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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겨울] 부산문화재단 전자아카이브 ― 시인 최영철

 

지금처럼, 지금처럼만

 

 

 

 

이상섭 (소설가)

 

 

 

최영철 시인은 달이다. 그는 결코 걸음발을 서두르거나 재촉하는 법이 없다. 밤하늘을 혼자만의 보법으로 걷는 달처럼 누가 봐주든 봐주지 아니하든 묵묵히 자기의 걸음을 유지한다. 눈빛 또한 예외가 아니다. 두꺼운 뿔테 안경 속의 두 눈망울은 그윽하다. 그저 달빛처럼 은은하게 상대를 애달프게 바라보며 어루만진다. 그런 따스한 눈을 지녔기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물들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원래 느려요.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크게 다친 게 중학 2학년 때인데 그 이전의 기억을 떠올려 봐도 전력으로 달음박질을 한 기억이 별로 없어요. 말하는 것 역시 즐겨하는 편이 아니었죠. 누가 말을 시키지 않으면 한마디도 않고 하루를 보낸 날도 많았습니다. 동짓날 오후, 음의 기운이 충만할 때 태어나 그런지 모르죠.”

 

평생에 걸쳐 뛰어본 기억이 없다니. 그렇다면 그는 태생적으로 느림의 철학을 타고났단 말인가. 느린 걸음을 지녔기에 주위의 사물을 더 자세히 볼 수 있고 더 자세히 보기에 남이 보지 못한 것들을 잡아낼 수 있었을까. 그의 시를 읽노라면 마음이 저절로 차분해지고 하잘것없는 사물조차 새롭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시의 어조가 강하지도 않다. 그냥 옆에서 나직이 읊조리듯 부드럽다. 그럼에도 시의 울림은 크다. 이런 놀라운 감성을 지닌 시인이 태어난 곳은 창녕 남지. 초승달처럼 휘어진 낙동강 언저리라고 했으니 달의 기운을 품고 태어났는지 모를 일이다.

 

“무일푼으로 이사를 감행한 부모님은 부산의 어느 달동네에 정착하여 반 칸 방에서 전등 하나를 주인집과 나누어 쓰셨죠. 그 가난한 반 칸짜리 방에서 유년의 한때를 보냈습니다. 큰소리로 울면 어머니가 힘들었을 것이니 울음을 참는 법을 어릴 때부터 익혔는지 모르겠어요.”

 

부산으로 이주해 주인네와 함께 나눠 쓰던 알전구. 그 반달 같은 흐릿한 불빛으로 시인은 도시의 사물들을 더듬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랬으니 시인은 자연스레 보잘것없고 사소한 것들을 운명적으로 그의 시에 호명할 수밖에. 그런 작은 것들에 애정을 보내던 그를 시기한 것일까. 느닷없는 불운이 닥친다. 중학교 때 교통사고가 그것이다. 그 바람에 2년여 동안 다친 다리를 끌며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다. 기질상 과묵했던 그는 다리마저 불편해지면서 몸의 움직임이 더욱 느려졌다. 하지만 불행은 그에게 새로운 삶에 눈뜨는 기회가 되었다. 아픈 몸 때문에 책과 가까워질 수 있었으니까.

 

“10대 중후반부터 여러 학생잡지와 학생신문 독자문예에 시와 산문을 발표하는 재미로 힘든 시절을 넘겼어요. 학생잡지 문예란에서 이름을 익힌 전국의 문청들과 ‘시림’ 동인을 결성해 동인지를 낸 것을 시작으로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여러 문청들과 갖가지 형태의 동인 활동을 했습니다. 그 중 <지금 여기의 시>에 발표한 시가 인연이 되어 이윤택 선생과 인연이 닿았죠.”

 

80년대는 동인지와 무크지의 시대였다. 진보적인 문학지 <창비> <문지> 등이 정권에 의해 강제폐간이 되면서 작가들은 다른 지면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은 부산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이윤택 선생은 당시 부산일보 편집부 기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연극연출가로 더 유명해졌지만 당시에는 시인 행세를 제법 할 때였다. 이윤택 선생은 소설가 신태범 선생과 의기투합해 출판사를 하고 무크지<지평>을 발간하던 중, 최영철의 시를 발견했다. 그러니까 일찌감치 그의 시적 재능을 알아본 것이었다. 얼마 뒤, 최영철은 보란 듯이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다. 한국일보 신춘문예는 여느 신문사보다 최고의 상금을 내걸고 오로지 ‘시’와 ‘소설’ 장르만 공모할 때였으니 최고의 영예를 안고 화려하게 중앙문단에 자기 이름 석 자를 당당하게 알린 것이다.

 

“형제처럼 지내자고 하기에 형님이라 부르긴 했지만 한국일보 등단 전부터 제 시를 인정해주고 <지평>과 <현실시각> 같은 무크지에 발표지면을 만들어주었으니 제 시의 스승이기도 하죠. 여러 가지로 고마운 분입니다. 이윤택 선생 때문에 다시 출판 일을 시작했고, 지금 도요예술촌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지내게 되었으니 여간 인연이 아니죠.”

 

한국일보 등단작 「연장론」에는 최영철 시인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는 이 시에서 대패, 톱, 못, 망치, 몽키 스패너, 바이스 프라이어 등과 같은 연장들을 등장시켜 각기 생김새도 다르고 쓰임새 또한 차이가 나는 연장들을 통해 인간들도 각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생김새와 개성, 그리고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실을 드러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최영철은 오늘날과 같이 서로 단절되고 불신이 깊어만 가는 시대에 있어서 서로 화해하고 협동함으로써 바람직한 삶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조화와 연대의 사상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물은 평등하고 모두 쓸모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모두 존엄하구요. 이것은 서정시의 중요한 열쇠일 겁니다. 또 인간과 지구와 우주의 존속을 위해 꼭 필요한 중요한 가치관이라고 생각하고 있구요. 그리고 만물은 결여와 결손으로서도 평등합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수긍하며 상호연대와 부조의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이런 시인의 세계관은 배워 익힌 것이 아니라 천성적으로 타고난 기질이다. 낮고 차분한 그의 목소리가 이를 증명한다. 그는 상대방이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는 듯 조곤조곤 속삭인다. 구모룡 평론가가 ‘관계의 시학’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시인의 시는 일관되게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등의 관계 속에서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 성품 또한 보름달처럼 두리뭉실하다고 할 수밖에. 이런 성품 덕에 그는 초면의 사람과도 쉬 어울리고 마음을 연다. 그런 만남에는 항상 술이 뒤를 따랐다. 관계 맺기 위해 마시던 술이 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줄 그도 몰랐다.

 

“양정 고지대의 골목 안에 살 땐데 술을 마시고 마지막 전철을 타고 귀가하다가 골목 입구의 전신주에 머리를 받은 것 같아요. 머리가 심하게 아파 골목 입구에 주저앉았다가 겨우 집에 들어가 쓰러졌는데 아침에 식구들이 깨우니 의식불명이었던 거죠. 밖으로 출혈이 되었더라면 금방 병원에 갔을 것이고 별다른 후유증도 없었을 텐데 안으로 출혈이 계속된 데다 수술이 늦게 이루어져 회복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지금은 다소의 후유증은 있지만 그때 친구들이 병원 앞에 모여 장례도 의논했다고 하니 구사일생인 셈입니다.”

 

다행이었다. 만약 그때 그를 잃었다면 우리는 어찌되었을까. 달의 눈물같이 촉촉한 그의 시들을 더 이상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다시 일어섰고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듯 더욱 시에 매달렸다. 수술 이후 그의 시 세계는 한층 깊어지고 넓어졌으며 일상을 넘어 우주까지 촉수를 뻗었다. 그러자 서울에서 응답이 왔다. <창비>에서 알아보고 제2회 백석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한 것이다. 이후 그는 정통서정의 적자로 자임하며 시의 길을 걸어왔다.

 

“저의 일상성은 변함없는 영역이지만 평이하고 단조롭다는 반성과 불만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시적 상상력이 너무 멀리 가면 모호해지기 쉽고, 전달에 집착하면 단순성의 함정에 빠지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 쓰는 자는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지요.”

 

의미 전달에서 머무는 산문화의 함정을 넘어 시의 특장을 드러내는 방식이 무엇인지, 그것을 죽을 때까지 고민해야 할 부분이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도출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그런 일을 게을리 하면 시라는 장르는 경쟁력을 잃고 고사할 것이니 정말 가혹한 과업이 아닐 수도 없다는 그의 말은, 자신의 시가 지닌 결점을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정통 서정을 고수하면서도 자신의 시관을 부단히 갱신하려 애쓴 것이다. 그런 시인의 고투는 시집을 세상에 내놓을 때마다 드러났다. 가장 최근에 묶어낸 시집 <찔러본다>만 보더라도 시의 흐름이 이전 작품과 달리 부드러워지고 리듬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부산살이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문화적으로 성숙해졌어요. 지원에 의지하지 않는 자생적 소집단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단체 중심의 문학운동은 한계가 있는 것이고 비대해진 문학단체가 문인 개개인에게 자극을 줄 여지가 희박해졌으니까요. 그러니 저마다의 역량을 재정비하는데 힘을 쏟아야 할 때가 지금인 거죠.”

 

그가 부산을 떠난 건 서울의 출판사에 근무하던 2년여가 고작, 평생을 ‘문학의 오지’인 부산에서 시의 길을 고수했다. 그렇게 한자리에서 펴낸 시집이 벌써 아홉 권째. 더군다나 아홉 권 모두가 한결같이 시적 긴장감을 견지해내고 있다. 이는 바로 그가 부러 느린 척하며 책과 책 사이를 산책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깊고 넓게 만들어왔던 증좌이다. 그는 앞으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마치 그믐달이었다가 초승달로, 그리고 반달에서 보름달이 되듯이 차근차근. 느린 발걸음은 느린 만큼 깊은 발자국을 남기는 법이다. 시인 최영철은 지금까지의 성취만으로도 부산을 넘어 한국문학사에 자신의 족적을 깊숙이 아로새겼다. 그러니 이미 그는 생물학적으로 늙은 나이는 아니지만 부산 문단의 원로인 셈이며, 부산을 대표하는 시인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겸손하게 자신만의 보폭으로 시의 길을 걷는 중이다. 그러니 아직 태어나지 못한, 아니 곧 태어날 시의 모습이 궁금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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