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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와 목월, 그리고 경주

 

 

신라 천년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고도(古都) 경주는 언제 가 보아도 새롭다. 한두 번 걸음으로 경주의 진면목을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없을 뿐더러 아직 땅 밑에는 무한한 보고가 숨겨져 있을 터이다. 경주의 곳곳에 산재해 있는 유물 유적들과 고색창연한 사찰, 주춧돌 몇 개만 남아 전하는 절터, 갖가지 형상의 마애불이 발길을 멈추게 하는 남산은 우리에게 영원히 불가사의한 숙제로 남아 있다.

그런 경주는 어제와 오늘이 만나는 곳이며, 또 멀지 않은 날 오늘과 내일을 이어주는 가교 역을 하기도 할 것이다. 경상도의 문학인들에게도 경주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 민족의 내면을 흐르는 정서의 뿌리를 찾아 나서는 곳이며 전통과 현대를 접목하려는 진지한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경주에는 역사의 고증으로 다 풀지 못한 옛사람들의 숨겨진 은유가 있고 언어의 힘으로 부활시켜야 할 묻힌 삶의 비밀들이 곳곳에 꿈틀거리고 있다.

그 경주에서 우리 현대문학의 우뚝한 봉우리 중의 하나인 시인 박목월과 소설가 김동리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시와 소설에서 독보적인 세계를 개척한 문학적 업적도 그렇거니와 오늘의 문학이 아직 그 두 사람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사실이 경주를 역사 유적지뿐 아니라 빼놓을 수 없는 문학 순례지로 다가오게 한다.

김동리는 1913년 경주 성건동에서, 박목월은 1916년 건천읍 모량리에서 각각 태어났지만 이들은 등단 전인 10대 후반에 만나 이미 두터운 교분을 쌓고 있었다. 동리가 서울 경신학교를 중퇴하고 낙향해 동양의 고전과 세계문학 작품을 읽으며 독학으로 소설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고 목월이 대구 계성중학을 다닐 때였다.

이들이 고향 경주를 무대로 하여 쓴 작품은 여러 편에 이른다.

김동리의 잘 알려진 작품 무녀도, 바위, 황토기등 토속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한 소설들이 모두 고향 마을 주변을 실제 공간으로 하여 쓰여졌고 널리 애송되고 있는 박목월의 시 나그네, 산도화, 윤사월, 청노루, 경상도의 가랑잎등 대표작들이 고향 산천의 정서와 가락이 실린 것들이다.

이 중 김동리의 무녀도는 자신이 나고 자란 경주 성건동 일대와 인근의 못 예기소가 무대가 된 작품이다. 지금은 동국대학교 경주분교가 보이는 곳이다. 무당 모화의 집 역시 작가의 동네에 실재했던 무당 집이 모델이 되었다.

지금은 그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지만 작가가 이 작품을 쓸 당시만 해도 예기소 주변은 무척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던 곳이었다고 전한다. 아들을 빼앗아 간 예수 귀신에 대한 원한으로 신령님의 영험을 증명해 보이려고 굿판을 벌이다 물에 빠져 죽은 무당 모화의 슬픈 통곡 소리가 한동안 들렸을지도 모른다.

김동리는 이 소설을,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문학을 통해 우리의 언어를 남기려는 의도로 썼다고 훗날 술회하고 있다. 조국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문학 작품으로 우리글의 아름다움을 남기려고 한 무녀도에 우리의 토속신앙인 샤머니즘을 가미한 것은 자연스러운 민족애의 발로로 여겨진다.

작가는 생전에 경주에 거주하는 제자를 앞세우고 모델로 삼았던 무당의 집을 찾아 나선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흔적은 고사하고 정확한 위치조차도 분간하기 힘들어 헛걸음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넉넉한 정신의 자산을 사장시키고 있는 우리의 무지함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경주는 문청시절의 김동리와 박목월이 조우한 곳이며, 청록파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박목월과 조지훈이 설레는 마음으로 처음 대면한 곳이기도 하다. 경북 영양 출생으로 목월보다 네 살 아래였던 지훈은 목월에게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봄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처럼 멋이 있으면서 단아한 기품의 필체로 네 장 정도의 긴 사연을 담았다고 하는 지훈의 편지에 목월은 이렇게 답했다.

󰡒경주박물관에는 지금 노오란 산수유꽃이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싸늘한 옥피리를 마음속에 그리던 임과 함께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

지극한 그리움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오래도록 멀리서 그리던 연인들의 첫 대면을 연상하게 한다. 목월과 지훈은 문장지에 나란히 추천을 받은 경력이 있는데다가 일제에 조국의 말과 얼을 빼앗긴 극한 상황에서 서로에게 깊은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절망의 끝자리에서 붙잡은 진실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었으리라. ·조선일보가 폐간되고 두 사람의 문학 모태였던 문장마저 폐간된 시점이어서 그들이 붙잡을 수 있었던 유일한 끈은 비운의 길을 동행하고 있는 단 한 명의 시우였을지도 모른다.

지훈의 첫인상을 목월은 이렇게 쓰고 있다.

󰡒긴 머리가 밤물결처럼 출렁거리던 그의 첫인상은 시인이기보다는 귀공자 같았다. 티없이 희고 맑은 이마, 그 서글서글한 눈, 나는 서울에서 온 시우를 맞아, 그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그렇게 뜬눈으로 정담을 나눈 식민지의 시인들은 다음날 토함산을 오르다 말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시를 쓴들 뭘 하느냐?’는 자조 섞인 질문을 서로에게 던지며 탄식하기도 했다.

지훈과 목월은 빼어난 시로써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은 사이로도 유명하다. 지훈이 경주에 4-5일 머물다 간 뒤 목월에게 보낸 시가 낙화이고 그에 목월이 화답한 시가 나그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로 시작하여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로 끝맺는 지훈의 낙화에 목월은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로 화답한 것이다.

세간에 알려지기는 목월의 나그네는 지훈의 시 완화삼(玩花杉)에 화답한 시로 알려져 있지만 그 완화삼에 화답한 시는 나그네가 아니라 밭을 갈아라는 시였다고 목월은 자신이 쓴 수필에서 밝히고 있다.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고/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 7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 저녁놀이여.’로 이어지는 지훈의 완화삼과 목월의 나그네가 전체적인 분위기와 운율에서 마치 짝을 이루듯이 흡사하여 그런 오해가 생긴 것 같다.

경주 현대호텔 앞 보문 인공 호수를 그윽이 내려다보는 자리에 목월의 시비가 있다. 어느 여제자에게 보낸 편지에 담았던 시 을 육필 그대로 각인한 것이다.  (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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