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바라보는 마음
심 경 호(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우리 집 마당에서 봄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준 것은 상사화 싹이었다. 단풍나무 아래서 크고 둥근 싹들이 겹겹 포개져 나오더니, 불과 일주일 사이에 수선화 잎을 닮아가기 시작한다. 6월이나 7월이면 잎이 마르면서 꽃대가 올라오고 8월이면 깔때기 같은 분홍 꽃이 피어날 것이다. 잎이 있을 때는 꽃이 미처 피지 않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이미 없다. 그래서 꽃과 잎이 서로 그리워한다는 뜻에서 상사화라고도 하고 이별초라고도 한다. 개난초나 녹총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상사화는 꽃무릇과 혼동하기 쉽다. 아내는 상사화 아래에 꽃무릇을 심어 두었는데, 잎 상태로 겨울을 난다. 이것도 수선화과에 속하지만 상사화와는 다르다. 5월에 잎이 마르고 여름동안 아무 자취도 없다가 가을이 되면 홀연 초록 꽃대가 자라나서 붉은 꽃을 피우며, 꽃이 진 후에 잎이 올라온다. 한자어로는 석산(石蒜)이라고 한다. 선운사의 상사화는 바로 이 꽃무릇이다. 긴 수술을 지닌 붉은 꽃이 갈고리 모양으로 하늘을 향해 뻗는 모습이 현세의 고통을 벗어나 열반에 드는 것 같다고 해서 피안화(彼岸花)라고 한다. 절간에서는 5월에 잎이 진 뒤 알뿌리에서 전분을 채취해서 불경 종이를 붙일 때 풀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중향국(衆香國)의 구성원들과 주인과 이방인
손바닥 크기의 땅이거늘, 돌단풍, 명자꽃, 철쭉, 앵두, 장미, 해당화, 채송화, 넝쿨장미, 자주달개비, 수선화, 매발톱, 딸기, 황매화, 산매화, 붓꽃, 금낭화, 바위취, 라일락, 무스카리 같은 초목들은 물론, 둥글래, 복분자, 구기자, 오미자 같은 약초도 있다. 그리고 부추도 한 구석에 심어 두어서, 가끔 식탁에 올라온다. 이 모두가 아내의 공력이 미치는 중향국(衆香國)의 구성원들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까지 중향국의 이방인이었다. 꽃을 볼 시간도 마음도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올봄, 아내가 상사화 싹을 가리켜 보이며 봄을 이야기하였을 때 문득, 나 자신이 얼마나 황폐한 영혼의 소유자인가 깨달았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이 강진의 다산초당에 화단을 만들고 「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의 연작을 남긴 사실을 환기하였다. ‘화사(花史)’는 화훼에 관해 기록이란 뜻이다.
다산은 국화, 수선화 같이 분에 담은 꽃도 좋아하였지만, 붉은 복사꽃, 배꽃, 연꽃, 목근화(무궁화) 같이 자연 속에 피어난 꽃을 더 좋아하였다. 강진 유배지에서는 연못에 삼신산을 만들고 주변에 백화를 심어 화단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중향국 주인으로서의 한 해 일들을 「다산화사」에서 노래한 것이다.
귤원 서편의 다산 초당은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시내물이 둘러나간 곳에 있었다. 초당의 정면에는 작은 못이 있었으며, 그 안에 석가산으로 세 봉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백화를 적절히 심어두고 섬돌을 두르자, 철따라 피는 꽃이 아롱다롱 자고(꿩) 무늬를 물속에 비추었다. 화단에는 매화, 복숭아꽃, 학정홍(鶴頂紅), 모란꽃, 홍약(작약), 수구(수국), 해류(석류), 치자, 부양(자미 곧 백일홍), 월계화, 해바라기, 국화, 자려(자초), 호장(천남성), 포도를 심었다.
다산은 별도로 미나리 밭도 가꾸었다. “금년에야 처음으로 미나리 심는 법을 배워, 성 안에 가 채소 사는 돈이 들지 않는다네.[今年始學蒔芹法, 不費城中買菜錢]"라고 하였으니, 생활의 방편 때문에 미나리를 심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나리를 ‘화사’의 군방보(群芳譜)에 넣은 것을 두고, 다산이 완물상지(玩物喪志)에 빠지지 않고 실생활을 중시하였다고 야단스럽게 풀이할 필요가 없다. 생활의 방편인 미나리의 꽃까지도 군방(뭇 화훼들)의 하나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다산에게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다산의 「화사」연작시는 화훼의 하나하나에 정신의 지향을 가탁하여 두었다.
해류의 화판은 술잔만큼 크다 海榴花瓣大如杯
종자는 애초 일본에서 왔다지. 種子初從日本來
춘삼월 가도록 깡말랐다 비웃지 마시게 莫笑枯寒到三月
꽃들 지거든 그때 가서 필 것이니. 群芳衰歇始應開
석류는 다른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을 때 깡마른 가지만 드러내고 있다가, 초여름이면 가지마다 하나부터 다섯 개에 이르기까지 화려하게 붉은 꽃을 피운다, 그것은 깡마른 지식인이 인고 끝에 이루어낸 풍요로운 지적 결실을 형상한다.
꽃을 꽃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이렇듯 다산은 꽃의 생태에 정신의 지향을 가탁해 두었지만, 꽃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강하였다. 모란꽃을 보호하려고 창 앞에 대바자를 쳐 놓은 다산이다.
바닷바람이 모래를 멀리 날리기에 海天風力遠飛沙
들창 앞에 대바자를 한 일자로 쳐놓는다.
산 사람 병들까봐 막은 게 아냐 不是山人養衰疾
모란꽃 보호하려고 막은 것이라네. 祇應遮護牧丹花
작약 싹이 죽순처럼 뾰족하고 경옥처럼 붉게 돋아나자, 행여 아이들이 장난으로 꺾기라도 할까봐 다산은 여간 걱정을 한 정도가 아니었다.
갓 돋은 작약 싹이 기세 좋게 솟아나 紅藥新芽太怒生
죽순보다 뾰족하고 경옥처럼 붉구나. 尖於竹筍赤如瓊
산 영감이 그 싹을 지키기로 다짐해서 山翁自守安萌戒
아이들 화단에 못 가도록 막는다오. 不放兒孫傍塢行
꽃을 꽃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생활의 이해관계로부터 떠날 수 있는 정신 지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간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킬 수 없는 사람은 학문을 하여도 제대로 된 결과를 이루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생활의 이해관계에 대해 관심이 없음이야말로 사심이 없음[disinterested]이다. 현실의 진정한 참여는 그런 사심 없는 마음을 만들 수 있을 때 가능하지 않을까, 다산의 「화사」를 되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상사화와 꽃무릇에 간간이 눈을 준다고 해서 중향국의 주인이 된 것은 아니다. 화단을 가꾸지 않는 나는 그저 좋은 손님[가빈]의 대우를 받게 되길 바랄 따름이다. 나의 이런 마음을 다산께서 미리 알아주셨던 것은 아닐까, 외람되나마 그렇게 생각해본다.
글쓴이 / 심경호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김시습 평전』,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시의 세계』, 『한학입문』, 『한시기행』, 『간찰 : 선비의 마음을 읽다』, 『산문기행 :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등
· 역서 : 『불교와 유교』, 『주역철학사』, 『원중랑전집』, 『금오신화』, 『한자 백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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