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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시집 『멸종 미안족』,2021. 시와사상 겨울 

우리 시대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시

이성혁

 

 

 

  어쩌면 우리 시대는 기억상실증의 시대 아닐까. 적어도 기억에 대한 중요성을 잃어버린 시대임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어떤 기대를 가지며 살아갈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현재를 겨우 견뎌내며 생존하는 데 급급한 시대다. 그러다 보니 우리 시대는 무엇인가를 상실해버렸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도 인지하기도 힘든 시대가 되어버렸다. 최영철 시인이 신간 시집 멸종 미안족에서 보여주듯이. 이 시집은 우리 시대에 상실된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특히 독특한 제목인 멸종 미안족이 그렇다. 생활고로 시달리다가 세 모녀가 마지막 월세와 공과금과 장례비 머리맡애 올려놓고 죽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그 시는 미안이라는 종자를 이 땅에 퍼트리기 위해 세상에 온 게 분명한 그들 가족이 죽고 미안족은 멸종되었음을 선언한다. 그들이 미안하다는 글을 남기고 죽은 그 사건에서 시인은 우리 시대의 상징을 보고, 그 사건은 뻔뻔한 난장판 세상에 내린 징벌이라고 판정한다. 미안해할 줄 모르게 된 세상은 과거를 되돌아볼 줄 모르게 딘 세상이며, 그럼으로써 더욱 뻔뻔해질 수 있는 난장판 세상이다.

 이에 더해 최영철 시인은 우리 시대를 살벌 끔찍한 세상”(안녕 안녕)이라고 판정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세상이 되어버린 건 인간의 끝 모르는 탐욕 때문이다. “그냥 가만 땅에 등 붙이고 살면 될 걸 마구 붕붕 솟구쳐 하늘을 넘보거나 수시로 땅굴 파 밑으로 내려갔기 때문”(같은 시)이라는 것이다. ‘살벌하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윤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는지 모르고 대지와 하늘을 파헤치고 찢어버렸다. 결국에는 파국에 다다를 인간의 살벌한 탐욕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저 세 모녀가 보여준 미안의 정신을 회복하여야 한다. “땅과 하늘은 먼저 납신 그대들 몫임을 인정하고 다신 그러지 않을 게요라고 미안해할 수 있어야 한다. ‘미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의 행위가 타자-하늘과 땅, 그리고 타인 등-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자이다. 그는 타자를 배려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시인은 그러한 사람들이 멸종되었으며 세상은 더욱 살벌 뻔뻔해졌다고 선언했지만, 한편으로 타인을 따뜻하게 배려하며 생활하는 삶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밥집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양푼이 비빔밥 삼천팔백 원 엄한 규칙이라도 되는 양 밥과 찬은 얼마든지 더 갖다 먹으라는 찬모의 말에 메마른 세상 건너오며 부실해진 다리 근육에 힘이 실린다 역사는 남자의 몫이었으나 깨우고 밥 먹여 역사를 돌린 것은 온전히 여자의 몫이었으니 혼자된 노인과 집 떠나온 젊은이 등 두드려 보낸 것은 오늘 역시 더운 김 피어오르는 이 조촐한 밥상이다 수십 년 만에 만난 이산가족인 양 겸상을 이룬 젊고 늙은 남자들의 분주한 젓가락질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

- 봉천동 밥집후반부

 

주로 혼밥 먹는 사람들이 찾는 봉천동 밥집은 밥값이 저렴하면서도 밥과 찬을 아낌없이 제공하는 밥집이다. 이 밥집의 찬모는 이곳에 오는 가난하고 외로운 남자들에게 삶의 힘을 불어넣어 준다. 이 밥집에서 혼밥을 먹으면서, 시인은 남자들이 살벌 뻔뻔한 세상과 역사를 만들었다면, 시인은 그나마 이 역사를 돌린 것이 여자였음을 깨닫는다. (마지막 미안족이었던 세 모녀 모두 여성이었다.) ‘찬모는 살벌한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을 이산가족의 재회 때처럼 겸상하게 하여 밥을 먹인다.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가 먹는다는 행위다. 씹어 먹는 행위에는 거짓 없는 날 것의 삶이 응축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시인이 팥빵 두 개를 사 들고 와” “오래 혼자 씹어먹으면서 아픈 약 후의 사탕처럼 슬픈 과거가/ 재빠르게 달려나와 소화”(슬픔을 녹이는 법)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팥빵을 혼자 씹어 먹는 행위는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씹어 먹는 행위로 전치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슬픈 과거를 되씹는 시 쓰기도 팥빵을 씹어 먹는 행위와 같은 것 아니겠는가. 그때 느껴지는 단맛이란 슬픔의 맛이다. 아픔을 겪고 난 후 우러나오는 슬픔이 쓴 약을 먹는 후 사탕의 맛과 같은 시의 맛이 된다. 이 맛이 시의 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에 최영철 시인은 서른한 살에 죽은 슈베르트슬픔만이 예술이라고 했듯이 점점 그렇게/ 슬픔만이 시가 되네”(시는 어디서 오는가)라고 말한다. 미안해할 줄 모른다는 것, 그것은 과거를 되돌아볼 줄 모르는 것이요, 그래서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를 되씹을 수 있을 때 슬픔도 느낄 수 있다. 슬픔을 느끼지 못하면 뻔뻔해지고 살벌해진다. 반면 슬픔의 육화인 예술, 그리고 시는 살벌 뻔뻔해져 가는 세상의 해독제가 될 수 있다. 과거를 -처럼 씹는 행위인 시 쓰기는 삶을 재충전하는 행위이면서 시라는 새로운 밥을 짓는 행위이기도 하다. -은 외로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겸상에 모이게 하여 그들이 자신의 삶을 되씹으며 삶의 힘을 충전하도록 해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 쓰기는 여성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슬픔의 맛을 내장한 밥과 같은 시는 텍스트로서의 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니 노래로서의 시가 이러한 시에 더욱 적합하다. 시는 노래에서 오지 않았던가. 슬픔의 시는 시의 근원으로서 노래에 다가간다. 최영철 시인에게 노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사막에서 너무 외로워 나는 뒷걸음질로 걸었네

 

누군가가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을 보고 싶었네

 

그렇지만 나를 만나러 온 나는

 

점점 나로부터 멀어지기만 하였네

 

울창 빽빽한 모래의 숲에 움푹 팬 빈 발자국만 남긴 채

 

어둠이 나의 발치까지 내려와 나의 길이 되어주었네

 

사막이라는 정글에서 따 낸 수북한 적막을 앃아 올려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낭떠러지 길을 만들었네

- 김광석을 듣는 밤전문

 

  노래가 맛보게 하는 슬픔은 자신의 삶이 외롭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끼게 만드는 데서 온다. 이 외로움은 누군가에 대한 욕망으로 더욱 사무친다. 최영철 시인은 노래를 들으면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걸어오기를 욕망하게 되는 것, 그런데 그 누군가는 사실 또다른 . 노래를 들을 때 나는 나를 만나러 온다. 그렇지만 그 는 노래를 들을수록 점점 나로부터 멀어지기만 하였다는 것을 감지하게 해준다. 누군가이자 는 과거의 일 터,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합치될 수 없다. 과거의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시인은 노래를 들으면서 슬프게 깨닫는다. 그 잃어버린 시간의 흔적은 움푹 팬 빈 발자국으로 이미지화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시간은 허망하게 비어 어두움에 싸여 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이 시간의 빈 발자국과 어둠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 길을 만들어준다. 그 길는 수북한 적막을 쌍아 올낭떠러지 길이다. ‘낭떠러지 질이라니? 그 길은 시간의 절벽이 만들어낸 낭떠러지라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저 과거의 와 현재의 사이의 결절된 시간의 길. 노래는 시인을 그 시간의 낭떠러지로 떨어뜨린다. 그런데 시인이 현재 사는 곳은 사막이다. 적막으로 이루어진 절벽은 사막의 현재 시간으로부터 과거의 시간으로 떨어지는 길인 것이다. 노래가 만들어낸 그 낭떠러지 길은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정도로 부드럽다. 노래는 상실의 슬픔으로 시인을 인도하는 동시에 그를 부드럽게 감싸기 때문이다.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며 얻은 감화에서 최영철 시인은 우리 시대가 있을 시의 자리를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곳은 어둑한 모퉁이 길을 돌아 아릿한 무지개로”(배호 생각) 뜨는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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