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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시골 선비가 시로 쓴 백과사전


이 종 묵(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서양의 역사에서 17세기는 계몽의 시대라 한다. 이성에 바탕한 지식의 욕구가 백과사전을 탄생시켰다. 조선에서도 이 시기 주목할 만한 서적들이 편찬된다. 이수광이 1624년 탈고한 《지봉유설》이 바로 조선에서 백과사전식 저술의 출발을 알린 책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보다 앞서 허균이 1611년 저술한 <도문대작> 역시 떡, 과일, 날짐승, 바다동물, 채소 등 다양한 먹거리에 대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음식 전문 사전이라 할 만하다. 허균이나 이수광 모두 중국의 문물을 어느 누구보다 먼저 섭취하였으니 새로운 시대를 맞아 새로운 저술을 남긴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겠다.


18세기 실학시대의 저술로 느껴질 정도


그런데 경기도 산본의 수리산 아래 살던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응희(李應禧, 1579∼1651)라는 사람이 있어 <만물편(萬物篇)>이라는 시로 지은 작은 사전을 하나 만들었다. 이응희는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안양군의 고손이다. 연산군이 즉위한 후 생모 윤씨가 폐출되어 죽게 된 것이 귀인 정씨와 엄씨가 참소한 탓이라 여겨 두 귀인을 장살하였는데 정씨 소생인 안양군은 죽임을 당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지만, 그 후손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수리산 자락에서 세거하면서 평범한 향촌 사족으로 살아갔다. 이응희는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도 않았고 서울의 이름난 문인들과 교유한 바도 없다. 지극히 평범하기에 당대에는 물론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후손을 제외하면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도 18세기 무렵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문집 《옥담유고(玉潭遺稿)》와 《옥담사집(玉潭私集)》이 문중에 전하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라 할 만하다. 이 문집을 읽어보면 18세기 이후 실학시대의 저술로 느껴질 만큼, 평범한 일상사를 담박하게 그려내는가 하면 당시 농촌의 고달픈 백성의 삶을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바로 <만물편>이라는 연작시다.


<만물편>은 세상 만물을 25종의 유형으로 나누고 다시 그 아래 280개의 사물을 나열한 다음, 각각의 사물에 대해 오언율시를 지은 것이다. 여기에는 꽃과 과일, 곡물, 채소, 어류, 의복, 기물, 문방구, 가축, 새, 곤충, 음식, 약초 등 매우 다양한 사물이 두루 포괄되어 있다. 예를 들어 만두를 두고 쓴 시를 보자.


 우리집 솜씨 좋은 며늘아기 / 물만두 예쁘게 잘 만든다네.

 옥가루에 금빛 조를 소로 만들어 / 은빛 피에 싸서 쇠 냄비에 띄운다.

 생강을 넣으면 매운 맛이 좋고 / 짭짤하게 하려 장을 듬뿍 붓는다.

 한 사발 새벽녘에 먹고 나면 / 아침이 지나도록 밥 생각 없다네.


만두는 고려시대부터 우리 식단에 널리 오르던 것인데, <도문대작>에는 “의주 사람들이 중국 사람처럼 잘 만든다. 그 밖에는 모두 별로 좋지 않다”고 짧게 적었고, 《지봉유설》에는 만두에 대한 기록이 없다. 물론 만두를 비롯하여 <만물편>에 등장하는 많은 음식을 두고 지은 시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만물편>에서는 자신의 생활과 관련하여 만두를 맛있게 먹는 법을 이렇게 자상하게 소개하였다. <만물편>은 이러한 방식으로 되어 있는 연작시다.


시골사람도 시대를 앞서갈 수 있어


이응희는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지 <만물편>에는 특히 물고기와 채소에 대한 자료가 풍부하다. 고래·자라·대구·방어·청어·문어·전복·가자미·은어·홍합·해삼·홍어·민어·준치·조기·밴댕어·새우·농어·숭어·웅어·뱅어·잉어·쏘가리·붕어·게 등의 어물, 수박·참외·오이·토란·상추·파·마늘·가지·아욱·생강·겨자·부추·차조기·동아·고사리·삽주·게목·순채 등의 채소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에 식탁에 오르는 다양한 먹거리를 두루 시로 읊어놓았다. 이러하니 가히 시로 쓴 백과사전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이응희는 새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았다. <만물편>에 까마귀· 까치·부엉이·올빼미·박쥐 등을 두로 시를 지었거니와, 이와 별도로 <영조(詠鳥)>라는 제목으로 47종의 새를 52편으로 연작시에 담았다. 꾀꼬리·소쩍새·쏙독새·직박구리·뻐꾸기·비둘기·딱따구리·종달새·구욕조·주걱새·후투티·백학·매·느시·꿩·자고새·메추라기·뱁새·까마귀·제비·참새·기러기·황새·갈매기·왜가리·오리·가마우지·원앙이·따오기 등 평범한 것에서부터 그 이름이 낯선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며, 아예 어떠한 새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것도 많다.


우리 문화사에 이렇게 많은 종류의 새에 대해 글을 남긴 예는 찾기 어렵다. 18세기에 이르면 새나 곤충, 채소 등 생활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사물에 대한 저술이나 연작시가 등장하니, 이응희는 한 세기 정도를 앞서간 사람이라 할 만하다.


우연히 본 시골 선비의 문집에 이러한 시가 있기에 소개해보았다. 실학은 중국과의 학술 교류를 통하여 나타난 새로운 학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응희의 <만물편> 등에서 보듯 평범한 시골사람도 생활 주변의 사물을 꼼꼼히 살피고 이를 꼼꼼하게 적어내면 그것 역시 실학이 아니겠는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 시골사람도 시대를 앞서가는 글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을 보이고 싶다. 



글쓴이 / 이종묵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의 문화공간』(전4권), 휴머니스트, 2006

         『한국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태학사, 2002

         『누워서 노니는 산수』, 태학사, 200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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