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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읽기의 즐거움/문학동네 1997 봄

 

주변의 시학/오형엽

 

 

1. 주변의 의미와 미시비평에의 요청

찬 바람이 분다. 바람이 차가워질수록 피는 뜨거워진다. 찬 바람의 냉엄한 현실과 피의 뜨거운 불꽃이 맞부딪쳐 존재의 충일을 가져온다. 겨울 감각의 절정이다. “바람이 분다살아봐야겠다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절이나,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이육사의 시구절에도, 이러한 감각적 체험이 어느 정도 녹아 있는 것이 아닐까. 80년대를 우리는 이러한 시대 감각으로 살았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90년대 이후 우리가 느끼는 시대의 체감온도는 미지근한 것이 되고 말았다.

체감온도의 변화와 더불어 진행된 90년대 문학의 새로운 경향은, ‘세속성잉상성의 흐름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경우, 이 흐름을 따라가며 이전에 시의 전면을 차지했던 중심이 밀려나고 주변의 요소들이 새롭게 등장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중심에서 주변으로의 이러한 변모는 우선 시간적 측면에서, 시대의 중심에서 이탈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즉 당대라는 시간적 현실과 정면으로 맞서는 대결양상이, 과거를 추억함으로써 현재를 견디는 환멸혹은 기다림의 양상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그것을 시대적 주변성이라고 불러보자. 공간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도시적 공간을 소재로 한 경우, 도시의 중심에 놓인 과학문명과 자본의 욕망으로부터 도시 변두리의 후미진 공간과 불우한 이웃들을 시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리고 농촌의 공간을 소재로 한 경우, 농촌 문화의 중심으로 여겨졌던 전원적 자연 대신에 농촌 생활의 일상, 혹은 변두리에서 퇴색되어가는 누추한 존재들과 자연물을 시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를 도시적 주변성통촌적 주변성이라고 이름붙여 보자. 한편 존재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존재 혹은 자아의 중심을 차지했던 이성 의식 남성 대신에 감정 무의식 여성이 전면에 등장하는 현상이 생겨난다. 이를 존재적 주변성이라고 말해 보자.

그런데 이러한 주변의 시학은 소재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심에서 주변으로의 변모는 다양한 층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그것은 소재의 차원에서 시적 형상화의 방식과 주제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서로 겹쳐지며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시는 다양한 층위에서 주변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의 감식안과 비평방식으로는 우리 시대의 시를 더 이상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주변의 시학은 주변적인 요소의 중심화가 아니라, 그 자체가 주변적인 요소로 남아 새로운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것은 텅 빈 중심과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더 복잡하나 체위를 형성한다. 그 목소리와 신체에 근접하기 위하여 우리는 미시비평이라는 새로운 비평방식을 체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까지의 시비평은 소재주의에 함몰하거나, 그것으로부터 진전된 경우에도 형식론적 고찰과 의미론적 고찰의 어느 한 쪽에 치중하여 그 연결고리를 섬세하게 포착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시가 지닌 내밀한 살결과 숨결에 다가서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시비평은 소재비평 실증비평 형식비평 주제비평 입법비평 등의 거시비평을 왕래하며, 우리 시를 도시시 농촌시 민중시 노동시 해체시 신서정시 정신주의시 포스트모던시 환경생태시 등으로 분류하고 그 안에 포섭하려 했다. 공간적 시간적 실존적 계급적 인식적 측면 뿐 아니라, 시적 기법과 주제의 측면에 이르는 다양한 차원에서의 차이를 무시한 채 시도된 이러한 분류와 분석은, 너무 큰 그물코로 인해 우리 시의 은밀한 비밀과 보석을 놓쳐버리고 만다. 그래도 80년대는 시대적 모순에 맞서 싸우는 대항의 논리에 의해 그것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시대감각과 현실이 현저히 변모된 90년대 중반에도 이러한 비평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의 현실은 우리에게 주변의 시학을 건져올릴 미시비평의 안목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읽을 이 계절의 시집은 최영철의 [야성은 빛나다], 이정록의 [풋사과의 주름살], 김소연의 [극에 달하다] 등의 세 권이다. 각각 개성적인 차원에서 주변의 시학을 형상화하고 있는 이 시집들을 미시비평의 방식을 통해 접근해 보자. 그것은 시의 질료, 즉 시어 운율 이미지와 상징 어조 등의 구성요소를 매개로, 그 어법과 화법의 발화방식에 녹아 있는 시인의 시선을 미세하게 추적함으로써 시적 자질을 밝혀내는 것이다. 미시비평의 목표는 이를 토대로 시인의 의식과 세계인식 뿐 아니라, 시인의 무의식과 사회적 차원의 의미?까지도 밝혀내는 데 있다. 밖에서 안으로의 해석이 아닌, 안에서 밖으로의 이러한 접근은 분석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나 원리로 환원될 수 없는 시의 고유한 무늬와 숨소리를 섬세하게 감지하고 포착하는 작업이다. 비록 목표와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이 시도는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이다.

 

2. 시대의 주변, 시적 응축과 조감도

최영철은 지금까지 소외된 이웃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도시변두리의 삶을 형상화해왔다. 빙유나 상징 등의 시적 함축이 소거된, 그의 일상적 어법은 산문화의 경향을 보이지만, ‘중도를 견지하려는 태도가 시적 긴장을 형성한다. 중도는 도시 변두리에서 누추한 삶을 살아가는 이웃들에 대한 부끄러움의 시선과, 그들을 억압하는 도시 중심보, 다시 말해 돈과 권력의 욕망으로 구조화된 자본의 체계에 대한 비판의 시선이, 팽팽한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생겨난다. 즉 긍정의 시선과 부정의 시선이 만나 시적 긴장을 얻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네 번재 시집인[야성은 빛나다]에서도 유지되고 있지만, 한편으로 변모된 양상이 나타난다. 가장 먼저 발견되는 변모은 자아에 대한 의식의 변모이다. 이전 시에 나타난 중도의 시선과 태도에는, 자아에 대한 회의나 반성이 개입되지 않았다. 고유하고 타당한 주체로서의 자아를 상정하고, 그 자아가 이웃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본 셈이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시적 자아는, 과거의 열정을 상실한 채 소시민적 일상에 파묻힌 자신을 끊임없이 회의하고 반성한다.

 

나도 한때는 무럭무럭 열나던 찜통

갖은 만두속으로 배가 터질 것 같은 시절이 있었나니

불씨 내린 찜통처럼 식어가는 아낙의 꿈

--<마흔>

 

나 이미 사랑을 잊고 산 지 오래

삶은 추하도록 환하거나 무료한 것

엎드린 손바닥 위에 동전

도시락 딸랑거리며 오골오골 모여 기다리는

너희 식솔에게 돌아가고 있느냐

삶은 너무 숭고하거나 바닥이 뻔한 것

--<그리운 지상> 중에서

 

시인은 마흔의 나이에 들어선 현재의 자신을 점검하고 반성한다. 열정과 사랑으로 존재의 충일감을 맛보았던 과거를 회상하며, 시인은 자신이 현재으 일상 속에서 무료한 소시민으로 전락한 것을 한탄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전 시에서 산문화되어 풀어졌던 시적 진술이, 응축된 시어와 단정적 어조와 짧은 호흡을 통해 긴장감을 얻고 있는 데 주목한다. 이 긴장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시인의 자기반성이, 그 안에 새로운 삶을 추구하려는 갱신의 의지까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자기 갱신의 의지는 히죽이 웃는 대가리에서 야성을 캐다/홀로 돼지국밥을 먹는 이마에서 야성은 빛나다”(<야성은 빛나다>)라는 냉소적 태도로부터, “얼마나 지져야 내 삶이 다시 얼얼할까”(<내가 나의 남성까지도>)라는 자학의 태도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눈물샘 마르면 까칠한 정강이로/정강이 시리면/갈라진 발바닥으로 노래할 수 있네”(<길 떠난 집새에게>)라는 적극적 태도로 이어지며 전경화된다.

그러면 이러한 자기반성과 갱신의 의지는 다시 어디에서 동력을 얻는 것일까? 그것은 과거를 잊지 않음에서 오는 추억의 힘견딤의 자세이다. “격정의 시간을 건너온 고요한 이력불순의 시간을 견딘 폐허같은 주름”(<소주>)에는, 추억과 견딤으로부터 자기반성과 갱신의 의지로 나아가며 긴장을 획득하는, 최영철 시의 내력이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현실대응이 현재의 자아가 처한 폐허, 즉 텅 빈 주체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텅 빈 주체는 텅 빈 시대라는 중심없는 세월을 견뎌나가기 위해, 80년대의 추억으로부터 힘을 부여받는다. 결국 시인은 아직도 80년대의 사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길의 끝까지 가 본 적 있느냐

거기 어느 날 져다 보리고 온 몹쓸 과거가 있다

한 인생이 찍다 만 둥근 마침표 있다

아무리 구덩이 파도 돌아서고 나면

불쑥 고개 쳐들고 있는

떨치고 가는 우리 뒤통수 쏘아보는 외눈 있다

봉곳 솟아 어두울수록 점점 커지며

죽어서도 눈감지 않는 원한 있다

이제 우리 마음을 덮고

젖무덤 같은 사이길로 조용히 가자

얼마나 헛되이 그대를 보냈으며

얼마나 서둘러 그대 이름 지웠는가를

산짐승이 쓸고 간 녹슨 뼈 불러 수습할 때

토막난 혼들이 우짖는

저쪽에서도 우짖는

--<무덤의 추억>

 

시인은 버리고 온 몹쓸 과거를 기억한다. 그것은 고개를 쳐들고 우리를 쏘아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녹슨 뼈를 불러 수습하기 위해 마음을 덮고 젖무덤 같은 사이길로 조용히 가자고 말한다. 이 길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과거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죽음, 즉 추억으로 되살아나는 무덤이다. “젖무덤 같은 사이길은 허상의 풍요로 이 죽음을 잊게 만드는, 환각과 도취의 90년대적 현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길의 끝까지 가는 것은, 완결되지 못한 과거와 만나면서 현재의 환멸을 뚫고 나가는 것이 된다.

결국 최영철 시의 위상은 이전 시가 보여주었던 도시 변두리에서 시대의 변두리로 옮겨진다. 그의 시는 당대의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과거와의 관련 속에서 바라본다. 즉 시인은 90년대라는 현재의 중심에 서 있지 않고 80년대라는 과거를 추억하며 그 사이길로 걸어간다. 파시스트적 속도가 심화되는 현재의 흐름에 역생하면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시선은 결국 시대의 주변으로 향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그의 시는 불우한 이웃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을 포함한 현실에 대한 반성과 냉소적 풍자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분단이나 한일 관계 등의 국가적 문제를 시화하거나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시화하는 것도, 그러한 경향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정표를 따라 자동 안내 방송을 따라

종점이 가까워 온다 종점 가기도 전에

버스가 지하철이

콩나물 시루 같은 일생이 없어지리라는 생각,

한결 두꺼워진 무덤 위로 아래로

버스가 지하철이 상쾌하게 씽씽 달린다

훗날 누가 지층을 쪼개어 보면

쥐포처럼 납작해진 버스의 지하철의

콩나물 시루 같은 일생들의

촘촘한 화석을 보게 될 것이다.

--<촘촘한 화석> 중에서

 

이 시는 약간의 환상적 분위기를 통해, 버스와 지하철이 지상에 묻혀 그것을 무덤으로 삼고 마는 상황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과 태도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대상을 관찰한 후 요약하고 압축하여 표현하는, 시적 응축의 어법에 스며들어 있다. 앞서도 살핀 바 있는, 시적 응축은 현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감의 시선과, 시간대를 밀집시키는 시간의식에서 얻어지는 듯하다. 즉 이 시의 응결된 어법과 선 굵은 문체는, 높은 데서 인간사를 내려다보는 듯한 조망의 시선에서 생겨나며, 또한 그것을 다른 시간대로 연결시키는 시간의 압축을 통해 강화된다. 이러한 형상화의 기법과 방식을 시적 응축조감도라 불러 보자. 이전 시의 긴장이 이웃에 대한 애정과 세상에 대한 야유라는, 균형과 중도의 시선에서 생겨났다면, 이번 시집의 긴장은 이처럼 현실을 전체적으로 내려다보느 조감의 시선과, 시적 응축의 어법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중도와 이별한 시인의 사랑법이, 추억의 힘을 통해 단련됨으로써 얻어진다. 결국 시인은 시대의 변두리에 선 자신의 위상을 직시하고, 자기 성찰과 자기 갱신을 동시에 추구함으로써 새로운 시적 차원을 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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