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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마사리일기

 

 

가마솥에게 절하다

 

부처님 나신 날. 절에 가야 하는데 지난번 고성 안국사에 간 것으로 대신하고 마사 들러 도요에 가보기로 했다. 지난 주말 흘리고 온 카메라를 찾아야겠다는 바람을 갖고 집을 나섰다. 이렇게 좋은 날 물욕을 버려야 하건만 일단 내 손을 떠난 것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하건만 쉽지가 않았다. 카메라야 다른 사람이 주워 사용하면 되지만 거기에 담긴 최근 사진들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얼마 전 에스비에스 촬영팀이 와서 최근 장편을 낸 아내를 하루 종일 취재할 때 찍은 사진이 가장 아까웠다. 나는 가방모찌로써 그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취재 모습을 찍어두었었다. 우선 그 사진을 찾고 싶었다. 되짚어보니 마사 농막에 두었을 확률이 가장 크다. 왜냐하면 도요에 가서는 사진찍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아내가 마사 산마루에 차를 대자마자 부리나케 농막으로 혼자 먼저 내려갔지만 카메라는 없었다. 농막 밖에 빠뜨리고 온 걸 누가 가져갔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또 금방 카메라를 포기했다. 나는 매사에 이런 식이다. 부질없이 사소한 것에 집착하다가도 금방 또 포기한다.

 

지난주 다 못 딴 장군차 우전을 따고 차조기와 자주색 들깨를 심고 구기자 순을 따고 풀을 조금 뽑았다. 볕이 너무 뜨거운데다 카메라를 잃은 게 서운했던지 나는 일할 맛이 나지 않았다. 도요에 어서 가보자고 아내를 졸랐다. 혹시 카메라가 도요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다시 차 있는 산마루로 가며 아내가 아카시아 꽃을 따 주었다. 꽃향기를 맡으니 기분이 좀 좋아졌다. 그런 나를 보며 아내가 놀렸다. 여자가 꽃을 들고 있으면 미친 취급을 받고 남자가 꽃을 들면 바보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원래 나는 바보이니 별로 손해 볼 게 없다.

 

도요로 가며 다시 그날의 동선을 되짚어 보았다. 우리가 들어가기로 한 집에 먼저 갔고 단원 숙소에 잠깐 들렀다가 도요 사무실에 갔었다. 현관으로 들어서며 보니 전에 살던 사람들이 두고 간 소파에 놓인 카메라가 반짝 눈에 들어 왔다. 찾았다. 내가 찾은 게 아니라 카메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가구 놓을 자리를 재보느라 이리저리 가늠하다가 카메라를 거기 두고 온 모양이다. 그러면 나를 부르지. 나는 왜 안 데리고 가느냐고 고함을 지르지.

 

아무튼 카메라를 찾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녀석이 기특해 나는 녀석을 쓰다듬어 보고 품에도 안아보았다. 그냥 열어놓고 있는 빈집에 놓인 물건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걸 보니 역시 도요는 청정 지역이다. 우리가 깃들어 살아도 되겠다.

 

오늘은 부처님 나신 날. 이보다 좋은 날이 없으니 따로 이사날을 잡지 말고 오늘로 하자고 해 마사에서 가마솥과 밭솥을 가져 갔었다. 그걸 방에 모셔놓고 큰 절을 했다. 우리가 도요 이 집에 사는 것을 부디 허락해 주시옵소서. 

 

도요 사무실에 가서 잠깐 앉았다가 한참 연습 중인 단원들 몇 사람과 인사하고 이윤택 선생도 잠깐 보고 나와 청도로 갔다. 기장의 시골집을 팔고 청도에 새집을 마련한 정선생 부부를 보러갔다. 청도는 아직 깨끗한 동네였고 정선생 부부는 잘 가꾸어진 넓은 정원이 있는 집에서 우리를 반겼다. 두 부부가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저녁 어스름이 밀려올 때까지 막걸리를 마셨다.

[최영철]

 

 

 

 가마솥, 압력솥 앞에 두고 절하면서, 도요마을 신고식을 치렀다.

초파일, 좋은 날에, 아직 도배도 안한 방이지만

솥부터 이사해야 밥을 굶지 않는다는 속설에 따라

마사 밭에 있던 솥을 옮기는 것으로 간편 신고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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