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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죽어 시가 되어 돌아온다  

  

 그러니까 2006년 끝머리였다. 사흘이 멀다 하고 문단 술자리가 이어지던 12월 어느 날. 어느 문학상 시상식 뒤풀이였거나 한 문예지의 송년회 자리였다. 여하튼 그는, 예의 그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트랜치 코트와 카키 색 머플러, 눈가에 잔주름 자글자글 패는 그 웃음까지 그대로였다.


 “살이 쪘나 봐. 자꾸 배가 나와. 살이 쪄서 그런지 소화도 잘 안 되고. 그래서 운동을 시작했어요. 뭐, 산책 같은 거지.”

 다들 그런가 보다, 했다. “운동, 좋지요” 누군가 추임새를 넣었던 것도 같고 “환갑인데, 술 좀 줄이세요” 웃는 얼굴의 잔소리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랬다. 그땐 정말로 아무도 몰랐다. 박찬(사진) 시인이 간암 말기인 줄은, 시인 자신도 몰랐다. 시인은 복수(腹水) 차오른 속사정도 모르고 아랫배 빼겠다고 운동을 시작했다. 그토록 그는 무심했다.


 그해 12월 18일, 시인은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2007년 1월 19일 오후 5시 운명했다. 그 석 달마저 못 채우고 시인은 황급히 떠났다. 문단은, 슬픔에 앞서 충격에 빠졌다. 늘 활달했던 시인이었고, 큰형처럼 넉넉했던 어른이었다. 하나 그는 목련꽃 제 목 꺾듯이 뚝, 이승의 인연을 끊어버렸다. 그 사람 좋은 웃음의 영정 앞에서 문단은 오열했다.


 시인이 숨을 거두기까지 한 달간, 시인을 본 사람은 거의 없다. 고인과 친분이 도타웠던 문인수 시인도 그 한 달 사이엔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창졸간에 죽음과 맞닥뜨린 친구는 “정리해야 할 게 많아 병원에 누워 있을 시간도 없다”고만 했단다.


 임종이 임박한 시각. 시인은 가족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사랑해, 였다. “여보, 사랑해, 세의(큰딸)야, 사랑해, 세연(둘째 딸)아, 사랑해”. 기력이 다했는지 언제부턴가 ‘사랑해’는 소리가 되지 못했다. 입 모양만이 겨우 ‘사랑해’를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사랑해’를 머금은 채 시인은 갔다. 그 임종의 순간을, 문인수 시인은 친구의 아내로부터 전해들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시를 썼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을 문 채 죽었다.//최후 단 한 마디 생생하게 남아 움직인 것, 계속 사랑해라고 말했다. 아내에게 두 딸에게,/숨을 거두어가는 힘으로도 계속 사랑해라고 말했다.//숨을 거둔 후에도 그 입 모양 그대로 붉게 피어나고 있었다.//아,//모음 향기가 계속 사랑해라고 말했다./다른 뜻 다 담아, 또는 다 버리고/하늘엔 듯 땅엔 듯 심는 것, 사랑해라고 말했다’-‘사랑해 라는 말의 입 모양, 그 꽃’


 고인의 1주기가 지났다. 때맞춰 유고시집 『외로운 식량』(문학동네)이 묶였고 지인 몇몇이 추모의 자리도 가졌다. 유고 시집엔, 그 누구의 것이어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여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투의 감상은, 어쩌면 가장 공허한 말일 수 있다. 고(故) 박찬의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문인수 시인은 지난해 친구를 애도하는 시를 세 편이나 썼다. 아니, 지난해 시인의 시편은, 휑하니 떠난 친구의 기억을 굳이 끄집어내지 않아도, 유난히 우울했고 또 어두웠다. 그는 “곁의 사람들이 자꾸 떠나서…”라고 얼버무렸다. 몇 달 뒤 시인은 미당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은 죽어서 시를 남긴다는 건 틀린 말이다. 시인은 죽어 시가 된다. 시가 되어 돌아온다.



중앙일보 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 <125>

2008.01.22 05:04 입력 / 2008.01.22 08: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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