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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과 시린 생 

 

                                                             고재종 시인 

                                                                         


미국의 노인병 신경병리학자인 비비언 클레이턴은 지혜(wisdom)의 성분을 인식적 차원과 성찰적 차원과 타인과 공명하면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동정적 차원으로 나눕니다. 이에 견주어 말한다면 문학이나 시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도 우리 인식 곧 생각에 깨달음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감각을 새롭게 하고 내면의 성찰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는 타인과의 공명을 통한 감동을 자아내야 합니다.

80~90년대 ‘민중시’는 농민과 노동자와 서민의 생존권 보장과 민주주의의 완성을 통해 세계를 변혁하고 민중을 구원하리라는 일념으로 여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저도 그때 농민회운동을 하면서 많은 농민시를 써서 한국의 대표적인 농촌 농민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었습니다.
하지만 요사이 문단에서 민중시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원래 책에 나온 지식으로 세상을 배우고 시를 배운 사람들은 그들이 추구했던 이념이나 관념이 유행처럼 지나가면 그걸로 끝입니다. 하지만 자기의 생활과 삶 속에서 문학을 끌어내는 사람들은 그런 시류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삶으로서 감동을 자아내 독자들에게 공감을 끌어냅니다. 그런 감동을 다음 최영철의 「인연」이라는 시가 마련하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고
자장면집 한켠에서 짬뽕을 먹는 남녀
해물 건더기가 나오자 서로 건져주며
웃는다 옆에서 앵앵거리는 아이의 입에도
한 젓가락 넣어 주었다
면을 훔쳐 올리는 솜씨가 닮았다

지금 시의 주인공 남녀는 아마도 결혼기념일을 맞았거나 어느 한쪽의 생일을 맞아서 외식을 나온 모양입니다. 한데 그 특별한 날 온 곳이 기껏해야 자장면집인 걸로 보아 노동자나 서민의 삶을 면치 못한 부부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짬뽕을 먹으며 오징어 조각에 불과할 해물건더기가 나오자 서로 건져주며 웃는 걸로 보아 아직도 그들 사이엔 꿋꿋하고 씩씩한 사랑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에겐 옆에서 앵앵거리는 아이도 있습니다. 한데 아이에게 한 젓가락 넣어주자 그 면을 훔쳐 올리는 솜씨가 부모를 닮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포착해 내는 시인의 예리한 눈을 보십시오. 이것을 사랑의 질기디 질긴 ‘인연’으로 명명하는 시인이 아직도 이 땅에 존재합니다. 흔하디 흔하게 겪는, 그리고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일상의 한 장면을 시적 경험으로 포착하여 우리에게 사랑과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아주 좋은 시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인연으로 빛나는 이 ‘공명의 감동’을 보면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등불 아래 다섯 명의 식구가 낡은 탁자에 둘러 앉아 감자를 먹고 있는데 램프의 불로도 어둠을 다 밀어내지 못해 실내는 진한 회색조입니다. 접시로 내밀고 있는 가족들의 손은 힘든 노동으로 인해 거칠고 투박하고, 차려진 식탁 또한 찐 감자와 차 한 잔뿐으로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식사보다도 가족들의 얼굴에 꿋꿋함과 진실함이 가득해 보이는 이 식사 장면이 최영철의 시와 자꾸 오버랩 됩니다. 물론 최영철의 시는 밝고 산뜻한 스냅사진이고 고흐는 짙고 어두운 유화라는 차이는 있지만, 예술과 시에 있어서 공명의 감동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아주 진정스럽게 보여주는 작품들이지요.
여기서 제 시 「시린 생」을 한번 적어 보겠습니다.

살얼음 친 고래실 미나리꽝에
청둥오리 떼의 붉은 발들이 내린다

그 발자국마다 살얼음 헤치는
새파란 미나리 줄기를 본다

가슴까지 올라온 장화를 신고
그 미나리를 건지는 여인이 있다

난 그녀에게서 건진 생의 무게가
청둥오리의 발인 양 뜨거운 것이다

어느 평론가는 위의 시 1연과 2연을 두보의 시 「절구」 중 “파란 강물이기에 새 더욱 희고 (江碧鳥逾白)/ 푸른 저 산, 꽃이 벌어 불이 붙은 듯(山靑花欲然)”이라는 구절과 비교합니다. 두보의 시가 파란 강물과 흰 새, 푸른 산과 붉은 꽃의 대비로 선연한 그림을 그린 것처럼 「시린 생」도 푸른 미나리와 붉은 오리발을 대비시키며 “오리의 붉은 발자국마다 새파란 미나리줄기가 살얼음을 헤친다”고 하는, 놀라운 직관력을 보인다고 평을 했습니다. 또 최근 시인 오태환은 비평집 『그곳에 가지 않았다』에서 이 시 중 미나리를 건지는 ‘여인’을 부조리한 세상을 고단하게 건너는 뭇 민초로 인식합니다. 그리하여 시인이 살얼음 친 미나리꽝에서 미나리를 건져 올리는 여인을 바라보는 순간은 삶의 고단함에 대한 실존적 각성의 순간이라고 합니다. 또 그녀에 대한 연민은 그녀와 같은 처지에 놓인 세상 모든 노동자에 대한 연대라고 했지요. “이때 ‘새파란 미나리 줄기’와 ‘청둥오리 떼의 붉은 발들’의 선명한 감각적 연대는 비극적 아름다움으로 시 전체가 일으키는 공감의 영역을 확장한다”고 했습니다.

시인들 누구나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시를 출발시키지만 그 의미가 삶의 ‘실존적 각성’의 단계에까지 닿는, 그런 의미의 중첩을 이루고자 갖은 애를 씁니다. 「인연」의 “면을 훔쳐 올리는 솜씨가 닮았다”랄지, 「시린 생」의 “난 그녀에게서 건진 생의 무게가/청둥오리의 발인 양 뜨거운 것이다” 등의 구절이 현실주의적 시각의 평범성을 일거에 깨뜨리며 실존의 진실에 가닿고자 하는 열정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한 편의 시가 공명의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것은, 김수영 시인의 말대로 활주로에 뱃바닥을 대고 온몸으로 밀고 달려야 창공으로 찬연하게 떠오르는 비행기처럼, 온몸으로 삶을 밀고 나갈 때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날 성(性)이 용광로처럼 들끓는 사회는, 변태의 극치를 향해 질주하는 각양각색의 성폭력 사건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보도합니다. 후기 자본주의사회는 잉여쾌락의 사회입니다. 욕망이 넘치고 넘쳐도 늘 결핍과 공허에 시달리는 잉여쾌락 때문에, 물건이 넘쳐도 생산을 멈추지 못합니다. 잉여쾌락은 반복을 낳는 욕망의 동인이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결국 도착증적 파시즘으로 퇴행하고 모든 것이 멈추는 죽음, 폐허, 파멸에 이릅니다.
그런 와중에도 가족의 소중함을 스케치한 「인연」이나, 노동의 무게를 포착한 「시린 생」이라는 시는 여전히 삶의 감동 편에 선 아름다운 노래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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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머니투데이 최광임 시인·대학강사] [편집자주] 디카시란 디지털 시대, SNS 소통환경에서 누구나 창작하고 향유할 수 있는 새로운 詩놀이이다. 언어예술을 넘어 멀티언어예술로서 시의 언어 카테고리를 확장한 것이다.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감흥(정서적 반응)을 일으키는 형상을 디지털카메라로 포착하고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를 다시 문자로 재현하면 된다. 즉 ‘영상+문자(5행 이내)’가 반반씩 어우러질 때, 완성된 한 편의 디카시가 된다. 이러한 디카시는, 오늘날 시가 난해하다는 이유로 대중으로부터 멀어진 현대시와 독자 간 교량 역할을 함으로써 대중의 문화 향유 욕구를 충족시키에 충분하다.

[<98> ‘민들레 홀씨 되어’ 최영철(시인)]

 
햐, 그렇지. 이 마음이지. 이렇게 흔들리는 게 마음이지. 흔들리지 않으면 마음도 아니지. 흔들려야 마음이고 사람이고 사랑이지.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잖아. 움직이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산 것이 아니지. 살아 있으니 움직이는 것이지. 혹, 누가 민들레 홑씨들을 생명 다한 것이라 여기는가. 씨나 품고 훌훌 떠다니다 다음 생을 준비하는 것이라 여기는가. 이렇게 살아서 사람처럼 살아서 펄펄 움직이는 것을.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고, ‘철천지원수처럼’ 헤어지기도 하고 금세 또 절대적인 사랑을 꿈꾸기도 하는 것을. 저 홑씨들도 사람 같은 마음이 되어 또 한 사랑을 꿈꾸는 중인 것을.

사랑은 그렇게 오는 것이지. ‘이모저모 좋은 자태 살피고 따를 겨를도 없이’ 오는 것이 진짜 사랑이지. 어떻게 사랑이 계산을 하나.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지. ‘나 좋다는 님 만나면 으와,’ 사랑하는 거지. 이 버겁고 더운 한 세상 사랑하며 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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