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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폭력성에 관한 시적 고찰

 

1.논의의 실마리를 콜린 윌슨에서 찾다

중국에 배문갑(裵文甲)이라는 한 젊은 고생물학자가 있었다. 그는 1929년에 세기적인 발견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인물이다. 북경 시내에서 약 50km 떨어진 마을 주구점(周口店) 근처의 동굴에서화석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류 초기의 것으로 인정될 만한 두개골이었다. 보기에 따라선 맹수의 두개골 같기도 하고, 유인원의 두개골 같기도 한 그런 두개골. 초기에는 아시아인의 선조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현생인류(現生人類)와의 직접적 연관성은 부정되고 있기도 하지만, 북경원인으로 이름된 이 두개골이 발견된 주구점 유적에서는 석기와 화로 등도 함께 출토되어, 이들이 무리를 이루어 공동체 생활을 했으며, 석기 등의 도구를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불에 탄 동물의 뼈 등도 발견되어 불을 사용하고 있엇던 것으로 추정되는 북경원인으로 이름된 이 두개골에서 인류의 야수성이랄까, 야수적 본능의 기원을, 콜린 윌슨은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실존주의의 물결이 일렁이던 1950년대에 독자적인 관점의 사색가로 혜성처럼 나탄 문학비평, 문명비평, 각종의 인문학 등의 분야에 자유분방하게 누비고 다녔던 콜린 윌슨은, 인류의 범죄사(A Criminal History of Mankind)라는 저서에서 북경원인을 식인종으로 추정하면서 아래의 인용문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잔혹-피와 광기의 세계사라는 이름으로 2003년 하서출판사에서 국역되었다. 다음의 인용문은 국역본 34면에 있다.

 

주구점의 동굴이 시사하는 것은 다음의 사실이다. 북경원인은 동굴에 살고 있는 야생동물과 싸워 이를 모두 죽인 다음, 동료와 살육을 벌여 이긴 자가 그 둘을 먹었다. (......) 즉 인류는 항상 서로를 살육하며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북경원인의 획기적인 발견이 있은지 8년 후, 북경에서 1000km 정도 떨어진 남경에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집단살육 중에서 가장 천인공노할 악행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는 남경대학살이 일본제국주의 침략군에 의해 자행되었다. 19371213, 일본군은 남경을 함락한 후 무장이 해제된 중국 병사의 잔당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대량으로 학살하였다. 물론 병사와 구별되지 않은 많은 민간인들이 수없이 희생되었다. 남경의 여자들은 울타리 안으로 끌려가 일본군에 의한 능욕의 아수라장을 이루었고, 소년들은 손목이 묶인 채 매달려 총검술 연습대로 쓰였다. 당시의 일본군이 인륜을 저버린 이 만행을 두고, 사람들 사이에는 단순 보복으로 가볍게 생각한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차디찬 심판은 인간의 극악한 행위를 반성하게 하고, 또 다시 반성하게 한다. 어쨌거나 북경원인의 동종에 대한 폭력성은 남경대학살의 현실적인 증명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2. 친화감의 소산인가, 위화감의 성찰인가

나의 오랜 글벗인 최영철은 작년 여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찔러본다라는 시집을 간행한 바 있었다. 그는 이 시집 덕분에 최근에 두 차례에 걸쳐 문학상을 받았다. 전업 시인인 그에겐 이 시집이 회심에 찬 실효의 시집이 되기도 하겠지만, 나의 생각으론 그것이 비평적인 가치가 평가되는 시집으로도 남을 성싶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시집의 시편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의 하나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다음의 것을 고를 것이다.

 

여자를 겁탈하려다 여의치 않아 우물에 집어던져버렸다고 했다 글쎄 그놈의 아이가 징징 울면서 우물 몇 바퀴를 돌더라고 했다. 의자 하나를 들고 나와 우물 앞에 턱 갖다놓더라고 했다 말릴 겨를도 없이 엄마, 하고 외치며 엄마 품속으로 풍덩 뛰어 들더라고 했다 눈 딱 감고 수류탄 한 발을 까 넣었다고 했다

 

담담하게 점령군의 한때를 회고하는 백발의 일본 늙은이를 안주 삼아 나는 소주 한 병을 다 깠다 캄캄하고 아득한 소주병 속으로 제 몸에 불을 붙인 팔월이 투신하고 있다 자욱한 잿더미의 빈 소주병 들여다보여 나는 엄마, 하고 불러보았다 온몸에 불이 붙은 아이들이 엄마, 엄마, 울먹이며 내 몸 구석구석을 헤집고 있다

 

시의 전반부 내용은 충격적이다. 시인 최영철은 일본군 병사였던 한 노인의 증언을, TV를 통해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 노인은 거의 70년이나 가까이 된 일을 어떻게 생각하며 그토록 긴 세월을 살아왔는지 궁금하다.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악행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왔는지, 아니면 의기양양한 점령군의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살아왔는지는 잘 알수 없다. 노인의 증언을 볼 때 남경대학살과 관계가 있는 얘기 같다. 이 시의 내용이 얼마나 의분을 불러일으켰으면, 시인 권혁웅이 내일은 어버이날, 붉은 카네이션이 무슨 수류탄 같다.”(중앙일보, 2011. 5. 14)라고 위악적인 말을 내뱉었을까? 정작 시인은 내 몸 구석구석을 헤집고 있는 위화감이 수반된 반전(反轉)의 제스처를 보이는데 말이다. 그러나 최영철 시인의 시집 찔러본다는 인간과 자연의 위화감 못지않게 인간의 자연에의 친화감이 폭넓게 펼쳐 있다. 그 대표적인 게 표제시다.

 

햇살 꽂힌다

잠든 척 엎드린 강아지 머리에

퍼붓는 화살

깼나 안 깼나

쿡쿡 찔러본다

 

비온다

저기 산비탈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

죽었나 살았나

쿡쿡 찔러본다

바람 분다

이제 다 영글었다고

앞다퉈 꼭지에 매달린 것들

익었나 안 익었나

쿡쿡 찔러본다

-찔러본다전문

 

햇살이 강아지 머리를, 빗줄기가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을, 바람이 나무에 매달린 과실을 쿡쿡 찔러본다. 사물과 사물의 인과적 관계는 사물과 사물이 서로 의지하고 의존하는 긴밀한 상호관계이다. 우주의 만상은 이처럼 서로 쿡쿡 찔러보는 상호작용의 그물망 속에 존재한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우주적인 존재론을 두고, 생태주의자들은 곧잘 화엄경적 생명 원리라고 치부한다.

시편 찔러본다는 동심의 발상으로 쓰인 시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한 시대를 대표하는 탁월한 한 편의 동시로 남아있는 게 시인의 입장에서 오히려 좋을 것이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나는 해보았다. 최영철의 시집 찔러본다에 나오는 시편들이 이처럼 인간과 자연의 화해로운 조응 내지 감응력을, 사물과 사물이 상호작용하는 우주 질서의 그물망적인 관계를 다잡아 서정의 영감을 떠올리면서 표현하고 있는 것만은 결코 아닌 듯하다.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이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내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이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

-노을전문

 

노을을 두고 피 닦은 수건으로 비유한 것은 시인의 직관적 상상력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으로 여겨지는 대목이다. 노을에 관한 한, 이와 같이 독창적이거나 사뭇 아름다운 비유의 장치는 없다. 초승달 칼날과 내 가슴살이 시각적으로 기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인간의 잠재된 폭력성과, 폭력에 의한 희생물의 무고성의 유추적 관계를 적실하게 밝히고 있는 것도 시적 비유의 아름다움이 실현한 눈부신 광휘이다.

시집 찔러본다의 해설을 쓴 비평가 이숭원이 시집의 모두에 놓인 노을을 논외한 것은 위화감이 지닌 불편한 진실보다 자연의 천진성과 원초적 생의 리듬으로 언표되는 친화감의 시적 진실에만 논의의 초점을 두고자 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나는 이숭원이 최영철의 시 세계의 양면성 가운데 한 면만을 바라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3. 최근의 신작에서 보는 인간의 폭력성

불교문예겨울호에 최영철은 다섯 편의 신작을 발표하고 있다. 시의 제목이 검은 물, 바이오 테러, 사랑과 전쟁에서 느껴지듯이 인간의 폭력성에 관한 시인의 성찰이 맥락의 일관성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첫 머리에 둔 주위를 뱅뱅 돌았다라는 시는 파리에 관한 얘깃거리를 통해 폭력과 희생의 짝패 관계성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 폭력과 희생은 필연적으로 짝패의 관계를 이룬다.

 

파리가 파리채에 앉아 놀고 있다

그러니까 파리지 어제도 그제도

짓이겨져 죽은 동족의 피 터진 흔적

알기나 하니?

파리가 파리채에 앉아 놀고 있다

한 마리 두 마리 또 저 멀리서 한 마리

동족의 남은 사체 빠는지

파리채 주위를 떠나지 못한다

며칠 있으면 추석

조상님 산소엔 언제 가나 궁리하는데

파리는 여전히 파리채 주위를 맴돈다

앉았다가 날았다가 몇 바퀴 빙빙 돌다가

어디선가 몇 마리 더 데려왔다

파리채를 번쩍 쳐들었다

파리채를 흔들어 멀리 내쫓았다

몇 마리른 즉사했다

잠시 한눈팔다 돌아보니

무슨 영문?

파리들은 다시 그 자리에 돌아와 있다

아차, 아무래도

동족의 남은 흔적 수습하고 있는 것인가

줄초상 처참한 흔적에

넙죽넙죽 절이라도 올리고 있는 것인가

파리채를 번쩍 쳐들었다

다시 가만히 내려놓았다

한쪽에 버려진 몇 마리 사체

고운 흙에 묻었다

파리들은 거기까지 쫓아와

주위를 뱅뱅 돌았다

-주위를 뱅뱅 돌았다전문

 

이 시는 추보식 구성에 의한 평이한 산문적 진술에 의존하고 있으며,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영철 시인의 인간에 대한 폭력성의 시적 고찰을 잘 보여주고 있는 텍스트이다.

최근에 곤충의 박물학적인 지식에 관한 방대한 체계의 저술물인 인섹토피아가 번역되었다. 곤충(insert)과 백과사전(encyclopedia)을 합성한 이 제목의 책은 변하지 않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곤충의 생태를 다룬 것. 이 책에 중국 상하이에 있는 당나라 시대에서부터 전래되어온 귀뚜라미 씨름대회가 소개돼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진주에서도 전통적인 소싸움 대회가 있다. 소싸움 전용 경기장도 있고, 승리에 거는 판돈의 규모도 결코 작지 않다고 한다. 나는 다른 생명체에게 폭력을 강요하면서 대리만족을 얻는 인간들의 야수적인 본능으로서의 폭력성을 진주 소싸움에서 본다. 왜 말 못하는 불쌍한 짐승들에게 억지로 싸움을 붙이느냐고 하면서 진주의 지인들에게 불만을 터뜨리곤 했었다.

인용시 주위를 뱅뱅 돌았다는 인간의 폭력성 앞에 희생된 파리가 희생물이 되어 늘 사람의 표적이 되는 것에 대한 성찰을 시의 내용으로 담은 것이다. 희생물에 대한 인간의 폭력성을 인간은 미처 파악하지 못한다. 르네 지라르가 말한 소위 박해의 텍스트를 시인 최영철이 보잘것없는 미물의 파리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은 자못 흥미가 있다. 다음의 시를 보자.

 

하루도 전쟁 아닌 날 없었네

평화를 보장받으려고 굳게 쌓아올린 담 너머

꽁꽁 동여맨 대문 틈으로

독가스 같은 분쟁의 씨가 잠입하고

대서양 넘어 상륙한 대량 살상무기에 감염되어

순식간에 평화가 박살나네

사랑을 까뒤집자 전쟁

사생결단 살림살이가 박살나고

너 죽고 나 죽는 뜻밖의 돌격

시퍼런 욕지거리 집구석 곳곳에 낭자하고

식탁을 뒤집어엎네 접시가 박살나네

(......)

전쟁을 까뒤집자 평화

사랑의 표면은 음흉하고 축축해

전쟁은 그걸 꺼내 반짝 윤나도록 닦아놓는 일

언제 그런 일 있었냐는 듯

우장창 두드려 엎으며 진군한

신명 나는 즉흥 난타

-사랑과 전쟁부분

 

단막 형태의 TV드라마 사랑과 전쟁이 한동안 인기를 끈 후 종영되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쓴 듯한 이 시는 부부싸움을 풍자적이고 회화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자양한 정의 가운데 호모 비오랑스가 하나의 개념으로 자리하고 있듯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인간이다. 로젠 다둔은 폭력적 인간의 개념을 가리켜 근본적으로 폭력에 의해서 정의되고 폭력으로 구조화된 인간’(로젠 다둔, 최은주 역, 폭력-폭력적 인간에 대하여, 동문선, 1993, 10)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에서도 작은 전쟁으로 비유되는 욕망의 다툼이 있고, 세계 도처에 인간성을 말살하는 진짜 전쟁이 늘 있게 마련이다. 폭력으로 정의되고 구조화된 인간과, 사람살이의 모습을 인용시의 경우처럼 유머러스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시인의 다사로운 가슴속에 온기가 남아있기 때문일까? 인간은 다투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모순의 존재인지도 모른다.

 

4. 검은 물, 인간이 개입된 자연의 정령

최근에 우리 사회를 둘로 나누어버린 국책 사업이 하나 있었다. 4대강 사업이 그것이다. 한동안 골프장 만든다고 산을 파헤쳐 난리를 피우더니, 이제는 강물의 순조로운 흐름을 끊어버림으로써 자연의 숨통마저 끊는 것이 아니냐면서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래저래 상자수명의 순결한 국토가 훼손되어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성싶다.

권력의 입장에서 볼 때 4대강 사업은 치수(治水)의 문제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잘된 치수냐, 잘못된 치수냐 하는 것을 두고 지금도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것이 실효의 유용성을 얻는다면 그보다 다행스런 일이 없겠거니와, 만약 실패의 판가름으로 끝을 맺는다면, 인간, 혹은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에 의해 폭력화된 자연의 능욕이란 관점에서 두고두고 뒷말이 무성할 것 같다.

 

물이 죽었다

앓지도 않고 못 살겠다고 소리치지도 않고

다소곳 물이 죽었다

목마른 어디로부터 급한 전갈 받고

허겁지겁 달려가던 중이었다

달려가다 엎어진 것이었다

왕진가방 풀어헤치고 구급약을 바닥에 쏟았다

벌컥벌컥 속살까지 환하던 투명한 눈

어둡게 감겼다

이제 더 이상 갈 데 없다

갈 길 찾지 못하겠다고 웅덩이에 주저앉았다

맥을 놓고 통곡한 사지가 썩고 있다

(......)

초승달 달빛에 썩은 물의 혼령 어른거린다

승천하지 못하고 시커먼 얼굴로 숨이 끊겼다

-검은 물부분

 

검은 물은 현대문면의 폭력성에 의해 희생된 대상물의 상징이다. 폭력화된 자연의 정령이다. 늘 그렇듯이 희생에는 제의적 성격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럴 때 희생은 성스러운 것이거나, 죄악의 것으로 나타난다. 희생 제의의 대상은 보통 연약한 것, 온순한 것, 순결한 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희생양(scape-goat)이란 것도, 우리가 잘 아는 에밀레종 전설에서 인신공양된 어린 아이도 희생제의의 전형적인 대상이 되지 않았나? 시편 검은 물에서 검은 물 역시 일종의 희생 제의의 대상이다. 본래 순결한 물이었던 것이 어떻게 일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어서 죽음의 물로 심각하게 훼손된 것이다.

 

최영철은 인생이 살만한 것인지, 세계는 살만한 곳인지를 묻고 있는 시인이다. 그는 딱 부러지게 말하지 않는다. 그저 살만하다고도 말하기도 하고, 살만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느 한 쪽을 위해 손 드는 걸, 그는 자제한다. 만약 그가 대답의 획일성을 띤 시인임을 고집하였다면, 그는 독종의 참여시인으로 남고 말았을 터. 그의 시가 혼돈의 경험에로 복귀하고 있는 것이 때로 이처럼 시적인 모호성이 지닌 미덕으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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