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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장삼이사의 애환을 보듬기 위하여

-[시평 2007 봄], 이승하 

 

 

 

 

철거지를 지나며

코딱지만 한 단칸방 가득 피어나던

따습던 저녁이 없다

오랜만에 걸어보는 길

희미한 외등만이 비추는 철거지는

여남은 집 어깨 나란히 하고 오순도순 살던 곳

쌀 한 됫박 연탄 한 장 빌리러 갚으러 가서

절절 끓는 아랫목에 발 집어넣던 곳

한글 막 깨친 아이 하나

밥상 위에 턱 괴고 앉아 소리 높여 글 읽던 곳

희미한 외등 따라 내 그림자 길게 늘어져

고단한 생의 흔적이 말끔하게 지워진 길

한 발 두 발 내 구두 소리만 흥얼댄다

일가족 칼잠으로 누웠던 머리맡

책 읽던 아이 책 잠시 덮고

그 위에 더운 국 한 그릇 차려지던

밥상을 밟으며 간다

차 조심해라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그 아침의 당부와 언약을 밟으며 간다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연장론으로 등단한 최영철은 제1시집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 2시집 가족사진, 3시집홀로 가는 맹인악사를 거쳐 제8시집 호루라기(문학과지성사)에 이르러 있다. 시를 쓰는 스타일이나 기법은 미세한 변모를 거듭해왔지만 시정신이랄까 시세계랄까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연장론은 이렇게 끝나다.

 

몽키 스패너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이스 플라이어의 꽉 다문 입술로

오밀조밀하게 도사린 내부를 더듬으며

세상은 반드시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

제 나름으로 굳게 맞물려 돌고 있음을 본다

 

그대들이 힘 빠져 비척거릴 때

낡고 녹슬어 부질없을 때

우리의 건강한 팔뚝으로 다스리지 않으며

누가 달려와 쓰다듬을 것인가

상심한 가슴 잠시라도 두드리고

절단하고 헤쳐놓지 않으면

누가 나아와 부단한 오늘을 일으켜세울 것인가

 

몽키 스패너나 바이스 플라이어 같은 연장은 장삼이사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연장 그 자체야 볼품이 없지만 그것들이 힘을 모아 집을 만들고 부단한 오늘을 일으켜 세운다. 연장들이 각기 제나름으로 굳게 맞물려 돌고 있음으로써 세상은 반드시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는 것이다. 시인은 이 세상에 실제적으로 쓰임새 있는 자들이 누구인가를 물었다. 부와 명예, 권력을 가진 자들인가, 아니면 연장의 역할을 하는 장삼이사인가.

주로 변두리 지역에서 살아가면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면서도 이웃과의 유대를 통해 제각각의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가는 이 땅 장삼이사들의 애환을 최영철 만큼 잘 다루는 시인이 또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못 가진 사람들끼리 더욱더 정을 나누며 살아간다. 대도시의 고층아파트 단지나 이른바 부자동네라는 데서는 이웃을 사귀기가 쉽지 않다. 타인을 경계하지 않으면 무시하고 살아가는 가진 자들에 비해 최영철 시의 등장인물들은 이웃 간에 정이 도탑다.

그래서 최영철의 시를 읽다 보면 이 세상에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전문을 인용한 철거지를 지나며도 그렇다.

지금은 철거되고 없는 무허가 건축물들, 그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가. 쌀 한 됫박 연탄 한 장 질리러 가서, 또 갚으러 가서 절절 끓는 아랫목에 발 집어넣을 수 있었던 곳이 바로 철거지다. 이웃사촌이 왔는데 그냥 보낼 수 없는 것이 그곳의 인심이었다. 방이 따뜻하니 몸이나 녹이고 가라고 한사코 이끌어서 절절 끓는 아랫목에 발을 넣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이 도시 계획에 밀려 뿔뿔이 흩어짐으로써 그곳은 철거지가 되고 말았다.

그 당시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정이 못내 그리워 시인은 이 시를 썼을 것이다. 거기서는 그때, 정말 그랬었다. 일가족이 칼잠으로 누웠던 머리맡에 책 읽던 아이의 책이 잠시 덮이면 그 위에 더운 국 한 그릇이 차려지곤 했었다. 안방이 침실이요 아이들 공부방이요 주방이었던 것이다. 1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에서 시인은 냄새 지독한, 그나마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 사용 가능한 공동화장실에서 아직도 쭈그리고 앉아서 일을 보는 사람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었다. 5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일광욕하는 가구는 홍수에 젖은 세간을 내다놓고 말리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딱한 처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최영철이 그리는 초상화의 주인공은 이처럼 거의 언제나 서민이다. 집 앞 개울에서 요강을 씻는 사람들, 시들어가는 호박잎 한 다발을 사고는 횡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5천원 회비를 못 내 자동납부시스템을 욕하는 화자, 열일곱 엄마 아빠와 열여덟 엄마 아빠가 낳은 아기들, 한겨울 호수 얼음판 난전에 좌판을 벌인 노점상, 시장 바닥에 엎드려 동냥하는 자아애인, 뒷방에 앉아 오줌을 참고 있는 호프집 바깥양반, 함안군 대산면 대암부락 외가에 주인 허락도 없이 들어와 사는 사람, 남편 산소에 가서 새똥 흘러내린 비석을 손바닥을 닦는 여인…… 이런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시선이 최영철의 일관된 시세계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낸 시집의 제목은 호루라기인데, 이 제목의 시 마지막 5행을 보자.

 

호루라기 이제 설레는 아이들의 가슴에 있지 않고

무허가 냉방 빗물 떨어지는 비닐 하꼬방에 있네

자식 가고 영감 할먼 먼저 가고 덩그러니 남은

한많은 세월의 대못 자리 위

사지를 늘어뜨리고 있네

 

어린아이들의 전쟁놀이에 유용하게 쓰이기도 했던 호루라기가 지금은 무허가 냉방 빗물 떨어지는 비닐 하꼬방에 있다. “한많은 세월의 대못 자리 위에서 사지를 늘어뜨리고 있기도 하다. 이 두 공간은 최영철 시세계 전부의 공간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공간이 꽤 협소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번 시집에서 만난 조금 특이한 사람으로는 자신의 시 창작 수업을 듣는 베트남 학생이나 비전향자로 사십 년을 살아온 사람, 점령군이 던진 빵 조각을 씹고 있는 두 다리 잘린 소녀가 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 된, 윌슨병 앓는 아들의 부탁을 받고 목을 졸라 죽인, 같은 병을 앓는 오십대 아버지도 나온다. 자신의 생활 주변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들 외에 앞으로는 이와 같이 시야를 좀더 넓히는 시도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가난한 서민의 애환을 보듬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인의 시세계가 더욱 넓어지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민중시라는 것이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함을 말해주는 몇 안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 최영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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