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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음의 쓸모있음, 쓸모있음의 쓸모없음 


최 영 철


   과민한 탓이겠으나, 시 쓰는 일이 공허하고 초라하게 여겨질 때가 많다. 어떤 식으로든 시의 쓸모를 스스로 규명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줄곧 그랬지만, 누가 나를 시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면 괜히 부끄러워져 쥐구멍이라도 찾아들고 싶어진다. 그 부끄러움의 저변에는 그들에게 아무 쓸모없는 노동으로 비쳤을 시 쓰는 일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다. 한때의 시인들은 그런 시선에 초탈할 수도 있었겠으나 실용적인 가치가 지배하는 지금 그런 모면책은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시 산업의 제자리걸음과 퇴보는 시적인 과장과 임기웅변, 턱없는 자존심으로 버텨온 시인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렇다 할 기득권이 없는 오늘의 시l인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근본적으로 시는 늘 맨주먹으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신성분들, 출생 학력 경력 등 예전에 그러저러하였다는 것은 시인에게 무용지물이다. 늘, 지금, 새롭게, 다시 출발해야 하는 시인에게 그 장신구들은 언제나 무용지물이다. 수중에 다소간 거머쥔 것이 있더라도 헌신짝처럼 그것을 떨쳐버려야 하는 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다른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경륜과 자산을 축적하고 거기에 기대는 행위는 당연한 일이지만 시에서는 그것이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된다. 시는 배가 불러 뒤뚱뒤뚱 뒷짐을 지고 가는 거드름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방식이다, 이제 좀 살만해져 한숨 돌리려는 상황을 비난하고 비판한다는 점에서 시는 정말 인장사정이 없는 양식인 것도 같다. 그래서 더 두렵고 만만치 않은 방식인 것도 같다.

    급격히 진행된 인간성과 환경의 파괴는 쓸모있는 것만 추구한 기술문명이 낳은  패악이었겠으나 최근 그에 대한 반성의 징후 또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도심 하천을 정화하고 녹지를 만드는 일, 주말농장을 일구고 자연의 생명을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 느림과 멈춤과 양보의 가치를 인식하게 된 것. 그러나 그런 생각들의 처음과 끝은 인간을 위한 발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지구를 망가뜨린 죄에 대한 대오각성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기위한 또 하나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주인이 인간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지금 잠깐 취해보는 화해의 몸짓으로는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시인들은, 그러한 문제들을 감응하는 인지능력과 해결하려는 자정능력이 누구보다 빼어나야 한다. 지금의 나는 그 감각이 둔해졌거나 그 몸가짐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반성한다. 병든 세계를 끌어안고 아파하지 않고 자기 일신만을 아파하지 않는지 반성한다. 찬밥 신세인 시의 밥그릇을 더 많이 먼저 차지하려고 안달이 나지는 않았는지 반성한다. 시의 쓸모를 빌어 그 안에 안주하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한다. 급기야 그 쓸모의 덕으로 시를 통해 무엇인가를 거머쥐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한다.  

   시인의 과업은 씨를 뿌리는 것으로 족하다. 그 결실과 파장을 의식하면 씨앗을 뿌리는 일에 이런저런 계산이 개입될 것이다. 기왕이면 안정되고 수확 많고 시장성 있는 품종을 좋은 자리 골라 심게 될 것이다. 약을 치고 쓸데없는 가지치기를 하고 접을 부쳐 최대한의 소득을 계산할 것이다. 시의 본령은 소득을 계산하지 않는, 소득을 헌신짝처럼 여기는데서 출발한다. 시의 현실적 쓸모는 그런 쓸모없는 생각들에 있었고 그 순수성이 시를 이만큼 장수하게 했다. 시를 쓰는 나의 즐거움 역시 쓰는 과정에 겪는 이런저런 고통이면 족할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면서도 나의 노동은 다른 노동에 비해 소출이 너무 빈약해 보여 마음이 흔들린다. 배고픈 이의 양식이 될 수도 없으며 나의 양식이 되지도 못한다. 내가 선택한 일이므로 나 하나의 불우는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이겠으나 나를 쳐다보고 사는 가족들에게는 참으로 무능한 가장이 되어버렸다. 생각할수록 시 쓰기의 나날이 공허하고 궁색하다. 그렇지만 그렇게 흔들리며 갈팡질팡 가는 것이 시의 길이라고 나는 나를 위로한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즈음 처가 근처의 잡풀이 무성한 야산 한 귀퉁이를 얻었다. 최근 그 땅을 개간하러 다니면서 다시 생각을 다잡고 있는 중이다. 시골 장터에서 삽과 호미 등 간단한 농기구 몇 가지를 사서 밭 가장자리부터 개간을 시작했다. 경사가 지고 풀이 무성한 땅은 자신을 방치한 세상에 항거라도 하듯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풀풀 흙먼지가 날리고 돌멩이들이 수북했다. 무엇을 심겠다는 계획도 없이 밭 전체를 뒤덮고 있는 풀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동네 한의원에서 얻은 약 찌꺼기를 뿌려 흙의 기운을 북돋았다. 농기계를 불러 일을 시키면 한나절이면 해결될 일이었으나 아내와 나는 여러 날에 걸쳐 그 지루한 손작업을 계속했다. 하루는 올무를 끊고 도망간 산돼지의 뒤를 사냥총을 들고 �아온 동네 사람이, 우리가 개간한 밭고랑을 둘러보며 이걸 다 직접 손으로 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는 쯧쯧 혀를 찼다. 모자라도 많이 모자란 사람들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손작업을 하는 것이 땅에 때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이제 막 어설픈 경작을 시작하면서 기계로 땅을 갈아엎는 것은 초보자가 할 도리가 아니었다. 초보자 주제에 땅을 놀라게 하고, 그 땅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 고라니와 풀벌레 같은 산 동무들을 놀라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시작해 묘목을 심고 감자 고구마 토마토 무 배추 등의 작물을 조금씩 심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수확을 내지는 못했다.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땅은 생명을 품기에 아직 버거웠고 김을 매고 농약을 치지 않는 게으른 농사는 잘해야 우리 두 사람이 두어 번 맛볼 정도의 수확만을 허락했다. 고구마는 모두 산 동무들의 먹이가 되었는데 그것들을 심느라 들인 공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질 일이기도 했으나 나는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누구든 배고픈 생명이 먹었으면 된 것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내가 유기농으로 가꾼 것이라고 자랑도 하고 싶었을 것이나 위급한 생명들이 먹고 굶주림을 면했으니 더 잘된 일이 아닌가. 좀 더 쓸모있는 행위로서 시의 독자들에게 공치사를 받고 싶었을 나의 욕망을 그 산 동무들이 깨우쳐 주었다. 인정받고 보상받기를 원하는 순간, 또 그 재미에 서서히 빠져드는 순간, 나는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 우리가 경작한 밭을 다녀간 산 동무들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그들이 고맙게 잘 먹었다고 답례를 하지도 않았지만, 또 그 숫자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겠지만, 어설픈 나의 올해 농사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나의 농사는 어차피 본전이 빠지지 않는 밑지는 과업이다. 묘목과 씨앗 값에, 하루 품삯과 교통비에, 아무리 따져도 본전을 뽑을 수 없는 밑지는 과업이다. 시 쓰는 일 역시 그러할 것이다. 아무리 수지타산을 맞추어 보아도 이 역시 본전이 빠지지 않는 밑지는 과업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밑지는 농사를 그만둘 생각이 없고 오랫동안 밑져왔던 시를 그만둘 생각이 없다. 배고픈 산 동무들의 양식이라도 되었다면 나의 농사는 헛되지 않은 것이고 마음 고픈 몇 사람의 양식이라도 되었다면 나의 시 쓰기 역시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 효과가 미미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오래 쓸모있는 것은 본디 그렇게 미미한 법이다. 그리고 지금 쓸모있는 것일수록 나중에 쓸모없는 게 될 공산이 크고 더 깊은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생각들을 일깨워 준 것은 버려진 야산에서 만난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쓸모없다고 걷어냈던 돌멩이들을 다시 주워 가냘픈 묘목들의 테두리를 만들어 주었고, 잡초라고 무시했던 풀들과 냄새나는 오물은 썩어 좋은 거름이 되었다. 오히려 도시에서 가져간 쓸모있는 용품들이 곧 처분이 불가능한 쓸모없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시평 07 겨울 권두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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