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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장삼이사의 애환을 보듬기 위하여

-[시평 2007 봄], 이승하 

 

 

 

 

철거지를 지나며

코딱지만 한 단칸방 가득 피어나던

따습던 저녁이 없다

오랜만에 걸어보는 길

희미한 외등만이 비추는 철거지는

여남은 집 어깨 나란히 하고 오순도순 살던 곳

쌀 한 됫박 연탄 한 장 빌리러 갚으러 가서

절절 끓는 아랫목에 발 집어넣던 곳

한글 막 깨친 아이 하나

밥상 위에 턱 괴고 앉아 소리 높여 글 읽던 곳

희미한 외등 따라 내 그림자 길게 늘어져

고단한 생의 흔적이 말끔하게 지워진 길

한 발 두 발 내 구두 소리만 흥얼댄다

일가족 칼잠으로 누웠던 머리맡

책 읽던 아이 책 잠시 덮고

그 위에 더운 국 한 그릇 차려지던

밥상을 밟으며 간다

차 조심해라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그 아침의 당부와 언약을 밟으며 간다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연장론으로 등단한 최영철은 제1시집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 2시집 가족사진, 3시집홀로 가는 맹인악사를 거쳐 제8시집 호루라기(문학과지성사)에 이르러 있다. 시를 쓰는 스타일이나 기법은 미세한 변모를 거듭해왔지만 시정신이랄까 시세계랄까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연장론은 이렇게 끝나다.

 

몽키 스패너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이스 플라이어의 꽉 다문 입술로

오밀조밀하게 도사린 내부를 더듬으며

세상은 반드시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

제 나름으로 굳게 맞물려 돌고 있음을 본다

 

그대들이 힘 빠져 비척거릴 때

낡고 녹슬어 부질없을 때

우리의 건강한 팔뚝으로 다스리지 않으며

누가 달려와 쓰다듬을 것인가

상심한 가슴 잠시라도 두드리고

절단하고 헤쳐놓지 않으면

누가 나아와 부단한 오늘을 일으켜세울 것인가

 

몽키 스패너나 바이스 플라이어 같은 연장은 장삼이사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연장 그 자체야 볼품이 없지만 그것들이 힘을 모아 집을 만들고 부단한 오늘을 일으켜 세운다. 연장들이 각기 제나름으로 굳게 맞물려 돌고 있음으로써 세상은 반드시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는 것이다. 시인은 이 세상에 실제적으로 쓰임새 있는 자들이 누구인가를 물었다. 부와 명예, 권력을 가진 자들인가, 아니면 연장의 역할을 하는 장삼이사인가.

주로 변두리 지역에서 살아가면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면서도 이웃과의 유대를 통해 제각각의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가는 이 땅 장삼이사들의 애환을 최영철 만큼 잘 다루는 시인이 또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못 가진 사람들끼리 더욱더 정을 나누며 살아간다. 대도시의 고층아파트 단지나 이른바 부자동네라는 데서는 이웃을 사귀기가 쉽지 않다. 타인을 경계하지 않으면 무시하고 살아가는 가진 자들에 비해 최영철 시의 등장인물들은 이웃 간에 정이 도탑다.

그래서 최영철의 시를 읽다 보면 이 세상에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전문을 인용한 철거지를 지나며도 그렇다.

지금은 철거되고 없는 무허가 건축물들, 그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가. 쌀 한 됫박 연탄 한 장 질리러 가서, 또 갚으러 가서 절절 끓는 아랫목에 발 집어넣을 수 있었던 곳이 바로 철거지다. 이웃사촌이 왔는데 그냥 보낼 수 없는 것이 그곳의 인심이었다. 방이 따뜻하니 몸이나 녹이고 가라고 한사코 이끌어서 절절 끓는 아랫목에 발을 넣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이 도시 계획에 밀려 뿔뿔이 흩어짐으로써 그곳은 철거지가 되고 말았다.

그 당시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정이 못내 그리워 시인은 이 시를 썼을 것이다. 거기서는 그때, 정말 그랬었다. 일가족이 칼잠으로 누웠던 머리맡에 책 읽던 아이의 책이 잠시 덮이면 그 위에 더운 국 한 그릇이 차려지곤 했었다. 안방이 침실이요 아이들 공부방이요 주방이었던 것이다. 1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에서 시인은 냄새 지독한, 그나마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 사용 가능한 공동화장실에서 아직도 쭈그리고 앉아서 일을 보는 사람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었다. 5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일광욕하는 가구는 홍수에 젖은 세간을 내다놓고 말리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딱한 처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최영철이 그리는 초상화의 주인공은 이처럼 거의 언제나 서민이다. 집 앞 개울에서 요강을 씻는 사람들, 시들어가는 호박잎 한 다발을 사고는 횡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5천원 회비를 못 내 자동납부시스템을 욕하는 화자, 열일곱 엄마 아빠와 열여덟 엄마 아빠가 낳은 아기들, 한겨울 호수 얼음판 난전에 좌판을 벌인 노점상, 시장 바닥에 엎드려 동냥하는 자아애인, 뒷방에 앉아 오줌을 참고 있는 호프집 바깥양반, 함안군 대산면 대암부락 외가에 주인 허락도 없이 들어와 사는 사람, 남편 산소에 가서 새똥 흘러내린 비석을 손바닥을 닦는 여인…… 이런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시선이 최영철의 일관된 시세계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낸 시집의 제목은 호루라기인데, 이 제목의 시 마지막 5행을 보자.

 

호루라기 이제 설레는 아이들의 가슴에 있지 않고

무허가 냉방 빗물 떨어지는 비닐 하꼬방에 있네

자식 가고 영감 할먼 먼저 가고 덩그러니 남은

한많은 세월의 대못 자리 위

사지를 늘어뜨리고 있네

 

어린아이들의 전쟁놀이에 유용하게 쓰이기도 했던 호루라기가 지금은 무허가 냉방 빗물 떨어지는 비닐 하꼬방에 있다. “한많은 세월의 대못 자리 위에서 사지를 늘어뜨리고 있기도 하다. 이 두 공간은 최영철 시세계 전부의 공간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공간이 꽤 협소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번 시집에서 만난 조금 특이한 사람으로는 자신의 시 창작 수업을 듣는 베트남 학생이나 비전향자로 사십 년을 살아온 사람, 점령군이 던진 빵 조각을 씹고 있는 두 다리 잘린 소녀가 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 된, 윌슨병 앓는 아들의 부탁을 받고 목을 졸라 죽인, 같은 병을 앓는 오십대 아버지도 나온다. 자신의 생활 주변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들 외에 앞으로는 이와 같이 시야를 좀더 넓히는 시도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가난한 서민의 애환을 보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인의 시세계가 더욱 넓어지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민중시라는 것이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함을 말해주는 몇 안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 최영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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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시집 『멸종 미안족』,2021. 시와사상 겨울 

우리 시대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시

이성혁

 

 

 

  어쩌면 우리 시대는 기억상실증의 시대 아닐까. 적어도 기억에 대한 중요성을 잃어버린 시대임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를 가지며 살아갈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현재를 겨우 견뎌내며 생존하는 데 급급한 시대다. 그러다 보니 우리 시대는 무엇인가를 상실해버렸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도 인지하기도 힘든 시대가 되어버렸다. 최영철 시인이 신간 시집 멸종 미안족에서 보여주듯이. 이 시집은 우리 시대에 상실된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특히 독특한 제목인 멸종 미안족이 그렇다. 생활고로 시달리다가 세 모녀가 마지막 월세와 공과금과 장례비 머리맡애 올려놓고 죽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그 시는 미안이라는 종자를 이 땅에 퍼트리기 위해 세상에 온 게 분명한 그들 가족이 죽고 미안족은 멸종되었음을 선언한다. 그들이 미안하다는 글을 남기고 죽은 그 사건에서 시인은 우리 시대의 상징을 보고, 그 사건은 뻔뻔한 난장판 세상에 내린 징벌이라고 판정한다. 미안해할 줄 모르게 된 세상은 과거를 되돌아볼 줄 모르게 딘 세상이며, 그럼으로써 더욱 뻔뻔해질 수 있는 난장판 세상이다.

 이에 더해 최영철 시인은 우리 시대를 살벌 끔찍한 세상”(안녕 안녕)이라고 판정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세상이 되어버린 건 인간의 끝 모르는 탐욕 때문이다. “그냥 가만 땅에 등 붙이고 살면 될 걸 마구 붕붕 솟구쳐 하늘을 넘보거나 수시로 땅굴 파 밑으로 내려갔기 때문”(같은 시)이라는 것이다. ‘살벌하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윤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는지 모르고 대지와 하늘을 파헤치고 찢어버렸다. 결국에는 파국에 다다를 인간의 살벌한 탐욕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저 세 모녀가 보여준 미안의 정신을 회복하여야 한다. “땅과 하늘은 먼저 납신 그대들 몫임을 인정하고 다신 그러지 않을 게요라고 미안해할 수 있어야 한다. ‘미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의 행위가 타자-하늘과 땅, 그리고 타인 등-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자이다. 그는 타자를 배려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시인은 그러한 사람들이 멸종되었으며 세상은 더욱 살벌 뻔뻔해졌다고 선언했지만, 한편으로 타인을 따뜻하게 배려하며 생활하는 삶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밥집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양푼이 비빔밥 삼천팔백 원 엄한 규칙이라도 되는 양 밥과 찬은 얼마든지 더 갖다 먹으라는 찬모의 말에 메마른 세상 건너오며 부실해진 다리 근육에 힘이 실린다 역사는 남자의 몫이었으나 깨우고 밥 먹여 역사를 돌린 것은 온전히 여자의 몫이었으니 혼자된 노인과 집 떠나온 젊은이 등 두드려 보낸 것은 오늘 역시 더운 김 피어오르는 이 조촐한 밥상이다 수십 년 만에 만난 이산가족인 양 겸상을 이룬 젊고 늙은 남자들의 분주한 젓가락질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

- 봉천동 밥집후반부

 

주로 혼밥 먹는 사람들이 찾는 봉천동 밥집은 밥값이 저렴하면서도 밥과 찬을 아낌없이 제공하는 밥집이다. 이 밥집의 찬모는 이곳에 오는 가난하고 외로운 남자들에게 삶의 힘을 불어넣어 준다. 이 밥집에서 혼밥을 먹으면서, 시인은 남자들이 살벌 뻔뻔한 세상과 역사를 만들었다면, 시인은 그나마 이 역사를 돌린 것이 여자였음을 깨닫는다. (마지막 미안족이었던 세 모녀 모두 여성이었다.) ‘찬모는 살벌한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을 이산가족의 재회 때처럼 겸상하게 하여 밥을 먹인다.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가 먹는다는 행위다. 씹어 먹는 행위에는 거짓 없는 날 것의 삶이 응축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시인이 팥빵 두 개를 사 들고 와” “오래 혼자 씹어먹으면서 아픈 약 후의 사탕처럼 슬픈 과거가/ 재빠르게 달려나와 소화”(슬픔을 녹이는 법)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팥빵을 혼자 씹어 먹는 행위는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씹어 먹는 행위로 전치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슬픈 과거를 되씹는 시 쓰기도 팥빵을 씹어 먹는 행위와 같은 것 아니겠는가. 그때 느껴지는 단맛이란 슬픔의 맛이다. 아픔을 겪고 난 후 우러나오는 슬픔이 쓴 약을 먹는 후 사탕의 맛과 같은 시의 맛이 된다. 이 맛이 시의 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에 최영철 시인은 서른한 살에 죽은 슈베르트슬픔만이 예술이라고 했듯이 점점 그렇게/ 슬픔만이 시가 되네”(시는 어디서 오는가)라고 말한다. 미안해할 줄 모른다는 것, 그것은 과거를 되돌아볼 줄 모르는 것이요, 그래서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를 되씹을 수 있을 때 슬픔도 느낄 수 있다. 슬픔을 느끼지 못하면 뻔뻔해지고 살벌해진다. 반면 슬픔의 육화인 예술, 그리고 시는 살벌 뻔뻔해져 가는 세상의 해독제가 될 수 있다. 과거를 -처럼 씹는 행위인 시 쓰기는 삶을 재충전하는 행위이면서 시라는 새로운 밥을 짓는 행위이기도 하다. -은 외로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겸상에 모이게 하여 그들이 자신의 삶을 되씹으며 삶의 힘을 충전하도록 해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 쓰기는 여성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슬픔의 맛을 내장한 밥과 같은 시는 텍스트로서의 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니 노래로서의 시가 이러한 시에 더욱 적합하다. 시는 노래에서 오지 않았던가. 슬픔의 시는 시의 근원으로서 노래에 다가간다. 최영철 시인에게 노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사막에서 너무 외로워 나는 뒷걸음질로 걸었네

 

누군가가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을 보고 싶었네

 

그렇지만 나를 만나러 온 나는

 

점점 나로부터 멀어지기만 하였네

 

울창 빽빽한 모래의 숲에 움푹 팬 빈 발자국만 남긴 채

 

어둠이 나의 발치까지 내려와 나의 길이 되어주었네

 

사막이라는 정글에서 따 낸 수북한 적막을 앃아 올려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낭떠러지 길을 만들었네

- 김광석을 듣는 밤전문

 

  노래가 맛보게 하는 슬픔은 자신의 삶이 외롭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끼게 만드는 데서 온다. 이 외로움은 누군가에 대한 욕망으로 더욱 사무친다. 최영철 시인은 노래를 들으면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걸어오기를 욕망하게 되는 것, 그런데 그 누군가는 사실 또다른 . 노래를 들을 때 나는 나를 만나러 온다. 그렇지만 그 는 노래를 들을수록 점점 나로부터 멀어지기만 하였다는 것을 감지하게 해준다. 누군가이자 는 과거의 일 터,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합치될 수 없다. 과거의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시인은 노래를 들으면서 슬프게 깨닫는다. 그 잃어버린 시간의 흔적은 움푹 팬 빈 발자국으로 이미지화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시간은 허망하게 비어 어두움에 싸여 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이 시간의 빈 발자국과 어둠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 길을 만들어준다. 그 길는 수북한 적막을 쌍아 올낭떠러지 길이다. ‘낭떠러지 질이라니? 그 길은 시간의 절벽이 만들어낸 낭떠러지라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저 과거의 와 현재의 사이의 결절된 시간의 길. 노래는 시인을 그 시간의 낭떠러지로 떨어뜨린다. 그런데 시인이 현재 사는 곳은 사막이다. 적막으로 이루어진 절벽은 사막의 현재 시간으로부터 과거의 시간으로 떨어지는 길인 것이다. 노래가 만들어낸 그 낭떠러지 길은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정도로 부드럽다. 노래는 상실의 슬픔으로 시인을 인도하는 동시에 그를 부드럽게 감싸기 때문이다.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며 얻은 감화에서 최영철 시인은 우리 시대가 있을 시의 자리를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곳은 어둑한 모퉁이 길을 돌아 아릿한 무지개로”(배호 생각) 뜨는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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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리듬이 만들어내는 공존의 장

 

송기한(문학평론가, 대전대 교수)

 

 

최영철 시인은 최근 열두 번째 시집 <말라간다 날아간다 흩어진다>를 펴낸 바 있다. 1986년 등단 이후 쉬지 않고, 성실하게 만들어낸 문학적 좌표가 이번 시집 속에 촘촘히 담겨져 있는 것이다. 많은 시집을 상재했으니 시인의 시세계 또한 많은 변화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번 시집이 추구하는 세계는 이전과 달리 매우 다변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회를 향한 비판적 혹은 계몽적 발언이 있는가 하면, 죽음에 대한 고민의 흔적들 역시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실존적 고민 또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도 있다.

담론의 확산은 시의 경계가 넓어지는 일이니 환영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고, 시인의 시력(詩歷)이 그만큼 깊어진 것이니 당연한 순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의 음역이 점점 확산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바뀌지 않는, 이 시인만이 포지하는 득의의 영역은 전혀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어떤 경계라든가 장벽에 대한 철저한 거부감 의식이 바로 그러하다. 우리는 일찍이 경계를 넘어 간극을 좁히는 포스트모던의 정신을 경험한 바 있긴 하지만, 이 시인이 추가하는 장벽이란 그런 역사철학적인 담론의 세계와는 무관한 경우이다.

최근 발표한 시집이 ?말라간다 날아간다 흩어진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런 제목이야말로 이 시인이 전략적으로 추구하는 담론의 세계를 적확하게 표현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어느 특정 존재는 ‘말라가서’ 소멸되어야 하고, 또 고정된 자리를 벗어나 ‘날아가야’ 하는 것이 순리인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고정점이 아니라 또 다른 정립을 위한 ‘흩어짐’ 또한 새로운 탄생을 위해선 필요한 절차이다.

이렇듯 새로운 지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경계가 굳건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리니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거쳐 새로운 모습이 수면 위로 떠올라야 하는 것이다. 그런 변모를 위해서는 ‘말라가야’ 하고, ‘날아가야’ 하며, 결국에는 ‘흩어져야’ 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새로운 질서란 이런 물리적, 화학적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까닭이다.

이번에 발표된 최영철의 신작시들은 시인이 기왕에 추구한 시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연과 인간 속에 내재한 원초적 생의 리듬을 통해서 자연의 섭리라는 사유를 매우 예리하게 표현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런 면들에 착목하게 되면, 이번에 발표된 시들은 다시 시의 원점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이를 두고 과거로의 회귀라든가 퇴행과 같은 부정적 담론으로 그의 시들을 묶어두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것은 그만큼 시인이 기왕에 추구해왔던 주제가 가치 있었던 것이고, 아직 그것이 달성되지 않았기에 그러한 것은 아닐까 한다.

최영철은 자연이라는 질서, 그리고 그것을 받드는 생리적 리듬에 대해 철저하게 자각한다. 그런데 그는 이를 시각적, 물리적 현실에 그치지 않고, 내성의 문제에까지 확대시킨다. 다음의 시는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몇 줄 적어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은 내 주위로 파리들이 몰려든다 금방 시작한 문장 주위에 둘러 앉아 너나없이 여기저기 짚고 뒤엎으며 훈수가 이어진다 이따위 걸 왜 쓰느냐고 버럭 호통을 치다가 이래도 모르겠냐고 귀 가까이 와서 일장 훈계다 여기저기 걷어차보다가 왜앵왜앵 행간에 달라붙어 잔소리 늘어놓다가 이래놓고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고 야단이다 참견은 자유지만 제대로 된 소리 하나 만들지 못하고 훈수나 두는 놈들, 제 풀에 지쳐 또 다른 참견을 찾아 맹렬하게 오가다 금방 꼬꾸라질 목숨들, 너의 전생은 한 번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훈수로 날품 팔다가 그 죄로 오늘 여기 나의 빈곤을 만방에 알려야 하는 중책을 맡게 된 것, 더 이상 파리할 수 없는 경지까지 나를 몰아붙이고야 말, 저리 쉴 새 없이 외고 다녀도 수수만년 안에 끝나지 않을 너와 나의 부끄러운 고행

「파리들」 전문

 

이 작품은 시쓰기와 관련시키면 시론시 비슷한 성격을 갖는 것이 되고, 내성과 결부시키면 자아의 훈련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시인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문학관을 드러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 매우 일상화된 일이기도 하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 「파리들」은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을, 시인의 세계관 혹은 문학관을 드러낸 경우라 할 수 있다.

일상의 현실에서 이타적 대상을 통해 자의식을 읽어내는 것은 흔한 경우이다. 이 작품 또한 이 범주로부터 자유스러운 것이 아니기에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라든가 윤리의식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자의식이 이 시인이 전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자연의 질서에서 찾아오고 있다는 점이다.

파리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생물에 불과하지만 인간과 결코 분리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그것은 마치 불을 쫓아 무작정 돌진하는 부나비처럼 인간의 체취에 이끌려 육박해 들어온다. 아니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인간과 파리의 해묵은, 그렇지만 귀찮은 피드백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파리의 그러한 기계적 행동을 통해서 경구를 이해하고 이끌어내며, 또한 이를 내성화한다. 물론 이 피드백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결론은 자명하다. 결론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종결되지 않는 그 무엇에 가깝다고 하겠다. “수수만년 안에 끝나지 않을 너와 나의 부끄러운 고행”이 바로 그것이다.

시인에게 글쓰기는 결론 없는 과정이다. 그 무한한 도정이 있기에 시인은 지금도 글쓰기의 주제에 대해 사유하고, 또 그 고민의 결과를 어떻게 담론화할 것인가에 대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실상 이러한 과정은, 의도적 장치에 의해서는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다. 무언가 끊임없이 추동하는 힘이 있기에 이 사색의 과정은 빛이 나는 것이 아닐까. 그 힘이란 역동적이어야 하고 항구적이면 더욱 그럴듯해 보일 것이다. 시인이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는 자연의 생리적 리듬도 그 하나가 될 것이다.

 

엊그제 몇 녀석

빠꼼 문 열고 쫑알대더니

어젯밤 찬비가 두드려 깨운

남창 틈새

우르르 삐죽삐죽

얼굴 내밀었네

그 뒤 저만치

달려 나올 용기 없어

날름 혀 내밀어보다

바람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새싹 몇 하늘하늘

 

「봄봄」 전문

 

 

최영철 시의 핵심은 자연의 섭리와 분리하기 어렵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주제는 시인들이 즐겨 사용할 만큼 지극히 일상화된 것들이다. 인간의 삶이 미정형의 상태에 놓이다 보니 자연의 규칙적인 질서야말로 현재의 불확실성을 벌충해줄 수 있는 최고의 대안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영철 시인의 경우 자연의 섭리는 인간의 삶이나 혹은 세속의 그것과는 저만치 떨어져 있다. 자연의 섭리를 노래한 시인의 작품들에서 인간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이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인용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봄의 질서, 이른바 항구성의 감각이다. 만물이 약동하는 것이 봄의 생동감이기에 이 계절은 매우 요란스럽게 다가온다. 어떤 시인은 그러한 봄의 물리적인 모습을 전쟁이나 시끄러운 아우성으로 비유한 바 있다. 그러나 최영철이 응시한 봄은 시끄럽거나 요란하지 않다. 그의 음성은 지극히 차분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고요하기까지 하다. 생명이 약동하는 봄이 야단스럽게 온다고 해서 이를 전쟁터로만 비유하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봄의 생리적 국면을 고려해보면, 시인이 묘사한 봄의 고요한 모습이 피상적인 단면을 그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자연은 고요하고 정밀한데,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연의 생동감이 매우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묘사하는 자연의 내포에서 인간적 요소들은 적극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이런 국면들이 어쩌면 이 시인만이 갖고 있는 고유의 영역일 것인데, 한국 근대 시사에서 자연이 어떻게 인유되어 왔는가를 이해한다면, 이것이 결코 성급한 진단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적 국면이 보다 인간적이게끔 인유되고 상징화되었던 것이 근대시의 자연관이었음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가령, 자연과 인간의 화해할 수 없는 거리를 노래한 소월의 자연은 철저하게 인간적 관점에서 구현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연의 현대적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짚어낸 정지용의 경우도 이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분열된 인식을 완결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 정지용의 자연 세계였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적 질서의 아름다운 구현을 위해 자연의 이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영철 시에 나타난 자연은 인간의 체취가 배제된 곳에서 만들어진다. 가령, 「봄봄」의 주체는 이름 모를 잡초이거나 꽃이다. 생명의 전령인 봄의 기운을 받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풀의 자립성을 담아내고 있을 뿐, 그 어디에서도 인간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자연의 섭리가 자연의 내부에서 약동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체취가 거세된 채 오직 자연 그 자체의 생리를 통해서 이법이라는 형이상학적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땅의 위급함을 알고 웅성웅성 하늘 광장에서 집회를 마친 구름들이 한꺼번에 돌격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나 제 큰 몸으로 아래 것들을 다치게 할까봐 흐린 장막을 펼쳐놓고 사흘 낮밤 제 몸을 잘게 나누고 부순 뒤 그것도 모자라 또 사흘 낮밤 가장 물렁한 물이 되기를 기다려 지금 저렇게 앞 다투어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타닥타닥 하늘과 땅이 이마를 부딪치며

자꾸만 얼싸안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비 비 비」 전문

 

인용시는 「봄봄」의 경우보다 자연의 생리적 리듬이 한층 구체화된 작품이다. 이를 배가시켜주는 시적 장치가 이른바 음성 상징들이다. 가령 “웅성웅성”이나 “타닥타닥” 등이 그러한데, 이를 통해서 인용시는 자연이 갖고 있는 리듬 의식을 더욱 배가시킨다. 그것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심포니가 “얼싸안는 소리”이다.

시인이 자연을 포회하는 방식은 세밀하고 치열하다. 그러한 열정 속에서 서정의 밀도는 더욱 섬세하고 강하게 독자의 정서에 각인된다. 자연의 조화라든가 이치에 대해 누구나 말해왔고, 또 현재도 말하고 있지만, 이 시인만큼 그러한 리듬이 독자의 정서에 깊이 각인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 정서의 진폭을 울려주는 장치가 음성상징이었거니와 이를 한층 승화시켜주는 것이 하늘과 땅의 조화 감각이다. 물론 자연의 리듬이 주는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이법이나 질서로 귀결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긴 하지만, 시인이 응시하는 눈은 보다 넓은 영역으로 확산된다. 그것이 곧 하늘과 지상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조화 감각의 발견이다. 그의 시에서 땅과 하늘은 지상의 갈증을 해소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매개들이고, 또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자연의 순환성이다. 그런데 시인이 만들어내는 조화는 지상의 그것만으로 혹은 천상의 그것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거대한 두 공간이 마주쳐야만 비로소 하나의 질서, 새로운 조화관계를 만들어내는 종합적인 그 어떤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인유화한 시들이 흔히 범할 수 있는 오류 가운데 하나인 협소한 시세계를 이 시인은 훌쩍 뛰어넘고 있다. 그가 다루는 시의 소재들은 한정된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있으며, 그가 응시하는 시선 또한 광대무변하기 때문이다. 그의 자연시들은 시공을 넘나드는 넓은 시야가 만들어낸 결과들이다. 그렇기에 시인이 만들어내는 시의 음역들은 대단히 깊고 장대하다.

 

여긴 천지사방 곳곳에서 모여든

햇살 두령들의 총회장이다

동에서도 오고 남에서도 오고

체력단련 끝내고 모여든 반짝 고수들

우렁우렁 뙤약볕 안면이 훤하다

구름 꼬임에 넘어가 일사천리 달아났던 놈들

해를 등지고 어둠을 틈타

응달에 숨어 허튼 짓 게으름 피우다

북으로 서로 유배 갔던 놈들

일광 바다가 쫒아가 데리고 왔다

해 볼 낯 없다며 수그린 저 빈 수평선

日光이 종종걸음 달려나가 반기고 있다

괜찮아 다 괜찮아

이 따스한 햇살이 모두 용서했다며

움츠린 등을 쓰다듬어주고 있다

「일광」 전문

 

자연을 포회하는 시인의 넓은 시야는 인용시에도 동일하게 묘사된다. 이 시의 중심 소재는 ‘햇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늘에서 투사되는 단순한 빛이라는 물리적 국면을 뛰어넘는다. 인용시의 표현대로 햇살은 동에서도 오고 남에서도 온다. 뿐만 아니라 체력단련의 과정을 거쳐서도 오고 구름을 뚫고 내려오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동서남북의 모든 방위를 뚫고 현현하기도 하고 하늘에서도 발사되는 등 입체적인 것으로 구현된다.

사물에 대한 시선의 확장은 공간의 폭을 넓힐 뿐만 아니라 시의 의미 역시 넓혀준다. 최영철의 시편들이 자연을 노래하되 협소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는 자연을 소재로 한 시들에서 발견되는 시의 한계와 뚜렷이 구별되는 지점이다.

자연의 생리적 리듬이 주는 아름다운 조화가 최영철의 시이기에 그의 작품 속에서 도덕이나 윤리, 혹은 계몽과 같은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굳이 그에 대한 이해를 얻고자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시도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일지 모른다. 그의 시들은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와 그 지극한 공존의 세계만을 집요하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틀 속에 그의 시세계를 가두는 것은 어딘지 허전한 일이고, 또 이 시인이 의도하고자 하는 맥락으로부터 어느 정도 멀어진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자연이라는 거대 주제를 다루는 것 자체가 인간의 질서를 함의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역을 완전히 배제하고 이해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시의 독법일까.

최영철의 시들은 시의 영역이 협소하지 않다고 했다. 그가 응시하는 대상은 좁은 공간이 아니라 넓은 시공간이었는데, 이는 단지 소재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시인은 자연을 이야기하되 그러한 생리나 리듬이 세속으로 쉽게 침투해 들어오지 않는다. 그 연장선에서 그의 시들은 어떤 교훈이나 계몽 혹은 윤리에 대해서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특징들이야말로 이 시인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영역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그의 시들은 자연이라는 감옥 속에 마냥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작품 「일광」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이런 혐의는 더욱 굳어지게 되는데, 이를 표명하는 대표적인 담론이 ‘움츠린 등’이 아닐까 한다. 이 담론은 자연의 물리적 현상에 그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음역을 형이상학적 영역으로 좀 더 넓히게 되면, 계몽적 관념을 충분히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의미를 이렇게 확산시키면 최영철의 시들은 분명 사회적 영역으로 편입될 소지가 다분히 있다. 어떻든 시인은 자연의 아름다운 생리적 리듬을 통해서 그것이 주는 교훈을 은근히 이야기할 뿐, 의도적으로 이를 드러내고자 하지는 않는다. 시인은 은자처럼 뒤에서 이를 조용히 말하고자 할 뿐이다. 그의 시들이 조용하고 편안하고 정밀한 것은 이런 고요의 미덕이 그 배음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시와정신 2018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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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의 세계와 맞서 싸우는 야성의 상상력

 

                                               오홍진

  

1.

최영철은 인공과 자연 사이를 가로지르며 시를 쓰고 있다. 그에게 인공의 세계는 도시 문명에서 비롯된 소외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공간이다. 이를테면 칸칸칸에서 시인은 칸막이가 쳐진 1인용 사회의 비극을 노래한다. “아무하고도 몸 섞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저마다 1인용 노래방에서 우울한 저 핏빛 조명과 블루스를 추고 있다.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노래 부르고 혼자서 춤을 춘다. 1인용 노래방에서는 언제나 반짝이며 도착한 낯선 환호와 브라보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그것이 떼를 지어 몰려온 공허를 막을 수는 없다. 1인용 노래방은 자본이 만든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1인용 향유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칸칸칸으로 나뉜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본이 무한대로 공급하는 향유를 만끽(?)하며 칸막이로 상징되는 1인용 사회와 기꺼이 마주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무인전철이나 무인모텔등에 나타나듯, 시인은 1인용 사회를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표현한다. 4차 산업혁명이니 하여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인공지능은 무엇보다 인간관계를 간접화하는 상황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산업시대보다 더한 인간소외 현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인공지능의 현장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가 사라진다. 인공지능이 문을 열면 전철을 타야 하고, 문을 닫으면 전철에서 내리지 말아야 한다. 옆방에 누가 있는지 관심이 없는 무인 호텔의 상황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우리네 삶과 정확히 닮아 있다. 윗방과 아랫방, 옆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다. 방음만 잘 되어 있다면, 그리하여 나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다. 1인용 사회에드리워진 이기적 삶의 극치를 우니는 무인無人이라는 말이 붙은 숱한 인공물에서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시인은 이런 인공물의 맞은편에 자연을 내세우고 있다. 햇살의 내력에 드러나는 대로, 자연은 햇살이 내 온몸을 간질이고 있다라는 감각으로 인간과 인연을 맺는다. 인공물과 인간은 직접적인 감각으로 시인을 자극한다. “천부적 바람둥이의 무한대 농담으로 비유되는 햇살의 내력은 인공의 시대에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인지 새삼 강조하고 있다. 햇살의 감각은 햇살 한 줌 시키신 분에도 나타나는 바, “아하, 모두 나눠주고도 여전히 쨍쨍한 대지의 젖꼭지로 대변되는 햇살의 생명성을 통해 시인은 인공 세계 너머로 나아가는 시적 힘을 발견하고 있는 셈이다.

  

순한 것들은 돌돌 말려 죽어간다

죽을 때가 가까우면 순하게 돌돌 말린다

고개 숙이는 것 조아리는 것 무릎 꿇는 것

엊그제 떨어진 잎이 돌돌 말렸다

저 건너 건너 밭고랑

호미를 놓친 노인 돌돌 말렸다

오래전부터 돌돌 말려가고 있었다

돌돌 말린 등으로

수레가 구르듯 세 고랑을 맸다

날 때부터 구부러져 있었던 호미를 들고

호미처럼 구부러지며

고랑 끝까지 왔다

고랑에 돌돌 말려

고랑 끝에 다다른 노인 곁에

몸을 둥글게 만 잎들이 모여들었다

돌돌 저 먼데서부터 몸을 말며

여기까지 왔다

--돌돌전문

  

돌돌 말린 것들에서 시인은 죽음을 보고 있다. 죽을 때가 되면 자연 속 생명들의 몸은 돌돌 말린다. 몸에서 물이 빠지는 현상을 이렇게 표현한 것인데, 시인은 돌돌 말려 죽어가는 존재들의 삶에서 역설적으로 변함없이 이어지는 자연의 순환을 발견한다. 엊그제 떨어진 잎이 돌돌 말리는 것은 새로운 생을 살기 위해서이다. 돌돌 말린 잎은 썩어 나무의 거름이 될 테니, 자연에서는 죽음이 곧 삶이 되는 역설이 일상처럼 벌어진다고 볼 수 있다. 돌돌 말린 등으로 밭고랑을 매는 노인 또한 이러한 자연의 순환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인간의 삶이라고 해서 자연과 무어 그리 다를 게 있겠는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삶=죽음의 역설적 언어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시인은 고랑에 돌돌 말려/ 고랑 끝에 다다른 노인 곁에/ 몸을 둥글게 만 잎들이 모여들었다라고 쓰고 있다. 노인이 몸을 돌돌 말고 일하는 사이 몸을 둥글게 만 잎들이 노인 곁으로 모여드는 상황을 바라보며 시인은 자연과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한다.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건 자연의 흐름을 따른다는 말가 같다. 자연의 흐름은 시간을 거스르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세계가 시간 너머를 지향하고 있다면, 자연 속 인간의 모습은 정확히 시간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몸을 돌돌 말아가며 밭고랑을 매는 노인의 모습은 이렇게 보면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오래된 미래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달빛의 이력에서 이러한 오래된 미래의 시학은 사력을 다해 제 생명을 지키는 태풍에 쓰러진 개잎갈나무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개잎갈나무는 한 달째 시름시름 앓고 있다. 시인은 힘들어 하는 나무의 눈이라도 감겨주려고 나무에게 다가갔다가 뜻밖에 끊어진 뿌리에서 잔뿌리들이 돋아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상부의 몸통이 모든 책임을/ 뿌리에 떠넘겼다라고 시인은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은 한편으로 나무가 여전히 자신의 생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에둘러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허공에 내몰린 잔뿌리들이 허우적대며 흙을 부른다. “마 나, 막혀,”라는 시구에 표현된 대로 잔뿌리들은 필사적으로 제 생을 버티고 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힘겹게 제 생을 견디는 나무 주둥이 몇/ 흙 품을 파고들며 씹다 만 달 한쪽 게워내는 장면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달이 무럭무럭 자라 보름달이 되자 개잎갈나무는 그제야 눈을 감는다. 시인은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한 저 나무의 생명력으로부터 저토록 환한 달빛의 이미지를 이끌어내고 있는 셈이다.

달빛은 나무를 비추고 나무는 죽어 달이 되는 순환의 세계는 나무들의 단식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집주인이 나무들이 빽빽한 마당이 있는 집을 부동산에 내놓는다. 집을 사려는 사람이 다녀간 그날부터 밤낮없이 나무들이 수군대기 시작한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니 아예 침묵을 고수한다. 웃지도 않고 속삭이지도 않고 건들건들 흔들리지도 않고 시들기만 한다. 이상한 건 말라비틀어져 몸을 꼬면서도 잎들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는 점이다. 나무가 이렇게 안간힘으로 제 집을 지키고 있으니 사람이라고 별 도리가 있겠는가.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전혀 없다. 나무는 단식으로, 침묵으로 제 집을 지킨 것이다.

시인은 봄 복수라는 시에서 단식을 끝낸 나무들이 벌이는 복수의 화신化身 화신花信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공의 세계와는 다르게 펼쳐지는 나무들의 복수는 다만 이렇게 따스한 꽃바람으로 갚는 것을 그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1인용 칸들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본다면, 나무가 행하는 복수는 말 그대로 신나는 일이다. 복수의 화신들이 이 세상에 꽃들을 터뜨린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복수인가. 최영철 시인은 이렇게 인간 세상에 복수하는나무의 마음에 시안詩眼을 집중하고 있다. 자연의 반대편에 인공을 세운 인간에 비한다면, 나무와 꽃은 여전히 저토록 환한 달빛을 양분 삼아 온갖 복수의 화신들을 뱉어내고 있다. 풀수염이라는 시를 참조한다면, 자연의 그런 복수는 지금 시인의 코 밑 턱수염에서도 풀이 되어 쑥쑥 자라는 상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어느 게 풀인지 어느 게 수염인지 모를 정글이 되어간다라는 시인의 말마따나 자연의 복수는 우리 몸 어딘가에서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시와사상, 2017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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