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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와 싸우는 시인들/류신

 

󰊱 그리스 신화에서 시간의 신 크로노스’(Khronos)는 낫과 모래시계를 손에 쥐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낫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시간의 파괴력을, 모래시계는 시간의 공허한 반복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정작 크로노스의 속성은 고야의 그림에서 사실적으로 묘파된 것처럼, 제 자식을 낳는 족족 가차없이 잡아먹는 식인의 면모에서 단박에 드러난다. 인간의 총체성을 잘게 쪼개어 갉아먹는 시간의 가혹한 매커니즘에 대한 이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가. 자본주의 시계판의 분침과 시침 사이에 충직한 노예로 에속된 처참한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신화란 허구적 상상력의 창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설득력있는 개념 생산의 화수분이란 점을 새삼 통감케 된다. 그러나 이 신화에서 정작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가 토제를 사용해 아버지가 삼킨 남매들을 내뱉게 하는 사건이다.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폭압적인 시간의 유린을 부리친 인류 최초의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벽두, 거침없이 줄달음치는 시간이란 괴물의 발목을 붙잡은 제우스의 후예는 누구일까? 우리가 최근에 나온 시집 가운데 각기 개성있는 토제를 사용해 크로노스와 싸우는 김진경 최영철 김명수의 시집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김진경이 매끈하게 다림질된 시간을 겹겹이 주름잡아 느림의 권리를 모색한다면, [일광욕하는 가구]에서 최영철은 우리를 앞으로만 끌고가는 팽팽한 시간의 비가역성을 거슬러 올라가는 지난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면 그는 왜 흘러간 시간의 뒤를 밟아가는가?

 

버스 타고 비행기 타고 우주선 타고 간

앞을 보내고

멀고 어둡고 긴 뒤를 밟아간다

차례대로 가서 처박힌다

줄줄이 늘어서서 발 동동 구르며 하품하는

앞은 절벽

--<앞으로 뒤로> 부분

 

인용된 시에서 명징하게 드러나듯, 한마디로 시인이 내다본 앞의 풍경이 심히 마뜩치 않기 때문이다. 암표를 사고 급행료까지 지불해가면서 버스 타고 비행기 타고 우주선 타고 간길의 끝은 장밋빛 복락원의 입구가 아니라, “절벽이나 천길 벼랑” (<세상 밖으로>)이라는 미래에 대한 비관적 인식이 시인을 뒤로 이끌게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길의 끝이 무덤이다”(<정상에서>)란 인식처럼 언젠가는 맞닥뜨릴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도 시인의 암울한 전망을 부추켰을 터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황금시대로 인식하는 낭만적 동경이 뒷걸음을 재촉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멀고 어둡고 긴 뒤를 밟아간다는 시구가 암시하듯, “부끄러움도 기다림도 남은 게 없는/풍비박산의 시간”(<노부부>)을 견디지 못해 저를 밟고 간 세월에 딱지가 앉아/곰보 얼굴이 된 난간”(<곰보다리>)이 흉물스럽게도 그의 귀로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퇴유곡의 암담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서늘한 퇴로”(<쥐스킨트를 읽는 밤>)를 고집하는 까닭은?

해답은 간명하다. “위로 뻗기만 하는 삶을 받치려고/실타래처럼 엉킨 땅 아래 상념들”(<대숲에서>)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재인식을 통해 생의 의지를 북돋우기 위함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렇게 만신창이로 허덕거린 사이/나는 다 망가져 처음으로 돌아왔다”(<20세기 공로패>)에서 들리는 삶의 초발심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이 독성 이 아귀다툼이 나를 새롭게 할 것이야

마디마디 박히는

민물장어 부스러진 뼈의 원한

힘이 솟는다

다 부서지면 나는 날아오를 것이야

--<이 독성 이 아귀다툼> 부분

과거로의 낭만적인 복귀는 재출발의 잠재력을 온축할 수 없는 법이다. “독성아귀다툼으로 생채기 난 삶을 온몸으로 뜨겁게 끌어안을 때, 비로소 비상의 의지와 부활의 심지를 세울 수 있게 되리라. 그에게 끝과 시작은 서로 상충하는 타자가 아니라 상보하는 타자다. 는 뒤집혀진 이다. 따라서 민물장어 부스러지 뼈의 원한과 같은 삶에 대한 고통과 번뇌를 극한까지 밀고 나갈 때, 생의 시작은 더욱 절실하고 치열하게 다가온다. 이제 시인은 낚시에 걸려 죽어도 따라오지 않으려는 바닷고기의 처절한 항전을 향해 부르짖는다. “파닥거려야지 갈갈이”!(<바보고기>) 이런 소생의 의지는 갯쑥부쟁이까지 피면 다시 출항이다여기까지 오게 한 음지의 근육들/탈탈 털어 말린 얼굴들이 햇살에 쨍쨍해진다란 시구로 각각 시를 종결하는 <폐선><일광욕하는 가구>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탈탈에서감지되는 과거 극복의 결의, “쨍쨍에서 느껴지는 미래를 향한 박동!

과거나 미래, 어느 한 편만을 절대화하고 특권화하는 유토피아주의는 절름발이 시간의식의 부산물이다. 그러나 이미아직’, 양편 모두의 한계에 대한 명료한 인식으로 빚어지는 긴장 속에서 자기 갱신을 企投할 때, 우리는 과거를 치유할 수 없느 sdud역으로 만들고 미래를 죽음과의 독대로 서둘러 몰고 가는 선형적인 세속시간의 궤도에서 벗어나, ‘미래는 과거보다 더 늦은 것이 아니며 과거는 현재보다 더 이른 것이 아니다“(하이데거)로 압축되는 나선적인 시간성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최영철의 시가 노정하는 과거로의 역행이 복고적 퇴행이나 소극적 도피가 아니라 편력의 길로 전환될 수 있는 계기가 여기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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