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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아침] 팔월 즈음

[중앙일보] 입력 2011.05.07 00:13 / 수정 2011.05.07 00:25
팔월 즈음   - 최영철(1956~ )


여자를 겁탈하려다 여의치 않아 우물에 집어던져버렸다고 했다 글쎄 그놈의 아이가 징징 울면서 우물 몇 바퀴를 돌더라고 했다 의자 하나를 들고 나와 우물 앞에 턱 갖다놓더라고 했다 말릴 겨를도 없이 엄마, 하고 외치며 엄마 품속으로 풍덩 뛰어들더라고 했다 눈 딱 감고 수류탄 한 발 까 넣었다고 했다

 담담하게 점령군의 한때를 회고하는 백발의 일본 늙은이를 안주 삼아 나는 소주 한 병을 다 깠다 캄캄하고 아득한 소주병 속으로 제 몸에 불을 붙인 팔월이 투신하고 있다 자욱한 잿더미의 빈 소주병 들여다보며 나는 엄마, 하고 불러보았다 온몸에 불이 붙은 아이들이 엄마, 엄마 울먹이며 내 몸 구석구석을 헤집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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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란 게 정말로 있구나. 제가 저지른 짓을 담담하게 회상하는 저 늙은이야말로 백발이 성성한 늙은 악이다. 하지만 이 시를 고른 것은 엄마를 찾는 저 아이의 간절함 때문이다. 아이는 “징징” 울다가 의자를 “턱” 갖다놓고는 “엄마” 부르며 우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인용부호 안에 든 말들이 전부 감탄사요, 의태어다. 엄마는 그렇게 간절하게, 즉각적으로, 온몸으로 찾아가야 할 존재다. 엄마, 엄마 울먹이며 세상을 떠도는 아이들 때문에 어버이는 있는 것이다. 내일은 어버이날, 붉은 카네이션이 무슨 수류탄 같다. <권혁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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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시] 인연 /최영철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고

자장면집 한 켠에서 짬뽕을 먹는 남녀

해물 건더기가 나오자 서로 건져주며

웃는다 옆에서 앵앵거리는 아이 입에도

한 젓가락 넣어주었다

면을 훔쳐올리는 솜씨가 닮았다


- 시집 '일광욕하는 가구'에서


▶최영철=1956년 경남 창녕 출생.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가족사진' '그림자 호수' '찔러본다' 등.

식구란 한 집에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요즘은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 얼굴 마주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들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적어도 아침, 저녁 하루 두 끼는 두리반에 붙어 앉아 머리를 맞대고 숟가락을 부딪쳐가며 함께 밥을 먹었지요. 그러는 사이 까다로운 식성과 날렵한 젓가락질이 서로 닮아가고, 입 안에 음식을 넣고 오물오물 씹는 그 모양새까지 점점 더 붕어빵이 되어가는 게 바로 '식구' 아닐까요.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치는 인연을 위해서도 전생에 오백겁 인연이 있어야 한다는데, 부부로 혹은 부자간으로 만나 한 밥상에 둘러앉게 된 이 무량겁의 인연을 어찌 다 말로 풀어낼 수 있겠어요. 고증식·시인
  입력: 2010.11.03 21:26
ⓒ 국제신문(www.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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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마을] 노을 / 최영철
 
 
 
한겨레  
 
한 열흘 대장장이가 두드려 만든
초승달 칼날이
만사 다 빗장 지르고 터벅터벅 돌아가는
가슴살을 스윽 벤다
누구든 함부로 기울면 이렇게 된다고
피 닦은 수건을 우리 집 뒷산에 걸었다-시집 <찔러본다>(문학과지성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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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 종각 앞에서- 최영철
 
 

무거우면 무겁다고 진즉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어요이제 그만 이 짐 내려달라 하시지 그러셨어요
내가 이만큼 이고 왔으니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좀 나누어 지라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쉬엄쉬엄 한숨도 쉬고 곁눈도 팔고
주절주절 신세타령도 하며 오시지 그러셨어요
등골 휘도록 사지 뒤틀리도록 져다 나른 종소리
지금 한눈팔지 않고 저 먼 천리를 달려가고 있습니다
뒤틀린 사지로 저리 바쁘게 달려가는 당신 앞에서
어찌 이승의 삶을 무겁다 하겠습니까
고작 반백 년 지고 온 이 육신의 짐을
어찌 이제 그만 내려달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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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거운 짐을 이고 지며 평생을 한눈팔지 않고 묵묵히 고통을 감내하신 당신! 개인적으로 볼 때 부모님이거나 배우자 중 한 분이겠지요. ‘개심사’에 들러 마음이 열리면서 다시 한번 보게 된 당신의 삶! ‘종각’ 앞에서 범종소리를 들으며 당신의 한평생이 저 종소리처럼 왔다가 흘러간다는 생각에 젖어듭니다. 저 종소리처럼 등골이 휘는 연이은 고통 속에서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자식들을 위해 달려가시는 당신!
  ‘맥놀이’ 현상이란 게 있습니다. 진동수가 다른 두 소리가 겹쳐졌을 때 서로 간섭하며 강약을 되풀이하는 현상인데요, 앞선 소리를 계속되는 뒷소리가 밀어내면서 멀리멀리 흘러가게 만든다고 합니다. 오늘따라 구곡간장 후비며 돌아나가는 범종소리! 그 종소리는 사지가 뒤틀리듯 일렁일렁 밀고 당기며 이승의 삶을 넘어 어쩌면 저승까지도 흘러갈지 모를 당신의 삶이겠지요. 우리네 삶의 굴레가 또한 그러하여서 고해의 바다에 파도가 일렁이듯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가고 있는 것이겠지요.
  문득 종소리가 들려오면 얼른 종소리에 올라타세요. 거기에 인생이 있고 당신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파동의 크기와 길이를 느껴보세요. 그 앞에서 어찌 이승의 삶을 무겁다 하겠습니까. -최석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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