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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견뎌내는 자의 고독한 내면

 김신우, 내일을 여는 작가, 2004년 봄

 

어렸을 적 나는 잠을 자고 있는 엄마 곁에 다가가 숨소리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엄마가 꼭 죽은 것처럼 느껴지곤 했기 때문이다.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을 때 난느 종종, 엄마가 이대로 숨이 멎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 몇 번씩 엄마의 숨소리를 듣거나 심지어는 가슴 께에 손을 얹어보고 나서야 안심이 되기도 했다. 잠을 잘 때뿐만이 아니라 어린 나에게 엄마는 꼭 정물쳐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엄마가 마루에 앉아 먼 들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나 혹은 태양이 작열하고 있을 때 시들어가는 맨드라미나 채송화를 검게 그을린 얼굴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도 나는 엄마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마치 미라처럼 느껴지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순간이야말로 엄마가 고단함 삶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언젠가 몸을 다쳐 하루의 대부분을 병상에 누워서 지내야만 했을 때 나는 내가 돌덩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했던 기억이 있다. 시체처럼 누워서 잠을 자다 눈을 떠도 한낮이거나 한밤이었을 때 삶은 너무도 초라한 것이었다. 그 지리멸렬한 시간들을 견디는 동안 나는 삶을 그렇게 견뎌야 하는 순간들을 반복하면서 나도 엄마처럼 나이를 먹어가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조명숙의 헬로우 할로윈은 내게 그런 느낌을 강하게 남겨주는 소설이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은 어둡고 남루한 삶을 배경으로 하여 그려진 흑백판화와도 같았다. 세밀한 칼날이 파놓고 지나간 자리에는 치명적일 만큼의 상처가 진한 먹물처럼 스며 들어가 있지만 이들은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한마디의 신음소리조차 뱉어내지 않는다. 다만 침묵 속에서 담담하게 견디고 있을 뿐 절망스러운 표정까지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작품의 곳곳에서 삶의 어떤 진실들을 알아가는 일은 가혹하거나 서글픈 일이었다.

우리말이 아닌 제목의 책을 대하면 낯선 느낌부터 드는 구닥다리 정서를 아직도 갖고 있는 나로서는 헬로우 할로윈이라는 제목의 이 책을 약간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읽을수록 삶에 대한 진지한 고백들로 가득 채워진 작품이라는 생각에 여러 문장 밑줄을 긋기도 했다.

 

바늘이 살을 꿰뚫은 자리가 듬성듬성한 아버지의 코는 쓰다가 아무렇게나 뭉쳐둔 고무찰흙덩어리의 가운데를 손으로 꾹 눌러놓은 것 같다. 무엇을 만들려다 만들지 못하게 되었을 때 손바닥에 고약한 냄새만 가득 남기던 고무찰흑이었다. 문방구에서 사 들었을 때 초록이나 노랑 빨강으로 선명하게 포장되어 있던 그것은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난 후 시커먼 덩어리가 되어서 책상 서랍 한 귀퉁이나 가방 속에 오래 머물러 있곤 했다. (9)

 

헬로우 할로윈은 결국, ‘하루 종일 유리 너머 로비를 내다보고 있으면 가끔 나 자신이 누군가 몰래 내놓은 쓰레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행복이라는 조건에서 소외되어 지친 삶을 오랜 시간동안 겪은 이가 그 시간들을 견디면서 세상과 타인에게, 혹은 스스로의 일상에게 건네는 고독하고도 멋쩍은 인사이다.

 

착시와도 같은 시간의 뒤범벅은 엄마가 집을 나가기 시작하던 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언제 엄마가 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땜ㄴ에 하루하루를 힘들게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 방법을 터득했다. 어제와 일 주일 전, 그제와 열흘 전을 분간하지 않고 지나간 모든 시간을 과거로 규정지어 버리고 나면 한결 마음이 편했다.(10)

 

냄새를 견디지 못한다는 이유로 습관처럼 집을 나가는 엄마와 고엽제 피해로 인해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아버지 사이에서 소외된 주인공이 삶을 견디는 방식은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가기 보다는 세상과의 거리를 섬뜩하리만치 일정하게 유지하며 참아내는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어진 현실을 참아내지 못하고 떠도는 삶을 산다면 주인공인 토용처럼 꿋꿋하게 현실을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작 자신은 고통에도 꿈쩍하지 않는 정물로써 세상에 저항한다.

 

밤이다. 할로윈의 밤. 나는 빨래를 꾹꾹 짜서 대야에 담아 옥상으로 올라간다. 죽어 썩은 몸들이 거리로 나와 흐느적흐느적 산 몸들과 어울려 춤을 추는 밤. 누가 살았고 누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채, 깊어갈수록 점차 밝게 살아 움직이는 저 불빛들.(35)

 

그럴 때 세상은 에게 어느 순간 할로윈의 밤처럼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뒤섞인 것으로 다가오게 되며 동시에 내가 그 세상과 함께 어울려 춤을추어줄 수 있을 만큼 는 성숙해진 내면으로 고통조차 적당히 즐길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얀 토끼인형에서처럼 조명숙 소설의 주인공에게 때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현실과 환영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며 모호함 속에서 무엇인가 솟아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인 것처럼 현실을 정면으로 대응하고 싶어하지도 않지만 제라늄의 집에서는 제라늄 냄새처럼 독한 의지로 삶을 지속시켜나가려는 주인공의 강한 애착이 엿보이기도 한다.

 

색이 바래고 깊게 먼지가 앉았을 때 언제든 내버릴 수 있는 가벼움에 끌려 그들은 그것을 샀겠지. 그리고 사람 사는 집의 벽들이 차차 허술해지고 검푸른 이끼가 골목과 마당을 줄기차게 점령해 가는 것처럼 그림도 바래고 낡아졌젰지. 그림은 스산하고 웅숭깊은 그들의 한때 희망이었을 것이다.(86)

 

남루하고 궁색하게 살아가는 남포동 버스 종점 마을사람들 중 하나인 에게도 역시 삶에 대한 희망은 있지만 그것은 이발소 그림처럼 쉽게 바래고 먼지가 내려앉아 버리는 불확실한 것이다. 그곳의 일상에는 행복이라는 것이 좀처럼 올 것 같지 않다. 그곳 사람들은 아버지가 왜 함께 살지 않는가에 대해 물었고, 집 앞을 쓸어달라거나 방범비를 내라거나 집단 방역을 하자거나 반상회에 나오라고 했으며, 초대하지 않아도 쳐들어와서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 있곤한다. 심지어 그들은 한밤중에 문을 두드려 세 번째 집의 소동을 구경하러 가자고 엄마를 깨우기도한다. ‘는 그런 이웃들이나, ‘사람 사는 일은 구경하지 않아도 다 겪고 사는 거라고말하는 엄마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다. 그들 모두는 이발소 냄새를 풍기는존재로 에게 여겨질 뿐이며, ‘는 그들과 함께 섞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엄마에게서 풍기는 집 곳곳에 놓아둔 제라늄과 같은 독한 냄새가 결국 자연스럽게 세상과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냄새라는 것을 는 알게 된다.

 

며칠 동안 비어 있던 속에서는 쓴 위액이 올라왔다. 아주 쓴 위액이 입 안에 고이자 그만 눈물이 나왔다. 나는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미지근하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희미하게 향기가 났다. 슬픔과 고통으로 뒤집어진 속을 어루만지면서 향기는 천천히 내 속으로 들어왔다. 코에서 목으로 방금 쓴 위액을 토해낸 위로, 그것은 죽처럼 편안하게 흡수되어 혈관으로 퍼졌다.(95)

 

그렇게 부정하고 싶었던 어머니의 제라늄 냄새는 주인공인 에게 어느새 깊은 향기가 되어 있으며 그 향기로 인해 는 절망적이고 비관적이었던 생의 단면들을 끌어안게 된다. 그러한 내적 의지들이 만추에서는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주인공 져아즌 남편이 죽고 고등학생이 된 아이가 집을 나가버린’, 역시 행복한 가정생활이라는 조건에서 소외당한 인물이다. 그녀가 힘겨운 일상을 견디는 방식은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밥을 지어야 하고 가게에 나가 앉아 화장품을 팔고 돌아오는 저녁이면 피곤한 몸은 잠을 불러오고 혼곤한 잠에 빠져 일어나면 어딘가에 부딪힌 것처럼 몸 구석구석이 얼얼한생활의 반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얇디 얇은 막으로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은근히 알려주는 것처럼 이상의 흔적도 없이 깨끗한 시신은 무거운 짐을 부려놓은 듯 평온해보였다. 파리가 앉았던 자리처럼 의미 없이 남편은 도시에서 지워져 버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는 뜨고 바람이 불었고 사람들은 부지런히 지하철에서 버스로 버스에서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때로 비가 내리고 온도의 변화에 따라 옷을 갈아입었다. 큰길에서 산동네로 올라가는 길목을 따라 이어진 좁은 거리에 가게를 얻고 매일 가게문을 열었다. 화장품을 사러 오는 여자들과 수다를 조금 떨거나 어쩌다 이웃가게 주인들과 점심을 먹기도 하면서.(111)

 

주인공인 그녀에게 불행이라는 것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다가와서 삶의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마음속의 슬픔을 극도로 자제하며 담담함을 유지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삶을 견뎌내는 자의 섬뜩한 내면을 느끼게 한다. ‘희망과 절망 사이의 그 정교한 접속이야말로 인생이 아니겠는가 하는 질문을 작가는 독자에게 던져주고 있다. 주인공 여자가 자신의 삶의 아픔을 풋풋하게 껴안 듯이 주변 이웃들인 순자 씨난쟁이를 껴안는 시선은 따스하기 그지없다. 그것들을 전부 수용하여 의 상처들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만추에서는 훨씬 깊고 끈끈하게 삶을 바라보고 포용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돋보인다. 그것은 꼭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어르고 토닥거려가면서, 때로는 불연속적이고 우연과 필연이 알게 모르게 겹쳐진 생(바람의 계곡161)이라고 체념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조명숙의 헬로우 할로윈을 다 읽고 책을 덮은 한밤중, 봄비 같은 겨울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얼어붙은 땅이 스펀지처럼 촉촉하게 빗물을 머금고 있는 것 같아 행복했다. 겨울 속에 봄이 함께 있다는 것은 모순이지만 그러한 모순 속에서 늘 꿈을 꾸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생이 아닐까 싶었다. 적막한 일상에서 할로윈을 꿈꿔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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