”에서 “야이 후레자식아”를 반복적으로 삽입해서 연이어 비처럼 떨어지는 꽃잎들의 흩날림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방법, &&쉰%% &&늙음%% 등의 시에서 시행을 ‘쉰’으로 끝맺거나 ‘늘 그럼’으로 시작하여 언어의 중의적 표현 속에 시의 리듬을 살리고자 한 노력 등은 현대시에 새로운 운율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학사적 성과로 평가되어야 한다. 새로운 리듬을 생산하려는 노력이 가장 집약적으로 응결된 작품은 다음의 시다.

 

 

숟가락 젓가락 어깨춤 배춤 먹다 만 국그릇 빈 밥그릇

간장 종지 짜게 갔다 싱겁게 돌아오는 지게목발 된서리

내 뺨따귀 네 허벅지 내 머리통 네 등허리

질펀 넓적 오동통 볼기짝 망할 놈 육시랄 놈

산에 가서 나무 베고 강에 가서 멱 감아

간들간들 봄바람 살랑살랑 여름바람 휘영청 갈바람

얼음장 칼바람 날 선 꽃샘바람 뻥 뚫는 빈 가슴 메아리

뚝딱 뚜다닥 뚝닥 뚜닥 어두운 담벼락

높이 선 적막을 밀어내고 잡귀를 쫒아내고

서에 번쩍 북에 번쩍 한달음에 도망가는 앞뒤 강 추임새

얼쑤 한번 일어나 덩실덩실 놀아보는 굿거리 세마치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엇모리

양은냄비 두레밥상 꽹과리가 깨앵깨앵 소리쳐 부르자

단잠 깨고 오종종 걸어와 묵직한 징소리로 엎드린

햇살 한 줌 궁……

                                        -[장단] 전문

 

이 시를 읽으면 그가 추구하는 시적 리듬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 핏속에 흘러오는 전통적인 민요의 가락을 종합적으로 계승하여 인생사와 자연사에 병치되는 새로운 가락을 창조하려 한다. 이것은 이번 시집에서 새롭게 선보인 창조적인 시도다. 이 새로운 리듬은 그가 추구하는 자연과 인간의 비차별적 소통과 연결되며 소통의 기반이 되는 천진성의 회복과도 연결된다. 시의 리듬이야말로 시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자연 발생적인 기본 요소이기 때문이다.

시의 리듬은 이념이나 사유를 떠난 인간의 원초적인 생의 호흡을 반영한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살색 고추와 같은 것이다. 원초적인 생의 리듬은 인간의 천진성과 연결되고 인간의 천진성은 자연의 섭리에 다가갈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최영철 시의 리듬은 자연의 천진성과 인간의 천진성을 넘나들게 하는 신묘한 굿판의 장단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 인간, 리듬의 측면에서 최영철이 펼쳐낸 시적 진경은 21세기 한국시의 새로운 풍광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 시집 [찔러본다]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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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하는 세상과 시인의 눈물

 

                                                                                     구모룡

 

범속한 트임

우리는 질서 잡힌 온전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조화롭고 완전한 세계를 갈망하는 시적 지향은 역설적이게도 난폭하고 무질서한 세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풍경의 대비는 단순하다. 오히려 훼손되지 않는 시원이나 원초적 고향은 환영에 가깝다. 현실은 복잡다단한 사건과 갈등, 우연한 죽음과 불행한 재난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영철 시인은 서정적 동일성이 지닌 한계를 시작 초기부터 간파하고 삶의 이면에 드리운 구체적 진실을 드러내는 시적 탐구를 지속해 왔다. 등단작 「연장론」(1986)은 일견 조화를 말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회의를 함축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잃어버린 고향을 추적하거나 도래할 희망을 과장하지 않는다. 삶의 구체적인 관계나 세계 속의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그의 일관된 시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변화는 대상과 어법의 차이에서 나타난다. 이는 신작시 「스마트 정진」, 「난파 2014」, 「벌레」 등이 보이는 차이처럼 시차를 두지 않고 교차한다.

「연장론」이 보여주고 있듯이 세속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시적 진실을 갈구하는 시인의 삶과 인식을 규정하는 말로 “범속한 트임”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즐거운 세속주의는 구체적인 발견의 언어와 더불어 인간학의 지평을 나타낸다. 가령 「스마트 정진」은 시인의 시법을 잘 알게 해준다. 도시철도 안에서 승객들이 스마트 폰에 몰입하고 있는 광경을 서술하고 있는 이 시는, 사람들이 세상을 넓게 이해하는 지평을 상실하고 존재를 망각하면서 탈감정과 무책임에 이르는 양상을 비판한다. 시인이 “스마트 정진”이라 풍자한 정보사회의 풍경은 소통의 과정이지만 미디어가 주는 메시지의 한계에 봉착한다. 정보와 오락을 지나 지혜와 진리에 이르는 사유의 과정이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모든 진리의 말씀은 캄캄한 지하 갱도에/묻혔다”고 탄식한다. 지하철이라는 “수행처”의 “경전”에는 “몇 차례 더 이어질 천지개벽의 위험성을/불가항력의 말세를 해독할 단서”가 없다. 수행자들은 그저 “혼자 빙그레 울었다/혼자 애통하게 웃었다”하는 그로테스크한 동물의 표정들을 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다중의 경관을 매우 비관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시인의 시선을 비관주의가 되게 하였는가? 정작 승객들이 모두 생각이 없거나 세상의 이치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스마트 정진”을 통해 사유의 지평을 확장하고 새로운 연대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시적 정황을 어두운 묵시의 분위기로 끌어간다. 왜?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진술 때문이다. “먼 바다에 수장된 아이들의 아우성이/지상을 뒤덮었으나 오래전 펼쳐진 검은 장막으로 귀를 틀어막은/세상은 더 깊은 땅굴을 팠다.” 그러므로 시인의 의도는 낱낱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대상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만큼 괴물이 된 사회체제와 그 구성원들의 운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오랜 회의주의는 이제 환멸의 넘어 묵시록의 언어로 터져 나온다.

 

난파하는 세상과 시쓰기

 

그러나 시인은 세상에 대한 환멸을 꾸준히 힘겹게 극복하려 한다. 천진성이나 자발성은 최영철의 시가 찾은 명랑한 멜랑콜리라 할 수 있다. 그는 시인의 과업을 “지나치게 진지하지도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는 것, 시와 잘 노는 것, 시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와 그 도구인 언어를 잘 가지고 노는 것, 잃었던 흥을 되살리는 것, 우리말의 묘미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열거한 바 있다. 가령 죽음과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담으면서 결코 주제의 무게에 눌려 가라앉는 어법을 구사하지 않는다. 「스마트 정진」이 그러했듯이 「벌레벌레」는 “인간은 벌레다” 또는 “인간은 벌레보다 못하다”라는 무거운 의도를 어조와 어법을 통하여 경쾌하게 전달하려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시인의 의도가 충분한 공감을 이끌 정도로 성취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주지하듯이 최영철은 수사학을 통하여 시적 성취를 이루려 한 시인이 아니다. 그는 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사물과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려 했다. 자멸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이라는 「벌레벌레」의 주제는 그의 시가 환멸의 세계인식으로 더욱 기울고 있음을 보여준다.

「난파 2014」의 직접적인 시적 계기는 “세월호 참사”라 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는 “눈을 감은 채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공포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속도와 환호 속에서 사람들은 세계의 진면을 보지 못한다. 재난에 직면하고서야 사후약방문처럼 그에 대처할 뿐이다. 시인은 재난 이후의 공허한 처방을 말하기보다 사건의 본질을 직시하려 한다. “엎어진 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라는 첫 구절처럼 시인은 근본에서 전도된 현실을 인식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이 그 어떤 불길한 파국의 징후임을 말하려 한다. “축포”가 터지고 “거대한 준공식”이 이어졌지만 그 이면에 도사린 “우환”은 은폐되어 아무도 그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은폐된 것이 드러나는 순간 “정적”이 “아우성”이 되고 “환호”가 “통곡”이 되는 파국이 개시된다. “크리시나의 수레”와 같이 멈출 줄 모르는 진보의 역사는 이미 종말론을 철폐한 종교가 되었다. 시인은 “세월호 참사”를 경험하면서 “항로를 움켜쥔 채 내빼던 쾌속선은 처음부터 이미 목표를 이탈한 난파선입니다”라고 지적한다. 속도의 신화라는 거대망상증의 귀결은 파국일 뿐이다. 홀로코스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체르노빌, 후쿠시마 등 인류는 많은 재앙을 경험하였다. 그럼에도 학살과 핵폭발의 공포는 상존하고 있다. 또한 속도와 경쟁이 유발하는 대규모 사고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진술처럼 “밤마다 휘영청 달은 밝았지만 그건 선지자의 부릅뜬 경고 그만하라고 내젖는 손사래”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자각하지 못한다. 그것은 진보라는 종교가 역사를 초월하는 종말을 그 내부에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보의 관념은 오직 미래로 나아갈 뿐, 종말론적인 발상이 아니라 목적론적인 발상을 견지한다. 그러므로 사회의 “하부”가 다 무너져도 “상부”는 그걸 딛고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상부를 지배하는 것은 자본이며 자본은 재난과 파국마저 새로운 독트린으로 변화시키려 한다. 파국은 임박하였지만 진보의 신봉자들은 그 어떠한 파국도 “인큐베이터”를 통하여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시인은 이토록 불길한 공포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시적 대응으로 그 극단은 그것에서 종말의 어둠을 읽는 것이라 생각한다. 최영철 시인은 난파하는 배의 이미지를 통하여 “어두운 세상”이 결코 밝아지지 않을 것임을 경고한다. 일찍이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인류는 세상의 비참과 파국 앞에서 시를 쓰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질 것인가 고민하였다. 소위 아우슈비츠 이후의 서정시에 대한 논란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 참혹한 세계에서 서정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일 뿐 아니라 쓰일 수도 없다는 생각(아도르노)과 그와 같은 상황에서 쓰일 수 있는 것은 서정시뿐이라는 주장(지젝)이 있다. 상반된 듯하나 서정시가 삶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말하기에 족하다. 극한상황에서 최후까지 발화될 수 있는 문학이 서정이지만 평상시 행복을 서술하는 장르도 서정이라는 이야기이다. 아울러 서정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노래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서정은 추억의 공간이나 상상의 행복을 말하기도 하지만 지금-이곳의 실존적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진술하기도 한다. 또한 시는 연속적으로 이야기를 서술하는 양식이 지니는 시차를 뛰어넘어 수행적이 되며 쉽게 세계와 접촉한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가 심한 현대에 이르러 새로움의 시한이 단축되는 곤경을 겪고 있다.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빨라지면서 새로움의 진정성에 대한 논란은 이제 거의 일반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것에 대한 회의와 전통에 대한 보전이라는 관념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자유를 위한 지향이냐, 과거로부터 지혜를 배울 것이냐는 논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논쟁 가운데서 최영철 시인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시적 지향이 유인하는 본질 환원의 함정을 스스로 차단하면서 구체적인 현실과 교감을 이뤄내고 있다. 사물과의 교감은 그에게 있어 삶과 시를 동시에 포용하는 방법이 되었다. 이러한 방법이 시를 고루한 성채에 가두는 본질주의의 울타리를 헐고 진전한 세속주의의 가능성을 열게 한 것이다. 시인이 내외를 향한 정화 충동을 가라앉히면서 타자와 사물과 교감하는 일은 힘든 연단을 필요로 한다. 최영철은 이러한 연단의 과정을 살아감으로써 범속한 트임을 이뤘다. 사물 안에서 그들의 생애와 역사를 함께 사는 지혜를 터득한 것이다.

서정시의 진자운동은 극단을 뚜렷하게 보이게 하는 착시현상을 가져다주지만, 양극 사이의 무수한 점들이 시적 개별성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진자는 좌우로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전후와 좌우 그리고 모든 방향으로 진자운동이 가능할 터인데 개별 시인들의 시적 지향과 한 시대의 문학적 경향이 진자운동을 정향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시대가 요구하는 시인상과 서정시는 어떠한 것일까? 스스로 이방인이 되는 것과 외부를 향한 시적 지평의 개진을 들고자 한다. 경계인의 긴장된 비전을 놓치고, 소외되거나 추방된 자의 시각을 지니게 된 현대의 시인들에게 주어진 길은 무엇일까? 타자들과의 교통과 연대가 아니겠는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보다가 엎드려 보다가 비스듬히 턱 괴고 보다가

안되겠다 슬며시 앉아 보다가 무릎 꿇고 보다가 엉엉 소리 내어 울며 보다가

죽기보다 힘든 삶을 살아내고 있는 저 언덕 넘쳐 이리로 흐르니

그대여 노 저어 오라 어서 노 저어 눈물범벅 온몸에 훈장처럼 두르고

한 번도 남을 위해 울어본 적 없는 한 번도 짓밟힌 풀잎 일으켜 세워준 적 없는

도도한 땅 앞에 뚝뚝 핏자국 멍자국 흘러내린 눈물 되게

한때의 열병 가라앉힐 약이라 적어두자 성장통에 먹는 독이라 적어두자

한 대접 받들어 마실 더운 탄식이라 적어두자

(「나눔 070」 부분)

 

실존은 외부의 타자와 관계 맺는 가운데 열리는 탈존(ex-position)이므로 시쓰기는 자신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자기에 머무는 나르시시즘의 감각은 시적 미성숙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냉담을 생산한다. 시의 과정은 끊임없이 외부를 향하면서 타자와의 관계를 창조적으로 반복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행이 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출구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시적 자유는 자유를 수행하는 동안에 가능한 것이며 그것을 멈출 때 그것은 사라지고 만다. 이러한 점에서 인용시가 말하듯 끊임없이 외부를 향하면서 타자와 교감하고 그 고통과 연대하려는 시인의 의지가 경이롭다.

 

시인의 눈물

「나눔 070」 후반부에서 시인은 “걸핏하면 우는 사람의 정체는 저 깡마른 강을 깨워 먼 길 나아가려는 다짐/노도처럼 범람해 우르르 달려 나가며 주린 길 다 적시며 가려는 각오/두레박 같은 걸로 고된 길 몹쓸 돌부리 다 길어 올리고야 말겠다는 다짐/제 한 몸으로 다 마셔 버리고 말겠다는 각오”라고 진술하고 있다. 난파하는 세계를 향한 시인의 수행 의지를 뚜렷이 표현한 대목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시인은 「눈물의 이력」을 통해 가짜 눈물과 진짜 눈물을 분별함으로서 슬픔이 희망이 되는 눈물의 시학을 제출한다. “그 좋았던 시절 눈물은 익사하지 않으려고 열어놓은 수문/이제 눈물을 아껴야지 샘은 마르고 강은 흘러/바닥을 긁는 소리 그녀는 새 눈물 몇 방울 처방해 주었지만/그걸로는 턱없지 상부로 거슬러 가보자 눈물이 쏟아지게/그러면 그렇지 누가 높고 견고한 둑을 쌓아놓았네.” 이와 같은 구절에서 “상부”의 문맥적 의미를 알려주는 것은 「난파 2014」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눈물의 계보가 다르다는 것이다. 시인은 장벽을 만들고 거대한 지배의 울타리를 친 사람들이 아니라 역사 없는 사람들의 눈물을 떠올리게 한다. 시인은 발터 벤야민이 바라보며 묵상한 “새로운 천사”의 눈빛으로 난파하는 세상을 바라본다.

파울 클레의 그림을 지니고 있었던 발터 벤야민은 이 그림을 통해 진보라 부르는 폭풍을 밀어내고 있는 천사를 보고 있다. 그는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조인된 독소불가침 조약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진보가 모든 것을 파괴하는 폭풍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천사”는 이러한 폭풍을 끌어안고 그것을 밀어내는 몸짓을 하지만 그의 앞에는 재앙의 잔해들만 그득할 따름이다. 시적 비전은 “새로운 천사”와 같이 역사의 폭력과 맞서면서 눈앞에 펼쳐진 잔해 더미를 넘어 오래된 미래를 찾는 일과 다르지 않다. 물론 벤야민의 역사철학이 지닌 함의가 쉽게 해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통해 문명의 파국과 이러한 파국이 지닌 종말론적 역설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파국이 오히려 구원이 되는 역설이다. 이러한 역설을 의미하는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는 시의 천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천사는 문명의 광포함과 생태학적 재난에 직면하여 쉼 없이 쌓이는 잔해들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 잔해들이 온 세계를 뒤덮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먼 과거 속에 존재하는 시적 세계를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미래로 밀려간다. 그에게는 추방자와 구원자라는 두 가지 이름이 동시에 붙게 된다. 그는 세상의 경계로 밀려 나면서 세상의 구원을 염원하고 있다.

최영철의 시에서 역사의 천사를 보는 것은 나의 과장일까? 적어도 「난파 2014」과 「눈물의 이력」 등의 신작시를 통해 “세월호 참사” 이후 시인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할 계기가 된 것임은 틀림이 없을 것이라 믿는다.

 

(시인수첩 2014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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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서 발원하여 언어로 건축하는

 

 

                                                                                                                                                  권

 

1. 서론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을 몰래 훔쳐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새로운 시에 담긴 시인의 고유한 마음의 무늬를 따라가는 일은 낯선 곳을 탐험하는 여행자의 심경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시작 활동을 천착하고 있는 박정남 시인과 최영철 시인의 개성적인 시 세계를 판단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제부터 반복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개되는 두 시인의 신작시를 함께 살펴 보기로 하자.

 

2. 언어의 장인이 조성하는 死 

 

언젠가 필자는 최영철 시인이 발간한 시집 제목에 감탄한 적이 있다. 그가 2010년에 간행한 시집 제목은 찔러본다이다. ‘찌르다도 아니고 찔러보다도 아닌 찔러본다를 선택한 시인은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장인임에 틀림없다. 같은 맥락에서 시 문이 생기고 난 뒤는 말을 다루는 기술자로서의 시인을 오롯이 복원한다.

 

문이 없었을 때는 아무 일 없었다

문이 없었을 때는 열고 닫고 잠그고 부수고

몰래 넘어갈 일 없었다

모두 문이요 모두 안이요 모두 밖이었으니

들어오시오 나가시오 들어오지 마시오 나가지 마시오

문이 없었을 때는 이런 말도 없었다

고독 불안 단절 공포 잠입 점령 탈출

엿듣지 마 엿보지 마 문이 없었을 때는

이런 말도 없었다 바야흐로 금세기 모든 재앙은

오래전 안팎을 나누고 알뜰하게 문을 잠그면서

시작되었다 커다란 자물쇠와 열쇠로

버티고 서서 합격 불합격 입장 퇴장 상승 하강

다시 오시오 돌아서 가시오 다른 방법으로 오시오

다시는 이 근처 얼씬도 마시오

판정 내리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바야흐로 그 문을

넘어보고 싶어 밀쳐보고 싶어 넘보고 싶어

부수고 싶어 벼르고 벼른 사이

아무 생각 없던 생각이 꼬리친 생각의 오합지졸들이

용기백배 도둑 강도 강간 살인으로 세를 불리면서

시작되었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 기웃거린 사이

무엇이 있기에 저리 문 꽁꽁 닫아걸었나 엿보는 사이

문제의 싹이 손을 내밀었다 궁금해 미치기 일보 직전

모두 문이 아니고 모두 안이 아니고 모두

밖이 아니게 되었을 때 어디가 어딘지 몰라

다들 기웃거리게 되었을 때

참 이상하게도 문이 너무 많이 생기고 나서

긴 파국은 시작되었다

                                                            -문이 생기고 난 뒤전문

 

이 작품의 핵심어는 문이다. 이 시의 목소리는 문이 없었을 때문이 생기고 난 뒤라는 두 개의 극사이를 이동하면서 대조적인 국면을 제시하기에, 독자들은 각각의 상황에 관해 신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한다. 시인의 안내에 따르면 고독 불안 단절 공포 잠입 점령 탈출이나 합격 불합격 입장 퇴장 상승 하강등 냉정한 판정의 기준이 된다. ‘의 등장으로 이라는 구분과 구별, 차이와 차별이 발생하여 궁극적으로 어떤 재앙이나 파국이 도래했다는 것이 최영철 시인의 진단인 것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은 물리적인 대상인 동시에 심리적인 영역으로 치환될 수 있으리라.

다시 오시오 돌아서 가시오 다른 방법으로 오시오/ 다시는 이 근처 얼씬도 마시오넘어보고 싶어 밀쳐보고 싶어 넘보고 싶어/ 부수고 싶어같은 표현에서 우리는 구어口語의 자연스러운 활용을 확인한다. 탁월한 언어의 리듬감은 시의 역동성을 확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최영철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개성적인 시안詩眼으로 사물을 포착해 진중한 사고와 참신한 연상 작용을 거쳐 한 편의 시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내 몸은 지뢰 묻힌 어두운 풀밭

장사지내지 못한 전우의 시체 말라가는

구덩이 구덩이 숨바꼭질 뛰노는 밤

거미줄 구름다리 시한폭탄 그 아래

잘 차려진 시식 코너 한 상

재료는 동포의 살점 원수의 뼈

찢긴 호주머니 속 젖은 담배 몇 개비

안전벨트 벗어 던진 마지막 승부처

포격으로 산산조각 난 집터 어루만지며

혈육의 잔해 앞에 구토하는 피투성이의 밤

살아도 죽어도 썩어갈 확률 반반

남은 생 다 걸고 최대 승부수 앞에 발가벗은

황홀한 봄밤의 러시안룰렛 게임

                                                 -러시안룰렛 게임전문

 

러시안룰렛Russian roulette 의 사전적 정의는 회전식 연발 권총에 총알을 한 발만 넣고 총알의 위치를 알 수 없도록 탄창을 마구 돌린 뒤에 두 사람 이상이 차례로 자기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목숨을 거는 내기인데, 필자에게는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 <디어 헌터(The Deer Hunter, 1978)>에 나오는 러시안룰렛게임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최영철의 시 러시안룰렛게임에는 지뢰’ ‘전우’ ‘시체’ ‘시한폭탄’ ‘동포’ ‘원수’ ‘포격’ ‘혈육전쟁과 관련된 어휘들이 출현한다. 그러나 시인이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도 이야기하고 싶었던 바는 다름 아닌 이 아니었을까. 그는 우리에게 생이란 매순간 죽음이라는 배수진을 치고 마지막 승부, ‘최대 승부를 거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콜 부른 게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전철이 슬며시 내게로 왔다

길을 열어주는 걸 깜박 잊었다는 듯

스르륵 길이 닫혔다

기척이 없었지만

그때 깜박 잊고 나를 섭섭하게 보냈던 사람

얼마나 신신당부였던지

얼굴 없이 몸뚱이만 보여주고 갔다

이 영접이 믿기지 않아 사방을 둘러보자

볼 낯 없는 사람들 천지

모두 덩달아 고개를 숙이고

아무도 모르게 길만 열어주고

길만 닫아주고 갔다

제발 입 다물고 돌아보지 말고

곧장 가라고만 했다

묻지 말고 두리번대지 말고

어서 이 아가리 속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서고 싶지 않은 데서 서고

내리고 싶지 않은 데서 내려야 할 것이라 했다

내가 나에게 권유하지 않아도

환한 아가리 속으로

자꾸만 빨려 들어갈 것이라 했다

인기척이 없어도 어김없이 길은 열리고

아무도 없는 미래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것이라 했다

길이 너무 많아

길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 했다

                                              -무인 전철전문

 

인용한 시의 제목은 무인 전철이다. 단순한 전철電鐵이 아닌 무인無人 전철임을 기억하자. ‘전동차電動車로 불리기도 하는 전철은 보통 지하철地下鐵이라는 표현으로 통용되는데, ‘전철은 도시에 거주하는 현대인의 삶과 긴밀하게 결속된 대상 중 하나이다. ‘전철은 전동기의 힘으로 레일위를 달리는데, 흥미로운 것은 최영철 시인이 이 작품에서 묘사한 길 위를 달리는 전철삶의 행로또는 인생길을 뜻하는 일종의 은유적 표현이라는 사실이다. ‘위를 이동하는 전철은 수정이 불가능한 ’, 직진하는 인생을 보여준다. ‘탄생(출생)’에서 죽음(사망)’으로 향하는 것은 불가항력에 의한 인간의 숙명이다.

최영철이 이 시에서 각별히 주목하는 바는 생이 소멸하는 때, 곧 죽음이다. 필자가 보기에 시인이 말하는 무인 전철은 다름 아닌 장례식장이다. “나를 섭섭하게 보냈던 사람기척이 없었얼굴 없이 몸뚱이만 보여주고 갔다일련의 과거형 표현이 가리키는 바는 화자가 가 아는 어떤 지인의 죽음이다. ‘이 영접장례식장에 모인 볼 낯 없는 사람들고인또는 망자에 대한 마지막 예의를 갖추려고 모두 덩달아 고개를 숙이고있는 것이다. 이 시는 죽음을 염두에 둔 의 본질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살펴 본 시 러시안룰렛 게임과 통하는 바가 있다. 더불어 우리는 작품의 후반부에 제시되는 가라고만 했다”, “들어오라고 했다”, “내려야 할 것이라 했다”, “빨려 들어갈 것이라 했다”, “쏟아져 나올 것이라 했다”, “보이지 않을 것이라 했다등 일련의 서술어 활용에서 언어의 장인으로서의 신인의 면모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3. 결론

 

최영철 시인은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장인의 모습을 재현한다. 그의 시를 읽는 독자들은 구어의 자연스러운 활용을 확인한다. 탁월한 언어의 리듬감은 시의 역동성을 확장하는 것이다. 시인은 시 러시안룰렛 게임에서 독자들에게 말한다. 우리에게 생이란 매순간 죽음이라는 배수진을 치고 마지막 승부, ‘최대 승부를 거는 것임을. 끝으로 최영철 시인은 시 무인 전철에서 삶의 행로또는 인생길을 뜻하는 일종의 은유적 표현인 길 위를 달리는 전철을 묘사한다. ‘위를 이동하는 전철은 수정이 불가능한 사람’, 직진하는 인생을 보여준다. 최영철은 이 시에서 탄생(출생)’에서 죽음(사망)’으로 향하는 것은 불가항력에 의한 인간의 숙명임을 이야기한다. 그가 이 작품에서 각별히 주목하는 바는 생이 소멸하는 때, 곧 죽음이다.

 

(문학청춘 2014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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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온-1974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2008[문학과 사회]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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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자술 연보

 

 

 

19561222일 동짓날 오후, 경남 창녕군 남지읍, 조부모와 큰집 식구와 고모 등 10여명의 대가족이 살던 집에서 아버지 최문갑 어머니 정덕시의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남. 아버지가 두 번째 군복무를 하실 때였고 아무도 출생신고를 해주지 않아 나는 2년 동안 아직 세상에 없는 아이였음.

 

1959년 즈음, 부모님을 따라 부산으로 이주. 범일동 달동네에 주인집과 백열등 하나를 같이 쓰는 반칸짜리 방에서 한동안 성장. 울음을 터트리면 어머니가 힘들었을 것이므로 울음을 참는 것부터 배웠을 것.

 

1963, 범일동 매축지 셋방에 살 때 성남국민학교 입학. 3학년 무렵 아버지가 집도 보지 않고 술자리에서 친구분과 매매계약을 하는 바람에 부암동의 한 칸 반짜리 작은 집으로 이주. 광무국민학교 전학 후 졸업.

 

1969, 부산진중 입학. 2학년 초입 문예반을 지원해 얼떨결에 문예반장이 되었으나 나의 문예반 활동은 그 첫 시간이 전부. 막연한 허무로 집을 나와 낯선 봄밤을 헤매다 큰 교통사고를 당함. 2년 가까운 병원 생활과 세 번의 수술 후 겨우 걸을 수 있게 됨. 목발을 짚고 스스로 교회를 찾아가 중등부 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열심히 교회에 다녔으나 번뇌와 망상이 나를 놓아주지 않아 기독교인이 되는데 실패함. 4년만에 중학교 졸업.

 

1973, 부산진고 입학. 연지동으로 이사. 학업을 놓치고 쓸데없는 낙서나 끄적거리는 것으로 소일. <학원>을 비롯한 학생 잡지와 신문의 독자문예에 시와 산문을 올리는 재미로 십대 후반을 보냄.

 

1976, 대학에 진학할 처지가 아니었으나 달리 할만한 게 없었으므로 경동공전(현 동의대) 야간부 건축과 입학. 낮에는 시립도서관에서 시와 소설을 읽고 저녁에는 막걸리집에서 알게 된 벗들과 개똥철학을 펼치는 것으로 소일함. <시문학> 대학생문예 입선.

1978, 용케 대학 졸업장을 받음. 그 즈음을 전후해 45년간 학원 독자문예에서 이름을 익힌 전국의 몇몇 문청들과 <시림>동인, 부산을 중심으로 한 문청들과 <시대> 동인 활동.

 

19771979, 한 동인지에 발표된 시가 좋아 백방으로 수소문해 조명숙을 만남. 책이나 읽을 생각으로 부모님을 졸라 작은 책방을 열었으나 몇 권 팔린 하루 매상을 찾아온 벗들과 막걸리로 탕진하는 바람에 책장은 하루가 다르게 헐렁해져 갔음.

 

1980, 부산 양정 산동네에 비키니옷장 하나를 놓고 조명숙과 살림을 시작함. 딸 정온 태어남. 동생이 결혼식 날을 잡는 바람에 그 예식장에서 1시간 전에 조명숙과 혼례를 치름. 젖먹이 딸을 안고 경주 12일 신혼여행. 1982년 아들 원석 태어남.

 

1983, 류명선 선생 주도로 발간된 사화집 <지금 여기의 시>에 참여. 이윤택 선생을 만나 1984년 무크 <지평>에 시를 발표하고 지평출판사 실무를 맡음. 1985년 무크 <현실시각> 시 발표. <시와 인간> 동인 활동.

 

1985, 김정한 선생이 발의한 57문학협의회 간사, 1990년대 초반 윤정규 선생이 주축이 된 부산민족문학인협의회 사무국장, 1986년 정일근 시인과 함께 발의해 몇 년간 지속된 부산경남젊은시인회의 활동, 무크 지평 편집동인 등으로 지역문학운동에 힘을 보템.

 

1985, 밥벌이를 찾던 중 친척이 제조하던 미니카로 양정운수(?) 시작. 공터를 구해 땅을 고르고 수시로 고장 나는 미니카를 손보느라 연장을 만지면서 시 <연장론>을 마감 전날 완성, 1986년 한극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됨. 이후 2년 남짓, 월간 <부산여성> 편집장, 도서출판 글방 편집장으로 일함.

 

1988년 김수경 선생을 따라 상경해 열음사, 계간 <외국문학>, 월간 <문학정신> 편집장으로 일함. 정일근 시인의 권유로 시힘 동인에 합류. 서울생활을 계속할 것인지롤 놓고 가족투표를 한 결과 2(아비와 아들) 2(어미와 딸) 동점이 나왔고, 가장의 직권으로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결정.

 

 

1990, 부산 양정동에 새 둥지. 월간 <현장>(발행인 정의화) 편집부장으로 4년여 동안 일함. 1994년부터 3년간 빛남출판사(발행인 이상개) 주간으로 단행본과 계간 <문학지평> 편집. 1996년 출판 일을 접고 다시 책이나 읽으려고 도서대여점을 염.

 

1997, 늦가을 귀가 도중 머리를 다쳐 뇌수술. 몇몇 선후배들이 장례를 의논했다고 하나 약간의 후유증을 가진 채 다시 살아남. 1997년 봄부터 78년간 부산예술대 문창과와 부산외국어대 국문과 출강.

 

1999년에서 2002, 계간 <관점21, 게릴라>(발행인 이윤택). 주간. 200315년 동안 살았던 양정에서 수영으로 이사. 우리 힘으로 처음 집을 샀고, 빚 갚느라 조명숙(소설가)과 열심히 산문을 씀. 수영팔도시장, 푸조나무, 곰솔, 와목 등을 만나 새 기운을 얻음. 2006년 아버지를 여의고, 2007년부터 2년여 동안 김해시 생림면 마사리 야산으로 주말 텃밭 농사를 다니며 좀 더 큰 기운을 얻음. 2010년 한국방송대 문화교양학과 졸업.

 

2009년 이후, 다시 이윤택 선생과 도요출판사를 부산 거제동에 등록하고. 김해시 생림면 도요리 낙동강변의 작은 분교에 연극과 문학을 중심으로 한 작업공간 도요창작스튜디오 조성. 문학 연극 단행본과 도요문학무크를 시 소설로 나누어 발행하고 도요가족극장의 연극 공연과 저자 초대 맛있는 책읽기 매월 진행(20143월 현재 55).

 

2011, 1년 동안 두 집 살림을 하다 부산집이 팔려 도요마을로 이주해 외지고 막다른 강마을 주민이 됨. 2013, 비상교육과 창비 발행 국어교과서 시 수록. 2014, 김해로 옮겼던 도요출판사 주소지를 다시 부산으로 옮기고 부산과 김해를 오가며 일하고 있음.

 

<출간>

시집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1987, 열음사)

시집가족사진(1991, 생각하는 백성)

시집홀로 가는 맹인 악사(1994, 푸른숲)

시집야성은 빛나다(1997, 문학동네)

시집일광욕하는 가구(2000, 문학과지성)

시집개망초가 쥐꼬리 망초에게(2001, 문학과경계)

시집그림자 호수(2003, 창작과 비평)

시집호루라기(2006, 문학과 지성)

시집찔러본다(2010, 문학과 지성)

시집 『금정산을 보냈다(2014, 산지니)

시선집엉겅퀴(2012, 지식을 만드는 지식)

산문집우리 앞에 문이 있다(1993, 빛남)

산문집나들이 부산(2002, 해성)

어른을 위한 동화나비야 청산 가자(2005년 개정판, 문학과경계)

산문집동백꽃 붉고 시린 눈물(2008, 산지니)

산문집영철이하고 농사 짓기(조명숙 공저)

성장소설 『)어중씨 이야기』(2014 년.  산지니)

산문집 『시를 위한 산문-변방의 즐거움』(2014 년.  도요)

 

57문학협의회 간사

부산경남젊은시인회의 간사

부산시인협회 사무국장

부산민족문학인협의회 사무국장

부산작가회의 부회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1기 문학위원

한국작가회의 이사

계간 시평 편집자문위원

 

[현재]

격월간 시사사 공동주간

계간 시선 자문위원

계간 발견 자문위원

도서출판 도요 주간

 

[수상]

2000년 백석문학상 (창작과비평사 주관)

2010년 최계락문학상 (국제신문사 주관)

2011년 이형기문학상 (진주시, 격월간 시사사 공동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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