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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병원 정기 진료. 행여 길이 막힐까 너무 일찍 도착했다. 대기실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데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병원을 찾는 사람은 모두 환자, 아니면 환자 가족이다. 2층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 채혈실은 아예 북새통이고사방에 사람이 깔려 있다. 휠췌어를 타거나 어깨를 웅크린, 마스크 밖으로 보이는 긴장한 눈빛과 경계심이 서린 몸짓들. 상가에 가면 상주만 보이고 병원에 오면 환자만 보인다. 웃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대기실 간호사의 목소리는 상냥하지만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탓에 틀에 갇힌 친절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왕좌왕하는 노인은 간호사에게 큰소리로 반복해서 묻고 또 묻는다. 남편에게 들은 말을 믿지 못하고 간호사에게 큰소리로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은 안된다고 해도 어렵게 왔는데 오늘 해 주면 안되냐고, 동네 병원에서처럼 애걸하기도 한다. 나도 곧 저렇게 되겠지 하는 우울한 생각.

  진료 3분, 수납하고 예약하고 3분인데 화장실에 3번이나 다녀왔다. 워낙에 좋아하는 단감을 엊저녁 내리 여섯 개 먹었더니 소화가 전혀 안된 채로 쏟아져나온다. 이럴 리가 없는데. 스무 개쯤 먹어도 끄떡 없던 위장이 약해진 것이 화도 나고 한숨도 난다. 이제 단감을 먹을 땐 와구와구 먹지 말고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어아한다. 이 병원 저 병원 일주일에 아두 번은 꼭 드나들어야 하는 신세, 각종 기관이 고장나고 있는 걸 느끼면서 섭생을 바꾸는 일이 일과가 되다니. 노년은 지루하고 고달프다. 우울하고 비관적이다.

그 마음 탓에 전복죽이나 먹으려고 파래장 해녀촌으로 갔더니, 하필 쉬는 날이다. 하는 수 없이 학리 국밥집에 갔다. 집에 가서 점심을 차려 먹을 기운도 없었다. 이런 날은 라면이라도 끓여서 "좀 먹어" 하는 사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학리 국밥집에는 사람이 꽉 찼다. 변함없이 발랄한 젊은 부부가 내놓는 쇠고기국은 시원하고, 배추김치 대신 나온 갓김치도 맛나다. 시원하게 한 그릇 먹고 돌아와 누웠는데 금세 잠이 들었다. 수선스런 꿈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산책하고 돌아오던 남편이 손님이 와 있으니 저녁 먹으러 가잔다. 내키지 않지만 어쨌든 추석도 눈 질끈 감고 넘겨버려 인사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처지. 70년대 말을 백조다방과 남포동 일대를 떠돌던 두 사람이, 아니 다섯 사람이 공통으로 가진 옛 서사를 풀어놓다가  둘이네 양산박 가서 2차. 라떼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지루함에서 벗어날 길이 없고, 몸도 추워 그쯤에서 자리를 털었다. 나머지 셋은 바닷가 흑진주로 3차를 간다고 했다. 나는 술도 못 먹고, 3차까지 가서 옛얘기를 설렁설렁 들을 기운도 없다. 집에 오자마자 털썩 쓰러져 자다가 일어나니 4시. 더 자야 되는데 잠은 안 오고, 원고 정리나 하자 싶어 컴을 켰는데 일기부터 쓴다. (조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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