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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식 


                                          김언희


1

고도가

왔다


노란 옷을 입고 맥도날드 깃발을 들고


고도가 왔다

얼굴을 쳐들고 귀를 세우고 고환을 시계추처럼 흔들며


고도가 왔다 털이 다 빠진 성기를 주물럭대면서

쌍년아, 내가

위야!


뺨을 후렸다


고도가

왔다


강물을 따라 떠 내려오다가 내 몸에

터억, 걸린 시체처럼


2

왔다리 갔다리 한다 뱀가죽 코트를 입은 고도가

뱀가죽 코트를 입은 고도처럼 창문 밖을


왔다리 갔다리



=====================================================



헛된 기대와 막연한 몽상을 박살내며


                                                                                                      최 영 철


   예술작품에서 받는 감동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어서 다른 이와 공유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매주 시 한편씩을 같이 읽는 한 학기 시 강의를 마치며 학생들에게 어느 시가 가장 좋았느냐고 물어보면 일치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감동은 그만큼 중구난방이다. 다수가 합의한 진실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요인들에 의해 작동된다. 왜 그것이 좋으냐고 묻거나, 그것을 한 개인의 가치관과 연결해 보는 일은 대부분 무모하고 어리석다. 느낌이나 감동 같은 것은 돌발적이고 변덕이 심한 것이어서 일관성을 부여하기 힘들다. 아침에 좋았던 것이 저녁에 다시 보면 형편없을 수도 있고 자신의 감정 상태나 날씨 변화에 따라 그 강도가 달라질 수도 있다. 아지 못할 충동과 다양한 감정의 기복에 의해 생산되는 시나 음악 같은 장르가 특히 그러할 것이다.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나와 비슷한 경로를 밟아 완성된 시보다 나와는 다른, 그래서 좀 낯설게 여겨지는 시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걸 보면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옛말이 그러지 않다. 나의 시는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어서 딱히 어떤 경향이라고 짚어 말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나와 너를 아우르고자 하는 합일의 욕구가 강한 편이다. 상반된 두 속성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고 있는 경우에도 희구하는 바는 결국 그 둘의 화해와 합일에 맞추어져 있을 것이다. 서정시의 보편적인 행로이고 그래서 다소 진부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거기서 멀리 도망갈 수 없는 게 나의 시적 성품이요 팔자다. 그것이 답답하고 시시껄렁하게 여겨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그럴 때 꺼내 읽는 시들이 있다. 살얼음을 딛듯 조심조심 걷고 있는 나의 시에 비해 그 시들은 당당하게 성큼성큼 나아간다. 토씨 하나에도 마음이 쓰여 자주 뒤를 돌아보는 나의 시에 비해 그것들은 쭉쭉 한달음에 저만큼 가 있다. 모름지기 시인은 그렇게 극한에 먼저 당도한 자일 것이다. 더 이상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한계상황에 먼저 당도해 세계의 불화를 먼저 말하는 자일 것이다.

  세계의 불화를 감지한 시인의 발언은 두 가지 형태로 발설된다. 한 쪽은 희망을 말하고 다른 한쪽은 희망을 박살낸다. 막다른 길에 먼저 당도했으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희망의 끈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앞의 처지라면, 더 호들갑을 떨며 세계의 종말을 고자질 해 독자를 각성시키고자 하는 것이 뒤의 처지다. 두 경우 모두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희망에 대한 간절한 열망 또한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렇지만 독자를 건드리는 강도는 후자가 훨씬 강열해 보인다. 전자가 점진적인 개선을 유도하는 내과적 처방이라면 후자는 환부를 들어내는 외과적 처방이다. ‘고도가/왔다//노란 옷을 입고 맥도날드 깃발을 들고//고도가 왔다/얼굴을 쳐들고 귀를 세우고 고환을 시계추처럼 흔들며//고도가 왔다 털이 다 빠진 성기를 주물럭대면서/쌍년아, 내가/위야!’(김언희 시「일식」부분)처럼 헛된 기대와 막연한 몽상을 박살낸다. 세계를 축조하는 시가 있는 반면 이렇게 세계를 박살내는 시가 있다. 체면을 집어던지고 웃통을 벗어던지고 속 시원히 세계와 맞서는 시가 있다.

 

(현대시 08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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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즐거움   


                                                                                                  최 영 철


   1.

  지금처럼 시가 무력했던 적이 있었을까. 노래도 희망도 절절한 부르짖음도 아닌 무미한 말의 조합으로 요즈음의 시가 다가올 때가 있다. 그것을 읽을 때의 기분은 물기 없는 건조한 식빵 덩어리를 씹을 때의 느낌과 같아서 단지 문자의 조합을 해독하고 있다는 자의식에 빠지곤 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말라비틀어진 일상의 한 굴레처럼, 무슨 아지 못할 의무감이나 습관으로 시를 읽는 행위에 불과하다. 배고프지 않아도 꾸역꾸역 밀어 넣어두는 한 끼 식사처럼, 현란한 불빛을 견디지 못해 쏟아놓은 한 알의 무정란을 삼키는 기분이다. 그것을 주변 상황의 변화 탓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세계의 갈등은 더 첨예하고 깊어졌을망정 해결되고 해소된 것은 없어 보인다. 훨씬 다양하고 풍요로워진 대중문화가 선사한 위무의 방식에 빠져 잠깐 우리는 어떤 환각에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치열하지 않고 독자는 절실하지 않다. 

  대전환의 시대, 문학의 상상력은 그 앞에서 참패를 당하기 일쑤다. 과학문명은 문학적 상상력을 추월해 질주하고 있다. 추리소설이나 공포소설의 상상력을 앞질러 현실은 훨씬 더 엽기적이고 추악하다. 가상현실과 실제현실의 구분 역시 모호하다. 오늘의 삶이 당면한 혼란들은 그 와중에 빚어진 혼돈의 결과물이다. 진지한 시는 어른들의 고루한 훈계처럼 무력하고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욕망, 시인과 작가의 욕망은 더 과도해졌다. 그것이 더 좋은 글을 쓰게 하는 촉매가 된다 할지라도 과도한 문학적 욕망은 시야를 흐리게 하는 독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많은 시인이 배출되고 있고 많은 시가 발표되고 있다. 십년 전에 비해 그 양이 족히 두세 배는 될 것 같고, 이십년 전에 비해 대여섯 배는 될 것 같다. 문예지나 시집의 시들을 건성으로 읽고 넘기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게라도 읽어내는 것이 예의라고 여겼겠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예의가 아니었을 것이다. 시인 본연의 자의식으로 공급과 소비의 이 불균형을, 과도하게 남발되고 있는 이 감정의 부산물들을 의심해야 할 때가 되었다. 시는 편승과 동조가 아닌 자발적 고립과 역행의 방식이고 그것은 순응으로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단호하게 포기할 때 가능해진다.

   

  2.

  서정시는 어떤 결여의 상태에서 촉발한다. 시적인 것이 유발되는 상황은 유有보다 무無, 득得보다 실失, 부富보다 빈貧, 상승보다 하강에 가깝다. 시는 상실과 결여를 씨앗으로 피어나는 꽃이다. 떠나버린 기차가 이제 막 진입해 들어오는 기차보다 아름다우며 만개한 꽃보다 떨어져 휘날리는 꽃이 더 아름답다. 시는 승승장구하는 것에 가깝지 않고 기울고 저물며 떨어지는 것에 가깝다. 시는 솟구치고 범람하는 것들을 거부하고 냉소하며 회의하고 의심한다. 충만한 사랑을 노래한 시는 채 획득하지 못한 사랑에 대한 갈망의 표현일 것이며 축복과 찬사의 노래 역시 그런 절정으로 나아가려는 희구의 몸짓이다. 그것들이 우리 앞에 충분히 주어졌더라면 지금 꽃핀 열망과 찬탄의 언어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의 모든 감탄사와 형용사들은 그러므로 우리를 무수히 스치고 간 결여의 상처를 거름으로 하여 핀 꽃이다. 그런 결여의 감정이 그리움을 낳고 그 그리움은 지속적인 추구를 낳는다. 시인은 그 과정을 운영하고 견디는 자이다. 그것은 나무의 성징과도 같다. 한 자리에서 온 세계를 끌어안으려는 자세가 그러하고 자신에게 몰아치는 풍상을 묵묵히 견뎌내는 자세가 그러하다. 시인과 나무는 견디며 흔들리고 견디며 꽃 핀다. 그리고 견디며 울부짖는다. 

  서정시는 머리를 통한 의식적 작동이 아니라 가슴을 통한 무의식적 파장에 의해 쓰여진다. 느닷없이 터져 나온 웃음이나 자제할 겨를도 없이 솟구친 눈물처럼 불현듯 터져 나온 것들이다. 기승전결의 절차가 없고 논리적 설득을 위한 일반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불쑥 솟구친 기쁨과 슬픔, 찬탄과 비탄의 감정을 아닌 밤의 홍두께처럼 쏟아낸다. 시의 독자는 이 돌발적 상황에 주춤거리고 놀라고 동요하면서 시가 일으키는 회오리바람에 압도당한다. 때로 가던 길을 멈추기도 할 것이고 뒤를 돌아보기도 할 것이고 길바닥에 망연자실 주저앉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독자로서도 예측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시의 작자 역시 예측한 상황이 아니었다. 독자에 따라 어떤 이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자신의 길을 가로막은 시를 걷어차 버리기도 할 것이다. 시의 위의는 그러한 다의적 반응에 있고 어떤 특정한 의미를 무시하고 뛰어넘는 지점에 있다. 그것은 한 갈래로 곧게 뚫린 길을 의심하고 질문하게 하며 그 질문은 혼돈과 상실과 절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편의 아름다운 시는 이 과정에서 발화되고 그 고통스러운 반복을 통해 완성된다. 

 

  3.

  나의 시는 결실과 풍요를 노래하지 않는다. 영글어가는 나락 물결과 탐스럽게 익은 과실을 노래하지 않는다. 수확과 충만을 노래하지 않으며 높고 청아한 하늘과 맑은 새소리를 노래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곧 다가올 퇴락과 소멸의 지점에 먼저 마음이 가 있다. 모든 결실과 절정은 곧 다가올 파국에 대한 불안과 상실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의 시는 아지 못할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 또는 뻔한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나날의 일상들과의 줄다리기이다. 막연한 희망과 절망을 보다 절실하게 구체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내가 붙잡고 있는 그 끈은 자신을 옭아매는 힘겨운 오라일 수밖에 없다.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오라를 쉽게 놓을 수 없는 것은 누가 명령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그 끈을 움켜잡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처음 부여잡던 각오 그대로 쉼 없는 자기갱신으로 더욱 단단히 더욱 팽팽히 그 끈을 바투 쥐어야 할 책무가 나에게는 주어져 있다.

 

  4.

  우리 동네에 작은 반찬가게가 하나 있다. 동네 길목 여기저기 너덧 개였던 반찬가게가 인근에 대형할인점이 생기면서 그 중 하나만 남았다. 장사가 신통찮을 것인데도 그 집 아주머니의 일과는 조금도 변화가 없다. 늘 좁은 가게 한 귀퉁이에서 반찬거리를 다듬고 있다. 기껏해야 천원짜리 한두 장 들고 두부나 콩나물 같은 걸 사러 가는 나에게도 꼭 두 손으로 물건을 건네고 잔돈을 내어주며 고맙다고 허리를 숙여 인사 한다. 나는 가끔 대형할인점에서 한보따리 먹을 걸 사가지고 오며 참 단정하고 고운 그 아주머니의 사는 모습에 죄 지은 기분이 된다. 그 아주머니가 정말 시인이라고 생각했다. 대형할인점과 자신의 처지를 견주지 않고 감사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어쩌다 필요해서 대형할인점에 가는 사람들을 탓하지 않고 웃으며 봐주는 것, 다른 장사에 비해 돈이 되지 않는다고 서둘러 가게를 때려치우지 않는 그 아주머니가 정말 시인이었다. 나는 그 아주머니가 손수 키우고 다듬은 콩나물과 푸성귀들을 사러 갈 때마다 나 역시 저러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가끔 찾아오는 시의 손님들을 기다리며 정갈한 손작업을 멈추지 않는 수공업자가 되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큰길가 대형할인점 앞에 난전을 펴고 싶은 충동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고 있다. 

  나태주 선생은 언젠가 시골에 살며 시를 쓴 것을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로 여긴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다. 일찍이 변방을 떠돈 백석이 그러했고 월든 호숫가에서 살다간  소로도 그러했다. 아직 우리가 변방에 있기 때문에, 돈 안 되는 시를 붙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돈이 망쳐버린 세상은 이렇게 돈 안 되는 것들이 조금씩 치유해 나갈 것이다. 21세기의 거대한 욕망들과 맞서 버틸 수 있는 힘도 변방에 사는 자의 이런 우직한 희망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시의 속도는 그래서 번영과 질주의 고속전철이 아니라 필요할 때는 멈추고 뒷걸음질도 칠 수 있도록 천천히 나아가는 마을버스의 속도에 가까워야 한다. 그것은 독주가 아닌 동행의 속도이다.

   그러므로 나는 변방에 사는 내가 무척 다행스럽다. 그것은 둔재로서의 자기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욕망의 소용돌이가 있는 중심부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는 변방의 언어와 변방의 세계인식을 밑천으로 하여 쓰여 진다. 중심에서 유통되는 표준의 언어와 세계인식이 인위적으로 걸러지고 규정된 것인데 반해 변방의 그것들은 자연발생으로 터져 나와 유통되고 있는 지금 여기의 것들이다. 그것들은 한 사회가 규정한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때로 그것에 딴지를 걸며 중심의 언어와 세계인식이 가진 허위를 까발리고 극복한다. 텔레비전 개그프로에서 보듯이 그 변방의 언어들은 무엇에 감격하고 무엇을 비난하고 풍자할 때 더욱 적절한 효과를 발휘한다. 이와 달리 표준의 언어는 매끄럽고 부드럽게 정제되어 무리 없이 유통되기는 하지만 진실을 전달하기에는 역부족일 때가 있다. 경우에 따라 자신의 진심을 은폐하는 가식의 언어로 쓰이기도 한다. 변방의 언어는 채 다듬어지지 않은 모나고 울퉁불퉁한 굴곡을 가졌지만 그렇게 마모되는 것을 거부하며 긴 시간을 자생해온 진정성의 언어이기도 하다. 표준어는 그것을 공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청자만을 설득하고 감동시키지만 변방어는 아닌 밤의 홍두께처럼 질서정연하게 놓여진 고요한 평화를 들쑤시고 깨부수며 발설된다. 거기에 찬탄과 비통을 담은 시의 언어가 있다. 이런 속성은 시가 가진 절실성의 감정, 비표준과 비정형을 추구하는 세계인식과도 일맥상통한다. 나는 그것을 지키기에 용이한 변방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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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단] 

봄에서 봄으로

                           최영철


[早春]

봄을 몰고 오는 새 후투티를 불러놓고

후둑후둑 겨울새 날아간다

가장 먼저 돋는 풀 냉이 개불알 깨우며

쑤욱쑤욱 한줄기 훈풍이 지나간다


[盛夏]

해는 중천

그림자는 발아래

째앵째앵

땀 말리는 은방울꽃


[晩秋]

그렇게 주고도 더 줄 게 남아

바람은 칭칭 옆구리 감으며 오네

그렇게 받고도 더 받을 게 있어

단풍은 멈칫 손 내밀고 섰네


[冬至]

긴 겨울밤이 빚은 새알심 속으로

까무잡잡한 아이 하나 걸어 들어갔다

새알심 팥죽 먹고 덩더쿵

긴 밤 달과 별 만나 덩더쿵




▶시작노트 - 하루의 시간은 일출을 향해 있고, 모든 계절은 봄을 향한 기대로 부푼다. 일 년 열두 달은 일월의 열망에 기댈 것이다. 지금의 다짐을 쉽게 잊지 않도록 하자.


▶약력 -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0년 백석문학상 수상. 시집 '호루라기' 외.




입력: 2008.01.0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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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08.1/

 

다른 경향의 시 읽기/ 김 언

 

 


토마토

 

                    최 영 철


  아무것도 없더니 아기 불알만 하구나 아기 불알만 하더니 아기 주먹만 하구나 아기 주먹만 하더니 아기 머리통만 하구나


  흙빛이더니 연초록이구나 연초록이더니 연분홍이구나 연분홍이더니 발갛게 발갛게 다 끓어 넘쳤구나


  몇 날 며칠 삼킨 해를

  한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터질 듯한 너의 볼

 

-------------------------------------------------------------------

 


  *모든 시는 나의 시와 반대여야 한다

  모든 시는 나의 시와 반대여야 한다. 이 과도한 욕심이 시를 포기하게 만들고 내일이면 다시 미련을 남기고 무언가를 끝없이 끼적인다. 그것은 한 단어일 수도 있고 한 문장일 수도 있으며 무지막지하게 긴 산문이 될 수도 있다. 그걸 시라고 발표하면서 나의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를 겨냥할 필요는 없다. 일단 써놓고 보면 모든 것이 반대쪽의 글이다. 어딘가의 반대쪽에 있는 글은 그래서 매일 탄생한다.


                               *

  두 점 사이에 직선 하나가 지나간다. 떨어져 있는 두 점 사이를 정확히 이등분한 자취를 따라가면 그것이 또한 직선이 된다. 어떠한 점도 직선을 사이에 두고 그 반대편에 대칭이 되는 점을 가진다. 따라서 점은 무한한 수의 반대편 점을 가진다. 당신이 무언가를 썼다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점처럼 희미하게 빛나는 위치를 가진다면 그것은 나머지 모든 글들과 반대되는 지점을 스스로 간직하게 된다. 그러니 애쓰지 말라. 당신의 글은 이미 유일무이하다. 어떤 지점에서도 반대되는 글을 지금 쓰고 있지 않는가.


  사실, 모든 면에서 나와 반대되는 인간은 거울 속에 있다. 모든 면에서 똑같은 그가 나를 반대하고 있는 현상이 반갑기도 하고 달갑지 않기도 하다. 궁금하기도 하고 식상하기도 하다. 이상李箱 이후로  나의 흥미는 거울 속에서 멀어졌다. 거울 속의 그 인간도 더는 나를 유심히 쳐다보지 않는다. 다른 인물을 찾자. 다른 시를 얘기하려고 오늘은 잡지 몇 권을 뒤적거렸다.

 

                             *

  반대편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극과 극이다. 나의 극은 죽음에 있다. 살고 싶으니까. 누군가의 극은 삶에 가 닿는다. 죽음을 보았으니까. 극과 극이 통한다는 말. 식상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이미 다 아는 얘기를 하는데도 계속 눈길을 끄는 시가 있는가 하면,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도 외면하기 힘든 시가 있다. 둘 다 시선을 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이미 다 아는 얘기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얘기. 불필요한 이항대립을 또 하나 끌어들이자면 우리가 읽는 시는 크게 이 두 갈래로 나뉜다. 매력적인 시는 이 두 갈래와 무관한 지점에서 빛난다. 자꾸 눈길을 끄는 시가 있으면 그것이 당신에게 좋은 시이며 매력적인 시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느냐 못 알아듣느냐는 차후의 문제다. 다 알면서도 빠져드는 매력과 뭔지 모르겠지만 자꾸 빠져드는 매력. 나의 피가 끌리는 매력은 후자이지만, 전자의 매력 앞에서도 종종 마음을 뺏기는 나를 본다. 나무랄 생각은 없다.


                                 *

  토마토는 둥글다. 근래에 읽은 「토마토」라는 시도 둥글다. 둥글고 둥근 세계가 하나의 극점을 향해서 치닫는다. 마치 해처럼 끓어 넘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아기는 자라고 토마토는 하루가 다르게 굵어지고 그 빛깔은 발갛게 발갛게 익는다. 절정의 순간에 들어와 있는 토마토. 너의 볼 속에서 터지는 그것을 해라고 한들 나는 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터질 듯한 너의 볼을 다시, 해라고 한들 나는 고개를 가로저을 생각이 없다.


                                *

  이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이야기. 이것은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을 키워주면서 부풀리는 이야기. 거기서 우리는 삶의 한 정점을 보고 죽음의 반대편에서 빛나는 눈부심을 보고 잠시 웃는다. 아주 잠시 죽음을 잊게 하는 이 시를 두고 내가 써 왔던 유령의 시들이 언짢아해 할 이유는 없다. 아주 잠시 고개를 끄덕이다가 툴툴 털고 나오면 된다. 유령도 헤어 나오기 힘든 삶의 눈부신 매력을 오물오물 씹다가 뱉을 것인가 삼킬 것인가. 불필요한 고민이 불필요한 시를 키운다. 그것도 토마토라고 익는다. 이렇게, 이렇게 반대편의 시를 또 궁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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