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이정록의 시읽기

 

 

기도

 

                                            최영철

 

 

미사 시간에 한 아이가

미사 볼 때 제발 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내 조는 사이 하느님이 다녀가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무엇을 빌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는 그저께 집나간 반달이가

부디 좋은 주인 만나 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구박받다 울며 돌아왔을 때

집 비우는 일 없게 해달라고 빌었다

저 아이에 비하면 너무 큰 욕심인 것 같아

제발 무서운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잡아먹히더라도 개소주 같은 건 안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

 

  내가 올린 몹쓸 기도를 떠올려 본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신발을 가져간 놈이 누구인 줄 알고 있어요. 제가 신발 코에 쇠 부지깽이로 무좀이라고  써놓았거든요. 근데 훔쳐간 놈이 자기도 무좀이라고 신발에 지져 놓았다는 거예요. 하느님, 그 녀석의 무좀이 도져서 목발을 짚게 해 주세요.” 기도가 잘못 전달되었는지 아직도 내 발가락 사이엔 무좀균이 들락날락한다.

  아, 다시 하나 떠오른다. 고등학교 2학년 늦가을 때가.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가을걷이가 늦어졌다. 간경화 판정을 받은 아버지로부터 농사일을 다 떠맡자니 시험이 걱정되었고, 중간고사 핑계로 들녘에 어린 동생과 어머니만 남기고 군립도서관에 가자니 양심이란 놈이 수수이삭처럼 도리질을 쳤다. 시험 과목을 논두렁에 펼쳐 놓고 벼를 베었으니 기도만이 두렁거리는 논두렁이었다. “하느님! 제가 공부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거 아니잖아요. 다 아시죠? 그러니까, 아는 것만 나왔으면 좋겠고요, 찍는 족족 성령이 임하시고요, 가능하다면 인쇄실에 불이 나서 중간고사가 연기되거나 기말고사만 봤으면 좋겠어요. 소원을 이뤄주시면 교회도 다시 나가고 헌금도 많이 할게요. 어미 염소가 새끼 낳은 거 아시죠? 염소 팔아서 헌금 할게요. 아멘.” 하느님을 겁주는 기도라니? 참 어이없고도 끔찍한 기도다.

  인터넷을 찾아 보니 어린이들의 순수한 기도문들이 올라와 있다. 하느님도 웃으신 기도문 가운데 몇 개만 옮긴다. “알라딘처럼 마술램프를 주시면, 하느님이 갖고 싶어 하시는 건 다 드릴게요. 돈이랑 체스 세트만 빼고요.(라파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학교에 못 갔던 날 기억하세요? 한 번만 더 그랬으면 좋겠어요.(가이)” “하느님은 천사들에게 일을 전부 시키시나요? 엄마는 우리들이 엄마의 천사래요. 그래서 우리들한테 심부름을 다 시키나 봐요.(마리아)” “사랑하는 하느님. 왜 새로운 동물을 만들지 않으세요? 지금 있는 동물들은 너무 오래된 것뿐이에요.(죠니)” “하느님, 사람을 죽게 하고 또 만드는 대신, 지금 있는 사람을 그대로 놔 두는 건 어떨까요?(제인)”

  내가 하느님이라면 아이들의 기도만 듣겠다. 이제 기도는 하지 말고 하느님의 너털웃음이나 엿들어야겠다. 한 해가 저문다. 낮은 기도를 올려야 하리라. 작은 기도만이 무릎에 연꽃을 피우리니. 

 

이정록 시인

 

(웅진, 2009년 12월호)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어능력 :어느 폭주족을 위하여  (0) 2010.05.04
EBS 수능 특강 : 지금도 지금도  (0) 2010.04.02
냉동창고  (0) 2008.02.22
얼음호수  (0) 2008.01.19
밤에  (0) 2007.12.31
728x90

경향신문

 

 
     
   
 
 
 
/최영철/

얼음조끼를 껴입은 생선들이 줄줄이 누워 있다

줄줄이 엎어져 있다

지난 겨울 연행되어 사지가 묶인 것들

방탄조끼를 껴입고 면회갔다

그들의 적의가 얼마나 살얼음 같은지

감옥 안이 다 꽁꽁 얼었다

일찍이 바다감옥에서

수도 없이 탈옥을 감행하다가

전과에 전과가 쌓여

바다 건너 이 철통요새 독방으로 이감되었다

차가운 종신감옥에 갇혀서도

호시탐탐 도망갈 방도만 찾고 있는

그들의 눈은 하나같이 시퍼렇다

스르르 적당히 눈감는 놈이 없는지

서로 노려보고 있다

-‘창작과 비평’ 가을호

살다보면 감옥이 세상인지, 세상이 감옥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영어(囹圄)의 몸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가끔 세상이라는 감옥 속에 갇혔다고 느끼곤 한다. 말의, 인습의, 혹은 사랑의 감옥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면 가끔 예가 종신감옥의 독방이 아닐까 하면서 치를 떤다(아홉살짜리 내 아들도 하루종일 인터넷의 독방에 갇혀 종신형을 감수할 태세다).

연행, 방탄조끼, 감옥, 탈옥, 전과 등등. 최루탄이 난무하던 시대의 저쪽에서 꽤나 친숙했던 단어들이다. 세상의 화법이 바뀌면 이같은 단어들도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보라. 아직도 우리 사는 세상 곳곳에 가시철망 같은 단어들이 진을 치고 마음을 찌르고 몸을 찌른다

생선들은 왜 한결같이 죽어서도 눈을 부릅뜨고 있을까. 시인은 ‘스르르 적당히 눈감는 놈이 없는지’ 서로 감시하느라 그렇다고 얘기한다. 그렇다. 우리를 옥죄고 있는 ‘냉동창고’로부터 탈옥하기 위해서는 좀더 눈을 부릅뜨고 서로를 감시해야 할 일이다.

‘썩은 동태눈’으로 질시하고 멸시하지 말고, ‘죽어서도 살아있는 눈’으로 세상과 정정당당히 싸우라고 말해야 할 때다.

〈오광수기자 oks@kyunghyang.com〉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BS 수능 특강 : 지금도 지금도  (0) 2010.04.02
기도  (0) 2010.03.09
얼음호수  (0) 2008.01.19
밤에  (0) 2007.12.31
본전생각  (0) 2007.12.31
728x90

 

 

[맛있는 시] 얼음 호수
부산일보 2008/01/18일자 025면 서비스시간: 10:27:04
 
사진 설명:
---[본문 2:1]-----------------------------------
한겨울 난전에 좌판 벌인 노점상에게는
일찍부터 휘몰아친 칼바람이 추임새였다
줄줄이 딸린 식솔들의 배고픈 손이 후끈한 보약이었다
처음에는 손발이 차고 턱이 얼어붙어
무엇을 사라고 외치는 소리
몇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았으나
소한 넘기고 대한 가까워오자
팔뚝을 걷어붙이고 다시 일어서는 몸에서
확확 더운 김이 터져나왔다
---[본문 2:2]-----------------------------------
-최영철, '얼음 호수' 중에서
(시집 '호루라기', 문학과지성사, 2006)
찬바람 속에서 울고 있는 너에게 이 시를 보낸다. 일용할 양식 기다리고 있을 식솔 떠올리면 슬픔도 사치스러운 것. 좌절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팔뚝을 걷어붙이고 일어서라. 눈보라 속에서도 뜨겁게 꽃망울 터트리는 동백이라는 꽃도 있다. 네 몸에서 터져 나온 더운 김이 결빙을 녹이고 봄을 불러들인다. 너의 땀이 희망의 싹을 틔운다. 배한봉/시인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도  (0) 2010.03.09
냉동창고  (0) 2008.02.22
밤에  (0) 2007.12.31
본전생각  (0) 2007.12.31
어느 날의 횡재  (0) 2007.12.31
728x90

최영철 시인

‘밤에’ 

  
하늘로 가 별 닦는 일에 종사하라고
달에게 희고 동그란 헝겊을 주셨다

낮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밤에 보면 헝겊 귀퉁이가
까맣게 물들어 있다

어두운 때 넓어질수록
별은 더욱 빛나고

다 새까매진 달 가까이로
이번에는 별이 나서서
가장자리부터 닦아주고 있다

 

 

----------------------------------------------------------------------------

 

달은 별을 닦아주고, 별은 달을 닦아주기 위해 빛난다. 밤하늘의 달과 별이 별개가 아님을 알겠다. 동시풍의 이 따뜻한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나’이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달과 별의 사이처럼 서로 닦아주어야 밤하늘이 외롭지 않다.


국정브리핑|기사입력 2007-07-25 17:30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냉동창고  (0) 2008.02.22
얼음호수  (0) 2008.01.19
본전생각  (0) 2007.12.31
어느 날의 횡재  (0) 2007.12.31
5월  (0) 2007.12.3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