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방랑자 고양이 그리고 이상한 호모 새

 

                                                                                                      최 영 철

 


  [방랑자 고양이]

  저녁 막고 담배 피우러 마당으로 나갔더니 담장 위에 새끼 방랑자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지난번 고기 몇 토막을 준 후로 쥐새끼를 세 마리나 물어다 놓은 녀석이었다. 그때 내가 밥 주며 잔소리를 좀 했었다. “이 놈아, 이걸 왜 네게 상납하는 거냐. 이걸로 쥐포 해 먹으라는 거냐 뭐냐. 또 이런 걸 물어 오면 다시는 국물도 없을 줄 알아.”했었다. 그 놈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다시는 그런 쓸데없는 살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저녁은 국수를 먹은 터라 그 놈에게 딱히 줄 게 없었다. 엊그제는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속이 하도 허해서 짬뽕을 시켜 먹었는데 아마 우리 부부생활  25년동안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모처럼의 배달 짬뽕이었다. 그런 귀한 짬뽕을 아내와 맛있게 먹고 있는데 현관 앞에 그 방랑자 고양이가 코를 박고 우리의 식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보나마나 국물이라도 좀 얻어먹을 심산이었다. 그래서 나는 모처럼의 짬뽕을 다 비우지 못하고 슬그머니 그릇을 내려놓고 말았다. 아내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한달음에 그릇을 비우고 있었다. 짬뽕 한 그릇 제대로 사주지 못한 내 죄가 컸다. 나는‘양이 너무 많은 것 같애,’어쩌구 하면서 남은 짬뽕을 문앞에 기다리고 있는 새끼 고양이에게 주었었다. 

  그렇게 저렇게 낯을 익혀서인지 오늘도 그 방랑자 고양이는 도망도 가지 않고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을 뭐 줄 거 없냐?  줄 거 있으면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주라. 나도 사무가 바쁜 놈이야.’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미안하다 자식아. 오늘은 정말 멸치대가리도 하나 없는 맨 국수 먹었다.’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녀석은 훌쩍 담장을 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그 방랑자 고양이가, 먹을 걸 주기 때문에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정말 인간적으로 친해보고 싶어서였으면 좋겠다.


  [이상한 호모 새]

  오늘 아침 사과 한 알을 깎아놓고 자기들 몫을 주려고 새장으로 갔더니 두 놈이 나란히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저 세상으로 간 것이었다. 우리에게 온 것이 1년도 안 되었으니 너무 짧은 생이었다. 그런데 얄궂게도 한날 한시에 갈 건 또 뭐란 말인가. 사랑 때문이라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그놈들은 같은 수컷인데다 하나는 카나리아고 하나는 금화조로 족보도 엄연히 달랐다. 그것들의 암컷도 비슷한 시기에 몇 차례 거듭해 알을 놓다가 몇 일 사이로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었다. 그 이후 남은 홀아비들을 한 둥지에 합방시켜 주었는데 아주 의좋게 살았던 놈들이었다. 횟대에 나란히 앉아 있거나 둥지에 나란히 들어앉은 놈들을 보며 우리는 그것들을 호모라고 놀렸었다. 조금전 그것들을 곱게 싸서 매화나무 아래 묻어 주고 왔다. 내년 봄 매화 두 송이로 다시 살아날 것을 빌면서.

  그런데 그놈들이 왜 한날 한시에 갔는지 그게 도통 모를 일이다. 지난 여름 매화나무 아래 묻었던 카나라이와 금화조 암컷들이 아직 일편단심으로 수컷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얼마나 배신감을 느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

'詩와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 화답  (0) 2008.02.28
수동씨, 찜질방 가다  (0) 2008.02.17
새로워진다는 것  (0) 2008.01.31
아프리카  (0) 2008.01.22
우유부단을 위한 변명  (0) 2008.01.19
728x90
 

새로워진다는 것


                                                                 최 영 철

                                                    


  다시 새날이 밝았다. 해맞이를 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올해도 어떤 처연한 엄숙성을 느꼈다. 아득하고 막막하기만 했던 지난 시간을 넘어, 사위어가는 자기 안에 다시 희망의 불씨를 지피려는 행렬이었다. 오늘이 어제와 다르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구이며 그 열망에 기대어 인류의 역사는 진일보했다. 거기에는 다소 과도한 기대와 갈망이 있을 수 있고 어제의 자기를 뉘우치지 못하는 뻔뻔스러운 출발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루, 한 달, 일 년의 시간 구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런 구분과 경계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일직선의 전진, 뒤돌아보지 않는 승승장구만을 거듭했을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한번 더 가늠해보는 일은 구분과 경계가 있어서 가능했다. 줄기차게 달려가다가 숨이 가빠 잠시 멈추고 싶어도, 길의 방향을 바꾸고 싶어도, 숨고르기를 할 마땅한 지점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국 파국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리라.  

 

  아무 시작도 없는 하루, 아무 다짐도 없는 한 달, 아무 뉘우침도 없는 일 년은, 새롭게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새로운 출발이 아니다. 그것은 막연히 주어진 지난 시간의 연속일뿐 다시 주어진 기회는 아니다. 멈출 수도 없고 뒤를 돌아볼 수도 없고 훌쩍 뛰어넘을 수도 없이 무료하게 주어진 시간이다. 그것을 배에 비유한다면, 배에 올라탄 이는 감각을 운용할 권한을 빼앗긴 청맹과니와 흡사하다. 배의 진로를 바꾸거나 속도를 조절할 아무런 장치도 그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배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계속 나아가고 있어서 한동안은 무척 대견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졌겠지만 그런 조건이 얼마나 형편없는 악조건인지를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주변 경관이라도 살필 수 있게 조금만 더디게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도, 때마침 눈에 띈 모래톱 근처에서 잠시 쉬었다 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갈망에는 아랑곳없이 배는 조금도 멈출 기세가 아니었고 점점 가속도가 붙었고 어느 모퉁이나 낭떠러지에서 좌초하고 말았으리라. 물길을 거슬러 승승장구하는 고속 엔진의 배보다 낡고 더딘 노 젖는 배가 더 다행일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상대적 박탈감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심각한 수위에 도달해 있는 듯하다. 일부의 최상위층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신이 턱없이 가난하다고 믿고 있고,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의 대다수는 상대방이 틀렸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국민 대다수는 능력에 비해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권력과 부와 명성을 가진 자에 대한 불신의 골이 어느 때보다 깊어 보인다. 상대방의 업적을 존중하고 인정하지 못하는만큼 자신에 대한 상실감도 크다. 남의 성과를 납득하지 못하는만큼 자신의 성과에 대한 만족도가 낮다. 자신의 상실이 자신의 과욕과 게으름과 무능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부당한 성취에 따른 박탈이라고 여긴다.

 

  나의 기대치가 성급하고 과도하지는 않았는지, 떠오르는 해를 향해 물었다. 나보다 더 가지고 더 누리는 사람들에 대한 시기와 미움은 없었는지, 그들의 성취를 비도덕적인 것으로 매도함으로써 무능한 나를 위로하고 합리화하지는 않았는지를 물었다. 분명 나에게도 그런 여지는 있었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옹졸하고 못된 티끌을 완전히 걷어낼 용기는 없었다. 나는 아직 그것들을 최소한의 전진을 위한 필요악의 에너지원으로 믿고 있는듯 하다. 그런 나를 용서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집 근처 수령 오백 년의 수영성 푸조나무는 이제 막 그 무성하던 잎을 다 떨구고 알몸이 되었다. 다른 낙엽수들이 늦가을이면 모두 떨구어내는 잎을 그 고목은 겨울이 깊어질 때까지도 계속 떨구어냈고 새해 아침에 이르러 마침내 그 일을 완결했다. 그렇게 알몸이 되어서도 더 떨굴 것이 남았다는 듯 앙상한 가지를 연신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 고목이 떨군 것은 잎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길들여졌던 자기 안의 낡은 권위와 습성이었을 것이다. 오백 년의 봄 여름 가을 동안 누렸던 무성하고 화려했던 시절만큼 그것을 떨쳐내는 일 또한 길고 힘겨웠으리라. 올해 겨울도 잊지 않고 그 일을 수행한 나무의 쇠락은 상실이 아닌 충만이었다. 무엇을 비우는 일이 다른 무엇을 새롭게 채우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고목에게서 배운다. 

 

  그 푸조나무를 지나 팔도시장 난전을 한바퀴 돌았다. 한겨울 바람은 매서웠고 난전에 펼쳐 놓은 푸성귀들은 다 팔아야 몇 만원이 될까말까한 것들이었지만 상인들의 몸에서는 더운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무 것에도 견주지 않고 누구를 탓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생으로서만 투철한 몸에서 피워낸 후끈한 열기였다.


'詩와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동씨, 찜질방 가다  (0) 2008.02.17
방랑자 고양이 그리고 이상한 호모 새  (0) 2008.02.08
아프리카  (0) 2008.01.22
우유부단을 위한 변명  (0) 2008.01.19
헛된 기대와 막연한 몽상을 박살내며  (0) 2008.01.17
728x90

 

아프리카

 

                                                                              최 영 철

 

 

  몸살로 여러 날 아프다 아프니까 내가 살아 있다 아프지 않을 땐 내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아프지 않을 땐 내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맥박은 뛰는지 숨은 쉬는지 몰랐다 아프니까 할딱거리는 내가 들렸다 할딱거리는 내가 만져졌다 약을 타려고 줄선 구부정한 뒤통수가 보였다 살려고 죽을 퍼 담고 있는 쪼그라든 부댓자루가 흔들렸다 아프니까 며칠 전 들은 아프리카 생각이 간절했다 할례를 한 엄마 품을 통과하느라 작게 작게 만들어진 아이들이 어두운 교실 바닥에 따개비처럼 붙어 책을 읽고 있다 폭삭 늙어버린 아버지들이 밀림으로 가고 있다 아프니까 아프리카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처녀들이 더 새까매졌다 아프니까 아프리카가 된 것인지 아프리카니까 아픈 것인지 아프리카가 아프니까 나도 아픈 것인지 내가 아프라고 아프리카가 한 발 먼저 아팠던 것인지 모르겠다 아프니까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아프리카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해주지 않는다 나도 이제 아프니까 어느 날 그만 아프리카로 가봐야 하지 않을까 아프리카처럼 새까맣게 누워 있어야 하지 않을까 눈만 번득이다가 그것도 안 되면 이빨만 희게 빛내다가  아프리카를 지고 좀 더 큰 병원으로 가 봐야 하지 않을까

 

문학동네  07 가을

 

 

 

---------------------------------------------------

 

 

아프리카는 너무 멀리 있지만,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앞으로도 가볼 기회는 영영 없을 것 같지만, 아프리카와 나는 이미 하나가 되었다. 이미 은밀하게 교접하였다. 상대를 짓밟지 않고도, 상대의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도 이렇게 내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고통이란 징검다리가 고맙다. (최영철)     

 

(작가, 2008 오늘의 시, 시작노트)

 

 

---------------------------------------------------

 

암은 차라리 축복이라는 암환자의 말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암이 사람에게 탐욕과 성공의 노예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람을 살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아파야 자기 몸의 존재를 인식할 것입니다. 물과 공기가 희박해야 물과 공기의 중요성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화자는 아프니까 아프리카 생각이 난다고 합니다. 아프다는 말에서 아프리카를 연상하는 겁니다. 흡사한 음을 다른 의미로 전이시키는 방법입니다. 굳이 언명하자면 유사음이의법이라고나 할까요? 아프리카는 실제 아픈 생활을 하고 있다는 심상을 여러 사람에게 제공하고 있어서 이러한 상상력에 공감이 갑니다.

몸살로 여러 날 몸이 아픈 화자는 유사음을 통해 자신의 심상에 남아 있는 아픈 아프리카를 떠올립니다. 아프리카에 대한 사유가 깊어지면서 화자와 아프리카는 일체가 됩니다. 아픈 것이 나이자 아프리카이고, 내가 아프리카이자 아픈 것입니다. 나 자신을 진지하게 만나야 본성이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종교의 원리와 같은 말이겠지요. (공광규) 

 

 (시선 07 겨울 좋은시)      

 

 

'詩와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랑자 고양이 그리고 이상한 호모 새  (0) 2008.02.08
새로워진다는 것  (0) 2008.01.31
우유부단을 위한 변명  (0) 2008.01.19
헛된 기대와 막연한 몽상을 박살내며  (0) 2008.01.17
변방의 즐거움  (0) 2008.01.17
728x90
[아침숲길] 우유부단을 위한 변명 /최영철
결단도 좋지만 장고도 '미덕' 경부대운하도 숙고에 숙고를

 
90년대 초반, 부산 중앙동을 거점으로 하는 '우유부단파'라는 정체불명의 조직이 있었다. 보스는 출판사 대표인 선배시인이었고 조직원은 나를 비롯한 몇몇 젊은 시인이었다. 조직의 행동강령이나 사업내용은 없었으나 좌우명은 '우유는 자를 수 없다'였다. 모두 자타가 공인하는 후줄근한 인물들이었다. 어깨는 축 처지고 눈빛은 우수에 젖어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우유부단이라는 한 유파를 자처했던 것은 오랫동안 대세를 유지해온 결단파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내가 성장한 지난 60, 7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가 그러했다. 인사성과 예의범절은 깍듯해야 했고 기나긴 훈시에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언제 어디서든 예와 아니오를 신속 정확하게 표현해야 했다. 잠시 주저하거나 딴 생각을 품을라치면 어김없이 몽둥이가 날아왔고 열등생의 낙인이 찍혔다.

나는 그렇게 몸서리를 치며 통과해온 그 일사불란이 여전히 싫다.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양단간에 어서 결정을 내리라고 종용하는 그 강압이 싫다. 그렇게 망설이고 주저하는 동안 대열은 저만큼 앞서가고 있었고 나는 계속 세상의 꽁무니를 쫓느라 허덕거리는 한심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렇지만 그 게으른 요령부득을 반성하거나 개선할 생각은 없다. 세상은 절대 간단명료하거나 단순하지 않다는 확신을 더 깊이 뿌리내렸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때 우리가 표방했던 우유부단은 미미하긴 해도 세상에는 결단파뿐 아니라 우리 같은 비결단파 또는 반결단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노력이었다. 세상을 망쳐놓은 것은 오히려 매사에 유능하고 딱 부러졌던 결단파라는 걸 온몸으로 주장하고 싶어서였다.

그 시절 우유부단파의 실천은 밥을 먹으러 갈 때 가장 잘 드러났다. 서너 명이 나서면 다른 사람들의 곱절 가까이 시간이 걸렸다. 우선 무엇을 먹을 것인가, 어느 식당에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서로 결정권을 양보했고 이런저런 조건들 사이에서 망설여야 했다. 어제는 이 골목에서 먹었으니 오늘은 길 건너편으로 가보자는 의견, 저 집은 우리 아니라도 손님이 많으니 오늘은 장사가 안 되는 이 집에 가보자는 등의 설왕설래였다. 자리를 잡고 앉아도 메뉴를 결정하는 일에 한참 뜸을 들여야 했다. 밥 한 끼 먹는 일도 이러했으니 다른 일은 더 일러 무엇하겠는가. 이처럼 하찮게 여기는 낱낱의 사정을 다 살피고 고려하는 것이 우유부단파가 공유한 가장 중요한 핵심 가치관이었다.

결단파들이 들으면 정말 고소를 금치 못할 일이겠으나 적어도 인류의 절반 가까이는 이런 우유부단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세계는 계속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어 진보하는 것이겠으나 속도를 늦추고 뒷걸음질을 하자고 우기는 사람이 있어 유지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자동차의 제동 후진장치와도 같고 시시각각 살펴야 할 보수 관리 책임과도 같다. 요즘 방식으로 압축하면 주저하고 반성하고 남을 배려하는 우유부단은 삼라만상과 더불어 존재하고자 하는 생태적 사고의 출발점이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라고 했으니 한 해가 시작되는 1월은 12분의 1이 아니라 2분의 1만큼의 무게와 가치가 있는 달이다. 시작을 두려워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생긴 말일 것인데 이 격려에 힘입어 나 역시 오랜 망설임 끝에 새로운 두어 가지 일을 실행에 옮겼다. 물론 작심삼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대부분은 분명한 매듭을 짓지 못한 채 흐지부지된 것들 투성이이며 그 미완의 시도는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뿌린 씨가 다 올라오지 않는다고 씨 뿌리는 일을 그만둘 어리석은 농부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작심삼일은 작정한 것이 사흘을 못 넘기고 흐지부지된다는 뜻도 있지만 달리 보면 사흘을 두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결정을 내린다는 뜻도 품고 있다. 이 사자성어야말로 우유부단의 가치를 가장 잘 압축한 말로 이해된다. 즉 깊이 생각하지 않고 여러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성급하게 시작한 일은 길게 가지 못한다는 가르침과, 그래서 무슨 일이든 숙고에 숙고를 거듭해 결정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교훈을 함께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유부단파의 정신적 기조는 모든 가능한 변수들을 따지고 종합해 생각하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또 한 번 자신에게 옳고 그름을 되묻는 과정을 반복하는 수순을 밟는다. 이를테면 지금의 경부대운하와 관련한 의견 개진이야말로 고도의 우유부단이 필요한 사안이 아닌가. 만에 하나 잘못되면 쉽게 되돌릴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시인

'詩와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로워진다는 것  (0) 2008.01.31
아프리카  (0) 2008.01.22
헛된 기대와 막연한 몽상을 박살내며  (0) 2008.01.17
변방의 즐거움  (0) 2008.01.17
봄에서 봄으로  (0) 2008.01.0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