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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을 거닐다 

 

 

자갈치, 활기찬 삶을 위한 종합선물세트

 

                                                                                  최영철

 

 

부산을 찾아온 손님에게 부산을 대표할만한 한 곳을 보여주어여 한다면 어디가 좋을까. 어떤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답은 달라질 것이다. 주어진 시간, 손님의 기호, 주머니 사정, 그날의 기후 조건과 기분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여건과 취향을 배제하고 보다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댄다면 그 1순위에 자갈치시장을 놓을만 하다. 가장 부산다운 곳, 그러면서도 가장 접근성이 좋고 부산적인 요소를 골고루 맛볼 수 있는 곳, 그곳이 자갈치시장이다.

우선 접근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부산역에서 대중교통으로 10분이면 바로 살아있는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자연의 순수가 살아있는 바다는 아니지만 대신 인간과 함께 생동하는 바다다. 그래서 일찍이 주당들은 자갈치를 한국의 나폴리라 불렀다. 세계 어느 항구와 비교해도 자갈치만큼 시끌벅적하고 생기발랄한 곳이 없을 것이다. 지금 여기 인간의 삶이 생생하게 투영된 곳으로서의 자갈치의 가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다듬고 걸러진 표준화된 시장 풍경이 아니라 지역의 토속성과 분주한 일상성이 민낯으로 드러나는 삶의 현장이다. 그래서 자갈치의 바다 풍경은 유유자적한 풍경으로서가 아니라 바다가 가진 본연의 역동성과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민초들의 절실성에 의해 움직인다 

 

 

활기찬 삶을 위한 종합선물세트

 

자갈치를 이루고 있는 여러 요소들은 주어진 조건과 정면으로 맞서려는 해양성 기질과 승부 근성으로 종합선물셋세를 이룬다. 그래서 드리는 권유이기도 하지만 팍팍한 세상에 지쳐 희망을 잃고 세상의 종점을 찾아 부산에 오신 분들은 우선 자갈치시장으로 오시기를 권한다. 나 역시 그랬지만, 그곳에서 안감힘으로 오늘을 헤쳐나가고 있는 시장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절망이 얼머나 큰 사치인지, 엄살인지, 부끄러워질 것이다.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나태와 방만으로 무기력해진 스스로를 다잡아 일으켜세우는데도 자갈치만한 곳이 없다. 방전만 하고 충전을 하지 않아 무기력해진 일상을 새롭게 되돌리는 일도 자갈치만한 곳이 없다.

부산을 구경하러 온 국내외 관광객들이 꼽는 중요 명소 중에는 해운대 태종대 범어사와 함께 자갈치시장이 꼭 빠지지 않고 들어간다. 우리가 다른 곳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지만 낯선 곳을 여행하며 얻고자 하는 정보는 자연 풍광과 더불어 거기 사는 사람들의 체취와 숨결이다. 이런저런 관광정보들이 영상이나 책자로 개방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람 사는 모습과 그 체취는 가서 부대껴보아야 오롯이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자갈치시장이야말로 각각의 오감으로 감지해야 할 살아 퍼덕이는 삶의 현장이다.

자갈치시장은 1915년 일제에 의해 계획이 수립되고 1928년 착공하여 1940년 완공된 남항 매축공사로 조성된 곳이다. 남부민동에서 충무동과 남포동을 잇는 이 매축지는 배를 편리하게 정박하고 배로 싣고 온 화물을 부리기 위해 축조되었다. 그 물양장 주위로 수산물 저장소와 냉동창고와 판매장 등이 들어서면서 싱싱하고 싼 수산물을 공급받으려는 상인과 소비자가 몰려 하나의 상권이 형성된 것이다. 자갈치의 원래 위치는 부산시청이 있던 용미산 동남쪽 해안과 남포동 건어물시장 주변이었는데 남항이 매축된 뒤 현재 자리로 옮겨왔다.

 

 

해방 전까지 일본인들이 쥐고 있던 자갈치시장의 상권은 해방 후 귀환동포의 몫이 되었고 전쟁 후에는 맨주먹으로 피난 내려온 팔도 사람들의 삶터가 되었다. 시장이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 잡으면서 자갈치란 이름으로 불려지게 된 것도 대략 이때쯤이다. 부산은 전쟁통에 내몰린 팔도 사람들의 최종 귀착지였고 자갈치시장은 막장과도 같은 위기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이 만난 훌륭한 생활 근거지였다. 오늘의 부산 사람들의 가지고 있는 악착같은 기질과 끈질긴 생명력은 이 자갈치를 근간으로 해서 생겼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자갈치의 어제와 오늘

 

자갈치는 우리나라 동해에 분포하는 농어목 등가시치과의 바닷물고기이기도 한데 자갈치시장은 충무동 로터리까지 뻗어 있던 자갈밭을 자갈치라 부르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 어원은발치’‘저만치처럼 자갈이 있는 곳, 그 끝자리 등을 의미한다. 구덕산 등지의 돌이 보수천을 따라 흘러내리고 용두산 복병산 등지의 돌이 빗물에 흘러내리면서 이 곳 자갈치에 모여 넓은 자갈밭을 형성했다. 그렇게 흘러 내려온 돌들이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이고 다듬어지면서 반들반들한 자갈이 되었을 것이다. 파도에 씻겨 다듬어진 그 자갈들은 온갖 풍상을 견디며 생활 근거지를 찾아 흘러온 부산 사람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바람에 부서지고 흐르는 물에 마모되어 둥그스름해진 작은 돌, 그것은 부산 사람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오랜만에 아침 일찍 노선버스를 타고 자갈치 시장을 다녀왔다. 새벽바다가 부려놓은 싱싱한 생선들과 그 생선들보다 곱절은 더 싱싱해 보이는 아지매들이 펼쳐놓은 좌판을 둘러보고 생선 몇 마리를 샀다. 객지에 나가 사는 딸과 아들 식구에게 우리는 이렇게 정기적으로 생선을 사서 보낸다. 그것은 그들에게 단순한 먹거리가 아닐 것이다. 고향의 소식이요 고향의 기운일 것이다. 이제 겨우 일어나 하루 일과를 준비할 아침 7, 길게 흩어져 있던 노점을 한데 모아놓은 새벽 어시장은 한낮처럼 환하고 시껄벅적했다.

 

 

자갈치시장의 이런 팍팍한 기운은 단순히 시장이라서가 아니라 그런 삶의 질곡을 견딘 자들이 내뿜는 기운들이 한데 어우러져 생긴 것이다. 생의 고비를 넘어온 자들이 갖는 억센 기운과 그 고비에서 터득한 아량을 함께 갖고 있다. 자갈치에 오면 그 양면의 에너지를 다 충전해 갈 수 있다. 두세곳에서 산 이런저런 생선들을 양팔 가득 들고 근처 식당에서 보리밥 된장국으로 아침을 먹었다. 그 옛날 할머니와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그 밥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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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오네

자꾸 비 오면

꽃들은 우째 숨쉬노

젖은 눈 말리지 못해

퉁퉁 부어오른 잎

자꾸 천둥 번개 치면

새들은 우째 날겠노

노점 무 당근 팔던 자리

흥건히 고인 흙탕물

몸 간지러운 햇빛

우째 기지개 펴겠노

공차기하던 아이들 숨고

골대만 꿋꿋이 선 운동장

바람은 저 빗줄기 뚫고

우째 먼길 가겠노

                                                                           (최영철의 시 우짜노전문)

 

 

형님! 가을이 깊어갑니다. 저는 형님을 생각하면 저 깊은 가을같이 우짜노?” 근심 반 위로 반 나직한 형님의 목소리가 먼저 파문 집니다. 시인이란 마음 씀이 많은 사람이라고들 하지만 형님은 늘 자신보다 먼저 상대를 생각하여 우짜노?” 하고 물어오는 참으로 마음 씀이 남다른 사람이지요.

내가 처음 형님을 만난 게 아마 85년 쯤 이었지요. 갓 군에서 제대를 하고 동인진가 뭔가를 만들겠다고 용두산 공원 아래 막걸리 집에서 깍두기를 앞에 놓고 횡설수설하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없지만 아무튼 젊은 혈기에 형에게 애배기를 해댔던 것 같습니다.

그 후 나는 참 부지런히도 형님 뒤를 따라다녔던 것 같습니다. 형님께서 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시고 그 다음 나도 이어 88년 한국일보를 통해 나오면서 우리는 이제 고향 선후배뿐만 아니라 같은 출신지의 지면 선후배도 되었지요.

형님이 양정에 사실 때에도 수영에 사실 때에도 나는 참 부지런히 드나들었지요. 늘 술이 반쯤 취해서 형님! 하고 비실비실 찾아들곤 했었지요. 술에 담배에 절어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나를 형수님께서도 싫다 하지 않으시고 푸근히 반겨주시곤 했습니다.

왜 나이가 들수록 옛날을 떠올리면 부끄러움이 더 많이 솟구치는 것일까요? 형님과의 추억을 떠올리려고 하는데 제 머리 속에서는 나의 부끄러운 기억들만 생각이 나서 한 줄을 썼다 두 줄을 지우고, 두 줄을 썼다 세 줄을 지우는 이상한 짓을 나는 지금 하고 있습니다.

이길 수 없는 도깨비 씨름 같은 이 짓을 계속하다보니 소심하기 이를 데 없고 구멍 난 양말 같은 가난뱅이 촌놈이 자꾸 쥐구멍을 찾아 이리로 뱅뱅 저리로 뱅뱅 합니다.

이런 기억도 나는 군요. 제가 갓 신춘에 등단하고 영천의 이중기 형을 뵈려 간 적이 있었지요. 돌아가신 황선하 선생님을 모시고 동행한 길이었는데 영천에서 1박을 하고 내려오다 삼량진에서 헤어지기가 섭섭하여 무작정 횟집으로 향했지요.

나는 형들의 뒤를 따르는 길이라 당연히 형들의 지갑에는 횟값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형들도 빈 지갑, 저도 빈 지갑 그렇게 술들을 마시고 부산의 친구 시인에게 술값을 청하던 일이 어제처럼 떠오르는 군요. ! 그 세월이 벌써 삼십년이 다 되었군요.

그러고도 헤어지기 섭섭하여 다시 부산으로 동행을 하여 12일을 내내 술에 취해 있었지요. , 괜찮다. 우짜노. 한 잔만 더하자. 형은 늘 푸근했습니다.

형의 네 번째 시집인가요? 야성은 빛나다(문학동네)가 있지요. “돼지국밥에는 쉰내 나는 야성이 있다고 형은 썼지요. 가장 부산다운 음식. 부산에서 시작된 음식으로. 부산을 대변하는 음식으로 형은 늘 돼지국밥을 말씀하셨지요.

저도 요즘 자주 헛헛하여 돼지국밥을 자주 먹습니다. 형님의 시처럼 야성을 연마하려고 돼지국밥을 먹으러갑니다. “일념으로 일념으로 돼지국밥을 밀고 나갑니다. 그래서 돼지국밥을 먹으며 형님을 생각하곤 합니다. ! 괜찮다. 우짜노.

19871223일 저녁이 생각나네요. 그날은 양김이 단일화에 실패하여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날이기도 하고 정일근 형의 첫시집 출판기념회가 있었던 날이기도 합니다. 소주에, 막걸리에, 맥주에 짬뽕이 되어 비실거리던 날이었는데요. 제가 오줌이 마려워 자리를 비우자 형이 슬그머니 화장실로 따라 나와 나의 신춘 통보를 물어왔지요. 저는 아직 연락이 온 곳이 없다고 말씀드리자, 뭐 괜찮다. 우짜노. 등을 토닥여 주셨지요. 그 기운인지 저는 그 다음날 한국일보에서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진해의 정일근 형과 영철이 형님과 저는 지연으로 학연으로 엮여 더 친근하게 뭉쳐 다니곤 했지요. 남들이 혹, ! 한국일보 삼총사 나타났다. 라고 말할 때에는 저도 형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처럼 마음속으로 기쁨이 한량없었습니다.

그렇게 뭉쳐 다니며 함께했던 세월. 참 빨리도 지나 이제 형도 육십, 저도 그 언저리에 가 닿고 있습니다. 경상도 말로 나는 니가 좋다, 라는 말을 아이구 징그러버라하지요. 참 형수님이나 제 집사람이나 우리를 보면 아이구 징그러버라하지 싶습니다.

그래도 제가 살아온 날들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들이 그 속에 있고, 그 술잔 속에 있고, 그 허접한 대화 속에 다 있습니다. 제가 가장 놀랬던 일은 형과 정일근 형이 동시다발로 뇌 수술을 받았던 때인 것 같습니다. 제발 아프지 말고 건강하십시오. 이제 겨우 삼십년 지났습니다. 앞으로 또 삼십년은 더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쓸데없이 또 횡설수설하네요. 형 건강하십시오. 좋은 날 잡아서 국화주 한 잔 하죠. 늘 곁에 있어도 늘 그리운 형에게 술 약속을 청합니다.

                                                                      이천십오년 시월 무학산 아래 누옥에서 아우 선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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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시인이 건네준 릴레이편지의 바통을 어디로 넘길까 고민하다가 대전의 형께 보냅니다. 형이라는 호칭이 좀 그렇지요. 저나 형이나 80년대에 시인이 되었으니 그 시대 호칭을 따라 그렇게 불러보지만 요즘은 이게 왠지 부자연스런 호칭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80년대 초중반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지요. 생판 처음 만나 막걸리잔을 몇 번 부딫치기만 해도 바로 형이라고 불렀지요. 그 호칭은 말을 트기 직전의 숨고르기 같은 것이었어요. 막걸리 두어 잔에 동지가 되고 야간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진도가 잘 나가면 바로 집으로 같이 가 날밤 술을 마시기 일쑤였지요. 시힘 동인의 좌장 김백겸 선배를 우리가 두목이라고 부르는 것도 다 그 시절의 정서가 아니겠어요.

제가 시힘 동인들과 처음 만난 것도 80년대 말쯤 김백겸 선배 댁이었어요. 저는 영문도 모르고 정일근 형을 따라 시힘 모임에 동행하게 되었지요. 정일근 시인이 민주일보 기자로, 저는 열음사 외국문학 편집장으로 같이 서울에 살고 있을 때여서 그런 동행이 이루어졌을 거예요. 그게 시힘 동인들과의 첫 만남이자 엉겹결에 저의 가입이 결정된 날이기도 하지요. 1985년 시힘 1그렇게 아프고 아름답다를 설레는 경외심으로 읽었던 저로서는 쟁쟁한 선배들을 대면한다는 게 큰 행운이었지요. 과분하고 느닷없는 제의에 쑥스러워하는 촌놈을 정겹게 받아준 시힘 동인들의 우정이 생각나는군요. 뒷풀이로 고고장 비슷한 데를 갔는데 형이 저보고 춤 좀 춰보라고 한 것도 기억이 나요.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 벌써 삼십년을 바라봅니다. 대전, 전주, 부산, 울산, 경주, 장흥, 서울, 종횡무진 전국을 누비며 모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 과정에서 정일근 시인이 옛날 설화에 나오는 서울쥐 시골쥐라는 말을 만들어냈죠. 지역에서 모이면 차표를 몇 번 바꾸면서까지 극진한 대접을 해서 보내는데 서울서 모이면 시골쥐들을 여관에 몰아넣고는 서울쥐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곤 해서 붙여진 말이지요.

몇년만에 만나 저녁 먹고 연극 보고 노닥거리다가 헤어진 게 지난여름이었던가요. 벌써 몇 달이 후딱 가버렸군요. 요즘은 그렇게 시간이 빨리 갑니다. 어제 일도 잘 기억나지 않아 간단하게 일기를 적어두는데 찾아보니 814일이군요. 이윤택 김백겸 두 선배와 함께 형이 사주신 맛있는 저녁을 먹고 대전문화의전당에서 이윤택 연출 [백석우화] 초연을 보았었지요. 대전충남 시인들과의 간단한 뒷자리도 가졌었지요. 저는 그 자리를 벗어나, 무척 오랜만에 만난 이정록 형과 호프 한잔 하다가 예매해둔 막차를 놓쳤었지요. 그래도 차를 놓치는 경험은 아직도 감당할만 했어요. 덕분에 다음날 아침 아내와 대전역 광장 한 귀퉁이에 열린 새벽시장을 둘러보며 이것저것 충청도의 농산물을 사들고 올 수 있었으니까요. 충청도 양반들은 아직 인정스럽고 기품이 있었어요. 저는 그것들과 만나려고 어젯밤 기차를 놓친 것이란 생각을 했었지요.

제 게으름과 불운을 이렇게 얼버무리는 걸 보면 저는 아직 80년대 사람인가 봐요. 80년대는 대의가 우선이었지요. 그시절의 술집은 무슨 이야기론가 떠들썩했고 하나같이 조국과 인류의 안녕을 걱정했지요. 먹고 사는 게 지금보다 어려웠지만 무슨 배짱인지 그런 궁리를 하는 청년은 많지 않았어요. 뜬구름 잡는 개똥철학을 한마디라도 더 해보려고 빈틈을 노렸고 날선 시국토론을 벌이다가 숭판을 뒤집고 주먹다짐이 오가기도 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디에서고 그런 열정을 만날 수 없어요. 있다면 야구장 정도이겠지요. 형과 저는 같은 56년생이어서 시절의 파장을 공유하며 살아왔을 겁니다. 우리가 통과한 이십대, 그러니까 1976년에서 1986년은 무척 험난한 격정의 시간이었지요. 유신에서 신군부에 이르는 억압의 시절이 우리의 이십대였다는 점에서 우리의 청춘은 무척 억눌리고 거세되었을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뛰쳐나오려는 충동을 무의식에 깔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20대 때 만났던 비슷한 또래 문청들은 광부나 염사 같은 극한직업을 꿈꾸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최우선으로 가져야 할 문학의 덕목이 치열성이었고 음풍농월을 혐오했었지요. 그런데 요즘 시인들의 품행은 대부분 너무나 단정하고 정숙합니다. 술에 취해 울부짖는 친구도 없고 탁자에 올라가 오줌을 갈기지도 않습니다. 이제야 고백합니다만 80년대 말인가 90년대 초쯤에 작가회의 행사 뒤끝에 비슷한 또래들과 술 한잔 하고 헤어지면서 광화문 거리 한복판에 노상방뇨를 한 적이 있어요. 우리는 그런 일탈을 당대 현실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무튼 지금의 젊은 시인들도 자기 식대로의 어떤 저항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강력해보이지는 않아요.

우리를 묶어주었던 시힘이라는 동인체가 지금 아무런 매듭도 없이 흐지부지되어 있는 상황, 이것이 오늘의 문학이 처한 현주소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은 역설적으로 시힘이라는 이름 때문일 수도 있을 겁니다. 여러모로 지금은 시가 힘을 가지는 시대가 아니니까요. 시힘 1집이 세상에 나온 것이 1985년이었으니 시힘이라는 제호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1985년은 아직 시의 힘이 강조되어야 하는 시점이었으니까요. 강제 폐간된 신문과 문예지들은 복간되지 않았고 출판의 자유도 억압당한채로 있었으니까요. 그렇다고해서 그런 통제와 검열이 없어진 지금이 태평성대는 아니겠지요. 역으로 그 시절이 불운의 시절만은 아니겠지요. 좋은 세상을 향한 열정이 있었고 사람들과의 유대와 믿음이 있었으니까요. 80년대 초의 일인데 부산의 한 시인이 신문에 시동인 모집줄광고를 내 동인지가 나왔고 저는 거기 실린 한 시인의 시가 좋아 주소를 들고 찾아가 방을 새우며 술을 마신적이 있어요. 그런 순정의 시대, 목마름의 시대를 살았던 것이 우리 세대 시인이 가지는 귀한 밑천일 겁니다. 시산업의 팽창에도 불구하고 시의 위기는 여전히 거론됩니다. 엄밀히 말하면 시의 위기가 아니라 시인의 위기이겠지요. 지금의 시인들은 너무나 건실하고 평범합니다. 울타리를 박차고 안주를 넘어 극한까지 가보려는 날선 시정신이 그립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예순에 이르는 우리에게도 축복처럼 그 정점이 다시 찾아와 주기를 바랍니다. 내년이면 형과 저는 육십에 이르지만 한 갑자를 다 소진한 0세이기도 하겠지요. 그래요. 우리는 곧 새로 태어날 한 살인 겁니다. 다시, 여전한 젊은시인으로 오래 강건하시기를 빕니다.

201511월 최영철 드림

현대시 2015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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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를 보내며] “하늘서 못다 이룬 정치 펼쳐주시길”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했다. 아, 한 시절이 가는구나. 나는 북창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지상을 떠나 천상으로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한 마리 새의 날개짓이 보였다. 1927년에서 2015년, 그 88년은 인간 김영삼에게 길고도 짧았을 것이다. 짧고도 길었을 것이다. 식민지 백성의 아들로 성장기를 보내고 해방과 분단과 동족상잔과 4·19와 5·16의 격랑을 피 끓는 청년으로 넘어왔고 유신독재와 민주화의 벼랑 끝 세월을 야권의 대표주자로 헤쳐 왔으니 말이다. 그 길은 한 걸음 한 걸음이 가시밭길이요 진퇴양난이었을 것이다.

YS의 서거를 접하며 1987년 12월 어느날 진해 풍경이 떠올랐다.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두고 진해 정일근 시인의 첫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당시 정 시인은 바다가 보이는 진해남중학교 국어교사였고 출판기념회는 인근 부산·경남 젊은 시인들의 축하 속에 조촐하게 치르어졌다. 

최영철 시인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평지풍파를 오로지 다 받아내고 다 살아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삶이고 이제 그 고생길로 자청해 걸어 들어가는 한 시인의 장도를 격려하는 모임이어서 그랬던지, 또 신군부의 억압에 시달렸던 80년대 중후반의 분위기 탓이었던지 우리는 술을 마시다 말고 진해 중심가의 대로상으로 진출했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누가 먼저였는지 중앙선을 따라 걸으며 우리는 ‘김영삼’을 연호했다.“김영삼 김영삼 김영삼” 10여명으로 시작한 사람들이 곧 20∼30명이 되었다. 가게 문을 닫다 말고 부리나케 달려나와 우리 뒤에 선 아저씨도 있었고 외박을 나온 해군 병사도 있었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 선거운동 기한을 넘어서고 있었고 날이 밝으면 대통령 선거 투표가 시작될 것이었지만 아무도 우리를 저지하지 않았다.

부산·경남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리고 시종일관 대부분 YS의 열열한 지지자들이었다. 특히 부산 사람들은 그를 연거푸 국회의원에 당선시켰다. 그것을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향한 호남정서와 대비시켜 일종의 지역정서로 보는 이도 있다. 그러나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과 1987년의 6월항쟁을 촉발해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온 부산 사람들의 정치성향을 그렇게 격하해서는 안 된다. 부산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좋은 세상을 향한 순정이 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끼여드는 정의감도 있다. 바른 일에 나서는 사람을 물불 안 가리고 뒤따르는 동지의식도 있다. 광주항쟁을 폭발시킨 호남정서에 버금가는 시대정신도 있다. YS는 그 선봉에 서 있었다. 광주·전남이 DJ에 열광하듯 부산·경남 역시 오랫동안 YS를 연호하고 열광해 왔다.

 
그런 기대 때문이었겠지만 나는 오랫동안 YS를 잊고 살았다. YS의 유세를 들으며 가슴이 뜨거워지고 YS가 건재하는한 좋은 세상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 믿으며 청춘의 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날 나는 그 믿음에 배반당했다. 뜨거웠던 청춘의 한때처럼 세상을 향해 품었던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1990년의 3당 합당이었다. 나는 대통령이 된 그를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불우하게 마주친 자신의 당대와 당당히 맞서 싸우고 그것을 통과해 새로운 길을 열어젖히는 한 사람의 위인을 기대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청춘의 시절에 품었던 한때의 꿈 같은 것이었다. 역사는, 정의는, 정치는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았을 것이다. 한 구비를 돌아나가기 위해 한 고비를 넘어서기 위해 암중모색의 뒷걸음질도 해야 했을 것이다. 어려웠던 한 시절을 온몸으로 이끌어왔으니 부디 하늘에서도 이 나라를 보살피는 수호신으로 못다 이룬 정치를 펼치시기 바란다.

최영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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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詩的인 길 안내가 내비게이션보다 좋은 이유

    • 최영철

조선일보 2015-11-11   YR1   [A32면]  

 
외진 강마을에 들어와 산 지 5년째다. 뜸 들인 기간도 없이 덜컥 보따리를 싸버려서 그랬는지 처음 1, 2년은 도시의 친구들이 여럿 찾아왔다. 정말 살림살이 전체를 옮긴 것인지 주변환경은 어떤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맞이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비게이션이 없는 경우 대충 길을 설명해 주지만 그것은 곧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고속도로를 나와 읍내를 통과하는 데까지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강을 넘어 들판으로 접어들면 이렇다 할 지형지물이 없는 막막한 들판뿐이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십여 분이면 올 수 있는 길을 한 시간쯤 헤매다 도착하는 경우도 있고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가는 경우까지 있었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분에게 고작 해준 말이 "조심해서 살살 오세요"였다. 그 말은 지인들 사이에 나의 우매함을 대변하는 관용구로 회자되고 있다.

그런 오명을 덮어쓰게 된 원인은 내가 아주 외진 시골에 살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래서 왔다 간 분 중에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고 대놓고 묻는 경우도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나는 한술 더 떠 마을로 오는 길을 이렇게 설명해보기도 한다.

'고속도로를 벗어나셨으니 이제 우선 차의 속도를 절반으로 줄이시고, 한참 잎이 물들고 있는 벚나무들의 사열을 5분쯤 받으신 후, 산으로 접어드는 갈림길에서 좌회전해 인근 축사의 쇠똥 냄새를 5분쯤 맡으시기 바랍니다. 코를 틀어쥐고 차창을 닫으려 하시겠지만 그 상황을 감수하지 않으면 원하는 최종 목적지까지 갈 수 없다는 것을 유념하시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나고 자랐던, 또 어느 날 매정하게 뿌리치고 나온 고향의 냄새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가슴을 펴 그것들을 심호흡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뒤라야 왼쪽으로 도열해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 강의 환영을 받을 자격이 있을 것이며, 잘하면 도로 중앙을 점거한 채 낮잠에 빠진 잡종개 한두 마리쯤 만날 수도 있으니 그들이 짓밟히지 않게 조심운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곤 "당신의 시간을 50년 전쯤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귀띔도 하곤 하는데 그건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라 그 나름의 근거가 있다. 5년 전 부산 수영의 집을 팔고 이곳으로 이사했을 때, 나는 한동안 대문을 닫고 살았다. 이렇다 할 연고도 없는 낯선 마을이니 응당 그래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아침에 나가보니 현관 앞마당에 검은 봉지가 떨어져 있었다. 도시 할머니들처럼 봉투 값을 아끼려고 쓰레기를 그렇게 버린 줄 알았다. 도시 할머니들은 쓰레기를 버리더라도 대문 앞에 살포시 놓고 가는데 여기 할머니들은 기운이 넘쳐 이렇게 와일드하게 마당 안으로 집어던지고 가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검은 봉지 안에는 새벽이슬을 촉촉이 머금고 있는 고추와 상추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런 무단투기는 농사철에 수시로 계속되었고 내용물도 수시로 바뀌었다. 안타까운 것은 어느 분이 던지고 갔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빚지고는 못 사는 성미여서 묘안을 냈다. 일이 있어 나갔다 올 때마다 음료수나 빵 같은 걸 사서 이웃집 마루에 몰래 올려놓고 왔다. 다행히 낮에는 모두 들판으로 일하러 나가고 빈집들이었다. 그 일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과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가끔 골목 어귀에서 마을 어른들과 만나면 혼잣말처럼 먼산을 보며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에 누가 우유를 한 통 놓고 갔어."

"저희 집에는 누가 호박을 한 덩이 놓고 갔어요."

지난해 추수철에는 건너편에 사시는 어르신이 막 탈곡한 햅쌀을 한 자루 가져 오셨다. "촌에서 농사도 안 짓고 뭘 먹고 사느냐?"고 걱정하셨다. 사실 이 외진 시골마을로 들어오며 내가 걱정했던 것은 나의 주업인 시(詩) 농사였다. 이 평화롭고 유유자적한 시골에서 과연 시가 쓰일 수 있을까 하는 우려였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오히려 나는 눈물이 더 많아졌고 지난 5년간 더 많은 시를 썼다. 시의 동력을 간절함이라 본다면 나는 더 간절해졌다고 봐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도시에서는 사이다를 마시고 싶으면 슬리퍼 끌고 대문을 나서기만 하면 되는데 여기서는 다른 용무들과 함께 며칠은 기다려야 한다. 다른 필요한 것들과 함께 줄 서서 기다리며 그 갈망들은 천천히 숙성된다. 그 힘으로 드디어 들이켜게 된 사이다의 맛은 더욱 시원하고 경쾌할 수밖에 없다.

오늘의 우리 삶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도 이를테면 그런 간절함일 것이다. 모든 욕구와 욕망은 바로 해결되고 해소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일정 시간 유보되면서 자체 검증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만 지금의 세상은 그 과정을 참지 못한다. 무엇이든 즉각적으로 가부(可否)가 결정되어야 하고 결과가 도출되어야 한다. 그것을 저지하고 방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살상도 불사한다. 층간 소음이나 추월 때문에 빚어진 여러 불상사를 이미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보상도 처단도 즉각적이고 곧 아무렇지도 않게 잊힌다. 충동적인 욕구가 은근하고 지속적인 바람으로 숙성되어야 이윽고 간절함의 정점에 이를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배설처럼 해소되어 버리고 만다. 절실해질 틈이 없다.

최영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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