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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공업자다. 소설 쓰는 일은 실을 뽑아 직접 잣고 천을 짜서 옷을 만드는 일과 같고, 바느질, 리폼하는 취미가 있다. 계절마다 요런저런 차를 덖거나 채소를 말리거나 장아찌를 담고, 서예 1년, 도자기 2년을 지나 지금은 그리기에 열중해 있으므로, 명백한 수공업자다. 글이 안 써진다 싶을 때마다 이것저것 넘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별로 좋은 일은 아니다. 한 우물을 파도 모자랄 판에 요것조것 곰지락거린다는 건 시간낭비일 때가 많다. 결국은 어떻게든 글을 안 쓰려는 핑게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서 웬만하면 안하려고 노력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어김없이 또 벌려놓은 일에 눈길을 준다.  훤한 낮에 글을 쓰는 게 잘 안된다는 무의식적인 습관을 고쳐야 한다고, 요즘처럼 한가할 때 장편소설이라도 써야 하는 게 소설가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건 잠시, 소설로부터 도망치라는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요즘은 쓰는 일보다 그리는 일이 훨씬 재밌다. 디지털이든 아크릴이든, 그리고 있는 시간은 몰아의 경지를 맛보게 한다.  3년 전에 소설을 쓰지 못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막막한 시간을 견딜 방도가 없어 전자책을 만들면서 시작된 그리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내가 그린 것들은 한결같이 엉성하고, 멍청하고, 구도가 맞지 않다. 3년이 지나도 좋아질 기미가 없는 것은 그쪽으로 아예 욕심을 내지 않아서일 것이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실력을 쌓았다면 지금쯤 꽤 솜씨가 늘었을 텐데, 그리기도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막막한 독학이다 보니 날마다 좌충우돌이다. 무료한 일상에서 좌충우돌은 즐겁다. 

날이 화창해 뭘 할까 하다가 부산현대미술관에 다녀왔다. 외곽순환도로를 지나 낙동강변을 달리면서 나는 도시철도를 타면 가볍게 갈 수 있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못본척하고 있는 나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잘했어. 잘 하고 있어. 잘 할 거야. 그럼, 그렇고 말고. 나는 수공업자니까. 개막작을 못 보면 하늘과 땅이 맞붙기라도 할 줄 알았고(북한식 표현이라고 한다), 결사의 각오로 야외상영관까지 걸었고, 타지 손님 가이드 노릇도 즐거웠던 광신도였지만 어느 날 문득 '거울 앞에 서서' 사는 일의 고달픔에 울먹이는 '누이'를 알아보게 되었다고나 할까.  

나는 영화가 싫다. 의식과 현상 사이를 묘하게 이간질하는 기계의 산물이라서가 아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적나라함과 섬세함,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제작 가능한 판타스틱의 위대함이 무섭다. 현대화된 장비와 재능있는 배우들이 보여주는 현란한 비현실성의 세계뿐만 아니라 고독과 타락,  탐욕과 증오, 소외와 절망을 보여주는 방식에서도 영화는 너무나 유용한 장르다. 이 무섭고 위대한 장르 앞에서 개미만도 못한 수공업자로서 나는, 그 수공 기능의 무력함을 알릴 수 없다는 사실이 분하다.  영화는 증기기관차처럼 폭주하며 수공업자들의 거처를 부수어버렸다. 능력 있고 미래에 낙관하는 수공업자들은 재빨리 증기기관차에 올라탔지만, 나처럼 무능한데다 나이까지 먹어버린 수공업자는 세상 끝으로 밀려나 쓸쓸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무능에 대한 반발로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영화를 싫어하는 것뿐이다.

 전시된 작품을 둘러보는 동안 수공업자로서의 동질성이 느껴져서 잠시 기분이 좋았다. 이리 저리 걷고 있는데 문득 스탭이  발밑을 조심하라고 했다. 오래된 신문지 위에 흙을 조금 바닥에 둔, 헛, 놀라운 작품이었다. 멈춰서서 한참 바라보았다.  이건 뭘까? 바싹 말라 있지만 물을 부으면 촉촉해질 흙은 가뭄 지역의 것일까, 오염된 지역의 것일까, 유물발굴지에서 가져온 것일까? 도대체 알 수 없는 작품의 의도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두 바퀴 돌기까지 했지만 신문지 위에 놓인 흙더미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조명도, 무대도 없는 맨바닥에 놓인 한 더미의 흙에 눈물이 떨어지려고 했다.

늙었구나! 영화가 싫고, 무심한 흙더미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나는 늙었구나. 이제 그만 가야겠구나. 하지만 언제 어떻게 가지? 아니, 갈 수 있지? 

영화는 괴물이다. 이야기와 그래픽, 사운드를 기계적으로 조합한 문화의 블랙홀이다. 그 무엇이 이 찬란함을, 이 자본주의적인 위력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영화가 싫다고 하면서도 매일 한 편의 영화를 봐야 하는 나를 중독자로 만들었다. 책과 영화 사이에서 망설이지 않고 나는 증오로서의 영화를 선택한다.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면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느끼는 좌절감은 몇 시간 정도, 다시 다른 먹잇감을 노리며 무한 세계 OTT를 떠돈다. 이것은 수공업자의 갈 길이 아니다. 수공업자가 아니라 대중으로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을, 명색 수공업자로서 매일 저지른다는 건 뇌의 오작동이다. 그 오작동을 인식하는 순간, 거대한 자본과 환호의 물결에 맥없이 사라져버린 수공업자의 제품이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것을 목도한 순간, 나는 국제영화제를 찾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도 게스트로 초청받았을 때 내 얼굴이 새겨진 패찰을 무슨 소중한 작품이기라도 한 듯 십 년째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영화는 내게 분명히 괴물이다. 

수공업자로서 나는 조용히 사라지겠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죽음을 맞고, 그보다 앞서 지루하고 하찮은 노년의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내느라고 자주 하품을 하겠지. 설렘도 희망도 허락되지 않는 노년 앞에서 죽은 듯 가만히 엎드려 있는 일이 요즘 내가 하는 일이다. (조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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