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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고향을 대표하는 시인(2)

- 시인 최영철의 고향과 시세계

 

 

 

*대담: 최영철(시인). 송용구(문학평론가. 본지 편집기획집필위원장)

 

*일시: 2013년 6월 21일. 금.

*장소: 경상남도 김해시 ‘도요 마을’

   

‘도요 마을’의 자택에서 집필에 여념이 없는 최영철 시인.

 

 송용구: 선생님! 평안하셨는지요? 2004년에 제가 ‘생명의식’의 관점에서 선생님의 시세계를 어느 시전문지에서 평론하면서부터 선생님과 문학의 인연을 맺었지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선생님의 시집 『호루라기』를 제게 보내주시고 문학적 인연의 끈을 계속 이어왔는데, 이렇게 얼굴을 뵙고 말씀 나누기는 처음입니다.

 

최영철: 이렇게 먼 곳까지 내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송 선생님의 말씀처럼 ‘문학’의 끈이 이어져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선생님과의 만남이 낯설지는 않군요.

 

‘도요 마을’(도요 창작촌)을 소개하고 있는 최영철 시인(左).

 

송용구: 계간 『시산맥』의 기획특집인 “한국인의 고향을 대표하는 시인”의 내용을 구성하기 위해 선생님의 거주지이자 문학활동의 현장인 “도요 마을”을 방문한 것이 사실입니다만, 업무상의 목적을 초월하여 ‘고향’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과 ‘고향’과 문학예술과의 관계 등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많은 얘기 나누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출생하신 고향은 경상남도 창녕의 ‘남지’이지만 5세 이후엔 주로 부산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넓게 본다면 ‘부산’도 선생님의 고향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고향에서의 자연친화적 체험 혹은 자연과의 소통 체험이 선생님의 시세계에 끼친 정서적 영향이나 정신적 영향은 어떤 것인가요?

 

최영철: 태어난 곳은 경남 창녕이지만 젖먹이 때 나왔고, 2년여의 짧은 서울 살이를 제외하면 줄곧 부산에서 살았기 때문에 부산이 고향이기도 합니다. 넓게 본다면 인간의 고향은 자연일텐데 도시에서 나고 자란 오늘의 세대 모두는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산업화 세대 대부분은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입니다.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서정시는 그 회귀본능을 자극하고 일깨우는 일이 되어야 할 겁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따르면, 저는 읍 소재지의 가난한 대가족들 사이에서 태어나 문간방에서 젖배를 곯으며 잠시 살았다고 합니다. 고향을 생각하면 큰아버지가 하시던 자전거방 기름 냄새가 상기되곤 합니다. 무일푼으로 도시에 나온 부모님은 부산의 어느 달동네에 정착하여 반칸 방에서 전등 하나를 주인집과 나누어 쓰셨죠. 그 가난한 반칸 방에서 유년의 한때를 보냈습니다. 큰소리로 울면 어머니가 힘들었을 것이므로 울음을 참는 법을 배웠을 겁니다.

태어난 곳이 창녕 남지의 낙동강 마을이었고 자란 곳이 낙동강 하류의 부산이었고 지금 살고 있는 김해 도요 마을이 또 낙동강을 끼고 있는 마을이라 강과 인연이 깊습니다. 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머니 품 속같이 편안합니다. 저의 생은 낙동강을 따라 흘러갔다 다시 모천으로 거슬러오르는 과정 같습니다. 제 이름 泳喆에도 헤엄칠 泳이 있습니다. 달동네와 매축지와 같은 가난한 동네에서 유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낮고 가난하고 허름한 것에 더 정이 갑니다. 지금도 낡은 골목길과 재래시장 같은 데를 돌아다니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도요 창작촌’의 야외예술무대에서 대화를 나누는 시인 최영철(右)과

문학평론가 송용구(左)

 

송용구: 선생님께서 태어나신 창녕의 남지를 흐르는 강이 선생님께는 정서의 모태 역할을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곳 ‘도요 마을’을 흐르는 낙동강의 물줄기를 보니, 태아의 몸에 연결된 모태의 탯줄을 보는 듯 합니다. 고향의 정서적 핏줄이 이곳 ‘도요’에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막힘없이 흐르는 강물을 젖줄 삼아 풍성하고 풋풋한 인정을 키우면서 이해타산을 초월하여 도움을 주고 받는 ‘상호부조’의 공동체가 이루어진 곳이라면 그 어느 곳이든 시인의 고향이란 생각이 듭니다. 더욱이,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자연의 만물과도 생명의 숨결을 주고 받는 가운데 공생의 생활방식을 깊이 뿌리 내린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시인의 고향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 간의 ‘공동체적 연대’가 사람과 자연 간의 ‘공동체적 연대’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선생님께서 귀의하고자 하는 고향이겠지요. 그 고향을 닮은 곳이 이곳 ‘도요’가 아닐까요?

 

2010년 부인이신 조명숙 소설가와 함께 이곳 ‘도요 마을’의 ‘도요 창작촌’에 정착하시어 창작과 예술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오고 계신데, ‘도요’라는 정서적 모태에서 ‘시와 ‘예술’이란 아이를 낳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입니다. 고향은 특정 지역이 아니라 정서의 모태이자 예술의 모태인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고향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발표해왔던 시의 주제나 소재 중에서 한국인들의 고향을 연상시킬만한 사건과 사물들은 어떤 것인가요?

 

최영철: 도시 주변부의 것들, 재래시장, 골목, 가난한 사람, 버려지고 낡은 사물, 하찮은 생명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대중이 하찮게 여기지만 결코 하찮게 여길 수 없는 모든 것들이지요. 이들과의 소통은 제가 언제나 ‘고향’에 살고 있다는 유대감을 확신케 해줍니다.

 

‘도요 마을’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 변의 정자에서 대화를 나누는

시인 최영철(左)과 문학평론가 송용구(右)

 

‘도요 마을’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 변의 정자에서 대화를 나누는

시인 최영철(左)과 문학평론가 송용구(右)

 

송용구: 선생님께서도 직접 밝히셨듯이 선생님의 시에는 우주 안에서의 만물의 ‘소통’과 ‘연대’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자연의 일부인 사람도 다른 사람(他者)과의 유기적 ‘연대’를 강화하는 생활방식(문화)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의 시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걸음 성큼 더 나아가서 사람과 자연이 서로 ‘융합’하여 상호의존(相互依存)의 ‘연대’를 튼실히 가꾸는 길이 선생님의 시에서 열리고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저의 문학비평집 『느림과 기다림의 시학』에 수록한 평론 「햇살의 직통선로에서 훔쳐온 생명의 불 – 최영철 시의 생명의식」도 이러한 개인적 확신에서 비롯된 산물입니다.

‘지구’라는 생명공동체 안에서 공존하고 공생하는 만물의 ‘공동체적 연대’. 사람들 간의 ‘연대’, 사람과 자연 간의 ‘연대’가 인류의 멸망을 예방하는 항체이자 건강한 미래사회를 예비하는 초석이라는 패러다임이 선생님의 시에서 정신적 생명의 혈맥을 이어 왔다고 확신합니다. 시집 『호루라기』 에 수록된 「오후 두 시」, 「도둑나무」등. 시집 『찔러본다』에 수록된 표제작 「찔러본다」, 「바디랭귀지」, 「자연학교」, 「아프리카」, 「풀들」등. 최근작 「봄 복수」, 「와불 지나며」 등이 저의 확신을 보증하는 대표적 증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공동체적 연대’는 시인의 특정한 개성적 경향이라고 보시는지요? 아니면 이 시대의 시인들이 사회적 책임의식을 갖고 마땅히 추구해야 할 연대적 문학경향이라고 보시는지요?

 

최영철: 모든 사물은 평등하고 모두 쓸모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모두 존엄합니다. 이것은 서정시의 중요한 열쇠일 것입니다. 또 인간과 지구와 우주의 존속을 위해 꼭 필요한 중요한 가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물은 결여와 결손으로서도 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수긍하며 상호연대와 부조의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질병과 사고로 힘든 성장기를 보냈고 97년에 머리를 다쳐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변명도 저항도 않고 그것들을 담담히 수락했습니다.

 

송용구: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이름으로 출간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 떠오릅니다. 만물 간의 ‘상호부조’와 만물 간의 ‘공동체적 연대’는 시대의 차이를 초월하여 시인들의 몸으로 육화(肉化)해야 할, 아름다운 생활윤리이자 필수적 문화임을 선생님의 견해로부터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도요 마을’을 터전으로 삼아 직접 체험하며 몸소 실천하는 삶을 담담하게 얘기하시는군요. 선생님께서 “서정시의 열쇠”라고 명명하셨습니다만, 저로서는 서정시의 본향이 어떤 세계인지를 이곳에서 목격하며 ‘산 증인’인 시인의 체험적 증언을 듣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선생님께서 표현하신 “서정시의 열쇠”로서의 우주적 ‘상호부조’와 ‘연대’는 창녕의 남지 마을부터 부산 시절을 거쳐 계속 선생님의 몸에 배어든 서정의 강물이자 서정의 혈맥이었군요?

 

최영철: 네. 공동체의 ‘연대’와 ‘상호부조’는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잘 실행하는 것 같습니다. 농촌과 도시 주변부 사람들의 일상이 대체로 그러했습니다. 지금 같이 일하고 있는 ‘도요 창작촌’ 사람들의 일상은 온통 그런 연대의 선행입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재주를 공동체를 위해 쓰고 있고 거의 모든 일이 안에서 다 해결됩니다. 여기는 쓸모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 같이 무능한 사람도 개밥 주고 집지키는 일에 쓰입니다. 서로의 재능으로 다른 이의 부족을 충당해줍니다. 이러한 사람들 간의 ‘연대’가 자연과의 ‘연대’로 이어지는 것이 제게는 너무나 자연스런 일상입니다.

 

송용구: 사람에겐 자신의 몸을 낳아준 물리적, 공간적 고향이 있고 정신적, 정서적 고향은 따로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물론 이 두 가지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가장 부러운 사람이겠지요. 선생님의 경우엔 ‘도요 마을’이 시창작을 비롯한 예술창작 전반에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을만큼 ‘마음의 고향’으로 다가오시는지요? 만약 그것을 긍정하신다면 ‘도요 마을’로부터 선생님이 공급받으시는 자원들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사상, 정신, 정서, 문화 등의 자원들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최영철: 여기는 변방이어서 중심으로부터 소외된 곳이라 여기기 쉽지만, 저는 그 반대로 여기가 중심을 소외시켜버린 곳이라 여기며 삽니다. 경쟁으로부터 소외된 곳이라 여기며 삽니다. 다만 그것이 저를 긴장하게 하는 선의의 경쟁까지 죽이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선의의 탈중심, 탈경계, 탈자본, 탈욕망이기를 바랍니다. 제가 귀의해왔고 또 지금 귀의해가는 ‘고향’의 참모습입니다. 서정시의 본령이지요.

 

송용구: 한국인의 ‘고향’을 대표할만한 서정시의 본향이 어떤 세계인지를 눈으로 보고, 말씀으로 듣고, 시로 읽게 되니 먼 길을 왔어도 피곤함을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최영철 선생님의 시집 『찔러본다』를 진지하게 읽어보았습니다. 이 시집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나누었던 ‘상호부조’와 ‘연대’와 서정시의 본령을 형상화한 “삶 속의 예술”이라고 명명하고 싶습니다. 본향의식과 생명의식이 통섭하고 있는 선생님의 시 「찔러본다」와 「바디랭귀지」를 다시 조명해 보았습니다. 저의 해설을 함께 읽으시는 것으로 오늘의 유익한 대화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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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시인-

최영철

시인 최영철은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다. 1984년 무크지 『지평』, 『현실시각』등에 시를 발표하고,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시집 『찔러본다』, 『호루라기』, 『그림자 호수』, 『일광욕하는 가구』, 육필시선집 『엉겅퀴』, 산문집 『동백꽃, 붉고 시린 눈물』등 여러 권의 작품집을 냈다. 백석문학상, 최계락문학상, 이형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현재는 경남 김해시 생림면 도요리, 일명 ‘도요 마을’에 거주하면서 ‘도요창작스튜디오’와 출판사 ‘도요’의 문화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대담 및 해설자-

송용구

1965년생. 시인. 문학평론가.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독어독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저서: 『독일의 생태시』, 『느림과 기다림의 시학』, 『현대시와 생태주의』,

『에코토피아를 향한 생명시학』외 다수.

현재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독일어권문화연구소 교수. 본지 편집기획집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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