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록의 시읽기
기도
최영철
미사 시간에 한 아이가
미사 볼 때 제발 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내 조는 사이 하느님이 다녀가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무엇을 빌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는 그저께 집나간 반달이가
부디 좋은 주인 만나 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구박받다 울며 돌아왔을 때
집 비우는 일 없게 해달라고 빌었다
저 아이에 비하면 너무 큰 욕심인 것 같아
제발 무서운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잡아먹히더라도 개소주 같은 건 안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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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올린 몹쓸 기도를 떠올려 본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신발을 가져간 놈이 누구인 줄 알고 있어요. 제가 신발 코에 쇠 부지깽이로 무좀이라고 써놓았거든요. 근데 훔쳐간 놈이 자기도 무좀이라고 신발에 지져 놓았다는 거예요. 하느님, 그 녀석의 무좀이 도져서 목발을 짚게 해 주세요.” 기도가 잘못 전달되었는지 아직도 내 발가락 사이엔 무좀균이 들락날락한다.
아, 다시 하나 떠오른다. 고등학교 2학년 늦가을 때가.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가을걷이가 늦어졌다. 간경화 판정을 받은 아버지로부터 농사일을 다 떠맡자니 시험이 걱정되었고, 중간고사 핑계로 들녘에 어린 동생과 어머니만 남기고 군립도서관에 가자니 양심이란 놈이 수수이삭처럼 도리질을 쳤다. 시험 과목을 논두렁에 펼쳐 놓고 벼를 베었으니 기도만이 두렁거리는 논두렁이었다. “하느님! 제가 공부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거 아니잖아요. 다 아시죠? 그러니까, 아는 것만 나왔으면 좋겠고요, 찍는 족족 성령이 임하시고요, 가능하다면 인쇄실에 불이 나서 중간고사가 연기되거나 기말고사만 봤으면 좋겠어요. 소원을 이뤄주시면 교회도 다시 나가고 헌금도 많이 할게요. 어미 염소가 새끼 낳은 거 아시죠? 염소 팔아서 헌금 할게요. 아멘.” 하느님을 겁주는 기도라니? 참 어이없고도 끔찍한 기도다.
인터넷을 찾아 보니 어린이들의 순수한 기도문들이 올라와 있다. 하느님도 웃으신 기도문 가운데 몇 개만 옮긴다. “알라딘처럼 마술램프를 주시면, 하느님이 갖고 싶어 하시는 건 다 드릴게요. 돈이랑 체스 세트만 빼고요.(라파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학교에 못 갔던 날 기억하세요? 한 번만 더 그랬으면 좋겠어요.(가이)” “하느님은 천사들에게 일을 전부 시키시나요? 엄마는 우리들이 엄마의 천사래요. 그래서 우리들한테 심부름을 다 시키나 봐요.(마리아)” “사랑하는 하느님. 왜 새로운 동물을 만들지 않으세요? 지금 있는 동물들은 너무 오래된 것뿐이에요.(죠니)” “하느님, 사람을 죽게 하고 또 만드는 대신, 지금 있는 사람을 그대로 놔 두는 건 어떨까요?(제인)”
내가 하느님이라면 아이들의 기도만 듣겠다. 이제 기도는 하지 말고 하느님의 너털웃음이나 엿들어야겠다. 한 해가 저문다. 낮은 기도를 올려야 하리라. 작은 기도만이 무릎에 연꽃을 피우리니.
이정록 시인
(웅진, 200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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