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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스님이 팔을 몹시 다쳤다는 소식을 박이 전해주었다. 다친 과정을 설명하는데 어찌나 조리있고 상세하며 리얼한지, 다친 사람 생각도 않고 마구마구 웃고 말았다. 아, 이러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도 박의 입담에 얼이 빠져 웃느라고 며칠 동안 안부 전화 넣는 것을 까먹고 말았다.

핑계를 대자면 아이들이 와서 7박8일을 지내고 가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할매 할배 가운데서 꼬박 일곱 밤을 자면서 할배 쪽 할매 쪽 번갈아 돌아누우며 얼굴을 맞대주는 것이, 아무리 애비 에미가 시켰다 해도 심성 타고 나지 않으면 못할 일이겠다. 아이가 가고 나니 허전하고 적막해져서 또 정신을 놓고 지냈다. 

그러다가 언제 경주 같이 가자던 박의 당부가 있었고, 마침 날짜가 잡히고 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받지 않았다. 어디서 뭘 하나. 일정을 맞춰야 하는데 싶어, 경주 가는 일 날짜 잡혔는데...까지 문자를 찍어 보내니 지금 병원, 나중에. 라는 답이 날아왔다. 지난 연말부터 올 연초까지 신병 관리 때문에 병원에 갔는데 결과가 엄청나게 좋다고 하더니 웬 병원이람? 부인이 탈이 났나.... 그래, 그런가 보다 하고 같이 가기로 한 정에게 전화를 넣었더니, 이이는 또 듣느니 처음이라며, 가만 있어 봐, 내 일정 보고... 하더니 곧 연락 와서는 그날이 모친 생신이라 가족 점심 일정이 있다 했다. 그럼 경주는 나가리, 담에 가는 걸로. 박도 알고 있어야겠다 싶어 경주 나가리 됐음을 문자로 전했다. 

근데 저녁 쯤 되니, 병원 간 일이 슬슬 궁금해졌다. 부인이 얼마 전 코로나를 겪었다기도 했고, 또 혹 다른 병이 생기기라도 했나 싶어 은근 걱정되던 차. 다행히 전화를 받은 박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지난 한 해 동안 자신을 의사처럼 돌봐준(매일 강제 산책을 시켜준) 개를 끌고 나갔다가, 이 개님이 갑자기 마구 달리는 바람에  끌려가다가(진도임) 그만 커다란 참나무와 박치기하였더란다. 밤에 자려니 돌아눕지도 못할 만큼 아프고 하여 엑스레이를 찍으러 병원에 갔더니 갈비뼈가 부러졌다더라나. 스프린트도 못한다며 무조건 안정!을 권했단다. 그래 지금 숨만 쉬어도 아프다!고 했다. 아이유 무슨 일이래. 그럼 말 그만 해유. 어서 전화 끊으라고 했는데도 뭐라고 뭐라고 한참을 더 사고 과정을 설명했다. 병문안을 가기로 했으니 기다리라 하고 가만 생각해 보니, 스님도 개띠, 박도 개띠, 나도 개띠.... 뭐야.... 다음은 내 차례인가.... 큰일났네. 남편이 옆에서 거들었다. 나도 호적상 개띠다. 

조마조마하며 하루를 더 보냈는데, 토요일 후배들이 와서 점심과 술을 잘 먹고 커피 마시러 갔다가 박의 안부를 전했다. 후배가 당장 전화를 걸어 상태를 물으니 어쩌고 저쩌고 박이 떠드는데, 이쪽에선 또 와르르 웃어대는 것이었다. 뭐야, 지금 웃을 상황 아니라니까. 정말 심각하다고, 이럴 때 우리끼리 모여서 웃으면 어떻하냐고! 내가 소리쳤지만 도무지 효과가 없었다. 

국수며, 마스크, 쌀 한 자루까지 얻어서 집에 돌아와 멍때리고 있다가 내일은 일요일이니 가족과 보낼 테고, 화요일엔 문화회관 가야 되고 목요일은 병원 가야 되고 .... 월요일이나 수요일에 문병을 가야겠다 마음먹었다. 노느라고 몸이 고단해 주말 드라마도 안 보고 누웠는데 뭔가 수상한 기운이 느껴져서 일어났다. 지난 이주일 동안 혈액 검사를 하고 결과 보고 어쩌고 했는데, 다음주엔 피부 반응 검사를 할 것이니 복용중인 비염과 천식 약을 중단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러니까 사흘째 비염과 천식 약을 끊고 있었던 것인데 한 이틀 잘 넘기더니 마침내 콧물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훌쩍거리며 일어나서 컴 앞에 앉아 있으니 나라는 개도 드디어 목요일까지 훌쩍훌쩍 비몽사몽 지내야 하는 수난에 처해졌다는 걸 알겠다.

매화 피고 산수유 핀 이 좋은 봄날에 개들은 왜 이리 난리들이람.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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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읽기의 즐거움/문학동네 1997 봄

 

주변의 시학/오형엽

 

 

1. 주변의 의미와 미시비평에의 요청

찬 바람이 분다. 바람이 차가워질수록 피는 뜨거워진다. 찬 바람의 냉엄한 현실과 피의 뜨거운 불꽃이 맞부딪쳐 존재의 충일을 가져온다. 겨울 감각의 절정이다. “바람이 분다살아봐야겠다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절이나,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이육사의 시구절에도, 이러한 감각적 체험이 어느 정도 녹아 있는 것이 아닐까. 80년대를 우리는 이러한 시대 감각으로 살았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90년대 이후 우리가 느끼는 시대의 체감온도는 미지근한 것이 되고 말았다.

체감온도의 변화와 더불어 진행된 90년대 문학의 새로운 경향은, ‘세속성잉상성의 흐름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경우, 이 흐름을 따라가며 이전에 시의 전면을 차지했던 중심이 밀려나고 주변의 요소들이 새롭게 등장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중심에서 주변으로의 이러한 변모는 우선 시간적 측면에서, 시대의 중심에서 이탈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즉 당대라는 시간적 현실과 정면으로 맞서는 대결양상이, 과거를 추억함으로써 현재를 견디는 환멸혹은 기다림의 양상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그것을 시대적 주변성이라고 불러보자. 공간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도시적 공간을 소재로 한 경우, 도시의 중심에 놓인 과학문명과 자본의 욕망으로부터 도시 변두리의 후미진 공간과 불우한 이웃들을 시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리고 농촌의 공간을 소재로 한 경우, 농촌 문화의 중심으로 여겨졌던 전원적 자연 대신에 농촌 생활의 일상, 혹은 변두리에서 퇴색되어가는 누추한 존재들과 자연물을 시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를 도시적 주변성통촌적 주변성이라고 이름붙여 보자. 한편 존재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존재 혹은 자아의 중심을 차지했던 이성 의식 남성 대신에 감정 무의식 여성이 전면에 등장하는 현상이 생겨난다. 이를 존재적 주변성이라고 말해 보자.

그런데 이러한 주변의 시학은 소재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심에서 주변으로의 변모는 다양한 층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그것은 소재의 차원에서 시적 형상화의 방식과 주제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서로 겹쳐지며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시는 다양한 층위에서 주변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의 감식안과 비평방식으로는 우리 시대의 시를 더 이상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주변의 시학은 주변적인 요소의 중심화가 아니라, 그 자체가 주변적인 요소로 남아 새로운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것은 텅 빈 중심과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더 복잡하나 체위를 형성한다. 그 목소리와 신체에 근접하기 위하여 우리는 미시비평이라는 새로운 비평방식을 체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까지의 시비평은 소재주의에 함몰하거나, 그것으로부터 진전된 경우에도 형식론적 고찰과 의미론적 고찰의 어느 한 쪽에 치중하여 그 연결고리를 섬세하게 포착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시가 지닌 내밀한 살결과 숨결에 다가서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시비평은 소재비평 실증비평 형식비평 주제비평 입법비평 등의 거시비평을 왕래하며, 우리 시를 도시시 농촌시 민중시 노동시 해체시 신서정시 정신주의시 포스트모던시 환경생태시 등으로 분류하고 그 안에 포섭하려 했다. 공간적 시간적 실존적 계급적 인식적 측면 뿐 아니라, 시적 기법과 주제의 측면에 이르는 다양한 차원에서의 차이를 무시한 채 시도된 이러한 분류와 분석은, 너무 큰 그물코로 인해 우리 시의 은밀한 비밀과 보석을 놓쳐버리고 만다. 그래도 80년대는 시대적 모순에 맞서 싸우는 대항의 논리에 의해 그것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시대감각과 현실이 현저히 변모된 90년대 중반에도 이러한 비평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의 현실은 우리에게 주변의 시학을 건져올릴 미시비평의 안목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읽을 이 계절의 시집은 최영철의 [야성은 빛나다], 이정록의 [풋사과의 주름살], 김소연의 [극에 달하다] 등의 세 권이다. 각각 개성적인 차원에서 주변의 시학을 형상화하고 있는 이 시집들을 미시비평의 방식을 통해 접근해 보자. 그것은 시의 질료, 즉 시어 운율 이미지와 상징 어조 등의 구성요소를 매개로, 그 어법과 화법의 발화방식에 녹아 있는 시인의 시선을 미세하게 추적함으로써 시적 자질을 밝혀내는 것이다. 미시비평의 목표는 이를 토대로 시인의 의식과 세계인식 뿐 아니라, 시인의 무의식과 사회적 차원의 의미?까지도 밝혀내는 데 있다. 밖에서 안으로의 해석이 아닌, 안에서 밖으로의 이러한 접근은 분석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나 원리로 환원될 수 없는 시의 고유한 무늬와 숨소리를 섬세하게 감지하고 포착하는 작업이다. 비록 목표와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이 시도는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이다.

 

2. 시대의 주변, 시적 응축과 조감도

최영철은 지금까지 소외된 이웃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도시변두리의 삶을 형상화해왔다. 빙유나 상징 등의 시적 함축이 소거된, 그의 일상적 어법은 산문화의 경향을 보이지만, ‘중도를 견지하려는 태도가 시적 긴장을 형성한다. 중도는 도시 변두리에서 누추한 삶을 살아가는 이웃들에 대한 부끄러움의 시선과, 그들을 억압하는 도시 중심보, 다시 말해 돈과 권력의 욕망으로 구조화된 자본의 체계에 대한 비판의 시선이, 팽팽한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생겨난다. 즉 긍정의 시선과 부정의 시선이 만나 시적 긴장을 얻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네 번재 시집인[야성은 빛나다]에서도 유지되고 있지만, 한편으로 변모된 양상이 나타난다. 가장 먼저 발견되는 변모은 자아에 대한 의식의 변모이다. 이전 시에 나타난 중도의 시선과 태도에는, 자아에 대한 회의나 반성이 개입되지 않았다. 고유하고 타당한 주체로서의 자아를 상정하고, 그 자아가 이웃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본 셈이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시적 자아는, 과거의 열정을 상실한 채 소시민적 일상에 파묻힌 자신을 끊임없이 회의하고 반성한다.

 

나도 한때는 무럭무럭 열나던 찜통

갖은 만두속으로 배가 터질 것 같은 시절이 있었나니

불씨 내린 찜통처럼 식어가는 아낙의 꿈

--<마흔>

 

나 이미 사랑을 잊고 산 지 오래

삶은 추하도록 환하거나 무료한 것

엎드린 손바닥 위에 동전

도시락 딸랑거리며 오골오골 모여 기다리는

너희 식솔에게 돌아가고 있느냐

삶은 너무 숭고하거나 바닥이 뻔한 것

--<그리운 지상> 중에서

 

시인은 마흔의 나이에 들어선 현재의 자신을 점검하고 반성한다. 열정과 사랑으로 존재의 충일감을 맛보았던 과거를 회상하며, 시인은 자신이 현재으 일상 속에서 무료한 소시민으로 전락한 것을 한탄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전 시에서 산문화되어 풀어졌던 시적 진술이, 응축된 시어와 단정적 어조와 짧은 호흡을 통해 긴장감을 얻고 있는 데 주목한다. 이 긴장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시인의 자기반성이, 그 안에 새로운 삶을 추구하려는 갱신의 의지까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자기 갱신의 의지는 히죽이 웃는 대가리에서 야성을 캐다/홀로 돼지국밥을 먹는 이마에서 야성은 빛나다”(<야성은 빛나다>)라는 냉소적 태도로부터, “얼마나 지져야 내 삶이 다시 얼얼할까”(<내가 나의 남성까지도>)라는 자학의 태도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눈물샘 마르면 까칠한 정강이로/정강이 시리면/갈라진 발바닥으로 노래할 수 있네”(<길 떠난 집새에게>)라는 적극적 태도로 이어지며 전경화된다.

그러면 이러한 자기반성과 갱신의 의지는 다시 어디에서 동력을 얻는 것일까? 그것은 과거를 잊지 않음에서 오는 추억의 힘견딤의 자세이다. “격정의 시간을 건너온 고요한 이력불순의 시간을 견딘 폐허같은 주름”(<소주>)에는, 추억과 견딤으로부터 자기반성과 갱신의 의지로 나아가며 긴장을 획득하는, 최영철 시의 내력이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현실대응이 현재의 자아가 처한 폐허, 즉 텅 빈 주체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텅 빈 주체는 텅 빈 시대라는 중심없는 세월을 견뎌나가기 위해, 80년대의 추억으로부터 힘을 부여받는다. 결국 시인은 아직도 80년대의 사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길의 끝까지 가 본 적 있느냐

거기 어느 날 져다 보리고 온 몹쓸 과거가 있다

한 인생이 찍다 만 둥근 마침표 있다

아무리 구덩이 파도 돌아서고 나면

불쑥 고개 쳐들고 있는

떨치고 가는 우리 뒤통수 쏘아보는 외눈 있다

봉곳 솟아 어두울수록 점점 커지며

죽어서도 눈감지 않는 원한 있다

이제 우리 마음을 덮고

젖무덤 같은 사이길로 조용히 가자

얼마나 헛되이 그대를 보냈으며

얼마나 서둘러 그대 이름 지웠는가를

산짐승이 쓸고 간 녹슨 뼈 불러 수습할 때

토막난 혼들이 우짖는

저쪽에서도 우짖는

--<무덤의 추억>

 

시인은 버리고 온 몹쓸 과거를 기억한다. 그것은 고개를 쳐들고 우리를 쏘아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녹슨 뼈를 불러 수습하기 위해 마음을 덮고 젖무덤 같은 사이길로 조용히 가자고 말한다. 이 길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과거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죽음, 즉 추억으로 되살아나는 무덤이다. “젖무덤 같은 사이길은 허상의 풍요로 이 죽음을 잊게 만드는, 환각과 도취의 90년대적 현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길의 끝까지 가는 것은, 완결되지 못한 과거와 만나면서 현재의 환멸을 뚫고 나가는 것이 된다.

결국 최영철 시의 위상은 이전 시가 보여주었던 도시 변두리에서 시대의 변두리로 옮겨진다. 그의 시는 당대의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과거와의 관련 속에서 바라본다. 즉 시인은 90년대라는 현재의 중심에 서 있지 않고 80년대라는 과거를 추억하며 그 사이길로 걸어간다. 파시스트적 속도가 심화되는 현재의 흐름에 역생하면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시선은 결국 시대의 주변으로 향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그의 시는 불우한 이웃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을 포함한 현실에 대한 반성과 냉소적 풍자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분단이나 한일 관계 등의 국가적 문제를 시화하거나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시화하는 것도, 그러한 경향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정표를 따라 자동 안내 방송을 따라

종점이 가까워 온다 종점 가기도 전에

버스가 지하철이

콩나물 시루 같은 일생이 없어지리라는 생각,

한결 두꺼워진 무덤 위로 아래로

버스가 지하철이 상쾌하게 씽씽 달린다

훗날 누가 지층을 쪼개어 보면

쥐포처럼 납작해진 버스의 지하철의

콩나물 시루 같은 일생들의

촘촘한 화석을 보게 될 것이다.

--<촘촘한 화석> 중에서

 

이 시는 약간의 환상적 분위기를 통해, 버스와 지하철이 지상에 묻혀 그것을 무덤으로 삼고 마는 상황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과 태도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대상을 관찰한 후 요약하고 압축하여 표현하는, 시적 응축의 어법에 스며들어 있다. 앞서도 살핀 바 있는, 시적 응축은 현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감의 시선과, 시간대를 밀집시키는 시간의식에서 얻어지는 듯하다. 즉 이 시의 응결된 어법과 선 굵은 문체는, 높은 데서 인간사를 내려다보는 듯한 조망의 시선에서 생겨나며, 또한 그것을 다른 시간대로 연결시키는 시간의 압축을 통해 강화된다. 이러한 형상화의 기법과 방식을 시적 응축조감도라 불러 보자. 이전 시의 긴장이 이웃에 대한 애정과 세상에 대한 야유라는, 균형과 중도의 시선에서 생겨났다면, 이번 시집의 긴장은 이처럼 현실을 전체적으로 내려다보느 조감의 시선과, 시적 응축의 어법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중도와 이별한 시인의 사랑법이, 추억의 힘을 통해 단련됨으로써 얻어진다. 결국 시인은 시대의 변두리에 선 자신의 위상을 직시하고, 자기 성찰과 자기 갱신을 동시에 추구함으로써 새로운 시적 차원을 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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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와 싸우는 시인들/류신

 

󰊱 그리스 신화에서 시간의 신 크로노스’(Khronos)는 낫과 모래시계를 손에 쥐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낫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시간의 파괴력을, 모래시계는 시간의 공허한 반복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정작 크로노스의 속성은 고야의 그림에서 사실적으로 묘파된 것처럼, 제 자식을 낳는 족족 가차없이 잡아먹는 식인의 면모에서 단박에 드러난다. 인간의 총체성을 잘게 쪼개어 갉아먹는 시간의 가혹한 매커니즘에 대한 이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가. 자본주의 시계판의 분침과 시침 사이에 충직한 노예로 에속된 처참한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신화란 허구적 상상력의 창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설득력있는 개념 생산의 화수분이란 점을 새삼 통감케 된다. 그러나 이 신화에서 정작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가 토제를 사용해 아버지가 삼킨 남매들을 내뱉게 하는 사건이다.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폭압적인 시간의 유린을 부리친 인류 최초의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벽두, 거침없이 줄달음치는 시간이란 괴물의 발목을 붙잡은 제우스의 후예는 누구일까? 우리가 최근에 나온 시집 가운데 각기 개성있는 토제를 사용해 크로노스와 싸우는 김진경 최영철 김명수의 시집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김진경이 매끈하게 다림질된 시간을 겹겹이 주름잡아 느림의 권리를 모색한다면, [일광욕하는 가구]에서 최영철은 우리를 앞으로만 끌고가는 팽팽한 시간의 비가역성을 거슬러 올라가는 지난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 그는 왜 흘러간 시간의 뒤를 밟아가는가?

 

버스 타고 비행기 타고 우주선 타고 간

앞을 보내고

멀고 어둡고 긴 뒤를 밟아간다

차례대로 가서 처박힌다

줄줄이 늘어서서 발 동동 구르며 하품하는

앞은 절벽

--<앞으로 뒤로> 부분

 

인용된 시에서 명징하게 드러나듯, 한마디로 시인이 내다본 앞의 풍경이 심히 마뜩치 않기 때문이다. 암표를 사고 급행료까지 지불해가면서 버스 타고 비행기 타고 우주선 타고 간길의 끝은 장밋빛 복락원의 입구가 아니라, “절벽이나 천길 벼랑” (<세상 밖으로>)이라는 미래에 대한 비관적 인식이 시인을 뒤로 이끌게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길의 끝이 무덤이다”(<정상에서>)란 인식처럼 언젠가는 맞닥뜨릴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도 시인의 암울한 전망을 부추켰을 터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황금시대로 인식하는 낭만적 동경이 뒷걸음을 재촉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멀고 어둡고 긴 뒤를 밟아간다는 시구가 암시하듯, “부끄러움도 기다림도 남은 게 없는/풍비박산의 시간”(<노부부>)을 견디지 못해 저를 밟고 간 세월에 딱지가 앉아/곰보 얼굴이 된 난간”(<곰보다리>)이 흉물스럽게도 그의 귀로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퇴유곡의 암담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서늘한 퇴로”(<쥐스킨트를 읽는 밤>)를 고집하는 까닭은?

해답은 간명하다. “위로 뻗기만 하는 삶을 받치려고/실타래처럼 엉킨 땅 아래 상념들”(<대숲에서>)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재인식을 통해 생의 의지를 북돋우기 위함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렇게 만신창이로 허덕거린 사이/나는 다 망가져 처음으로 돌아왔다”(<20세기 공로패>)에서 들리는 삶의 초발심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이 독성 이 아귀다툼이 나를 새롭게 할 것이야

마디마디 박히는

민물장어 부스러진 뼈의 원한

힘이 솟는다

다 부서지면 나는 날아오를 것이야

--<이 독성 이 아귀다툼> 부분

과거로의 낭만적인 복귀는 재출발의 잠재력을 온축할 수 없는 법이다. “독성아귀다툼으로 생채기 난 삶을 온몸으로 뜨겁게 끌어안을 때, 비로소 비상의 의지와 부활의 심지를 세울 수 있게 되리라. 그에게 끝과 시작은 서로 상충하는 타자가 아니라 상보하는 타자다. 는 뒤집혀진 이다. 따라서 민물장어 부스러지 뼈의 원한과 같은 삶에 대한 고통과 번뇌를 극한까지 밀고 나갈 때, 생의 시작은 더욱 절실하고 치열하게 다가온다. 이제 시인은 낚시에 걸려 죽어도 따라오지 않으려는 바닷고기의 처절한 항전을 향해 부르짖는다. “파닥거려야지 갈갈이”!(<바보고기>) 이런 소생의 의지는 갯쑥부쟁이까지 피면 다시 출항이다여기까지 오게 한 음지의 근육들/탈탈 털어 말린 얼굴들이 햇살에 쨍쨍해진다란 시구로 각각 시를 종결하는 <폐선><일광욕하는 가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탈탈에서감지되는 과거 극복의 결의, “쨍쨍에서 느껴지는 미래를 향한 박동!

과거나 미래, 어느 한 편만을 절대화하고 특권화하는 유토피아주의는 절름발이 시간의식의 부산물이다. 그러나 이미아직’, 양편 모두의 한계에 대한 명료한 인식으로 빚어지는 긴장 속에서 자기 갱신을 企投할 때, 우리는 과거를 치유할 수 없느 sdud역으로 만들고 미래를 죽음과의 독대로 서둘러 몰고 가는 선형적인 세속시간의 궤도에서 벗어나, ‘미래는 과거보다 더 늦은 것이 아니며 과거는 현재보다 더 이른 것이 아니다“(하이데거)로 압축되는 나선적인 시간성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최영철의 시가 노정하는 과거로의 역행이 복고적 퇴행이나 소극적 도피가 아니라 편력의 길로 전환될 수 있는 계기가 여기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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