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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을 가리지 마라


                                                                      남 영 신


숭례문이 무너졌다.

외적의 폭격으로 무너졌다면

국민의 적개심을 하나로 모아 외적에 대항하게 했을 그 숭례문이,

오늘 우리 눈앞에서

무너졌다.


6백 년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묵묵히

민족의 삶을 지켜보며 민족의 얼굴이 되어 주었던 그 숭례문이,

오늘 우리 눈앞에서

무너졌다.


그것은 분신이었다.

자신을 태워 민족의 잘못을 일깨우려는

숭례문의 성스러운

자기희생이었다.


보라!

오늘처럼 우리가 돈에 굶주린 적이 있었던가?

오늘처럼 우리가 예의와 염치를 잃은 적이 있었던가?

오늘처럼 우리가 허영에 들떠 있던 적이 있었던가?


지금 우리는 갈증을 바닷물로 해결하려는

허망한 짓을 하고 있다.


돈 맛을 알게 되자

돈이 되지 않은 것은 모조리 무가치한 것으로 돌리고

편안을 맛보게 되자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모든 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돌렸다.


그래서 돈이 된다면

개인이나 국가기관이나, 장사꾼이나 지식인이나, 필부나 대통령이나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가치를 허무는 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으니


그래서 숭례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자기 몸을 태웠다.


숭례문의 처참한 모습을 보라.

눈을 가리지 말고 똑바로 보라.


무너진 숭례문의 뒤편에 숨어서

그것을 서둘러 가리려는 자들은 물러서라.


2년에 2백억이면 복원할 수 있다고

떠드는 자들은 가라.

돈이 있고 기술이 있으니 곧 복원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들은 가라.


죽은 자를 꽃단장하여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는 자들.

죽은 자를 꽃단장하여

자신의 치적으로 삼고자 하는 자들도 가라.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모두가 깨달을 때까지


너희 명리에 눈먼 자들이여,

숭례문의 숭고한 희생을

보잘것없는 철책과 천으로 가리려 하지 말라.


숭례문의 처절한 부르짖음을

온 국민이 보고 또 보게 하라.


아, 숭례문이여!

민족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으라!


2008년 2월 12일 아침


글쓴이 / 남영신
· 국어문화운동본부 회장
· 국어단체연합 국어상담소장
· 저서: <남영신의 한국어 용법 핸드북><4주간의 국어 여행>
          <국어 한무릎공부><문장 비평>
          <국어 천년의 실패와 성공>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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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저는 운하문제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TV와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3당 대선주자의 공약이었던 천성산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들을

통하여 공약이라는 것에 대한 신뢰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운하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천성산 관련 기사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면서였습니다. 운하문제는

곧잘 고속철도(천성산) 문제와 비교되며 회자되고 있어 운하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기 시작한 것은 보름전입니다.

그럼으로 이 이야기는 불과 보름 동안 제가 자료를 찾아보고 정리한 ,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도출된 결론이라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며 이에 대하여 반론이나 보충 자료가 있다면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2분 정도 동영상 자료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제일 먼저 접속했던 운하관련 싸이트의 메인화면에는 한반도 대운하 특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계신

한나라당 국회의원 박승환위원장의 토론회 동영상이 떠있었습니다. 국회예산 결산 특별위원회 위원이신 박승환

의원께서 발제하신 내용은 주로 운하를 놓는 첫째 목적인 물류에 관계된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이 토론회를 보면서  지난 5년 동안 고속철도 공단으로부터 수백 번도 더 들은 물류 이야기와 언론사와 학계,

연구소와 법조계에 배포했던 책자와 그 글을 인용하였던 연구 보고서들을 떠올랐습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놀란 일은 물류전문가라고 소개되고 계신 박승환 위원장님께서 승객 전용열차인 ktx와 운하를

화물 중심으로 비교하고, 이미 완성단계에 있는 사업과 아직 구상중인 운하사업의 사업비를 출발선에서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반도 대운하 특별위원회 위원장 박승환 의원의 토론회 중

 

2020년 물동량은 지금보다 3배 이상 늘고 있고 FTA등이 되면 훨씬 많이 늘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결국 도로가 아니면 철도냐 운하를 건설해야하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건설비용을 볼 때 고속도로와 고속철도 KTX 보다 이 운하를 하면 훨씬 더 비용이 적게 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화물 철도는 30량 정도를 기껏 가지고 갑니다. 그것을 2단 3단으로 실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도 지금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로 가는 데는 79km의 터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터널을 통과하는데 기존의 터널을 다 뚫지 않으면 2단 3단 적재가 불가능합니다.

                                                              - 2007년 12월 4월  물류 선진국을 향한 정책 방향 토론회에서 

 

불가의 화두 중 달을 가르키는데 손가락 끝만 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경우 달만 잃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까지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 땅에 새로운 운하를 건설하려하면서 운하 뿐만 아니라 고속철도가 놓인 이유와 목적까지 잃어버리고

계십니다.  아래 사진은 고속철도 공단에서 발행 한 고속철도 홍보자료입니다.

 

 

 

의원님이 말씀 하셨듯이 13조를 들여 완공한 1단계 고속철도는 매년 수천억의 적자가 발생하여 세금을 먹는

하마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조1900억을 더 들여 천성산을 관통하며 개통을 앞두고 있는

고속철도의 명분은 물류수송이었습니다..

 

위 홍보지에 의하면 2010년 ktx가 완공 후 기존 경부선 철도는 화물 전용철도로 변형되어 현제의 상태에서

8배 이상 물류수송 증가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는 경부선 축 물동량의 56%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2007년  부산항 물동량

  1.330만개

  환적화물 530만개(40%)

  국내 수송800만개(60%)

  국내수송 800만개

  경부선 축 이동 70%

  560만개

  철도 수송

  기존철로 35만개

 고속철도 완공 후300만개 (56%)

  운하 예상 수요

  최대수요 15%

  적정수요10-12%

 84만개

 50-60만개

  운하의 운항 횟수 12회

  (편도 6회)

  터널 길이 20- 22km

  폭 22m /높이 20m

 터널을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 2시간

 

의원님이 토론회에서 말씀하신 운하 운송의 예상 수요 15%는 화물선이 실을 수 있는 화물랑을 가득 적재하고

(200개) 운하통과 최대 횟수인 하루 12회를 350일 운항 했을 경우의 수치로,  평균 수치로 계산한다면 그 보다는

 3분의1일 정도 낮은 10%-12% (50-60만개) 정도가 될 것입니다.

 

정확한 정보와 데이터가 없이 잘못된 수치에서 시작되고 계획 된 국책사업은 엄청난 재앙을 불러온다는 것을 우리는

고속철도 문제를 통해 보았습니다.  흔히들 고속철도 문제를 이야기 하면서  5조 8천억원의 예산이 4배 가까운 19조

9천 억원으로 증가 문제를 쟁점화 하지만 그 보다 중요한 문제는 고속철도를 이용하는 수요가 2배 가까이 증가 할 것

이라는 애초의 예상과는 달리 예상 수요의 3분의 1도 미치지 못하는 승객수요입니다.

 

비록 지난 한해 동안  고속철도를 이용한 승객은 전년에 비하여 조금 늘었다고 하지만 전체 철도 이용객은

400만명 이나 줄었고 그 이유는 승용차의 대중화와  연계 교통망이 많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현제 우리나라의 국도 현황은 경부선 외에 중부내륙 고속도로, 중부고속도들이 확장되어 (서울 부산간 387.78km)

고속버스로 서울- 부산간 4시간20분 밖에 소요되지 않으며 평일에는 4시간 주파가 가능합니다.

아래 사진은 우리나라의 고속도로와 철도망입니다.

 

 

 

위 지도에서 보면 운하가 가는 길은 이미 교통망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더구나 지난해부터 운하의 물길과 중복되는

서울- 충주 간 중부내륙 철도가 추진중에 있으므로 내륙지방을 연계한 관광화라는 명분 역시 작위적 발상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물류문제의 전문가가 아니어도 조금만 관심만 관심을 가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상식적인 이야기

입니다.  만일 이 사회가 상식을 거부하고 기적과 같은 변화를 위해 운하사업을 강행한다면 그 시험대 위에 놓이는

것은 국민들이며 재앙은 이 땅에 올  우리 후손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공약이라는 이름으로 타당성 검토와 사전 준비를 허수로히한 개발사업의 결과가 어떻게 닥아오는지

수 차례 보아 왔고 이미 충분히 경험한 일입니다. 더구나 구상중인 운하는 그 예산이 얼마나 소요 될지, 자연 생태계

환경의 변화가 어떻게 올지 예측조차 하기 어려운  - 물길을 바꾸고 땅을 뒤집는 대규모 토목사업입니다

 

많은 분들이 운하를 공론에(투표) 부치자고 주장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지만  저는 운하 문제의 대안은 운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출발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투표나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에 앞서 이 시대에 우리가 정립해야 할 소중한 가치와 현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논의하고, 이 땅의 자연과 문화, 역사를 일으켜 세우는 일부터 돌아보고 난 후 마지막에 대규모 국책사업이 가져 올

환경파괴와 실익의 문제로 넘어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의 출발이 그르지 않다면 우리가 돌아가게 될 시점은 우리가 혼란 속을 헤매게 된 - 길을 잃은 그 시점쯤이

것이며, 길을 잃은 그 시점으로 돌아가는 것은 시행착오로 인하여 얻은 지혜를 미래로 옮겨놓는 첫 걸음이 될 것

이라는 것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음편에는  관광화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여보려고 합니다. 운하에 대한 의견이나 자료를 가지고 계시면

초록의 공명 게시판에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운하 문제를 통해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라고 생각됩니다.      

 

                                                                                                              - 산막에서 지율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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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시골 선비가 시로 쓴 백과사전


이 종 묵(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서양의 역사에서 17세기는 계몽의 시대라 한다. 이성에 바탕한 지식의 욕구가 백과사전을 탄생시켰다. 조선에서도 이 시기 주목할 만한 서적들이 편찬된다. 이수광이 1624년 탈고한 《지봉유설》이 바로 조선에서 백과사전식 저술의 출발을 알린 책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보다 앞서 허균이 1611년 저술한 <도문대작> 역시 떡, 과일, 날짐승, 바다동물, 채소 등 다양한 먹거리에 대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음식 전문 사전이라 할 만하다. 허균이나 이수광 모두 중국의 문물을 어느 누구보다 먼저 섭취하였으니 새로운 시대를 맞아 새로운 저술을 남긴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겠다.


18세기 실학시대의 저술로 느껴질 정도


그런데 경기도 산본의 수리산 아래 살던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응희(李應禧, 1579∼1651)라는 사람이 있어 <만물편(萬物篇)>이라는 시로 지은 작은 사전을 하나 만들었다. 이응희는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안양군의 고손이다. 연산군이 즉위한 후 생모 윤씨가 폐출되어 죽게 된 것이 귀인 정씨와 엄씨가 참소한 탓이라 여겨 두 귀인을 장살하였는데 정씨 소생인 안양군은 죽임을 당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지만, 그 후손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수리산 자락에서 세거하면서 평범한 향촌 사족으로 살아갔다. 이응희는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도 않았고 서울의 이름난 문인들과 교유한 바도 없다. 지극히 평범하기에 당대에는 물론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후손을 제외하면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도 18세기 무렵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문집 《옥담유고(玉潭遺稿)》와 《옥담사집(玉潭私集)》이 문중에 전하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라 할 만하다. 이 문집을 읽어보면 18세기 이후 실학시대의 저술로 느껴질 만큼, 평범한 일상사를 담박하게 그려내는가 하면 당시 농촌의 고달픈 백성의 삶을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바로 <만물편>이라는 연작시다.


<만물편>은 세상 만물을 25종의 유형으로 나누고 다시 그 아래 280개의 사물을 나열한 다음, 각각의 사물에 대해 오언율시를 지은 것이다. 여기에는 꽃과 과일, 곡물, 채소, 어류, 의복, 기물, 문방구, 가축, 새, 곤충, 음식, 약초 등 매우 다양한 사물이 두루 포괄되어 있다. 예를 들어 만두를 두고 쓴 시를 보자.


 우리집 솜씨 좋은 며늘아기 / 물만두 예쁘게 잘 만든다네.

 옥가루에 금빛 조를 소로 만들어 / 은빛 피에 싸서 쇠 냄비에 띄운다.

 생강을 넣으면 매운 맛이 좋고 / 짭짤하게 하려 장을 듬뿍 붓는다.

 한 사발 새벽녘에 먹고 나면 / 아침이 지나도록 밥 생각 없다네.


만두는 고려시대부터 우리 식단에 널리 오르던 것인데, <도문대작>에는 “의주 사람들이 중국 사람처럼 잘 만든다. 그 밖에는 모두 별로 좋지 않다”고 짧게 적었고, 《지봉유설》에는 만두에 대한 기록이 없다. 물론 만두를 비롯하여 <만물편>에 등장하는 많은 음식을 두고 지은 시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만물편>에서는 자신의 생활과 관련하여 만두를 맛있게 먹는 법을 이렇게 자상하게 소개하였다. <만물편>은 이러한 방식으로 되어 있는 연작시다.


시골사람도 시대를 앞서갈 수 있어


이응희는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지 <만물편>에는 특히 물고기와 채소에 대한 자료가 풍부하다. 고래·자라·대구·방어·청어·문어·전복·가자미·은어·홍합·해삼·홍어·민어·준치·조기·밴댕어·새우·농어·숭어·웅어·뱅어·잉어·쏘가리·붕어·게 등의 어물, 수박·참외·오이·토란·상추·파·마늘·가지·아욱·생강·겨자·부추·차조기·동아·고사리·삽주·게목·순채 등의 채소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에 식탁에 오르는 다양한 먹거리를 두루 시로 읊어놓았다. 이러하니 가히 시로 쓴 백과사전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이응희는 새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았다. <만물편>에 까마귀· 까치·부엉이·올빼미·박쥐 등을 두로 시를 지었거니와, 이와 별도로 <영조(詠鳥)>라는 제목으로 47종의 새를 52편으로 연작시에 담았다. 꾀꼬리·소쩍새·쏙독새·직박구리·뻐꾸기·비둘기·딱따구리·종달새·구욕조·주걱새·후투티·백학·매·느시·꿩·자고새·메추라기·뱁새·까마귀·제비·참새·기러기·황새·갈매기·왜가리·오리·가마우지·원앙이·따오기 등 평범한 것에서부터 그 이름이 낯선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며, 아예 어떠한 새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것도 많다.


우리 문화사에 이렇게 많은 종류의 새에 대해 글을 남긴 예는 찾기 어렵다. 18세기에 이르면 새나 곤충, 채소 등 생활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사물에 대한 저술이나 연작시가 등장하니, 이응희는 한 세기 정도를 앞서간 사람이라 할 만하다.


우연히 본 시골 선비의 문집에 이러한 시가 있기에 소개해보았다. 실학은 중국과의 학술 교류를 통하여 나타난 새로운 학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응희의 <만물편> 등에서 보듯 평범한 시골사람도 생활 주변의 사물을 꼼꼼히 살피고 이를 꼼꼼하게 적어내면 그것 역시 실학이 아니겠는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 시골사람도 시대를 앞서가는 글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을 보이고 싶다. 



글쓴이 / 이종묵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의 문화공간』(전4권), 휴머니스트, 2006

         『한국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태학사, 2002

         『누워서 노니는 산수』, 태학사, 200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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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죽어 시가 되어 돌아온다  

  

 그러니까 2006년 끝머리였다. 사흘이 멀다 하고 문단 술자리가 이어지던 12월 어느 날. 어느 문학상 시상식 뒤풀이였거나 한 문예지의 송년회 자리였다. 여하튼 그는, 예의 그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트랜치 코트와 카키 색 머플러, 눈가에 잔주름 자글자글 패는 그 웃음까지 그대로였다.


 “살이 쪘나 봐. 자꾸 배가 나와. 살이 쪄서 그런지 소화도 잘 안 되고. 그래서 운동을 시작했어요. 뭐, 산책 같은 거지.”

 다들 그런가 보다, 했다. “운동, 좋지요” 누군가 추임새를 넣었던 것도 같고 “환갑인데, 술 좀 줄이세요” 웃는 얼굴의 잔소리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랬다. 그땐 정말로 아무도 몰랐다. 박찬(사진) 시인이 간암 말기인 줄은, 시인 자신도 몰랐다. 시인은 복수(腹水) 차오른 속사정도 모르고 아랫배 빼겠다고 운동을 시작했다. 그토록 그는 무심했다.


 그해 12월 18일, 시인은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2007년 1월 19일 오후 5시 운명했다. 그 석 달마저 못 채우고 시인은 황급히 떠났다. 문단은, 슬픔에 앞서 충격에 빠졌다. 늘 활달했던 시인이었고, 큰형처럼 넉넉했던 어른이었다. 하나 그는 목련꽃 제 목 꺾듯이 뚝, 이승의 인연을 끊어버렸다. 그 사람 좋은 웃음의 영정 앞에서 문단은 오열했다.


 시인이 숨을 거두기까지 한 달간, 시인을 본 사람은 거의 없다. 고인과 친분이 도타웠던 문인수 시인도 그 한 달 사이엔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창졸간에 죽음과 맞닥뜨린 친구는 “정리해야 할 게 많아 병원에 누워 있을 시간도 없다”고만 했단다.


 임종이 임박한 시각. 시인은 가족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사랑해, 였다. “여보, 사랑해, 세의(큰딸)야, 사랑해, 세연(둘째 딸)아, 사랑해”. 기력이 다했는지 언제부턴가 ‘사랑해’는 소리가 되지 못했다. 입 모양만이 겨우 ‘사랑해’를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사랑해’를 머금은 채 시인은 갔다. 그 임종의 순간을, 문인수 시인은 친구의 아내로부터 전해들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시를 썼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을 문 채 죽었다.//최후 단 한 마디 생생하게 남아 움직인 것, 계속 사랑해라고 말했다. 아내에게 두 딸에게,/숨을 거두어가는 힘으로도 계속 사랑해라고 말했다.//숨을 거둔 후에도 그 입 모양 그대로 붉게 피어나고 있었다.//아,//모음 향기가 계속 사랑해라고 말했다./다른 뜻 다 담아, 또는 다 버리고/하늘엔 듯 땅엔 듯 심는 것, 사랑해라고 말했다’-‘사랑해 라는 말의 입 모양, 그 꽃’


 고인의 1주기가 지났다. 때맞춰 유고시집 『외로운 식량』(문학동네)이 묶였고 지인 몇몇이 추모의 자리도 가졌다. 유고 시집엔, 그 누구의 것이어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여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투의 감상은, 어쩌면 가장 공허한 말일 수 있다. 고(故) 박찬의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문인수 시인은 지난해 친구를 애도하는 시를 세 편이나 썼다. 아니, 지난해 시인의 시편은, 휑하니 떠난 친구의 기억을 굳이 끄집어내지 않아도, 유난히 우울했고 또 어두웠다. 그는 “곁의 사람들이 자꾸 떠나서…”라고 얼버무렸다. 몇 달 뒤 시인은 미당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은 죽어서 시를 남긴다는 건 틀린 말이다. 시인은 죽어 시가 된다. 시가 되어 돌아온다.



중앙일보 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 <125>

2008.01.22 05:04 입력 / 2008.01.22 08: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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