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을 연마하려고 돼지국밥을 먹으러 간다/ 그것도 모자라 정구지 마늘 새우젓이 있다/ 푸른 물 뚝뚝 흐르는 도장을 찍으러 간다/ 히죽이 웃고 있는 돼지 대가리를 만나러 간다/ 돼지국밥에는 쉰내 나는 야성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시장바닥은 곳곳에 야성을 심어 놓고 파는 곳/ 그 따위 현혹되지 않고 오로지 야성만을 연마하기 위해/ 일념으로 일념으로 돼지국밥을 밀고 나간다/ 둥둥 떠다니는 기름 같은 것/ 그래도 남은 몇 가닥 털오라기 같은 것/ 비계나 껍데기 같은 것/ 땀 뻘뻘 흘리며 와서 돼지국밥은 히죽이 웃고 있다/ 목 따는 야성에 취해 나도 히죽이 웃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면 마늘 양파 정구지가 있다/ 눈물 찔끔 나도록 야성은 시장바닥 곳곳에 풀어 놓은 것/ 히죽이 웃는 대가리에서 야성을 캐다/ 홀로 돼지국밥을 먹는 이마에서 야성은 빛나다
- 시집『야성은 빛나다』(문학동네, 1997)
야성이란 동물적 자기방어 혹은 공격본능이 살아 꿈틀거린다는 의미이리라. 생존경쟁의 동물적 삶의 양식을 뜻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인간적 야만성이 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에서 야성이란 바다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 특유의 거칠고 개방적인 기질과 자갈치시장 등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활기찬 숨결, 억척스러움 따위를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야성’은 여야 개념을 떠나 진보개혁 성향을 의미한다.
부산은 전통적으로 야성향이 강한 지역으로 독재의 서슬에 맞서 부마항쟁과 6월항쟁의 진원이 되었을 정도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분연히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해 13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의 강적 허삼수를 누르고 국회에 첫 진출한 지역도 부산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또한 다른 도시에서는 보지 못하는 사직구장 ‘갈매기’들의 목청과 영화 ‘친구’의 거친 분위기에서도 야성이 스며들어 있음을 느낀다. 시인은 불현듯 그런 야성을 대변하는 화끈한 음식이 바로 시장의 돼지국밥이라고 생각했던 게다. 땀 뻘뻘 흘리며 히죽이 웃고 있는 돼지국밥을 씩씩하게 퍼먹는 행위 자체가 야성적이며, 야성을 연마하는 구도적 자세로 보았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정구지 마늘 새우젓 양파’ 등 온갖 자극적인 양념을 듬뿍 넣어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나면 느슨해졌던 야성도 일제히 살아 돋는 것이다. 거기에 땡초 하나 된장에 찍어 냉큼 깨물면 온몸이 전율하면서 ‘눈물 찔끔 나도록’ 야성은 이마에서부터 빛나고야 마는 것이다. 확실히 ‘따로국밥’과는 변별된다.
과거 YS의 민주화 투쟁은 부산뿐 아니라 많은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고뇌에 찬 결단’으로 인해 오랜 기간 영남의 정치지형을 한쪽으로 고착화시킨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보면 YS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부채가 적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부산은 이번 지방선거를 계기로 완전히 그 야성을 회복했다. 지역주의의 깊은 수렁에서도 빠져나왔다. ‘돼지국밥을 먹는 이마에서’ 야성이 화끈하게 빛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역사를 거슬러 가보면 대구의 야성도 부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여전히 대구의 야성에 자부심을 갖고 ‘따로국밥’에 밥 말아먹는 사람에게는 부산의 야성 회복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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