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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폭력성에 관한 시적 고찰

 

1.논의의 실마리를 콜린 윌슨에서 찾다

중국에 배문갑(裵文甲)이라는 한 젊은 고생물학자가 있었다. 그는 1929년에 세기적인 발견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인물이다. 북경 시내에서 약 50km 떨어진 마을 주구점(周口店) 근처의 동굴에서화석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류 초기의 것으로 인정될 만한 두개골이었다. 보기에 따라선 맹수의 두개골 같기도 하고, 유인원의 두개골 같기도 한 그런 두개골. 초기에는 아시아인의 선조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현생인류(現生人類)와의 직접적 연관성은 부정되고 있기도 하지만, 북경원인으로 이름된 이 두개골이 발견된 주구점 유적에서는 석기와 화로 등도 함께 출토되어, 이들이 무리를 이루어 공동체 생활을 했으며, 석기 등의 도구를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불에 탄 동물의 뼈 등도 발견되어 불을 사용하고 있엇던 것으로 추정되는 북경원인으로 이름된 이 두개골에서 인류의 야수성이랄까, 야수적 본능의 기원을, 콜린 윌슨은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실존주의의 물결이 일렁이던 1950년대에 독자적인 관점의 사색가로 혜성처럼 나탄 문학비평, 문명비평, 각종의 인문학 등의 분야에 자유분방하게 누비고 다녔던 콜린 윌슨은, 인류의 범죄사(A Criminal History of Mankind)라는 저서에서 북경원인을 식인종으로 추정하면서 아래의 인용문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잔혹-피와 광기의 세계사라는 이름으로 2003년 하서출판사에서 국역되었다. 다음의 인용문은 국역본 34면에 있다.

 

주구점의 동굴이 시사하는 것은 다음의 사실이다. 북경원인은 동굴에 살고 있는 야생동물과 싸워 이를 모두 죽인 다음, 동료와 살육을 벌여 이긴 자가 그 둘을 먹었다. (......) 즉 인류는 항상 서로를 살육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북경원인의 획기적인 발견이 있은지 8년 후, 북경에서 1000km 정도 떨어진 남경에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집단살육 중에서 가장 천인공노할 악행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는 남경대학살이 일본제국주의 침략군에 의해 자행되었다. 19371213, 일본군은 남경을 함락한 후 무장이 해제된 중국 병사의 잔당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대량으로 학살하였다. 물론 병사와 구별되지 않은 많은 민간인들이 수없이 희생되었다. 남경의 여자들은 울타리 안으로 끌려가 일본군에 의한 능욕의 아수라장을 이루었고, 소년들은 손목이 묶인 채 매달려 총검술 연습대로 쓰였다. 당시의 일본군이 인륜을 저버린 이 만행을 두고, 사람들 사이에는 단순 보복으로 가볍게 생각한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차디찬 심판은 인간의 극악한 행위를 반성하게 하고, 또 다시 반성하게 한다. 어쨌거나 북경원인의 동종에 대한 폭력성은 남경대학살의 현실적인 증명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2. 친화감의 소산인가, 위화감의 성찰인가

나의 오랜 글벗인 최영철은 작년 여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찔러본다라는 시집을 간행한 바 있었다. 그는 이 시집 덕분에 최근에 두 차례에 걸쳐 문학상을 받았다. 전업 시인인 그에겐 이 시집이 회심에 찬 실효의 시집이 되기도 하겠지만, 나의 생각으론 그것이 비평적인 가치가 평가되는 시집으로도 남을 성싶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시집의 시편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의 하나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다음의 것을 고를 것이다.

 

여자를 겁탈하려다 여의치 않아 우물에 집어던져버렸다고 했다 글쎄 그놈의 아이가 징징 울면서 우물 몇 바퀴를 돌더라고 했다. 의자 하나를 들고 나와 우물 앞에 턱 갖다놓더라고 했다 말릴 겨를도 없이 엄마, 하고 외치며 엄마 품속으로 풍덩 뛰어 들더라고 했다 눈 딱 감고 수류탄 한 발을 까 넣었다고 했다

 

담담하게 점령군의 한때를 회고하는 백발의 일본 늙은이를 안주 삼아 나는 소주 한 병을 다 깠다 캄캄하고 아득한 소주병 속으로 제 몸에 불을 붙인 팔월이 투신하고 있다 자욱한 잿더미의 빈 소주병 들여다보여 나는 엄마, 하고 불러보았다 온몸에 불이 붙은 아이들이 엄마, 엄마, 울먹이며 내 몸 구석구석을 헤집고 있다

 

시의 전반부 내용은 충격적이다. 시인 최영철은 일본군 병사였던 한 노인의 증언을, TV를 통해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 노인은 거의 70년이나 가까이 된 일을 어떻게 생각하며 그토록 긴 세월을 살아왔는지 궁금하다.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악행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왔는지, 아니면 의기양양한 점령군의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살아왔는지는 잘 알수 없다. 노인의 증언을 볼 때 남경대학살과 관계가 있는 얘기 같다. 이 시의 내용이 얼마나 의분을 불러일으켰으면, 시인 권혁웅이 내일은 어버이날, 붉은 카네이션이 무슨 수류탄 같다.”(중앙일보, 2011. 5. 14)라고 위악적인 말을 내뱉었을까? 정작 시인은 내 몸 구석구석을 헤집고 있는 위화감이 수반된 반전(反轉)의 제스처를 보이는데 말이다. 그러나 최영철 시인의 시집 찔러본다는 인간과 자연의 위화감 못지않게 인간의 자연에의 친화감이 폭넓게 펼쳐 있다. 그 대표적인 게 표제시다.

 

햇살 꽂힌다

잠든 척 엎드린 강아지 머리에

퍼붓는 화살

깼나 안 깼나

쿡쿡 찔러본다

 

비온다

저기 산비탈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

죽었나 살았나

쿡쿡 찔러본다

바람 분다

이제 다 영글었다고

앞다퉈 꼭지에 매달린 것들

익었나 안 익었나

쿡쿡 찔러본다

-찔러본다전문

 

햇살이 강아지 머리를, 빗줄기가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을, 바람이 나무에 매달린 과실을 쿡쿡 찔러본다. 사물과 사물의 인과적 관계는 사물과 사물이 서로 의지하고 의존하는 긴밀한 상호관계이다. 우주의 만상은 이처럼 서로 쿡쿡 찔러보는 상호작용의 그물망 속에 존재한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우주적인 존재론을 두고, 생태주의자들은 곧잘 화엄경적 생명 원리라고 치부한다.

시편 찔러본다는 동심의 발상으로 쓰인 시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한 시대를 대표하는 탁월한 한 편의 동시로 남아있는 게 시인의 입장에서 오히려 좋을 것이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나는 해보았다. 최영철의 시집 찔러본다에 나오는 시편들이 이처럼 인간과 자연의 화해로운 조응 내지 감응력을, 사물과 사물이 상호작용하는 우주 질서의 그물망적인 관계를 다잡아 서정의 영감을 떠올리면서 표현하고 있는 것만은 결코 아닌 듯하다.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이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내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이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

-노을전문

 

노을을 두고 피 닦은 수건으로 비유한 것은 시인의 직관적 상상력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으로 여겨지는 대목이다. 노을에 관한 한, 이와 같이 독창적이거나 사뭇 아름다운 비유의 장치는 없다. 초승달 칼날과 내 가슴살이 시각적으로 기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인간의 잠재된 폭력성과, 폭력에 의한 희생물의 무고성의 유추적 관계를 적실하게 밝히고 있는 것도 시적 비유의 아름다움이 실현한 눈부신 광휘이다.

시집 찔러본다의 해설을 쓴 비평가 이숭원이 시집의 모두에 놓인 노을을 논외한 것은 위화감이 지닌 불편한 진실보다 자연의 천진성과 원초적 생의 리듬으로 언표되는 친화감의 시적 진실에만 논의의 초점을 두고자 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나는 이숭원이 최영철의 시 세계의 양면성 가운데 한 면만을 바라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3. 최근의 신작에서 보는 인간의 폭력성

불교문예겨울호에 최영철은 다섯 편의 신작을 발표하고 있다. 시의 제목이 검은 물, 바이오 테러, 사랑과 전쟁에서 느껴지듯이 인간의 폭력성에 관한 시인의 성찰이 맥락의 일관성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첫 머리에 둔 주위를 뱅뱅 돌았다라는 시는 파리에 관한 얘깃거리를 통해 폭력과 희생의 짝패 관계성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 폭력과 희생은 필연적으로 짝패의 관계를 이룬다.

 

파리가 파리채에 앉아 놀고 있다

그러니까 파리지 어제도 그제도

짓이겨져 죽은 동족의 피 터진 흔적

알기나 하니?

파리가 파리채에 앉아 놀고 있다

한 마리 두 마리 또 저 멀리서 한 마리

동족의 남은 사체 빠는지

파리채 주위를 떠나지 못한다

며칠 있으면 추석

조상님 산소엔 언제 가나 궁리하는데

파리는 여전히 파리채 주위를 맴돈다

앉았다가 날았다가 몇 바퀴 빙빙 돌다가

어디선가 몇 마리 더 데려왔다

파리채를 번쩍 쳐들었다

파리채를 흔들어 멀리 내쫓았다

몇 마리른 즉사했다

잠시 한눈팔다 돌아보니

무슨 영문?

파리들은 다시 그 자리에 돌아와 있다

아차, 아무래도

동족의 남은 흔적 수습하고 있는 것인가

줄초상 처참한 흔적에

넙죽넙죽 절이라도 올리고 있는 것인가

파리채를 번쩍 쳐들었다

다시 가만히 내려놓았다

한쪽에 버려진 몇 마리 사체

고운 흙에 묻었다

파리들은 거기까지 쫓아와

주위를 뱅뱅 돌았다

-주위를 뱅뱅 돌았다전문

 

이 시는 추보식 구성에 의한 평이한 산문적 진술에 의존하고 있으며,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영철 시인의 인간에 대한 폭력성의 시적 고찰을 잘 보여주고 있는 텍스트이다.

최근에 곤충의 박물학적인 지식에 관한 방대한 체계의 저술물인 인섹토피아가 번역되었다. 곤충(insert)과 백과사전(encyclopedia)을 합성한 이 제목의 책은 변하지 않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곤충의 생태를 다룬 것. 이 책에 중국 상하이에 있는 당나라 시대에서부터 전래되어온 귀뚜라미 씨름대회가 소개돼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진주에서도 전통적인 소싸움 대회가 있다. 소싸움 전용 경기장도 있고, 승리에 거는 판돈의 규모도 결코 작지 않다고 한다. 나는 다른 생명체에게 폭력을 강요하면서 대리만족을 얻는 인간들의 야수적인 본능으로서의 폭력성을 진주 소싸움에서 본다. 왜 말 못하는 불쌍한 짐승들에게 억지로 싸움을 붙이느냐고 하면서 진주의 지인들에게 불만을 터뜨리곤 했었다.

인용시 주위를 뱅뱅 돌았다는 인간의 폭력성 앞에 희생된 파리가 희생물이 되어 늘 사람의 표적이 되는 것에 대한 성찰을 시의 내용으로 담은 것이다. 희생물에 대한 인간의 폭력성을 인간은 미처 파악하지 못한다. 르네 지라르가 말한 소위 박해의 텍스트를 시인 최영철이 보잘것없는 미물의 파리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은 자못 흥미가 있다. 다음의 시를 보자.

 

하루도 전쟁 아닌 날 없었네

평화를 보장받으려고 굳게 쌓아올린 담 너머

꽁꽁 동여맨 대문 틈으로

독가스 같은 분쟁의 씨가 잠입하고

대서양 넘어 상륙한 대량 살상무기에 감염되어

순식간에 평화가 박살나네

사랑을 까뒤집자 전쟁

사생결단 살림살이가 박살나고

너 죽고 나 죽는 뜻밖의 돌격

시퍼런 욕지거리 집구석 곳곳에 낭자하고

식탁을 뒤집어엎네 접시가 박살나네

(......)

전쟁을 까뒤집자 평화

사랑의 표면은 음흉하고 축축해

전쟁은 그걸 꺼내 반짝 윤나도록 닦아놓는 일

언제 그런 일 있었냐는 듯

우장창 두드려 엎으며 진군한

신명 나는 즉흥 난타

-사랑과 전쟁부분

 

단막 형태의 TV드라마 사랑과 전쟁이 한동안 인기를 끈 후 종영되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쓴 듯한 이 시는 부부싸움을 풍자적이고 회화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자양한 정의 가운데 호모 비오랑스가 하나의 개념으로 자리하고 있듯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인간이다. 로젠 다둔은 폭력적 인간의 개념을 가리켜 근본적으로 폭력에 의해서 정의되고 폭력으로 구조화된 인간’(로젠 다둔, 최은주 역, 폭력-폭력적 인간에 대하여, 동문선, 1993, 10)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에서도 작은 전쟁으로 비유되는 욕망의 다툼이 있고, 세계 도처에 인간성을 말살하는 진짜 전쟁이 늘 있게 마련이다. 폭력으로 정의되고 구조화된 인간과, 사람살이의 모습을 인용시의 경우처럼 유머러스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시인의 다사로운 가슴속에 온기가 남아있기 때문일까? 인간은 다투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모순의 존재인지도 모른다.

 

4. 검은 물, 인간이 개입된 자연의 정령

최근에 우리 사회를 둘로 나누어버린 국책 사업이 하나 있었다. 4대강 사업이 그것이다. 한동안 골프장 만든다고 산을 파헤쳐 난리를 피우더니, 이제는 강물의 순조로운 흐름을 끊어버림으로써 자연의 숨통마저 끊는 것이 아니냐면서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래저래 상자수명의 순결한 국토가 훼손되어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성싶다.

권력의 입장에서 볼 때 4대강 사업은 치수(治水)의 문제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잘된 치수냐, 잘못된 치수냐 하는 것을 두고 지금도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것이 실효의 유용성을 얻는다면 그보다 다행스런 일이 없겠거니와, 만약 실패의 판가름으로 끝을 맺는다면, 인간, 혹은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에 의해 폭력화된 자연의 능욕이란 관점에서 두고두고 뒷말이 무성할 것 같다.

 

물이 죽었다

앓지도 않고 못 살겠다고 소리치지도 않고

다소곳 물이 죽었다

목마른 어디로부터 급한 전갈 받고

허겁지겁 달려가던 중이었다

달려가다 엎어진 것이었다

왕진가방 풀어헤치고 구급약을 바닥에 쏟았다

벌컥벌컥 속살까지 환하던 투명한 눈

어둡게 감겼다

이제 더 이상 갈 데 없다

갈 길 찾지 못하겠다고 웅덩이에 주저앉았다

맥을 놓고 통곡한 사지가 썩고 있다

(......)

초승달 달빛에 썩은 물의 혼령 어른거린다

승천하지 못하고 시커먼 얼굴로 숨이 끊겼다

-검은 물부분

 

검은 물은 현대문면의 폭력성에 의해 희생된 대상물의 상징이다. 폭력화된 자연의 정령이다. 늘 그렇듯이 희생에는 제의적 성격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럴 때 희생은 성스러운 것이거나, 죄악의 것으로 나타난다. 희생 제의의 대상은 보통 연약한 것, 온순한 것, 순결한 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희생양(scape-goat)이란 것도, 우리가 잘 아는 에밀레종 전설에서 인신공양된 어린 아이도 희생제의의 전형적인 대상이 되지 않았나? 시편 검은 물에서 검은 물 역시 일종의 희생 제의의 대상이다. 본래 순결한 물이었던 것이 어떻게 일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어서 죽음의 물로 심각하게 훼손된 것이다.

 

최영철은 인생이 살만한 것인지, 세계는 살만한 곳인지를 묻고 있는 시인이다. 그는 딱 부러지게 말하지 않는다. 그저 살만하다고도 말하기도 하고, 살만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느 한 쪽을 위해 손 드는 걸, 그는 자제한다. 만약 그가 대답의 획일성을 띤 시인임을 고집하였다면, 그는 독종의 참여시인으로 남고 말았을 터. 그의 시가 혼돈의 경험에로 복귀하고 있는 것이 때로 이처럼 시적인 모호성이 지닌 미덕으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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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성의 시학에서 관조의 미학으로

 

 

                                                                                                                                                  송희복 (문학평론가)

 

 

 

1. 최영철 시인은 비판과 적의를 좀처럼 잘 드러내지 않는 시인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렇다고 그는 속말을 능청스럽게 감출 줄 아는 시인인 것도 아니다. 시인이 시적인 대상에 대해 속시원히 곧이곧대로 시비를 거는 것이 옳으냐, 변죽을 울리면서 속엣말을 감추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는 가치의 쟁점에 속하는 문제이다. 최영철 시인이 이완된 듯한 일상의 삶 속에서 언어의 긴장감을 추구하는 시인이라는 인상이 평소 나에게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신작 소름 돋는 봄직설의 어법이 드러나 의외의 각별한 느낌을 주고 있는 작품이다.

 

기름값이 내리고 독재자의 동상이 쓰러지고

거기 솟은 꽃의 색깔이 너무 붉다

피고름에 잘 듣는 가루약처럼

폭격 멈춘 사막 위로 무역상의 전단지가 뿌려진다

(......)

두 다리 잘린 소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점령군이 던진 빵 조각을 씹고 있다

사막에서 날아온 검은 재가

자꾸만 빵 조각에 달라붙는다

소녀의 잘린 다리에도 소름이 돋는다

-소름 돋는 봄부분

 

인용된 시 소름 돋는 봄은 최근의 일을 다루고 있다. 최근의 일 중에서 세계사적인 의미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 이라크 전쟁에서 시적인 취재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로서는 예외적인 시사성을 갖는다고 하겠다. ‘피고름 잘 듣는 가루약이란 개성적인 수사의 제시가 참신함을 띄고 있지만, 작품의 배후에 깔려있는 반전의 생각은 예사롭다. 물론 직설의 화법이 직정(直情)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신창이가 된 세계에 찾아온 봄은 그 폭력성으로 인해 소름이 돋는다? 소름은 춥거나 무섭거나 징그러울 때 돋아나는 피부의 거부반응이다. 요즘 아이들이 자주 말하는 소위 닭살과 같은 것이다.

소름 돋는 봄이란, 더 이상 자연의 아름다움이 노래되지 않는다는 것. 봄을 통해 자연의 순환적인 쾌미감을 감수할 수 없는 인위적인 재해인 전쟁은 인간들로 하여금 강박의 관념과 공포의 의식 속에 매몰시키고 만다. 최영철의 의도는 대충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2. 최영철의 시를 읽으면 문득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다. 그의 시는 소박하게 아름답고 질박한 쓰임새를 지닌 일상의 용기(容器)와도 같다. 그의 그릇에는 그리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일상사의 얘깃거리가 담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는 크기가 알맞은 일상성의 그릇이라고 비유적으로 표현될 수 있겠다.

우선 그는 일상의 삶으로부터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애틋함을 느낄 줄 아는 시인이다. 삶의 후미진 주변부에 서성이면서 사람의 살림살이에 짙게 배어 있는 사람다운 몸냄새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는 하는 시인이다. 이번에 발표된 시 중에서 철거지를 지나며는 이러한 정감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코딱지만한 부엌 단칸방 가득

솔솔 피어나던 따습던 저녁이 없다

오랜만에 걸어보는 길

희미한 외등만이 비추는 철거지는

여남은 집 어깨 나란히 하고 오순도순 살던 곳

쌀 한 됫박 연탄 한 장 빌리러 갚으러 가서

절절 끓는 아랫목에 발 집어넣던 곳

한글 막 깨친 아이 하나

밥상 위에 턱 괴고 앉아 소리 높여 글 읽던 곳

희미한 외등 따라 내 그림자만 길게 늘어졌다

고단한 생의 흔적이 말끔하게 지워진 길

한 발 두 발 내 구두 소리만 흥얼댄다

일가족 칼잠으로 누웠던 머리맡 밟으며 간다

-철거지를 지나며부분

 

한때 우리의 생활 주변에는 서로의 등을 기대어 웅크림의 앉음새로 빼곡이 붙어 있는 무허가 주택들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러한 집들이 철거되고 새로운 길이 생기고 길가에는 반듯한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우리는 익히 보아왔다. 시인 최영철도 사람살이들 사이로 나 있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걸어 다녔으리라. 이 골목길을 시인은 고단한 생의 흔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삶의 흔적들이 지워진 자리에 새로운 길이 난다. 비록 가난하지만 그 골목길에는 인간들의 체취가 짙게 배어 있고 이것이 사라진 자리엔 규격화된 실용적인 삶의 양식으로서의 새로운 길, 새로운 살림살이의 모형을 암시하는 길이 생겨나 그를 안타깝게 한다. 시인은 자신이 걷고 있는 철거된 땅이 더 이상 쓸모없는 삶의 양식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고 시의 행간 속에서 강하게 반문하고 있다.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칼 가는 아저씨

칼 가시오 칼, 말을 높이지도 않고

칼 갈아라 칼. 하고 말을 턱턱 놓고 다니네

잠 덜 깬 채 그 소리 들으며 오금이 저려오네

칼 가는 아저씨 그렇게 외치고 다녔는데도

오랫동안 칼 갈지 않았네

(......)

내 칼에 번득이는 건 시퍼런 날의 섬광이 아니라

푸르죽죽 끼기 시작한 녹이라는 걸 알아버렸네

무엇이든 단번에 베어 넘길 날이 아니라

눈꼽처럼 앞을 가리기 시작한 녹이라는 걸 알아버렸네

-날과 녹부분

 

시인의 일상적 삶 속에 놓여 있는 칼은 식칼인 듯하다. 이 칼은 사용하지 않아 무디어지고 또 무디어져서 녹이 생겨 아주 사용할 수 없는 듯한 칼이다. 쓰임새를 다한 용도 폐기의 사물에 대해 애틋한 아쉬움이나 애정 어린 눈길을 주고 있는 것을 소재주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최영철의 시가 가지는 하나의 장기라면 장기가 될 수 있었다. 가족사진등의 오래된 시집에 실려 있는 작품들, 예컨대 낡고 볼품이 없는, 딸아이가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생각하면서 그리움의 정서를 적절하게 환기시켜주고 있는 그리움을 위하여가 그러한 성질의 것이리라.

서슬이 시퍼러서 섬광의 빛이 감도는 것은 실용적인 삶의 양식이다. 이것은 일상의 자아를 하려금 늘 쇄신과 경신을 요구하게 한다. 이 작품은 갈고 다듬고 고치고 하여 빛을 내고 규격화하는 삶의 양식 속에 쉽게 동화하지 못하는 시인의 자괴감을 묘사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속에 쉽게 동화하려는 시속적(時俗的)인 삶의 양태에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총알택시 타고 잠깐 조는 사이

나의 전생이 간다

(......)

전생에 오줌 한 번 갈긴 적 있는 버드나무

눈 흘기는 이파리로 숨어

찬란한 현세에 휩쓸려 가는

총알택시 나를 붙든다

어이, 하고 부르다가

여봐라, 하고 호통치다가

묵묵부답 졸고 있는 현생을 지나

저기 눈에 불을 켠

후생이 앞질러 간다.

-총알택시 타고부분

 

무의식과 몽유(夢遊)의 자유분방한 흐름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시이다. 속도전의 현실 속에서 풀어져 해체된 자아, 묵묵부답 졸고 있는 현생을 성찰하고 있는 시인 듯하다. 그러나 기능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총알택시, 이 속도전의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요컨대, 최영철은 일상속에 매몰되어 가는 자아를 성찰하면서도 동시에 이것에 길항하며 또한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크기에 알맞은 일상성의 시학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3. 시인 최영철의 심리적인 반응을 살펴볼 때, 그는 그다지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다. 소름이 돋고, 오금이 저리고, 녹이 눈앞을 가리고, 총알택시 안에서 졸음을 느끼기도 한다. 그의 신작시를 통해 세계와의 긴장된 관계를 다소간 유지하고 있는 자아의 뒷모습을 슬몃 엿볼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자연의 친화적 관계에 대한 웅숭깊은 사색의 편린도 엿보이고 있다. 그의 시력(詩歷)은 이제 20년이 넘어섰다. 그의 시력이 말해주듯이 인생과 세계를 관조하는 시적인 안목도 깊어진 듯하다. 다음의 시는 삶의 대조적인 측면을 잘 포착하고 있는 해학적인 작품이다.

 

풀풀 방사하고 있는 조루 벚꽃

첫 휴가 해군 옆에 선 처녀 가슴께로

후르르 떨어지네

 

쉽게 방사할 줄 모르고 꼿꼿이 선 지루 벚꽃

첫아들 면회온 아낙 머리 위에

낭창낭창 흔들리고 있네

-벚꽃제전문

 

벚꽃이 휘날리는 걸 두고 그는 방사(放射)라고 표현하고 있다. 바퀴살 모양의 내뿜음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이 시에서 조루 벚꽃과 지루 벚꽃을 식별해내고 있다. 연정은 짧은 시간을 아쉬워하는 격정의 한순간이요, 반면에 모정은 은근하게 길어져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환희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시간이다. 어쨌든, 자연의 상태에 동화되어 가는 삶의 대조적인 측면이 유머러스하게 잘 묘파되어진다.

 

찬바람에 떨어지는 잎의 무게에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네

제 몸의 무게를 저 잎 하나에 실어 보내려고

지난 계절 나무는 눈물 한 방울 생기면 잎으로

바람이 간지른 웃음 하나 까르르

잎으로 올려 보냈네

그 나무 아래 앉아 너와 나

세상이 짐 지운 모든 슬픔을 부렸네

세상이 쥐어준 모든 기쁨을 묻었네

나무를 받아먹고 나를 받아먹고

불그레 취한 잎이여

찬바람에 떨어지는 잎의 무게에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네

봄 여름 가을 받아먹은 것들을

여린 몸 하나에 꽁꽁 담아낸 잎의 무게에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네

다 줄래야 줄 것도 없이 나를 다 받아먹은

천근만근 잎의 무게에

잔잔하던 땅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네

- 어떤 하강전문

 

이 시는 유기체적인 자연관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동화 및 친화력을 잘 제시하고 있는 수작이다. 보잘것없이 지는 낙엽 한 낱에도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시인의 안목이 예사롭지 않다. 이제 시인은 한층 오묘하고 성숙한 시인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일상성의 시학에서 관조의 미학으로 한껏 격상이 된 느낌이다.

상승과 하강의 순환적인 반복은 자연의 웅숭깊은 법칙이요 이치이다. 이와 같은 순환적 반복을 통해 대우주의 세계와 소우주의 자아는 날숨을 내뿜기도 하고 들숨을 받아들이고는 한다. 자아와 세계가 온전하게 서로 합일될 때, 가벼움은 무거움에 기대고, 무거움은 가벼움에 매달린다. 이 기막힌 상생의 의존성이야말로 온생명(global-life)의 지닐성이자 항존성으로 이름될 수밖에 없으리라!

마침내 시인 최영철의 눈은 이와 같이 오묘의 궁리(窮理)에까지 이르게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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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환(원북원부산운동 운영위원장. 동아대 교수)

최영철(시인, [금정산을 보냈다] 저자)

 

 

 

이국환 책 읽는 부산, 생각하는 시민, 토론하는 사회를 목표로 2004년에 출범한 원북원부산운동이 12년 만에 처음으로 시집을 선정하였고, 그 시집이 부산 문인인 선생님의 시집이어서 더욱 뜻이 깊습니다. 선생님의 시집 [금정산을 보냈다]가 부산 시민이 함께 읽을 한 권의 책으로 선정되어 한 해 동안 시민과 시를 공유하는 경험을 하셨습니다. 이 새로운 경험이 올 한해 선생님께는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요?

 

 

최영철 이번 시집이 열 번째 시집이고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지 삼십년되는 해여서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보통 인생에서 30년이라고 하면 청장년의 시기로 그동안의 준비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정점의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詩作 30년은 정리와 마무리의 단계라고 봐야 합니다. 청춘의 장르인 사에서는 30년쯤 활동하면 이제 슬슬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뒤로 물러나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지요. 이런 시점에 낸 시집이 원북원부산에 선정되어 저로서는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미흡하고 성장 중에 있고 아직 제 마음에 흡족한 시를 쓰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원북원부산 선정도 먼 여정의 시원한 냉수 한 사발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국환 오늘 원북 독서토론회 행사는 2015년 원북원부산운동의 마지막 행사라고 봐도 좋을 듯합니다. 시집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에 대해 생소해 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토론회를 준비하며 독후감 공모를 했을 때 중학생, 고등학생, 일반 성인에 이르기까지 [금정산을 보냈다]를 읽고 많은 분이 독후감을 보내왔습니다. 그중 몇 편의 독후감을 선생님께 보내드렸는데, 읽으신 느낌은 어떠신지요?

 

최영철 필자와 독자 간에 형성되는 관계는 산문과 시가 서로 다릅니다. 산문의 세계는 필자가 의도한 범위 안에서 독자와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여러 독자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나누어 봐도 대개 독후감이 비슷합니다. 또 책에 실린 여러 편 중에서 가장 좋았던 글을 골라보라고 해도 비슷하게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시는 그런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시집 한권을 같이 읽고 각자 좋았던 시를 말해보라고 해도 다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산문이 설득의 방식인 반면 시는 공감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산문은 최선의 합의점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고 시는 비밀스런 의식 저편의 공감대를 불러오는 과정입니다. 저의 이런 생각을 입증이라도 하듯 선에 든 독후감들이 언급하고 있는 시들이 달랐습니다. 시의 독법은 가장 잘 쓴 작품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에 숨겨진 어떤 상처, 또는 생태적으로 가지고 있는 흥과 한의 합일점을 찾아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국환 이번 독서토론회 주제는 , 세상을 보는 힘을 키우다입니다. 시를 읽고 감동한 적이 있느냐? 라는 질문에 프랑스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자신이 감동한 시를 암송한다고 하지요. 우리 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생뚱맞다는 듯이 바라보며 웃더군요. 아마도 입시 위주의 우리 시 교육이 학생들로 하여금 진정한 시의 맛을 잃게 하였나 봅니다. 이번 독서토론회는 학생들이 많이 참여하였습니다. ·고등학생들에게 시란 무엇이며, 이번 시집과 관련하여 학생들이 어떻게 시와 만났으면 하는지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최영철 시는 교육적인 효과가 충분하지만 일반적인 교육방식, 즉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으로는 역효과를 내기 쉽습니다. 모국어로 쓰여진 좋은 시가 예를 들어 수만 편이 된다면 그것은 수만 가지의 다른 생각이 그 각각의 시에 깃들어 있다고 봐야 하는데 그걸 일사불란한 방식으로 가르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 시도 교과서에 몇편 수록된 게 있지만 우리나라 제도교육이 선정한 시들은 교육적 효과에 중점을 두고 선정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의도를 가진 시들을 밑줄을 쳐가며 배우고 공부한 학생들이 시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시를 통해 무엇인가를 가르쳐야 하고 배워야 하고 평가해야 하니 시가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자유정신은 다 달아나고 없습니다. 이미 냉동해버린 물고기를 놓고 이 물고기는 어디로 헤엄쳐가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를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면 암송과 자기 판단 능력일 것입니다. 우선 선생님들이 그런 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이니 여러 방식의 연수를 통해 선생님들 생각부터 바꾸어놓아야 하는데 우리의 교육 여건으로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국환 예술이 시대를 반영하듯, 시인의 시도 마찬가지라 여깁니다. 선생님의 이번 시집에서는 전작인 [찔러본다]나[호루라기]와 비교해도 우리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드러나는 시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난파 2014], [향긋한 양극화], [하야리아 부대], [못할 짓이 없구나] 등이 그러한데요. 이러한 시를 통해 선생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지요?

 

최영철 시인은 대체로 낙관과 비관이 시시각각으로 교차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엄살쟁이나 변덕쟁이로 비칠 수도 있겠으나 환경의 파장을 누구보다 먼저 감지하고 반응하는 잠수함 속의 토끼가 시인에게 주어진 영원한 책무일 것입니다. 또 그것이야말로 인류 사회에 시인이 필요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시인이 너무 많아 문제라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시인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자로서의 시인이라면 많아서 문제될 게 없지만 그것이 아니라 자기과시와 자기만족과 같은 문화적 허영심을 체우기 위한 시인들이 많아지고 있어 문제입니다. 인류사회가 지금 당면한 위기상황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으로 지구생태계의 균형은 깨어졌고 인간의 신의와 상생의 덕목은 무너졌습니다. 지구의 멸종속도는 가속도가 붙어 여러 재앙들이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분열과 파괴의 20세기를 반성하고 새로운 천년을 만들자고 다짐한 게 15년 전인데 우리는 그 짧은 기간동안 이미 끔찍한 재앙과 분쟁, 사건 사고들을 접하고 있습니다. 시야말로 이런 위기 상황을 자각하고 반성하게 하는 언술이 되어야 하고, 그럼에도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 가녀린 풀꽃 한 송이와 같은 희망와 사랑이 있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국환 선생님의 시들이 인터넷 블로그나 SNS 등을 통해 공유되고 있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그런 점에서 컴퓨터와 스마트폰 등 인터넷이 주요 소통도구가 되는 디지털 시대에 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최영철 시의 경쟁력은 짧은 양식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런 형식적 특성은 최근의 문화양태와도 잘 부합됩니다. 메시지가 아닌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점도 이 시대 취향과 잘 어울립니다. 최근의 인터넷 소통방식과 디지털 환경은 시를 나누고 공유하기에 편리한 환경이고, 지루하게 설득을 강요하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 지금 세대의 취향과도 맞아떨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 소통이 갖고 있는 무례는 개선되어야 합니다. 오타는 물론이고 행 구분 등 원작이 훼손돤채 돌아다니는 시가 많습니다. 어휘 하나 부호 하나 행 구분 하나에 모두 내밀한 시인의 의도가 있는 것인데 그게 훼손된채 돌아다니고 있는 시들을 보며 소름이 끼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접한 한두 편으로 그 시인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오해할 소지도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시의 역할은 보다 전문적인 탐구가 필요하겠지만 저 나름대로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런 이야기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른바 문사철로 대변되는 인문학이 위기를 맞고 있고 영화가 모든 예술양식을 수렴하는 대표 장르가 되었지만 거기에는 내밀한 정서적 반응과 혼을 담을 수는 없습니다. 높은 깨달음의 가치는 영상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문자로 표현됩니다. 저는 그래서 지금 홀대받고 있는 문사철은 머지않아 부활할 것이라 여깁니다. 시장논리에 흔들리지 말고 좀 힘들고 가난하더라도 그것을 잘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 일을 가장 잘 수행 할 수 있는 구성원이 시와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국환 이번에는 조금 개인적인 질문인데요. [금정산을 보냈다] 말미에 실린 최학림 부산일보 논설위원과의 대담에서 선생님은 눈물이 더 잦아졌다.’(129)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가장 최근에 선생님의 눈물샘을 자극한 일은 무엇이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최영철 시인들은 대부분 눈물이 많지만 저는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생긴 것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지요. 눈물은 슬플 때만 나오는 게 아니겠지요. 슬플 때, 기쁠 때, 안타깝고 안스러울 때, 감동의 순간에도 눈물은 나오지요. 신문 기사를 읽다가도 눈물이 나고 드라마를 보다가도 눈물이 나고, 책을 읽다가도 눈물이 나지요. 교육방송의 나눔 070’이나 전국노래자랑이나 시시한 드라마를 보다가도 눈물이 날 때가 있습니다. 아내에게 그걸 숨기느라 늘 애를 먹지요. 만물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많은 게 아마 시인의 천부적 재능일 겁니다.

 

이국환 최근 이윤택 선생님과 함께 펴낸 [백석우화 그리고 서른 세 편의 시]를 읽었습니다. 지난 여름 출간한 성장소설 [어중씨 이야기]도 그렇지만, 선생님의 활동은 여전히 활발하고도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듯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선생님의 향후 활동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최영철 내년에 시집 한 권이 더 나올 것 같습니다. 건강은 여러 군데가 탈이 나 있지만 2년쯤 진행된 녹내장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걱정입니다. 선천적으로 약시였지만 그런대로 지금까지 왔는데 완전한 실명에까지는 이르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런 것들이 저를 더 절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니 사실 병이나 가난 같은 것은 저의 스승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것들과 좀더 사이좋게 밀고 당기며 몇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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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를 넘어서

최영철론

 

 

 

                                                                                                                                                             구모룡

 

 

등단작 연장론(1986)은 최영철의 시법을 잘 드러낸다. 우선 이 시는 연장을 화자로 내세워 삶의 문제를 우회하면서 진술한다. 고백적 화자라는 서정시의 오랜 문법과 거리가 있으며 의 이야기보다 이웃과 세상을 향한 시인의 열린 시각을 반영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은 단순한 의인화에 그치지 않는다. 연장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연장이 말을 하는 방법을 통해 사람과 연장의 관계를 뒤집어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연장과 사물은 인간과 사회로 각각 유비된다. 도구에 불과한 연장 없이 사물이 바른 자리에서 작동할 수 없듯이 사회도 연장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할 때 조화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최영철은 조화와 화해로운 삶에 대한 서정적 지향을 비서정적 어법으로 발화하는 독특한 개성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잠시라도 두드리지 않으면/불안한 그대들의 모서리와 모서리는 삐걱거리며 어긋난다/우리가 세상 어딘가에 녹슬고 있을 때/분분한 의견으로 그대들은 갈라서고/벌어진 틈새로 굳은 만남은 빠져 나간다/우리가 잠시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그 누가 일어나 두드릴 것인가/무시로 상심하는 그대들을 아프게 다짐해 줄 것인가

연장론부분

 

표제인 연장론은 최영철이 지닌 관계학이자 시학이다. 그는 등단 이전 70년대 후반부터 시작에 몰두해왔다. 80년대 초반에는 무크지 지평에 시를 발표하면서 부산에서 전개된 무크지 운동을 이끌어가는 역할(이윤택, 강영환, 구모룡 등과 함께)을 하였다. 지평은 한국사회의 불균등성을 예민하게 감지하면서 그것을 해소하는 것을 문학적 과제로 삼았다. 사회적 불균등, 민족적 불균등 그리고 지역적 불균등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특히 다른 무크지들이 사회(계급)와 민족에 주안점을 둘 때 지평은 여기다 지역을 더하였다. 무엇보다 구체적인 삶에 근거를 두면서 세상을 이해하자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상위레벨의 이념을 따라 삶을 해석하는 방식과 달라서 어찌 보면 소박하고 더딘 태도로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진실은 구체적인 것에서 찾아진다는 고집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동안 우리는 쉽게 보편을 말하려는 경향들을 보아왔다. 누구의 보편이냐는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일방으로 편향되는 가운데 정작 현실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돌이켜 보아서 무크지 지평의 위상을 다시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구체성의 시학을 들 것이며 이러한 시학의 중심에 최영철이 있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해묵은 무크지 시대를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꾸준하게 구체적인 것에 착목하고 있는 시인 최영철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80년대 이후 우리의 삶이 달라져 온 만큼 이에 따라 최영철의 시적 대상 또한 변화한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 변함없는 입장은 구체적인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지이다. 이러한 의지와 더불어 시인의 시세계는 더 많고 넓은 외부를 포함하면서 시적 지평을 확산해 왔다.

 

햇살이 꽂힌다/잠든 척 엎드린 강아지 머리에/퍼붓는 화살/깼나 안 깼나

쿡쿡 찔러본다//비 온다/저기 산비탈/잔돌 무성한 다랑이논/죽었나 살았나/쿡쿡 찔러본다//바람 분다/이제 다 영글었다고/앞다퉈 꼭지에 매달린 것들/익었나 안 익었나/쿡쿡 찔러본다

찔러본다전문

 

가장 근래에 발간된 시집찔러본다(2010)의 표제작인데, 이 시를 시법의 차원에서 연장론과 비교해보자. 우선 진술 방식에 차이가 있다. 연장론에 비하여 간결하고 반복을 통하여 리듬을 창출하는 등 훨씬 더 많은 시적 장치들을 포함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차이는 자연스러운 발화라는 점에서 큰 거리를 만들지 못한다. 발상의 측면에서 사물이 시의 주인공이 되는 방식에서도 상통한다. 단순한 의인관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을 보인다. 그렇다면 화자의 위치는 어떠한가. 이 시에서 화자는 사물이 아니라 이다. ‘는 햇살과 비와 바람을 응시한다. 그런데 의 응시는 그들과의 공감 속에서 진행된다. 반복되는 쿡쿡 찔러본다라는 진술에서 사물의 현상과 의 행위가 포개지고 있다. 두 편을 비교한다면 최영철의 시법이 지닌 연속성과 변화가 분명하다. 그는 처음부터 사물을 과감하게 시 속의 주인공으로 삼아 진술하였고 사물 현상을 삶과 등치시켰다. 이러한 그의 관계론적 시학은 찔러본다에서처럼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자연사물 그리고 생명현상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최영철의 시적 과정 전반을 변화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일은 하나의 과제이다. 하지만 변화의 지점을 자리매김하는 일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무익한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구체적인 것을 탐문하려는 그의 입장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찔러본다에 게재된 엄청난 무기연장론에서 제시한 화해와 조화에의 열망이라는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역시 화자와 대상이라는 관점에서 차이가 부각되고 있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풀 한 통 사들고 나오며/어깨가 우쭐/풀 한 통이면 수십 수백 흩어진 것들/찢어진 것들 반듯하게 하나로 꿰맬 수 있는데/말하고 싶어 자꾸만 들썩이는 가벼운 입/조용히 아무 탈 없이 봉해버릴 수 있는데/무엇이 걱정/이것 하나면 뿔뿔이 흩어진 창세기와 계시록을 붙이고/비운에 찢겨나간 백제와 가야를 붙이고/마지막 숨 넘어가는 생물도감의 실밥을/단단히 단단히 이어 붙일 수 있는데/폭격으로 동강 난 반도의 허리도 이을 수 있는데/무엇이 걱정/동전 두어 개로 이 엄청난 무기를 손에 쥐고/씽씽 찬바람 이는 내 가슴살부터 이어 붙일 생각에/어깨가 우쭐/자꾸만 떨어져 너덜거리는 지구 곳곳/산산조각 찢겨 휘날리는 세계지도부터/구멍 난 땅, 떨어져 흩날리는 꽃잎부터/가만가만 풀칠해 붙일 생각에/어깨가 우쭐

엄청난 무기전문

 

연장론의 의지가 그대로 이 시에 이어지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인용시의 표제는 천진한 아이의 눈이 만든 아이러니다. “풀 한 통엄청난 무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아이의 시선으로 상상한다. “그대들이 힘 빠져 비척거릴 때/낡고 녹슬어 부질없을 때/우리의 건장한 팔뚝으로 다스리지 않으면/누가 달려와 쓰다듬을 것인가/상심한 가슴 잠시라도 두드리고/절단하고 헤쳐 놓지 않으면/누가 나아가 부단한 오늘을 일으켜 세울 것인가.”(연장론에서) 이처럼 연장론의 결구는 결연한 의지로 끝난다. 그렇다면 인용시는 의지의 피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세상의 이치를 아는 시인에게 흩어지고 찢어지고 동강나고 떨어진 세상의 일들이 꿰매지고 봉해지며 이어지고 붙기가 쉽지 않다고 인식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희망은 아이의 천진한 상상 속에서 찾아지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나는 최영철의 시적 인식을 범속한 트임”(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해설에서)이라고 한 바 있다. 발터 벤야민의 용어를 빌려다 쓴 것으로 연장론이 보여주고 있듯이 세속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시적 진실을 갈구하는 시인의 삶과 인식을 규정하기에 적합한 용어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러한 범속한 트임은 시적 행위에 있어 세속주의를 의미하지만 반드시 이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인식이나 시쓰기에 있어서 그가 이미 하나의 단계를 넘어섰음을 뜻한다. 가령 연장론은 벌써 인간의 한계를 내포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회의가 전제되어 있는 것인데 시인은 애써 이러한 회의를 딛고 일어서려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시작 과정에서 지속된다. 엄청난 무기가 쓰이는 대목도 그러하다. 세상에 대한 환멸을 시인은 힘겹게 극복하려 한다. 아이의 천진성이나 자연의 자발성은 후기시에서 그가 기대는 희망의 거처이다. 그러나 시인의 어법을 간단하게 규정하려 들면 안 된다. 여러 겹의 사유가 이끌어낸 단순함과 자연스러움이기 때문이다.

 

저의 일상성은 변함없는 영역이지만 평이하고 단조롭다는 반성과 불만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시적 상상력이 너무 멀리 가면 모호해지기 쉽고, 전달에 집착하면 단순성의 함정에 빠지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 쓰는 자는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지요. 의미전달에서 머무는 산문화의 함정을 넘어 시의 특장을 드러내는 방식이 무엇인지, 그것을 죽을 때까지 고민해야 할 부분이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도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일을 게을리 하면 시라는 장르는 경쟁력을 잃고 고사할 것입니다. 정말 가혹한 과업입니다. 지나치게 진지하지도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는 것, 시와 잘 노는 것, 시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와 그 도구인 언어를 잘 가지고 노는 것, 잃었던 흥을 되살리는 것, 우리말의 묘미를 드러내는 것, 그것이 시인의 고통스러운 과업입니다. (

― 「최영철-사물의 평등과 조화를 향하여,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109-10월호, 36.

 

배한봉과의 대담에서 최영철이 한 진술인데 시인의 시쓰기에 대하여 매우 직절한 해명이 아닌가 한다. 그가 말한 가혹한 과업범속한 트임의 필연이다. 나는 이러한 최영철의 시적 성취를 은유 넘기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많은 시인들은 필생의 과업을 은유로 생각한다. 나와 언어와 세계를 은유로 연결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물론 은유의 범위는 대단히 넓다. 좁게는 원관념을 담기 위하여 보조관념을 끌어오는 데서 넓게는 모든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물활론에 이른다. “시는 은유다라는 정의는 이러한 은유의 진폭을 포함하면서 주체 중심의 서정시학을 중심 내용으로 삼는다. 최영철의 시학과 관계학은 처음부터 이러한 은유를 수사학의 중심에 두지 않는다. 은유를 찾는 일보다 일상적인 어법으로 시적 발화를 수행하는 일에 더 많은 공력을 들인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은유와 거리를 두는 일과 다르다. 그야말로 은유를 넘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은유는 시적 수사이기도 하지만 세계 인식이기도 하다. 서정시의 기본 원리인 자기표현은 이러한 은유적 인식을 바탕으로 삼는다. 모든 사물을 생명적인 관계로 인식하는 생명시 혹은 생태시는 주체 중심의 은유를 넘어설 때 발현된다. 하지만 시적 의도에 의해 구성된 생태시는 기존의 은유가 확장된 데 불과하다. 다수의 시인들이 삶은 그러하지 않지만 시에는 생태적인 비전을 담는 경우가 있다. 기존의 은유를 자연사물로 확장한 형국이다. 최영철의 후기시가 보이는 생명적 관계론은 초기시부터 일관된 관계시학의 연장에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새로 발견된 은유가 아니다.

 

사물에서 시적인 것을 찾는 행위는 삶의 구체를 가장 중요한 시적 덕목으로 삼고 있음을 의미한다. 최영철은 시적 지향이 유인하는 본질 환원의 함정을 스스로 차단하면서 사물과의 교감을 이뤄내고 있다. 사물과의 교감은 그에게 있어 삶과 시를 동시에 포용하는 방법이 되었다. 이러한 방법이 시를 고루한 성채에 가두는 본질주의의 울타리를 헐고 진전한 세속주의의 가능성을 열게 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시의 입장에서 삶은 비루하다. 이러한 삶의 비루함 안에서 시적 지평을 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내외를 향한 정화 충동을 가라앉히면서 타자와 사물과 교감하는 일은 힘든 연단을 필요로 한다. 최영철은 이러한 연단의 과정을 살아감으로써 범속한 트임을 이뤘다. 사물 안에서 그들의 생애와 역사를 함께 사는 지혜를 터득한 것이다. 그러니 그가 사물들로 하여 스스로 그 본성을 드러내게 하는 시적 깊이를 얻는 것이 당연하다. 최영철의 시를 통하여 우리는, 강요 없이 존재가 열리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졸고, 타자 혹은 사물에의 교감,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109-10월호, 65.

 

최영철의 시에 대하여 내가 설명한 대목이다. 여기서 범속한 트임을 이뤘다라는 구절은 실제 시작의 처음부터 견지한 범속한 트임이 확장되었다로 고쳐 읽혀야 옳다. 그리고 이러한 범속한 트임은 달리 은유 넘기로 명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배한봉과의 좌담에서 최영철은 모든 서정시는 대부분 다 생태시가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굳이 생태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 좀 거부감을 느낍니다. 모든 생명과 사물, 곧 삼라만상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로 엮여 있다는 생태적 상상력이야말로 서정시의 본질이겠지요.”라고 진술한다. 최근의 시에서 생태적 상상력이 발현된 의식을 자주 발견했다는 배한봉의 질문에 대한 답변인데 최영철의 시에서 생태적 상상력이나 의식을 따로 찾아내려는 것은 그의 시를 잘못 읽는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그의 시는 처음부터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등의 관계를 인식하고 있다.

 

순한 것들은 돌돌 말려 죽어간다/죽을 때가 가까우면 순하게 돌돌 말린다/고개 숙이는 것 조아리는 것 무릎 꿇는 것/엊그제 떨어진 잎이 돌돌 말렸다/저 건너 건너 밭고랑/호미를 놓친 노인 돌돌 말렸다/오래전부터 돌돌 말려가고 있었다/돌돌 말린 등으로/수레가 구르듯 세 고랑을 맸다/날 때부터 구부러져 있었던 호미를 들고/호미처럼 구부러지며/고랑 끝까지 왔다/고랑에 돌돌 말려/고랑 끝에 다다른 노인 곁에/몸을 둥글게 만 잎들이 모여들었다/돌돌 저 먼데서부터 몸을 말며/여기까지 왔다

돌돌전문

 

이 시를 두고 생태시 운운하는 일은 최영철의 시학을 왜곡하게 된다. 돌돌 말린 잎과 돌돌 말린 등을 지닌 노인의 관계도 은유가 아니다. 그들은 우연히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고 시인의 눈에 포착된 것이다. 자연과 우주에서 우연한 일들은 그 이면에 필연의 법칙을 함축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 우연한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어렵다. 애써 필연을 찾아내려는 것이 사람들이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필연을 말하거나 우연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순한 것들의 생존에 대하여 담담한 눈으로, 그러나 세심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바라봄은 대상을 타자화하는 시선의 권력을 지니지 않는다. “순한 것에 대한 공감과 순환하는 생명의 이치를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명의 순환이라는 개념을 이 시를 통해 제시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러한 의도야말로 이 시의 대상이 부과하는 공감 영역을 넘어선다. 시인 또한 이러한 과잉해석을 경계한다. “모여들었다”, “왔다와 같이 현상 그대로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묘미는 표제에서 발견된다. 말라가는 혹은 죽음에 다가가고 있는 생명체의 현상을 돌돌이라는 의태어로 경쾌하게 서술한다. 그가 말한 시인의 과업지나치게 진지하지도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는 것, 시와 잘 노는 것, 시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와 그 도구인 언어를 잘 가지고 노는 것, 잃었던 흥을 되살리는 것, 우리말의 묘미를 드러내는 것이 잘 수행된 느낌이다. 빈소에 가면 웃음이 나오는 이유, 풍장, 고양이, 아버지 기일 , 저승꽃등도 마찬가지다. 모두 죽음과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지만 결코 주제의 무게에 눌려 가라앉는 어법을 구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게를 거듭 걷어내면서 생과 사의 문제를 처리한다.

그 처음부터 개성적인 어법의 시를 쓴 최영철은 단지 시의 수사학을 통하여 시적 성취를 이루려 한 시인이 아니다. 그는 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몸을 가진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를 인식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은유는 거추장스런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설혹 그의 시가 확장된 은유로 해석되더라도 이는 그의 시가 나아간 어떤 경지를 말하는 데 불과하다. 은유를 넘어서 일상의 언어로 시적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그의 시적 외부 또한 끊임없이 넓어졌다. 그럼에도 여전하게 그는 구체적인 삶을 시작(beginning)으로 삼는다. “시작은 항상 시작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는, 표현보다 서술을, 재현보다 현현을 지향한다. 그의 시법은 이제 우리 시사의 맥락에서 하나의 위치를 얻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시, 생활시, 생태시 그 어디에도 속하면서 그 어느 것으로도 그의 시를 한정하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국문학 2012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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