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시정신]
아무 것도 아니면서 아무 것인 것
최영철
시는 세계의 파장에 먼저 반응하고 그 파장에 누구보다 먼저 맞서려는 자의 몫이다. 먼저 말하고 싶은 시인과 먼저 듣고자 하는 독자의 열망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룰 때 시는 파닥이는 생명력을 얻는다. 수급하려는 양보다 공급하는 양이 많아졌을 때 시는 호들갑스러운 수다에 그칠 우려가 크고 공급보다 수용이 많을 때 시는 자만의 수렁에 빠질 위험이 크다. 그렇게 본다면 수급보다 공급이 많아 보이는 지금의 시는 엄살쟁이의 수다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진지한 담론을 원하지 않는 시대인데도 시인들은 무엇인가 혼자서 계속 중얼대고 있다. 너무나 재미있게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딴지를 걸고 있는 시인들이 독자들은 못마땅할 것이다.
지금 시가 해야 할 일은 21세기가 깔고 앉은 지옥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시인은 현란한 사이키조명과 폭죽이 쏟아지는 천국에 깔려 신음하는 지옥에 대해 말해야 한다. 지옥으로 통하는 길은 너무 좁고 누추하고 역한 냄새가 나며 천국이 그 큰 엉덩이로 짓누르고 있어 존재 여부조차 알기 어렵다. 신명나는 풍악소리에 덮여 요란한 박수와 환호에 덮여 세상은 이제 지옥을 잊었다. 그 지옥은 범람하는 환희와 쾌락이 서둘러 파묻어버린 고통의 다른 이름이다. 니체는 일찍이 창조하는 자가 존재하려면 고통이 있어야 하며 많이 변신해야 한다고 했다. 시인은 지옥과 천국에 각각 발 하나씩을 빠트리고 있어야 한다. 천국에만 거하고자 한다면 그의 시는 뿌리 없는 꽃과 다름없을 것이며 지옥에만 머문다면 전망 없는 울부짖음에 불과할 것이다.
시의 위기를 거론하는 속내에 시에 대한 과도한 경외감이 있다. 시는 애당초 소수에 의해 생성되고 유지된 적빈무의의 장르였다. 굳이 시의 위기를 논해야 한다면 다산과 과식으로 뒤뚱거리는 시의 범람을 지적해야 한다. 지금 시는 분명 과체중 상태이다. 무엇인가를 잔뜩 집어먹어 터질 듯한 배를 부여잡고 뒤뚱뒤뚱 걸어가고 있다.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고, 많이 가지고 있고, 많이 말하려고 하는 이 과적 상태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것이 시의 위기일 것이다.
두발 자전거의 균형은 진행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갈 때 비로소 유지된다. 멈추고 쉬기를 밥 먹듯이 하는 자전거가 많다. 환호하는 관중이 없으면 슬그머니 자전거를 멈추고 딴전을 피운다. 가던 길을 바꾸어 다른 길을 기웃거린다. 거기에도 관중이 없는지 살핀다. 웃고 떠드는 관중이 있는 쪽으로 슬쩍 핸들을 돌린다. 별 거 아니라는 듯 그 길을 또 금방 빠져나온다.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는지 박수갈채를 받고 있는 자전거 후미를 또 다시 슬금슬금 따라간다.
시인은 제 몸을 스스로 수레바퀴에 걸어버린 자이다. 갈 길이 빨라지고 굴곡이 심할수록 몸이 찢어지는 아픔은 극렬해질 것이다. 좋은 시, 나쁜 시는 누군가의 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결정된다. 생이 나에게 부여한 이 고역을 비켜가지 않고, 흥얼흥얼 콧노래라도 부르며 동행하고 있다면, 그대는 이미 좋은 시인이다. 좋은 시를 살아내고 있는 시인이다.
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는 낱낱의 존재와 낱낱의 현상들이 다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한 수도승이 사냥꾼에게 잡힌 새를 구하려고 새의 부피만큼 자신의 살점 일부를 떼어주었지만 저울은 계속 기울기만 했다. 결국 수도승이 자신을 전부 올려놓았을 때 저울이 수평을 이루었다. 시의 저울도 이처럼 모든 존재와 현상에 경중 없이 똑같이 반응하고 작용한다. 작은 풀잎의 흔들림이 우주적 파동으로 인식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래서 시의 눈으로 본 세계는 인정하고 수용하지 못할 것이 없고 견디고 넘어서지 못할 것이 없다. 그 어떤 상황과도 대치할 수 있고 반대로 그 어떤 상황과도 화해하고 동거할 수 있다. 시인이 시쓰기의 고통을 지불하고 얻는 즐거움 역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시인은 현재의 상황에 좌우되고 흔들리지 않는 혜안을 갖게 된 자이고 그 눈으로 본질을 보는 시야를 확보한 자이다. 피어나는 꽃에서 낙화를 보고 떨어지는 꽃에서 새싹을 본다. 불행과 행복, 그것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모든 상황은 각자가 가진 존재의 무게로 감당해야 할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세계의 존재들은 우리가 미처 다 간파하지 못한 아지 못할 오묘한 관계로 맺어져 있다. 시는 그것들의 존재를 알리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데 종사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넋 놓고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에도 그것들은 서로 교접하고 있으며 무심한 나를 향해 계속 말을 걸어오고 있다. 내가 그것을 놓치고 있을 뿐이다. 시인의 소임은 다른 이가 놓치고 있는 그 삼라만상의 말을 대신 받아 적는 일이다. 망가진 라디오와 부러진 의자, 휴지 한 조각도 쓰레기가 아니다. 해와 달과 별과 새와 바람, 삼라만상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된 자가 시인이다.
두 갈래의 시가 있다. 절망의 시와 희망의 시가 있다. 절망의 시는 모든 불안과 파국을 앞질러 제시함으로써 곧 닥칠지 모를 위기상황을 지연시키고 방지한다. 안온한 현재를 들쑤시고 보장된 미래에 재를 끼얹고 덫을 친다. 희망의 시는 지치고 낙망해 이제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으려는 이에게 한 바가지 시원한 생명수를 제공한다. 지금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저 앞의 모퉁이만 돌아가면 환하고 따스한 새날이 펼쳐질 것이라 등을 두드린다. 그 두 갈래의 출발점은 서로 다른 듯하나 가닿고자 하는 종착점은 같다. 비극적 정황으로서의 절망을 미리 제시해 희망에 대한 갈구를 한층 드높이는 것,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에 쉬지 않고 추임새를 넣어 그 불씨를 잉걸불로 되살려 놓는 것. 절망을 통한 변주는 세계가 너무 안일한 희망으로 들떠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되고 희망을 통한 변주는 세계가 너무 암울한 미궁 속을 헤매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조급하고 엄살이 심한 몽상가들이다. 시의 대상은 바위처럼 묵묵한데 혼자 그 무념의 바위를 향해 밤새워 눈물의 연서를 쓴다. 님은 돌아서서 이미 저만큼 가고 있는데 시인은 그 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님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흔든다. 속은 갈갈이 찢기면서도 님이 잘 가시도록 꽃을 뿌려주는 어리석은 사랑이다. 버림받은 자리에 망부석으로 붙박혀 고개를 넘어간 님이 다시 그 고개로 돌아오리라고 믿는 가련한 사랑이다. 님은 뭍같이 까딱도 않는데 혼자 눈물 콧물을 찍어내는 청승맞은 사랑이다. 시인이 원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이 아니다. 시인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궁합이 잘 맞는 세계가 아니라 서로 어긋나서 삐걱거리는 불화의 세계다. 그 어긋나고 삐걱거리는 세계를 해체하고 조립하고 중재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존재가 시인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원하는 사랑은 나란히 가는 평행선이 아니라 힘겨운 줄다리기나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이다. 놓친 기차가 아름다운 것처럼 실패한 사랑이 아름다운 법, 시인은 삐걱거리는 사랑에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순탄한 사랑 앞에서 불안해한다. 시인의 사랑은 파국을 꿈꾸는, 파국을 전제로 한 사랑이다. 이것이 상처를 먹고 크는 시인의 숙명이다.
시인의 자아는 자신이 생산하고자 하는 시의 세계와 때로 갈등하고 때로 조우한다. 그 양자의 끌어당김과 물리침은 한창 사랑이 무르익어가는 두 연인처럼 적절한 불협화음을 동반할 때 더욱 팽팽하게 유지된다. 그 둘이 별다른 갈등 없이 쉽게 합일되기만 한다면 시인의 시는 낭만의 수렁에 빠질 위험이 있고, 늘 상반되기만 한다면 공허한 이미지들의 나열이 되기 쉽다. 그런 면에서 시인이 가진 배합비율은 50데 50의 당김과 물리침이 가장 좋다. 50의 끌어당김은 50의 물리침 때문에 자주 절망하겠지만, 그 50의 이율배반은 50의 합일을 더 곤고하고 확실하게 유지시킨다. 그것을 시멘트와 물의 배합에 견주어도 좋으리라. 물은 시멘트의 미세한 입자들 사이를 파고들며 그들 사이의 결별을 종용하지만 그 핍박을 견디기 위해 시멘트의 입자들은 물을 끌어안으며 더 강하게 서로를 밀착시킨다.
무너진 건물에 매몰되거나 바깥세계와 단절된 오지에서 용케 살아남은 사람들의 경우를 가끔 접하곤 한다. 극한상황이랄 수 있는 그 절망적 상태에서 그들을 견디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하루 이틀을 견디기도 힘들 것 같은 상황에서 그들은 열흘, 몇 달, 또는 일본 패잔병들처럼 60년을 견딘 사례까지 있었다. 그것이 불가사의한 일로 여겨지는 것은 환경적 조건에 지배받고 자의식을 느끼는 사람의 경우였기 때문이다. 다른 동식물처럼 생명연장에 필요한 최소한의 영양소만으로 지탱하지 못하고 복잡하고 섬세한 감정의 기복에 의해 생명이 유지 또는 종결되는 것이 인간이다. 다른 이의 관점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최악의 조건에서도 수십년을 거뜬히 살아내는 것이 인간인가 하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사소한 동기로 한순간에 절명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지배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행복과 불행의 잣대 역시 객관적 기준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인 잣대에 의해 가늠되기 일쑤다. 개개인의 인격체가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기준에 의해, 동일한 상황을 두고도 어떤 이에게는 행복, 어떤 이에게는 불행의 국면으로 인식돤다. 길을 잘못 접어들어 극심한 정체상황에 빠지거나 낯선 길을 헤매고 있을 때, 그것을 울화가 치미는 불행의 요소로 인식해 어서 그 길을 빠져나가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처럼 얻은 여유를 만끽하며 도로변 풍경에 눈길을 돌리거나 낯선 길이 주는 경이로움에 흠뻑 취해 보는 이도 있다. 어느 쪽이 더 슬기로운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시가 지향하는 세계는 대부분 현실과는 동떨어진 낯설고 터무니없는 몽상일 때가 많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느닷없이 제기된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향해 품었던 근원적인 사고였다. 해와 달과 같은 자연물, 가축 벌레 나무 풀, 비와 바람 같은 것들을 인격화하고 그것과 대화하던 옛시절 민초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시인이었다. 인간에 한정하거나 인간을 중심에 두지 않고 삼라만상을 평등한 인격체로 인식했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사고방식과 논리를 싹틔우며 새로운 말하기 방식을 만들어나갔다. 일자무식의 문맹이었지만 너른 대지를 향해, 비와 바람을 향해, 주변의 가축과 사물을 향해 중얼거리던 어머니들의 언술이 시였다. 우주 만물이 자아내는 파장을 감지하고 지금은 부재하지만 오랜 염원을 담아 간구하던 자타일념의 갈망이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던 힘이었다. 그런 교감을 가능하게 한 개념을 한 마디로 축약한다면 ‘이웃’일 것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사물들이 귀천과 서열을 벗어 던지고 이웃으로 동등해지는 것, 시인은 그것을 먼저 깨친 자로서 이웃의 존재를 감지하고 인식하며 그들끼리의 소통에 중개자 노릇을 하거나 그들이 느낀 바를 증언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시가 고통이 아닌 즐거움이 될 수 있는 것은 미천한 제 몸에서 실을 뽑아내는 누에의 기쁨처럼 고통이 고통의 모습을 띄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세우고 지탱하는 양식과 거처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상처가 단지 곪고 썩어가는 죽음과 상실의 징후에 머무르지 않고 푸드득거리며 새롭게 날아오르는 비상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절박한 심정으로 천여 편의 신춘문예 응모작들을 읽었다. 비인기 종목이 되어 버린 시에 아직도 목매다는 지망생들이 있다는 게 고맙다. 그 정도라면 혁명은 어려워도 현상유지나 계승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호황은 아니어도 시 산업의 존립을 걱정해야 할 수준은 아닌 것이다. 시의 고매한 위의가 훼손되고 있는 문단 안팎의 상황을 매우 안타깝게 바라보는 눈길 또한 없지 않으나 재미난 것이 수도 없이 널린 세상에서 시 같은 걸 써보겠다고 자청한 사람들이 있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최종심에 올려 논의해야 할 작품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궁여지책으로 작품성향, 지역과 남녀, 세대를 안배하여 몇 편으로 압축해보지만 이것이다 싶은 게 없다. 외형은 그럴싸하지만 속씨가 없다. 진열장의 견본 모델처럼 깔끔하게 잘 다듬어진 시들이다. 비슷한 향수 냄새가 난다. 언제부터 시에서 이렇게 똑같은 향기가 나기 시작했을까. 피비린내와 땀 냄새, 역겨운 토사물, 시궁창 냄새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은 더 그런 냄새들로 넘쳐나고 있는데 말이다. 심지어 작년에 투고한 것에다가 새로 나온 향수 몇 방울을 뿌려 다시 투고한 것도 있다. 하루 수십 편씩이라도, 미친 듯 걸신들린 듯 써내야 하는 문청시기에 출세작만을 겨냥하고 있다. 한 편의 성공작을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강좌를 기웃거리는 게 통과의례처럼 행해지던 시절도 있었다. 데뷔작이 출세작이나 대표작이 되고 마지막 작품이 되는 사례도 있었다. 시와 시인을 너무 화려하게 동경했던 탓이 아닐까. 시와 시인은 죽는 날까지 처음이며 마지막이어야 하고,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것이야 한다. 그 과정의 머나먼 무명을 감당할 줄 알아야 한다.
[시와정신 2016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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