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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의식과 생명의식의 통섭

- 최영철 시집 『찔러본다』다시 보기

 

송용구

(문학평론가. 본지 편집기획집필위원장)

 

 

비 온다

저기 산비탈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

죽었나 살았나

쿡쿡 찔러본다

 

바람 분다

이제 다 영글었다고

앞다퉈 꼭지에 매달린 것들

익었나 안 익었나

쿡쿡 찔러본다

 

- 시 「찔러 본다」일부. 최영철 시집 『찔러 본다』중에서.

 

 

“비”는 “논”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찔러본다”. 확인한다. 죽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가까스로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비”는 죽어가는 “논”을 살려낸다. “논”을 다시 일으키는 일에 “비”와 연합했던 “바람”이 “산비탈”을 미끄럼 타듯 내려온다. “바람”은 나뭇가지의 열매가 잘 익었는지 찔러보고는 열매 속으로 스며든다. “바람”은 열매의 성숙을 절정에 이르게 하는 마지막 힘이 된다. “햇살”과 “논”의 생명적 연대가 손에 잡힐 듯이 묘사되고 있다. “바람”과 열매의 연대적 생명감(生命感)이 촘촘한 그물코처럼 팽팽하다. 만물이 ‘몸’의 언어로 생명의 그물망을 유기적으로 직조해가는, 그러나 결코 인위가 아닌 자연의 순환질서에 따라 직조해가는 생명의 직물(織物) 과정을 또 다른 시 「바디랭귀지」에서 만나보자.

 

느닷없이 내리는 부슬비 맞으며 셔틀버스 기다리는데

저만치 우산 받치고 선 외국인

자기 우산속으로 들어오라며 손짓이다

이런 봄비쯤이야, 설레설레 괜찮다고 손 흔들었더니

요즘 비 맞을 거 못 된다고 살랑살랑 또 손짓이다

우산 속에 나란히 서서 가로수 아래 풀잎을 보고 있는데

다급하게 쫓아 들어온 체면 없는 비를 마다않고

풀잎들은 서로 자리를 내어주느라 설레설레 살랑살랑 물결친다

버스가 오고 서로 먼저 타라고 손을 내밀고

버스가 서고 서로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몇 정거장 지나 다른 나라에 왔는데도 비는 내렸다

풀잎은 어서 오라고 손을 흔들고

그러지 않아도 지금 간다며 비는 미끄럼을 탔다

여기 목마른 곳 간지러운 곳 있다고 풀잎은 몸을 비틀고

안다고 다 안다고 비는 거기에 정확히 파고들었다

문 열어달라고 댕댕댕 비는 풀잎의 심장을 두드리고

벌써 다 열어놓았다고 풀잎은 비를 받아들였다

 

- 시 「바디랭귀지」전문. 최영철 시집 『찔러 본다』중에서.

 

 

‘나’와 “외국인”, “풀잎”과 “비”가 각각 독립적 위치에 서 있다. 하나의 존재와 다른 존재, 즉 ‘나’와 타자(他者)가 동등한 수평관계를 이루며 적의(敵意) 없이 마주 보고 있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한 것처럼 “나와 너”의 평등한 “상호관계”가 몸의 언어를 그물코 삼아 소통의 그물망을 넓혀간다. ‘나’와 “외국인” 사이가 온정의 그물코로, “비”와 “풀잎” 사이가 생명의 그물코로 연결되었다.

언어의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차이’의 벽을 뛰어넘는 만남이여! 서로 다른 문화권(文化圈)의 소리나는 언어로써는 소통이 되지 않았던 ‘나’와 “외국인”. 두 사람은 훈훈한 인정을 담고 있는 ‘몸’의 언어로써 소통의 장벽을 허문다. 단 한 점의 이해관계와 목적의식도 없는 순수한 ‘만남’ 속에서 피어나는 교감의 꽃과 언어의 향기여! 시인 최영철이 지향하는 ‘상호부조’의 공동체가 ‘나’와 “외국인”의 만남 속에 아름다운 미니어처로 축소되어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 사이에 피어나는 소통의 꽃은 서로 다른 생명체들 사이에 맺어지는 상호부조의 열매로 변용된다. “풀”은 “비”가 잠시나마 거주할 공간을 내어주고 “비”와 공존한다. “비”는 “풀”의 생명을 키울 에너지를 공급한다. “비”는 “풀”의 뿌리에 스며들어 뿌리의 혈액을 채워주고, “풀”은 “비”를 몸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바디랭귀지”의 빛이 눈부시다. 시인 최영철이 자신의 삶으로 육화(肉化)시킨 ‘공동체적 연대’가 사람 간의 ‘상호부조’에서 생명을 가진 만물의 ‘상호부조’로 공동체의 그물망을 넓혀간다.

 

아프니까 아프리카가 된 것이지 아프리카니까 아픈 것이지 내가 아프라고 아프리카가 한발 먼저 아팠던 것인지 모르겠다 아프니까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아프리카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해주지 않는다 나도 이제 아프니까 어느 날 그만 아프리카로 가봐야 하지 않을까 아프리카처럼 새카맣게 누워 있어야하지 않을까 눈만 번득이다가 이빨만 희게 빛내다가 아프리카를 지고 좀더 큰 병원으로 가봐야 하지 않을까

 

- 시 「아프리카」일부. 최영철 시집 『찔러 본다』중에서.

 

시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연대적 책임의식을 ‘나눔’과 ‘돌봄’의 당위적(當爲的) 의무로 승화시켰던 휴머니즘의 시인 최영철. 그의 ‘인간주의’는 크로포트킨의 말처럼 “만물이 서로 돕는” 생명적 연대의식의 차원으로 상승한다. 휴머니즘의 가락은 ‘생명주의’의 노래 속으로 합류한다. 휴머니즘의 토대 위에 세워진 ‘시’의 집은 ‘생명주의’라는 아름답고 튼실한 기둥에 의해 지탱된다. 최영철의 시. 이 본향의 ‘집’을 구성하는 가족은 이타적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들이다. 시 「풀들」의 “풀들” 같은 멤버들이다.

“뿌리”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독성(毒性)의 “물”을 온 몸으로 막아내며 “주검”이 되도록 “뿌리”를 지켜내는 이타적 존재들이 살아 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집’이 최영철의 시다. ‘사랑’이라는 붉은 벽돌과 ‘생명’이라는 녹색 벽돌을 ‘몸’의 언어로 결합하여 지상에 우뚝 세운 ‘이타적 공동체'의 집이여! 인간의 이성이 낳은 언어가 아닌, 생명을 가진 모든 몸들의 ‘연대’가 낳은 언어의 집이여! 본향의 ‘집’, 바로 최영철의 시다.   -계간 시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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